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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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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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基督敎
크리스트교(그리스도교) | Christianity


파일:기독교1.jpg

기원
1세기, 이스라엘
창시자
예수
경전
성경
분류
계시종교
신에 관한 사상
유일신론
규모
약 24억명[1] (세계 1위)
근원 종교
제2성전기 유대교, 헬레니즘 유대교
신앙 대상
야훼(성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관련 학문
교회사학, 기독교신학, 기독교철학, 성서학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은 기독교만의 고유명사가 아니며,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들이 다른 종교나 문화 등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문서에 '하느님'을 사용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기독교만의 고유명사화를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1. 개요
2. 특징
3. 명칭
5. 분류
5.2. 세계의 국가, 지역별 기독교 분포
6. 역사
6.1. 서곡
6.2. 역사적 예수와 예수 운동
6.2.1. 예수의 생애
6.2.2. 예수와 이스라엘
6.2.3. 예수는 메시아 자의식을 가졌는가?
6.3. 교회의 탄생과 원시 그리스도론
6.3.1. 죽음과 부활
6.3.2. 지옥 강하
6.4. 속사도 시대 전후
6.5. 발전
6.6. 분열
6.7. 근세 ~ 근대
6.8. 현대
8. 서양철학과의 관계
9.1. 역사
9.2.2. 개신교의 입장
9.2.3. 정교회의 입장
9.3. '하느님'과 '하나님' 논란
9.5. 기복신앙
9.6. 자원봉사
9.7. 교민사회에서의 역할
9.8. 교파의 분화와 이단
10. 비판
11. 박해
12. 역사적 의의
13. 각종 오해와 통념들
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받으며, 그를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2. 특징[편집]


  •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다. 최소 24억명 이상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집계돼[2] 2위인 이슬람교(약 19억 명)보다 신도가 약 5억명 이상 더 많다.[3]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4대 종교로 꼽히며, 서양 문화권을 대표하는 종교다보니[4] 서양을 중심으로 인류의 사회 및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종교로 평가받는다.[5] 가령, 21세기 현재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역법기독교예수 그리스도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는 서력기원이다.[6]
  •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으로, 크게 신약구약으로 분류된다.
  •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따르는 절대자의 계시의 전통과 역사성을 표방하였다. 때문에 학술적으로 유대교와 나중에 발생한 이슬람까지 포함한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표현한다.[7][8]
  • 유대교와의 차이는 크게 다음과 같다. 기독교는 성부 뿐 아니라 성자하느님으로 보고 신약성경을 정경[9]으로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극소수 분파인 메시아주의 유대교를 제외하면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를 사이비 교주로 바라보는 시선에 가깝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타나크, 즉 히브리 성경의 가치만을 인정하며 당연히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신약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신이 아니라 신에 의해 세상에 파견된 예언자의 하나로 보며, 예수보다는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더 중요시한다. 물론 예수도 매우 급이 높고 존귀한 예언자로서 칭송하지만 알라(하나님)[10]와 동급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와의 차이점이다.
  • 유대교, 이슬람교와 달리 기독교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성령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유일신으로 본다.[11] 이를 삼위일체론이라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서 이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가 공통적으로 믿는 교리이다.
  •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은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같은 신을 믿는 일신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앞에서 길게 서술했듯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다. 물론 세세하게는 그 말고도 차이점들이 아주 많다.

3. 명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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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이들, 특히 한국에서 기독교는 개신교만 지칭하는 줄로 많이 오해하고 오용한다. 심지어 기독교라는 어원은 가톨릭 선교사들로부터 시작했는데도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독교(그리스도교)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교예수 그리스도메시아(그리스도)라 믿는 모든 종파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파일:그리스도 어원.png
기독교의 '기독'은 16세기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의 번역어로 그리스도의 한자 음역 표현인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유래하였다. 개화기 문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야소기독(耶蘇基督)'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리사교)와 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는 명백한 동의어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곧 개신교라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한국에서 이런 혼동이 유독 심하긴 하나 중국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있고, 서양에서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개신교 문화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어느 정도 세속화되긴 했어도 개신교가 문화적 기반 노릇을 했던 영국, 네덜란드, 북유럽 등에서도 자신들의 종교를 지칭하는 표현을 헷갈려 한다. 일부 사람들이 개신교와 기독교를 동일하게 여기며, 가톨릭(천주교)과 정교회는 기독교가 아닌 별도의 종교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도 명백히 기독교라는 공통분모에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등의 종파가 나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및 정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인식은 매우 그릇된 상식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어휘의 사회적 선입견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Christianity를 말할 때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로 자주 지칭한다. 개신교에서는 종래와 같이 다수가 '기독교'를 사용하고, 이러한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그렇게 통용하고 있다.

기독교
종파
대중적 호칭
대중적 상징
교파
개신교
기독교[12]
성경, 교회[13], 예배,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성공회[14],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회
가톨릭(천주교)
천주교, 가톨릭, 카톨릭[15]
성당, 미사, 묵주, 신부, 수사, 수녀, 교황, 추기경 등
단일 교파[16]
정교회
정교회, 그리스 정교[17]
성당, 성찬예배, 이콘
단일 교파[18]

이에 앞에도 서술했듯 일상 속에서 개신교 신자를 기독교 신자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단어의 올바른 뜻을 고려할 때 '개신교 신자'를 지칭하기에 '기독교 신자'라는 표현은 모호한 면이 있다. 기독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으며 모두 '기독교'라고 뭉뚱그려 지칭하기에는 자기만의 색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19] 하지만 일반적인 오해에 따라 기독교를 개신교와 동일시한다면 '기독교 신자'란 '개신교 신자'에 한정된 표현이기 때문에 그리 모호하지 않긴 하다.[20]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곧 개신교라 오해하는 경향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를 지칭할 때는 오히려 그리스도교나 크리스트교로 풀어서 말하곤 한다. 특히 종교적 중립을 중시해야 하는 교과서에서는 절대다수가 크리스트교라는 명칭을 쓴다. 나아가 신자들 중에서도 '메시아(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믿는 종교'라는 의미가 더 확실히 와닿기도 하고, '기독교'를 제외하면 단어에 '그리스도' 대신 '기독'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21]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


4. 교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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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분류[편집]


크게 서방교회동방교회로 나뉘며 서방교회에는 가톨릭개신교[22], 동방교회에는 정교회동방 가톨릭[23],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로 나뉜다. 이중 동서방 가톨릭정교회, 개신교를 칼케돈파[24]오리엔트 정교회네스토리우스파를 비칼케돈파[25]로 칭한다. 이외 종파로 그리스도아델피안[26],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메시아주의 유대교, 유니테리언 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현재의 주류 정통 기독교에서 교리적으로 한참 떨어진 종파들이다.

5.1. 주요 종파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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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계의 국가, 지역별 기독교 분포[편집]



파일:기독교_지도.png

가톨릭교회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최대의 종파다. 남유럽동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을 기독교의 원류로 더 쳐준다. 또한 스페인포르투갈의 정복전쟁에 힘입어 남아메리카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27]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필리핀에서도 교세가 강하다. 단일종파로만 따지면 심지어 미국에서도 최대 종파이다.다만 주류는 아니고 히스패닉 계열의 꾸준한 증가로 최대종파가 된 것. 미국의 주류는 W.A.S.P로서 백인, 앵글로 색슨, 그리고 개신교도들이다. 미국 역사상 가톨릭 대통령은 딱 뿐이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는 가톨릭을 배척하는 법이 존재했으나 이후 폐기되었을 정도로 비주류였다. 현재도 미국 가톨릭의 상당수가 히스패닉계, 라틴계다. 주류 백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기독교의 불모지 중동에는 동방 가톨릭, 곧 동방 예법 가톨릭 교회들이 있으며 가령 레바논 그리스도인의 과반을 차지하는 마론 교회도 동방 가톨릭의 일원이다.

러시아동유럽 상당수 국가들, 에티오피아(오리엔트 정교회)는 정교회 혹은 비칼케돈 교회(오리엔트 정교회) 국가였고,공산정권의 몰락 이후 신자수도 늘어나고 정치적 영향력도 회복하고 있는 추세다. 기독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동방 예법의 교회들이[28] 현지 그리스도교의 큰 축을 담당한다. 대부분 20세기의 사회주의권이었던 러시아동유럽의 주요종파였던 역사 때문에 아무래도 정교회는 구 공산국가에 많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일단 대체적으로 사실이나, 예외적 사례로 그리스, 키프로스, 중동 정교회권같은 경우나, 해외로 망명한 반공 러시아인들의 정교회처럼 공산권 밖의 정교회도 어느정도 있었다.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은 북유럽영국,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정도고, 개신교가 늘어나는 지역은 남미[29] 정도가 있다.[30] 한국이나 미국이 최대의 개신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한국은 20%밖에 안 되며 미국에서도 40% 대로 절반에 약간 못미친다. 뉴질랜드북유럽 같은 지역은 개신교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사실상 스칸디나비아 등 이들 지역 상당수에서는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 유교같이 문화나 관습, 연례행사 등으로만 자리잡혔을 뿐 사실상 주류 종교로서의 위력은 떨어지고 세속화된 명목상의 신자들이 대다수인 편이라서 제대로 된 개신교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렇게 전통적인 개신교 지역에서는 교세확장이 시원찮아진 반면, 중남미에서는 주류 가톨릭보다 훨씬 빨리 늘어나고 있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신자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종교규제에도 불구하고 비밀교회 가정교회 방식의 포교로 개신교의 세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31]

그 외에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제3세계에서는 20세기부터 서구 방식의 교파 구분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신학이나 관습을 중시하는 토착민 중심의 독립교회나 교단들이 많이 생겼고 수적으로도 매우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단, 이들 아프리카의 기독교 독립교단들이 지닌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기존의 아프리카인들이 가지던 조상신 신앙이나 정령숭배 등을 끊어버리지 않고 기독교와 융합해서 믿거나, 외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를 지나치게 신봉하는 등의 이단시비가 있는 종파들도 상당히 있다.[32] 그러나 아프리카의 이런 혼합주의 이단들이 아프리카 기독교의 거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과장이 심한 견해이다.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주류 개신교 교단 인구들이 토착 독립교단들보다 훨씬 더 많으며 이러한 주류 교단들은 공식적으로 혼합주의, 정령신앙, 주술사상 등을 반대하고, 제대로 된 기독교신앙을 지닌 아프리카인들도 대단히 많다. 또 상당수 신자들이 아프리카 토착 가치관에 여전히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넓게보면 이런 현상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33]의 기독교'만' 특이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 러시아 정교회의 초창기 정착과정이나 중남미 가톨릭의 초기 역사, 이슬람권의 '민속 이슬람' 현상 등 보편종교의 전파로 문화 변동이 일어났던 많은 토착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기독교 전파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고, 또 다른 세계종교들과 비교해도 전례없이 광범위하게 선교, 이주, 역사적 전파가 이루어졌던 특성때문에 일반인들이 흔히 "여기엔 기독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 의외로 기독교가 퍼져있는 경우도 많다. 과거 중세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권인 중국까지 일찌감치 진출한 적도 있으며 대표적으로 중앙아시아권인 카자흐스탄 같은 지역은 전 국민의 4분의 1이상이 기독교(정교회) 신자이고, 불교권인 미얀마 북부나 히말라야 인근의 인도 북동부[34], 그리고 남부[35] 등지에도 기독교 소수민족들과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태평양권의 많은 열대 도서국가들(유명한 필리핀을 제외하고도, 가까이는 티모르, 파푸아 지역 등부터 투발루피지, 키리바시, , 사이판, 통가, 타히티, 사모아 등)에도 원주민 기독교 신자들이 대단히 많다.

다만 현대에는 예전에 비해 기독교 신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으며(유럽,아시아) 유럽의 난민 증가와 무슬림과의 통혼, 저출산과 아시아의 박해중 순교와 동화, 피난중 배교, 낮은 출산율로 인해 빠르게 줄고 있다.


6. 역사[편집]



6.1. 서곡[편집]


1세기의 유다인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다렸는가? 확실히 아니다. 사정이 그런 만큼 신약성서의 독자는 당시의 모든 유다인들이 폭넓게 받아들인 통일된 메시아니즘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그런 메시아니즘을 이 시대에 투사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 예수의 면모에 다양한 메시아적 동기를 환원적으로 적용시킨 사람들은 바로 베드로 내지 나아가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노선을 따르는 유다계 그리스도교에 속한 이들이었다. 쿰란을 비롯하여 1세기 유다교 안에서 상황은 모호하였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모두 군사적(軍士的)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예수는 사랑을 설파하고 평화를 증진하는 자들을 찬양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에 너무 조급하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적 동기를 강조한 사실은 그 시대의 유다인들이 이것에 그다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더욱 주목할 만하다. 적어도 사두가이 계열의 고위 사제 계층이나 유력 인사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유일한 규범이었던 모세 오경이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창세 49.10?)...

2바룩 30과 4에즈 7,26~38에서와 같이 적어도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메시아 희망의 자취를 다시 발견하려면 1세기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마르 10,47에 의하면 대중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렸고 일부 율사들도 마찬가지였다(마르 12,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헤로데 대왕 시절 로마가 이미 이스라엘을 장악한 뒤로 메시아적 동기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러기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물론 그들 중에는 갈릴래아의 유다의 뒤를 이어 기원 6년 이후 로마를 상대로 봉기하면서 분위기가 격양된 부류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첫 선동가들을 나중에 계승한 사람들은 이미 앞장(章)에서 언급한 바 있는 자객들을 동원한 종말론적인 에언자들과 강도들이었다.[36]

메시아화된 이들 예언자들(마르 13,22; 사도 5,36; 21,38)은 각자 메시아 왕국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 속에서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메시아 칭호에는 함정이 많았다.

-Charles Perrot[37]

지음. 백운철 옮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ㅡ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231-236쪽.


셀레우코스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지배되던 기원전 3-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왕의 폭정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하스몬 가문에 의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카베오 혁명 동안 '의인의 부활'이라는 개념도 유대교 일부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반란에서 승리한 하스몬 왕조는 유대인들의 특권과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지만,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폼페이우스는 권력 투쟁에 빠져있던 하스몬 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탈취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하의 유대교는 랍비 사회가 되어 다양한 종파(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심당, 쿰란 공동체 등)로 분열되었고, 다양한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소동도 피웠으나 큰 영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곧 하느님이 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외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가속시키기 위해 세례를 통한 회개 운동을 일으켰으나 사형되었다.

다니엘 7:9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다니엘 7:13에서 언급되는 '인자[38] 같은 이'[39]에녹서에서 선재하며 하느님 옆에 계신 인간의 모습을 한 메시아 인자로, 그리고 에스라 4서에서 사람의 형상과 같은 이로 언급되는 것을 통해 저 두 가지 명칭이 메시아 교의로 소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같은 인자는 태초부터 있었고, 하늘로부터 임재하며, 하느님 옆에서 최후에 심판을 할 메시아로 그려지게 되었다. 메시아-인자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원후 1세기 전반에 유행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아우구스트 라이첸슈타인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 종파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할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메시아-인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또한 당대의 예언도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나의 왼편의 그들이 칼과 거대한 도끼를 두었다 [...] 내가 황폐화시키고 다시 쌓으며, 내가 파괴하고 나의 전을 다시 세울 것이다.

—Lidzbarski, Johannesbuch, ch. 76. 242, 8.

원래 고발자를 의미하는 일반명사 '사탄'은 스가랴 3과 욥 1-2에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천사로 등장했다. 역대상 21-22:1에서 사탄은 고유명사로 변화된 흔적이 생기지만, 여기서도 아직 하느님의 천사로서 그려진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키루스 칙령에 의해 풀려난 BC 6-4세기 경에 유대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통해 이 세상의 악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과 구약의 이방 신들은 모두 하느님에 대적하는 '악마'로서 재해석되었다.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는건 더이상 하느님이 아니라 악마다! 에녹서에서 감시자 세미아자스[40]에 의해 감시자들은 인간 여성들과 결혼을 해 거인들이 태어나게 된다. 거인들이 식인을 하는 것에 결국 하느님이 거인들을 홍수로 벌하게 되었는데, 세미아자스는 심연 속에 갇히고, 죽은 거인들의 영은 심판날까지 인간들을 괴롭히게 되었다(귀신). 희년서에서 감시자들은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들의 우두머리 마스테마는 사탄과 동일시되며 지상에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아담과 하와의 생애'에서 아담 경배를 거부한 천사는 교만으로 사탄이 된다. 사탄은 뱀이 되어 인간과 하나님을 멀어지게 했다. 에녹 2서에서 사탄이 아담보다 먼저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사해문서들에서 '빛의 아들'과 '악의 영'은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그려지며 이원론적인 윤곽이 잡혔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영생관과 내세관이다.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셰올(שְׁאוֹל)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디테일한 배경이 아닌, 망자들이[41] 기거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즉 셰올은 죽음을 정의하는 공간적 개념의 영역이었지, 기독교 특유의 사후세계관은 아직 없었다. 당대의 내세관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구약의 천국은 이사야서[42]에서 말하는 낙원 외에는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으로 인해 의인의 부활 개념이 들어온 후, 자연스럽게 죽음과 부활 사이의 공백과 악인의 최후에 대한 의문이 자라났다.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43] 그의 영이 하데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며 스올은 하데스의 다른 이름으로 재해석되었다.[44] 죽은 영들은 지하에 갇힌다는 개념으로부터, 선한 영과 달리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악마들이 지하에서 형벌을 받는 것에서 악마들이 지하를 지키는 것으로 변경되고, 이는 곧 메시아가 지하에 갇힌 영들을 해방시켜주어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여러 교의들의 형성이 초기 기독교의 탄생과 맞물리며 독특하고 창의적인 기독교 고유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6.2. 역사적 예수와 예수 운동[편집]



6.2.1. 예수의 생애[편집]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45]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에우앙겔리온의 시작.

-마르코 1장 1절(직역)[46]


1세기 유대인 남성인 예수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네 명의 형제들과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다.[47] 그가 태어난 나자렛은 별볼일 없는 마을로, 유대 지방에 속하면서도 이방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고 소외된 집안이었으며, 그는 장인이 되었는데 이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기도 했다. 예수의 성장 환경은 복음서상에 매우 단편적으로만 묘사되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텍스트상으로는 단지 유아 시절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으며(루가 2,21), 성장하면서 지혜도 자랐다(루가 2,40)는 식의 기본적인 정보를 전할 뿐이다.[48]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기점으로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을 서술하는데, 예수 역시도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지, 혹은 제자는 아니지만 세례자 운동을 수용하고 그와 관계를 맺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49] 아무튼 확실한 건,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예수 역시도 진심어린 공감을 보였으며, 예수 역시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요한 3,22) 다만 애초에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가 어떠했든 간에, 세례자 요한과는 구분되는 독립된 활동으로서 예수 운동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메시지는 자주 단순화되지만, 이는 근대 시민윤리적 운동이나 심리치료로 환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50] 반(反)율법주의나 종교적 개인주의, 윤리적 이완주의는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고, 반율법주의자들도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 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51]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에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52]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370쪽.

오히려 유다인 사회에 예수의 메시지가 준 충격은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다. 간단히 산상설교를 예시로 들어보자:

18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7'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33"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38'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40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3'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오 5장 18-44절(공동번역)


여기서는 윤리적 이완주의도, 반율법주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보다 더 의로워지라고 요청하며, 결코 율법을 '더 널널하게'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53] 그리고 이런식으로 율법에 주석을 다는 것은 당대 율법학자들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준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말을 하는 방식에 있다. 위 발췌문에서, 예수는 마치 자신이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말을 하였다. "X라고 이르러진 말씀을[54]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Y라고 말한다."라는 화법에서는 유다인 청중 누구나 예수가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즉 예수가 준 충격의 관건은 율법에 해석을 달았다던지[55] 율법을 이완시켰다던지[56] 하는 게 아니다. 시나이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의 여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최고의회 의원들은 바로 이것을 정확히 간파했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현대 유다교의 석학이자 라삐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도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한다. 뉴스너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신사적인 라삐인데, 그리스도교 신앙에 존경을 표하면서도 자신이 유다교 신자로 남은 이유를 저서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에서 다음과 표현했다. 이 저서에서, 뉴스너는 자신이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AD 1세기로 되돌아가 예수와 직접 이야기도 해보고 따라도 가봤다고 가정한다. 그는 예수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가 다른 유다인 동포와 함께 기도하고 토라 공부를 하기 위해 조그마한 어떤 도시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 도시의 어떤 라삐와 함께 예수에 관한 토론을 한다:

선생님이 물었다. "예수라는 학자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단 말이지?"

내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충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빠뜨렸지?"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탰지?"

내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보탰습니다."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 Dlubleday, 1993


즉 예수는 구약의 믿음에서 그 무엇도 빼지 않았다. 유다인 사회에 예수가 준 충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며, 토라를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하는 예수의 권한이야말로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슷하게, 예수의 성전 정화를 보자. 오늘날 이 사건은 "예수가 부패 성직자와 장사꾼들을 보고 분노한 사건" 정도로 단순화되지만[57] 핵심이 되던 쟁점은 '예수의 권한'이었다. 공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사아적 암시를 이미 하였다.[58] 그런데 바로 이 맥락에서[59] 예수는 마치 예루살렘의 왕권을 주장하듯이(!) 성전으로 향한다.

그분은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오해를 감수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 오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삼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대한 입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분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어디서나, 특히 수도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선포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당신 자신을 통해 '표징 안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성전 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이 성전 정화는 바로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차지하는 일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갈릴레아에서의 활동 이후 이제 수도에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대리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그분이 성전을 제쳐놓으실 리 없다. 여기에도 옛 원칙이 통한다. 곧, 임금이나 통치자가 성전 책임자라는 원칙이다.[60]

따라서 입성과 연결된 성전 정화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이심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는 일에 성전의 모든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아니 최우선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거의 필연적으로 성전 정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5-437쪽

물론 예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오해를 낳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성과 성전에 대한 어떤 왕권을(그러나 정치적 왕권이라 할 수 없는 종말론적 왕권을) 주장한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이 광대한 구역을 다 '정화'하시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시위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이 몇개의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시고 성전 구역을 가로질러 짐을 나르는 이들을 꾸짖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의 행동은 하나의 표징일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가이 사제 귀족층은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가 예수님에 의해 의문에 처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간파했다. 이미 토라를 둘러싼 갈등이 율법 해석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성전 운영에 관한 주변부 문제들, 이를테면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이 성전 규역보다 도성 안에서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예배를 온통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 복음 선포의 빛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 권한, 그리하여 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곧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종교 기구인 최고 의회가 정확히 이를 문제삼고, 단호히 부정한다.

예수님은 성전 정화 행동을 통해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신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마르 11,18)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8-442쪽.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째서 예수가 정치범에게나 선고되는 십자가형을 당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로마 공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신전 모독자'이자[61] 동시에 '도성 신전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하는 왕 사칭자'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당국이, 또한 로마 당국도, 자기를 반대하는데 대한 마지막 수단으로 터트린 것이 성전 상거래에 공격을 감행한 저 성전저항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그중에도 특히 사두가이 파 대제관들에게 성전이 이스라엘 신심의 본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점령세력인 로마인들도 평정된 각 민족의 신들을 존중했고 따라서 야훼도 존중하여 성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전에서는 날마다 로마인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고, 그런만큼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 쪽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방송 대담[62]


그렇기에 예수는 유다인들의 고발과 로마 공권력의 판결에 의해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로서 처형되었다.

6.2.2. 예수와 이스라엘[편집]


역사상 예수가 과연 교회를 세웠더냐는 물음이 비평 신학에서 세차게 일어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점차 뚜렷이 인식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문제 제기 자체에 잘못이 있습니다. 꼬집어 말하건대, 예수는 애당초 교회를 세울 수도 없었으니, 오래 전부터 교회가, 사실인즉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모아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말하면, 예수에 의해 모여지고 예수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하느님 백성의 삶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말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상 예수에게서 무슨 정식의 교회 창설 행위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물론, 예수가 이스라엘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으며 참 이스라앨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했더냐를 묻는다는 것은 더없이 뜻있는 일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5쪽

상술했듯이, 예수는 1세기 유다인이지 현대적인 종교적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문화사의 맥락에서 보든, 성경 텍스트 그 자체에서 보든, 예수에게 있어서 삶은 온통 '종말론적 이스라엘'(=교회)[63] 향해 정향되어 있다. 분명히 예수의 가르침은 민족의 벽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개방성을 갖추고 있지만,[64]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뿌리를 갖춘 개방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개인들의 산술적 집합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동체를 전제한 개방성이다. "예수가 자신의 교회상을 특징짓기 의하여 사용한 성서의 보고들과 비유들은, 그가 매우 구체적인 교회상을 가졌고 사도들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65]

예수의 관심은 개인의 총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다. ... 중요한 관심사인즉 어떤 임의의 집결운동과 각성운동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세말 모임이다. 예수 설교의 중심 내용인즉 바야흐로 예수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때가 성취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세말을 위한 옛 약속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다. 이 세말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제시된 구원을 붙들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이다.

... 예수의 윤리는 엄밀히 바로 이런 의미에서 쇄신된 세말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인이라는 처지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적 차원이 표출되고 생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127-129쪽


예수가 관계하는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는 자기네 역사를 지닌 이 백성 앞에 나타난다. 이 백성을 상대로 활동한다. 이 사정이 예수의 활동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예수 자신이 이 백성의 일원인 이스라엘 사람이요, 모국어를 말하며, 성서의 언어에서 취한 청중에게 익숙한 표상과 동기 들을 자기 선포에 사용한다.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백성을 앞에 두고 이 백성에게 자기가 보냄받았다고 의식했으며 이 백성을 자기 제자들의 협력으로 임박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런 집단적 현상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까닭이란 없었다. 아니,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 소임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사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 활동의 이 정향을 삭감 없이 인정할 때라야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갈릴래아의 예수 청중 가운데 이방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종종 적시되어 있다 해서 이 정향이 원칙적으로 달라지는 바는 조금도 없다. 물론 예수의 청중 속에 그런 이방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있다. 이스라엘이 ― 꼬집어 표현하자면 ― 예수의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교회)였으며, 새로이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불려 들어와야 할 백성이었다. 여기서 "엑클레시아"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다름없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을 뜻한다.[66]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간적으로 이스라엘 땅과 계속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알려진다. 요르단 동쪽의 헬레니즘화한 열 도시 지역인 데카폴리스가 언급되기는 하지만(마르 4,20; 7,31; 마태 4,25),[67]

그리고 마르코 7,24 이하 // 마태오 14.21 이하에 따르면 예수는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넘어가고(루가는 삭제한다) 마르코 8,27 // 마태오 16,13에 따르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부근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루가 9,18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일이 없이 예수의 혼자 계심을 말한다), 아무튼 이방인 가운데서 일어난 전도 활동을 말하는 바는 없다.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상황이 어떠했다고 할 수 있든간에, 그 지리적 소여는 정작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여행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준(마르 7,26//), 더욱이 예외로 특징지어진(마르 7,27-30//) 여행에서 추론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회상으로서 북부 여행에서 선교사업이 성립될 수는 없었다면, 여기서는 분봉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쪽의 일시적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겠다(참조: 루가 13,31-32)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2002, 256-257쪽


가령 산상설교를 읽을 때 구체적인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사해동포 사상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텍스트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실상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동체에게 하는 말이다.
3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4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5μακάριοι οἱ πραεῖς,
ὅτι αὐτοὶ κληρονομήσουσιν τὴν γῆν.
6μακάριοι οἱ πεινῶντες καὶ διψῶντες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ὅτι αὐτοὶ χορτασθήσονται.
7μακάριοι οἱ ἐλεήμονες,
ὅτι αὐτοὶ ἐλεηθήσονται.
8μακάριοι οἱ 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
ὅτι αὐτοὶ τὸν θεὸν ὄψονται.
9μακάριοι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ὅτι αὐτοὶ υἱοὶ θεοῦ κληθήσονται.
10μακάριοι οἱ δεδιωγμένοι ἕνεκεν δικαιοσύνης,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11μακάριοί ἐστε
ὅταν ὀνειδίσωσιν ὑμᾶς καὶ διώξωσιν καὶ εἴπωσιν πᾶν πονηρὸν καθ’ ὑμῶν [ψευδόμενοι] ἕνεκεν ἐμοῦ.
[
가톨릭 새번역
]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개신교 새번역
]

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마태오 5장 3-11절
산상설교의 이 말을, 보편 인류 중에서 마음이 가난한[68] 사람이 행복하다는 의미로 읽으면 해석이 아예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산상설교를 듣고있는 종말론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하늘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며, 교회가 슬퍼한다면 위로를 받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또한 산상설교 말고도, 예수가 30대의 나이로 독신이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실상 예수에게 있어서 아내란, 이스라엘' 혹은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예수 스스로가 부부나 혼인과 연관된 가르침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즉 이스라엘에게로 정향된 자신의 삶을 독신을 통해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전권주장과 근본적인 그리스도론을 보인 것이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69]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70]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71]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


6.2.3. 예수는 메시아 자의식을 가졌는가?[편집]


물론 예수가 실제로 스스로를 메시아 및 종말론적 인자(사람의 아들)로서 명시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도 있다. 일단 이른 공관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스스로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마르 8,30)
이를 주석학에서는 '메시아 비밀'이라 하는데, '메시아 비밀'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메시아라 말하진 않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 외의 사례 (Bousset, 1913): 예수가 3인칭으로 언급하는 '인자의 도래'[72]; 지나치게 교의적인 구절들[73]; 후대의 개작 및 삽입으로 의심되는 구절들[74]; 역사적 전승이 빈약한 구절들[75] ; '인자'(바르 에나샤)는 본래 '사람'이라는 메시아(!) 칭호로서 사용되었다[76];'인자' 칭호는 아람어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헬라어의 오역에서만 발견된다.[77]).

당연히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령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는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메시아 고백뿐만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서도 '비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는 "예수의 금지 명령이 어떻게 무시되는지 묘사"한다.[78]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그렇다면 최소한 치유 사회에 있어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메시아 비밀의 초점은 함구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함구령으로 드러나는 은밀한 발현에 있다"는[79]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의 이 예시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직접적인 비밀 요청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를 접근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령 마르 14,61에서는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묻는데, 마르코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간다면 1. 예수가 메시아라는 세간의 평을 적대자가 들었거나 2. 예수의 행적으로부터 "자칭 메시아"라는 의혹을 적대자가 도출했거나 이지, 소위 상상도 못한 정체라는 게 아니다. 또한 치유 사화가 아니라 베드로의 직접적인 메시아 고백에 대해서는 슈낙켄부르크는 다음을 지적한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마르코의 예수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이 메시아 칭호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이 메시아를 현세의 정치적 통치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해방자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이 개념을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했다. ……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를 군중의 생각과는 달리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렇게 그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이 고백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가 끝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그 고백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 후반부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이 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 보여 주기 시작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하고 죽어야 하는 '사람의 아들'의 비밀을 알려 주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 함구령 배후에는 예수의 비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밝혀 줄 사람의 아들에 관한 사고가 배태되어 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4쪽.


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기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R. Marlè 번역), Paris 1965, p.100[80]

또한 '메시아'라는 말을 예수가 명시적으로 발설하진 않았을지라도,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예수는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이 호칭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불릴 뿐이다. 단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호칭을 수용한 적은 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그밖에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이 호칭을 인정하지만,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한 베드로의 고백(마르 8,27-33 병행)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81]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9) 예수는 이 호칭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해방가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메시아는 고통을 당해야만 하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마르 8,31)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런 의미로의 메시아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의 수난예고 직후 고난 받는 메시아를 반박함: 마르 8,32), 하느님의 뜻에 따른 메시아였다.

두 번째는 대사제가 예수에게 신원을 물을 때다. "'당신은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마르 14,61.62) 이 일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소송과정 중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언할 적절한 시간에 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학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마르코 복음사가의 편집도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묘사하는 표현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제의 질문형식은 목격증언을 동반한, 대사제가 직접 발설한 말(ipsissima vox)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82]

여기서 예수가 왜 정치적 함축성이 들어있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수는 당시 무력한 상황에서 소송에 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인정한 메시아의 의미는 정치적 승리자인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종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math({ }^{2})]2014), 318-319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는 예수가 친히 메시아라고 말한 바는 없지만,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직접적인 발설은 없었으나, 예수는 메시아 사명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83]

6.3. 교회의 탄생과 원시 그리스도론[편집]



6.3.1. 죽음과 부활[편집]


예수의 죽음 이후 충격과 허무에 빠진 그의 제자들은 예수 운동을 멈췄다. 그러나 충격도 잠시,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체험'을 하였으며[84] 이는 선험하는 어떤 심리적인 기대와도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85] 다음은 불어권 주석학자들의 논문 모음집[86]의 머리말과, 거기에 실린 논문 발췌이다.

자크 슐로셔(Jacques Schlosser)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체험을 어떤 수준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찾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연구한다. ... 그는 심리학, 역사학, 문학적 지시들을 모두 수렴하면서, 역사학자가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 이 지시들만으로 충분한가를 자문한다. 달리 말해, 이 체험은 주관적 체험에 속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파스카 신심은 하느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통 기준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파스카 신심을 말하기 위해, 종교사에서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주변의 본보기들에서 표현을 끌어온 것인가?

슐로셔는 파스카 체험이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 체험을 보충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들이닥친 위기와 급변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던 것일까? 슐로셔는 중요한 증언인 1코린 15,3-8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오프테'(ophthē) 동사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는 체험의 특성이 들어 있는 추가 지시들을 수집한다.

슐로셔는 연구를 마치면서 제자들이 눈으로 본 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파스카 이전에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들로 형성된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 ... 무엇인가 아무 이유 없이 뜻밖의 방식으로 외부에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머리말 18-19쪽.


마르코는 체포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여기서 '그들'은 명백히 예수의 동료들을 말한다. 의인이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고통받는 의인" 이야기에 나오는 전통 모티브라 하더라도, 이 간단한 진술을 십중팔구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일치한다. ... 광야의 예언자인 요한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예수에게 맞선 소송은 하느님 백성의 고위성직자들이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매우 다양한 파스카 이야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증언하는 것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보이는 것 앞에서 체념했으며, 부활이 완전히 "뜻밖의 사건"[87]

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 "실패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환상 곧 집단적 강박관념의 산물로서 부활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들의 분명한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다."[88] ... 뮐러 자신도 인정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새 출발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렇게 돌변한 강력한 동기를 추정케 한다. 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이미 같은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제자들의 돌변은 "만일 그 사이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십자가에 못 박인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들을 확신시켰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89]

-Jacques Schlosser. 〈환시, 무아경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 (위 책 215-217쪽)


파스카 체험은 보통의 환시들과는 달리 선행된 기대나 신앙의 결실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논문(위 책 236-237쪽)

즉 '부활 체험'은 심리적인 기대를 위해서 고통을 이겨냈다거나, 예수의 죽음을 재해석한 결과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죽었을 때 제자들은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조차 하지 않았던 뜬금없고 충격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곧이어 예수가 바로 예언되었던 '인자'라는 생각이 그들은 휘잡았다. '부활 체험'을 통해 과거를 다시 되짚으면서, 예수가 '메시아-인자'라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빌헬름 부세트에 따르면, 루가 6:22과 요한 9:34는 예수 제자 공동체가 인자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유대교 회당과 구별했음을 보여주며, 여기서 제자들의 심판 이해(메시아-인자를 따르는 자들과 그를 거부하는 자들의 분리)가 드러난다. 또한, 그노시스파적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는 아담과 동일시되었으며, 여기에서 "태고의 사람의 반신적인 모습에 관한 다양한 사색들[90]이 뒤따랐다." (Bousset, 1913)[91]

예수는 죽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며 기존 유다교와는 구별되는 공동체를 이뤘다.

공관복음서가 아직 작성되지 않았던 1세대 교회에서도 이미 예수가 '선재하는 하느님'이자 '사람이 되신 분'으로 고백되고 있었다.
6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7ἀλλ’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8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9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10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11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
가톨릭 새번역
]

6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
개신교 새번역
]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필립비서 2장 13절-53장 12절[92]
물론 이는 후대의 세계 공의회들처럼 헬라스 철학의 용어를 사용한 삼위일체론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위치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위의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사람의 모습을 취한' 예수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선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유다인들이 피조물에게는 결코 쓰지도 않았고, 써서도 안되는 표현이었다. 또한 이 찬가는 바울로가 창작한 것도 아니며, 전해 받은 찬가를 바울로가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다계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전례적 기법의 운율을 가진 찬가이다. ... 찬가의 어휘는 바오로의 것이 아니다. 특히 예수의 하강에서 상승으로 이어지는 사고의 움직임은 "하강했다가 승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높여진"(사도 2,33; 5,31) 예수에 대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11-312쪽


공관 복음서 전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인 고린토 1서에서도 예수에게 예사롭지 않은 고백을 한다.

ἀλλ’ ἡμῖν _εἷς θεὸς ὁ πατὴρ_ ἐξ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εἰς αὐτόν,
καὶ _εἷς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_ δι’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δι’ αὐτοῦ.[93]
[
가톨릭 새번역
]

우리에게는 _하느님 아버지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_주님(kyrios)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
개신교 새번역
]

그러나 우리에게는 _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_한 분(heis) 주님(kyrios)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_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고린토 1서 8장 6절

물론 주님(Kyrios)이라는 말 자체는 그냥 높은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주님'이라는 표현은 1세기 유다인들이 하느님 외에게는 쓰지도 않고, 써서도 안되는 표현이었다, "주님은 X 한 분이 계실 뿐"이라는 말에서 X에 들어갈 말이 뭐냐고 물으면, AD 1세기 유다인들은 당연히 '하느님'이라 답변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1세대 교회가 예수를 유다인 나름의 표현 방식을 통해 하느님의 위치로 설명한 것은 분명하다.[94]

또한 일견 사소해보일지라도 고린토 1서 8장 6절이 예수를 "유일한 주님(heis kyrios)"으로 표현하는 것도 눈여겨봐야한다.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성서에서 희랍어 heis(유일한)나 monos(홀로)는 하느님께 주로 부여되는 표현이다.(마태 23,8~9; 로마 3,30; 요한 8,41). "들어라 이스라엘" 기도에서 고백하듯 하느님은 유일하시다. 한편 1코린 8,6에서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는 하느님과 주님에게 공히 적용된다. 더욱이 이 구절은 어떤 다른 신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유일하신 분(4절)만이 존재한다는 선언 다음에 나타난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1쪽

이런 표현들은 "1우시아(실체) 3휘포스타시스(위격)의 하느님", "1휘포스타시스(위격) 2퓌시스(본성)의 그리스도"라는 이후 교부 신학의 철학적 설명은 아니지만, 1세기 유다인이 하느님에게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이미 1세대 유다계 교회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것이다.[95] 이들 1세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위치로 고백한 것은 "유다 표징세계의 근본 원칙에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귀결되는 필연적인 '확장'이자 '완결'이었다."[96] 하느님의 오른쪽에 좌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고백한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유다인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이즘의 유일신주의를 저버린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의식을 가졌다."[97]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1세대 그리스도인의 증언이라 하지만 모두 바울로의 저작 아닌가? 지나치게 바울로의 신학에 의존함으로써 다른 계통의 1세대 신학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애시당초 최초의 신약 저술들이 바울로 친서들이거니와) 바울로 이후의 교회가 겪은 역사를 본다면, 이는 지나친 기우이다. 할례 논쟁에서 보듯 1세대 교회는 신학적 다원성이 있었지만, 이것이 아예 다른 교단을 차리고 남남으로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98] 당장 바울로부터가 예루살렘 공동체와 계속 교류하는 관계였으며,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부활 증인에 속함을 분명하게 명시한다.(1고린 15,7)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바울로가 말하는 필립비서 2장의 찬가는 명백히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찬가이며, 예수에 관한 신성 고백들은 유다 표징세계의 귀결이었다.

그리고 바울로 이후 교회는 유다계 공동체와 이방계 공동체의 급속한 혼합이 있었다. 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 헬레니즘화된 유다인인 루가가[99] 저술한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에서 묘사되는 1세대 교회에는 유다계와 이방계의 신학적 긴장이 매우 부드럽게 희석되어있다. 이것을 역사적인 1세대 교회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붙겠으나, 루가의 시대에는 이런 긴장이 없었다. 즉 루가는 자기 시대의 교회 상황을 1세대 교회로 소급시킨 것이다. 동시에, 루가의 시대에는 바울로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이 할례 문제로 논쟁한 것은 이미 먼 과거의 일이었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에게도 바울로는 당연히 사도였다. 무엇보다도, 현대인들이 읽는 27권의 신약성경에 유다계 문헌과 이방계 문헌이 공존한다는 것부터가 이러한 혼합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에비온파를 바울로와 대립하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류이다. "교부들을 통해서 에비오니스트 그룹에 대해 알게 된 내용을 기원 1세기의 현실에 쉽게 투사해서는 안 될 것이다."[100] 2세대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란, 예루살렘의 유다계 공동체와 안티오키아의 이방계 공동체, 바울로가 개척한 공동체, 마태오 복음서가 탄생한 시리아의 유다계 공동체가 모두 포함된 실체였다.

네로 이후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지중해 세계에 점차 흩어져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와 90년대까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때는 마태 13,52의 표현처럼 "하늘나라의 율사"들에 의해서 크고 작은 형태의 글로 전해진 과거의 전승들을 집성할 수 있는 시기였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결별이 더욱 심화되었고 교회와 회당 제도 사이의 거리가 점차 벌어졌다. 대회당과 장로가 있는 회당 제도 역시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 시대는 갈라 2장이 반영하듯 바오로 생전에 알려진 공동체들 간의 강한 긴장이 부분적으로 완화되던 시기였다. 약 85년경에 루가는 처음부터 완전하게 일치된 공동체의 모범을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격동의 역사를 거의 잊어버리고자 했다. 교회 활동은 이제 말씀의 전파에 온전히 흡수되어 버렸다. ...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는 상호 소통을 지향하여 개선되고 있었다. 다양한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는 공관복음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유다계 그리스인 출신의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이야기를 기초로 작업하였고 루가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의 맥락에서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다른 교회들과는 격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요한 전승과 루가 간에는 여러 연결점들이 존재한다. 요한 전승에서는 단지 사랑받는 제자만이 아니라 베드로의 위치도 격상되어 나타난다(요한 20,5 이하와 21장).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 이후 - 초대교회의 직무》Après Jésus -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108-109쪽


6.3.2. 지옥 강하[편집]



파일:Andrea di Bonaiuto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jpg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La discesa di Gesù agli inferi
Andrea di Bonaiuto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자 가운데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한국 가톨릭, 옛 번역[101]

)[102]

He descended into hell (잉글랜드 국교회, Book of Common Prayer, 1662)

he descended into hell (미국 가톨릭)

사도신경

원시 그리스도론의 부활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로, 예수의 지옥 강하 교리가 일찍부터 성립되었고, 오늘날 교리로도 남아있다.

물론 이는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갔다는 의미는 아니며,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협의의 의미(구원이 배제된 끝없는 형벌의 상태)가 아니라 광의의 의미(하느님을 볼 수 없는 사후 상태, 곧 셔올)이다.[103] 곧, 예수가 죄 있어서 지옥에 간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인 '죽음'을 온전히 맛봄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였다고 보면 고대 교회의 확신에 부합한다.

예수의 이 '지옥 강하' 교리는 이미 신약 성경에서도 성립된 것이다.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전하면서(참조: 로마 8,11; 10,9) 예수가 '지하'로부터 올라왔다고 언급한다.(로마 10,7 참조)
로마서 10장 7절 (AD 55-57년경)
τοῦτ’ ἔστιν Χριστὸν ἐκ νεκρῶν ἀναγαγεῖν.[104]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또한 마태오 복음서가 묘사하는, 요나의 표징에 관한 예수 로기온(Jesu-Logion) 역시도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대한 전거로 읽힌다.
마태오 복음서 12장 40절 (AD 80-90년경)
ὥσπερ γὰρ ἦν Ἰωνᾶς ἐν τῇ κοιλίᾳ τοῦ κήτους τρεῖς ἡμέρας καὶ τρεῖς νύκτας, οὕτως ἔστα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ν τῇ καρδίᾳ τῆς γῆς τρεῖς ἡμέρας καὶ τρεῖς νύκτας.[105]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것은, 베드로 1서의 다음 구절이다.
베드로 1서 3장 18-22절(AD 70-92년경)
18ὅτι καὶ Χριστὸς ἅπαξ περὶ ἁμαρτιῶν ἔπαθεν, δίκαιος ὑπὲρ ἀδίκων, ἵνα ὑμᾶς προσαγάγῃ τῷ θεῷ θανατωθεὶς μὲν σαρκί, ζῳοποιηθεὶς δὲ πνεύματι· 19ἐν ᾧ καὶ τοῖς ἐν φυλακῇ πνεύμασιν πορευθεὶς ἐκήρυξεν 20ἀπειθήσασίν ποτε, ὅτε ἀπεξεδέχετο ἡ τοῦ θεοῦ μακροθυμία ἐν ἡμέραις Νῶε κατασκευαζομένης κιβωτοῦ εἰς ἣν ὀλίγοι, τοῦτ’ ἔστιν ὀκτὼ ψυχαί, διεσώθησαν δι’ ὕδατος 21ὃ καὶ ὑμᾶς ἀντίτυπον νῦν σῴζει βάπτισμα, οὐ σαρκὸς ἀπόθεσις ῥύπου ἀλλὰ 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ἐπερώτημα εἰς θεόν, δι’ ἀναστά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22ὅς ἐστιν ἐν δεξιᾷ τοῦ θεοῦ πορευθεὶς εἰς οὐρανὸν ὑποταγέντων αὐτῷ ἀγγέλων καὶ ἐξουσιῶν καὶ δυνάμεων.[106]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19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6)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22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베드로 1서 4장 5-6절
5οἳ ἀποδώσουσιν λόγον τῷ ἑτοίμως ἔχοντι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6εἰς τοῦτο γὰρ καὶ νεκροῖς εὐηγγελίσθη, ἵνα κριθῶσιν μὲν κατὰ ἀνθρώπους σαρκί, ζῶσιν δὲ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107]
5그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5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죄다 아뢰어야 합니다. 6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이 구절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견해들이 갈리지만[108] 아무튼간에 결과적으론 죽음과 부활을 통한 예수의 구원 업적이 어디에나, 곧 '감옥'으로 표현된 지옥(셔올)까지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약 성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구원론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지만, 예수께서 저승에 가셨음과 이로써 그분이 죽은 이들의 세계에 들어가셨음을 분명히 증언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109]

사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의 최종적인 내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분의 이타존재(Pro-existentia), 우리를 위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의 자기비움과 낮춤(Kenosis)이 어느 끝까지 이르는지, 그에 대한 결정적 대답이 바로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기 때문이다. 이타존재로서 예수는 이 절대적 케노시스의 하강을 죽음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실현한다. 이로써 그분이 인간과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연대하셨는지 하는 구원 경륜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과 연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뒤의 현실이 가리키는 죽음 그 자체의 상태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신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110]

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111]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112]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113]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 91.


6.4. 속사도 시대 전후[편집]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전통'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추방되고 저주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또한 유대인들을 혐오하게 되며 이방인들의 개종에 보다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유대 그리스도교'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숭배와 신앙, 신학이 공존했으며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신앙하든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다. 그렇기에 이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영지주의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된 다종교적 철학 운동), 그리스-로마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성장해 갔다. 사도 바울로에 의한 일곱 개의 바울로 서신들(갈라디아, 데살로니카, 1 고린토, 2 고린토, 로마, 필립비, 필레몬에 보낸 서신들)과, 세 개의 복음서들(마르코, 마태오, 루가-행전[114] 복음) 등의 문헌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유대교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제안했던 원-삼위일체(하느님, 로고스, 하느님의 숨)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로고스가 동일하다고 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사이비로 취급된 것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전파되던 당시, 기독교도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의 "빵은 내 살, 포도주는 내 피."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비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오해를 산 것으로 여겨진다.[115] 신자들도 초대교회를 비롯해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비참했는데, 차별은 당연하고 툭하면 잡아다 십자가에 못박거나 원형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풀어 놓았다. 네로 황제의 방화사건 이후의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기독교가 신격화된 황제 숭배가 포함된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였다는 핑계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보았다. 이로 인하여 64년부터 네로 황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차별하기 이른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서기 81년~96년)에도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경향이 심해서 역으로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116] 때문에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이전에는 신약성경 초기에 등장했던 일부 교회들은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국교화 이후에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되면서 모두 재건되긴 했지만.

다신교인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신앙을 이유로 탄압받았던 다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공공 의례를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생활습관이 유난히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로마인들이 매우 중시했던 수많은 축제나 스포츠 행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 로마는 1년에 3분의 1 가량이 축제로 도배를 할 정도로 많은 축제가 있었는데, 이는 국가적인 레벨이거나 혹은 지방적인 레벨의 축제들이었다. 그래서 많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만은 이런 축제들에 일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그러한 태도는 다른 로마인들에게 '자기네가 뭐 그리 대단한가?' 라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 이외에는 딱히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기독교 자체를 국가의 문제로 여기는 생각은 적었다.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들의 행방을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박해로 순교한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떤 역사학자는 박해되어 살해된 사람 수가 5천에서 6천명에 불과하다 주장하며,[117] 원래 로마는 다신교이며, 기독교 이외에도 많은 종교가 공존했기 때문에 종교 자체보다는 '개인의 행동'을 문제로 삼았다. 공공연한 기독교인이라 해도 의례를 거부하지 않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경우 법적조치에 취해지게 되었는데,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황제를 신으로 심기는 공공의례를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측면일 뿐이었고, 실상은 고대 로마제국 이교도들 사이에서 기독교인은 굉장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2세기 중엽부터 기독교가 확실히 뿌리를 박는 시기인 5세기까지도(!)의 수많은 사료들은 가뭄, 지진, 기근이나 질병 등 사회에 안좋은 일이 있기만 하면 당대 비기독교인들의 증오의 타겟이 기독교인들에게로 향했다는 증거들이 넘치도록 많다. 여전히 로마의 신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불법요소였으며, 기독교 초기 지도자들도 박해가 심해질수록 예수 재림과 최후의 심판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보고 신앙을 위한 순교를 장려했다.

그 외 소수 종파로 에비온파는 그리스도를 아담 안에서 처음 나타난, 여러 사람의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한 '태고의 사람'으로 이해했다 (Bousset, Hauptprobleme der Gnosis. pp. 172-). 또한 심마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를 아담이자 인류의 영혼으로 고백했다.[118]

6.5. 발전[편집]


파일:기독교의 승리.jpg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119]
(Le Triomphe du Christianisme sur le paganisme)

귀스타프 도레作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는 늘어났고, 기독교 세력은 하층민들 중심으로 크게 팽창하였다.[120] 사실 이전까지 기독교는 1~2세기 로마에서 아주 소수 종교 집단에 불과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서기 100년경, 제국 인구 6천만 중 기독교도들은 약 7000명~약 7500명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며 이로부터 백년 후 세베루스 왕조 시대인 200년경에도 불과 20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하고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린 250년경에는 순식간에 500만 명으로 늘었을 정도로 급속히 신자 수가 증가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인 200년대 말에 기독교들은 6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제국 인구의 10%에 달했다.[A]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황제 중엔 셉티무스 세베루스(202년~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발레리아누스(257년~260년)황제 등이 대표적으로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에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를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 등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이 3세기의 위기 때 신전에 가서 울고불고 했을 때도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인 황제들은 이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해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이를 통해 다른 로마인들이 단결하길 바랐다.

또 이 시기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페르시아 지방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 황실의 핍박으로 서기 230년과 287년 박해 때 3만 명이나 죽임당하는 등 고초가 심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기독교도들이 로마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군인의 수가 감소하여서 서로마제국을 쇠퇴시킨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대표적으로 시오노 나나미 등)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기독교의 초기시대에는 평화주의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이 있긴 했지만 시대가 계속 흐르면서 군복무에 개의치 않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군에 입대했고, 군대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기독교도들도 많았다.

군인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없이 강경한 기독교 탄압을 시도하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사실 전임 황제였던 데키우스나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강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문제는 전임 두 황제는 일찍 비명횡사[121]하는 바람에 탄압이 중단되었던 것.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래 살았으므로 오랫동안 강력한 탄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적도 전임황제와 비슷하여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탄압이었다. 디로클레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자체"를 겨냥해서 파괴하려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탄압도 애매하게 중단된다.

파일:기독교_확장.png
서기 4세기~7세기 기독교의 확장.

어쨌거나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만 해도 신도가 이전보다 매우 늘었다고 한들 본질적으로는 아직 제국민의 10% 정도가 신자에 불과한 제국의 비주류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세가 증가한 것은 역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한 기독교 공인 이후로, 이 시기부터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그들이 중용하여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나온 기독교도 황제들의 기독교 진흥책에 힘입어 4세기 동안 기독교의 교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대제 시절인 4세기 말에 이르면 기독교인의 수는 30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가 된 셈이다. 학자들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하기 전까지 십 년마다 40%씩 교인 수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A] 지역적으로도 북서 아라비아, 페르시아만 연안과 크림 반도, 중앙 아시아, 켈트 지방까지 교세가 뻗어나간다.

각설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이어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드디어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합법 종교로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성인같은 위치로 공경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적인 위치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엔 낯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샤한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정식 직함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인 로마에서 특권을 부여받은 편법적인 존재였으므로 어느 정도 신격화되긴 했지만 제국민들에게 신으로서 숭배받는 전통이 약했고 따라서 조금만 실책을 저지르면 즉시 암살당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따라서 로마 황제를 아예 유일신인 하느님과 기독교 교회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122]

사실 이러한 시도는 군인황제 시대 때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초로 시도하였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무적의 태양신'( 인빅투스)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양신보다는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더 걸맞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오랜 전통의 유대교와 사도 시대를 거치며 상당히 정교한 신학이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나 친숙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그의 목적에 걸맞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방식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된 '황제 암살 → 내전 → 승자의 황제계승'의 패턴이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또 기독교를 공인한 경제적 이유로는 모라토리엄의 해결이 주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기독교를 공인했으니 신전의 은닉금을 털 수 있었고 그 금으로 재무장한 군대와 경제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이때의 금화를 솔리두스라고 하며,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것.[123] 참고로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가서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정적 살인 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124] 실제로 이런 이유로 콘스탄티누스의 시절엔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대에 저런 이유로 세례를 늦추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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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승리
토마소 라우레티作

그 후 기독교는 4세기 중반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 로마 신앙을 부흥시키는 정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견제받기도 했으나[125] 훗날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니케아파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380년).[126] 즉 기독교는 4세기 극초반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만 해도 박해받는 입장이다가, 불과 7~80년 정도 지난 4세기 말에 국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로마제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었다.[127] 이에 따라 재미있게도 시리아에서 로마(비잔티움) 시대가 끝난 지 한참된 13세기의 시리아 기독교 측에서 남긴 기록에는 몽골 제국(일 칸국)의 훌라구를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로 묘사했던 기록도 있다고 한다.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이슬람 세계를 크게 약화시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권 한복판에서 박해받던 처지를 끝냈기 때문에[128](훌라구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마치 옛날 로마가 이교(그리스 로마 전통종교)시절일 때 박해받다가 콘스탄티누스가 나타나 종교의 자유를 주어 박해를 끝낸 것에 비유한 것이다.[129]

이후 로마 제국의 공적 영역은 급속도로 그리스도교화되며, 이교는 점차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는 대략 6세기에 거의 완료되었다. 다만 이를 단편적으로 파악해서, 이교도의 대대적 박해가 있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고대 다신교는 기본적으로 공적인 제사가 신심 활동의 핵심이고,[130] 고대 로마인에게 중요한 건 로마 건국신화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제사에 참여해서 공동체의 일치를 드러내는 공동 신심 행위였다. 따라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다신교가 시민의 공동체적 일치의 자리를 교회에게 빼앗긴 순간, 박해 유무와 상관 없이 옛 다신교는 이미 실질적으로 끝장이 난 것이었다.

눈에 띄는 사건만 보고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80-81쪽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위상은 이미 테오도시우스 이전에도 다신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의 공적 기능에 대한 가장 큰 극찬은, 아니러니하게도 독실한 이교 신자였던[131] 율리아누스 황제에게서 나왔다.

무신론(=그리스도교)이 조장되는 가장 큰 요인은 낯선 이에 대한 (교회의) 인간애와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 주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무신론자인 갈릴레아 사람들은 자기네의 가난한 이들 외에 우리네의 가난한 이들까지 부양하고 있다. 우리네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실 분명 우리들 자신의 보살핌이 모자란 것이다.

-율리아누스, Epistola ad Arsacium[132]

물론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아직도 제국의 절반 이상 가량은 기독교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간간히 반기독교적인 반발은 종종 나왔으며 기독교를 완전히 로마의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조차 전 제국에 기독교 신앙을 실제적으로 국교화시킨건 프리기두스 전투로 마지막 이교도 황제인 에우게니우스를 죽이고 서로마의 반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그가 죽기 1년 전인 394년의 일이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내부의 이단 논쟁의 경우, 대체로 황제들은 대놓고 특정 노선의 편을 들기보다는, 갈등을 중재시키는 보호자로 인식되길 바랬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물론이고, 이후의 황제들의 신앙에서 나타나는 혼란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133]

아무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기독교 국가로 온전히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134]을 중심으로 기독교는 번성하였고, 프랑크족아타나시우스파세례를 받아들이고, 그 프랑크족이 프랑크 왕국을 세움으로써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미선교지역에 대한 선교는 계속 이루어졌는데 스칸디나비아 지방이나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은 아직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14세기까지 이교도 국가로 남아있었고,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사미족19세기에 와서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6.6. 분열[편집]


기독교의 분열의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기독교의 공인 이후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간의 신학 논쟁으로 아리우스파가, 5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간의 신학 논쟁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파단성론파의 종파가 정통파에서 갈라져 나왔다. 단성론파는 엄밀히 말하면 합성론파인데, 단성론은 예수에게 신성만이 있다고 보았지만 치릴로는 신성과 인성이 육화해서 하나의 본성으로 합쳐졌다고 보는 것이다.

정통파 교회는 서로마의 멸망 후 중세 초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게 되었다.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신학적으로는 8세기 초 동로마 황제 레온 3세성상파괴령을 내리면서 양 교회의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 동방에서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또한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동안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를 서방황제로 등극시킨 것은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1054년, 양대 교회는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사건을 교회의 대분열, 또는 동서 대분열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필리오퀘 논쟁이로 단순하게 설명되곤 하지만, 필리오퀘 자체는 분열의 이유가 아니었다. 6세기 쯤이면 이미 라틴 교부 개개인의 견해를 넘어 서방의 지역 시노드들에서 채택되었으며 수백년간 동방에서도 이를 일치의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들은 있었지만, 교회 일치의 면에서 필리오퀘는 결정적인 문제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한 그리스 교부들의 정식들은 설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룩한 라틴 교부들의 정식들을 비롯해 필리오퀘 역시 그렇게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각자가 지닌 고유한 독창성에 대해 온전히 존중하고 양측 간의 합의를 강조해야 한다. 6세기를 기점으로 '필리오퀘'는 서방 전통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는 교회 간의 일치가 다른 여러 동기로 인해 분열되기 전까지 결코 교회 일치의 장애물로 간주되지 않았다.

-정교회 아드리아누폴리스(하드리아노폴리스) 대주교 다마스키노스Δαμασκηνός, 'Réflexions et perspectives et au sujet du rétablissement de la communion sacramentell', Oriente Cristiano, 15 (1975), 7-25; cité dans Irénikon 48 (1975), p.219.[135]

가령 동방 교부인 고백자 성 막시모스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성령"이라는 라틴 신학의 명제를 표현 차이로 보았고, 라틴 신학의 이 명제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였다.

물론 도시의 여왕(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현 교황님의 시노드 서한을 공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쓴 모든 장(章)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 두 장만 공격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으로 그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은 또한 성자로부터도 자신의 발출(ekporeuesthai)을 갖는다." 또 다른 하나는 신적 강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로마인들)은 첫 번재 사안과 관련해서 만장일치로 라틴 교부들의 증언들을 제시했으며, 거기에 더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성 요한의 복음에 대해 작업했던 거룩한 연구에 따라 그의 증언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증언에 바탕을 두고 성자를 성령의 원인(aition)으로 만들지 않은 점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ㅡ 실상, 그들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점, 곧 한 분은 출산을 통해서 다른 한 분은 발출(ekporesi)을 통해서 유일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ㅡ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자를 통한 발출(to dia autou proïenai), 그리고 이를 통한 본질의 일치와 동일성을 입증했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로마인들)은 잘못 비난 받은 것들과 관련해서 비난당했습니다. ... 당신의 질문에 따라, 저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것("또한 성자로부터")을 번역하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유래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피하게 했습니다. ... 그밖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언어로, 그들의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외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고백자 성 막시모스(AD 580-662), 키프로스의 사제 마리노스에게 보낸 편지(AD 655)[136]


또한 로마 주교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교회정치적 경쟁 구도 역시도, 동로마 황제의 존재 때문에 어떻게든 중재가 되고 있었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편들었을 것 같지만, 그건 분열 이후의 상황을 분열 전의 상황으로 소급해서 생각한 착각이다. 분열 전에는 로마 주교이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이든 황제 입장에선 둘 다 정당한 주교이고, 오히려 '같은 도시'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주교와 협력하곤 하였다.

즉 동서대분열의 원인은 '필리오퀘 논쟁 때문이다', '황제가 자기 도시 주교를 편들어서다'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미묘한 문제이다.[137]

아무튼 1054년 로마 추기경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동서의 그리스도인이 분열된 것은 사실이다.[138] 그러나 이 분열을 대(大) 분열로 만든 건 1054년 이후의 상황이다. 1054년의 상황에서 보자면, 주교들의 상호파문은 안타깝기는 해도 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으니 전무후무한 일은 아니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잠깐의 분열 후 화해를 했다면, '전에도 그랬듯이'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다. 이 해프닝이 대(大) 분열이 된 건, 이후 화해를 하지 않고 장기화된 것에 있다.

양쪽 모두 완강했고, 특히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Μιχαήλ Α΄ Κηρουλάριος)[139]

는 라틴 성직자들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 그 결과 양 교회는 서로를 파문했다. 이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 사건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1054년의 분열은 확실한 균열을 남겼다. 상호 파문은 1964년에야 철회되었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218쪽


가톨릭으로 대표되던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에 면벌부 파동을 계기로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사실 이 정도의 '종파분열'은 그때까지도 드물지 않게 있어왔지만 정치적 무력과 가톨릭 자체의 쇄신으로 저지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루터는 강력한 독일 제후들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있었고, 가톨릭 측은 이 신교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 분열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분단이 되었다. 이때 서방교회의 틀 안에서 하나를 이루던 교회는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로 분리된다. 이 분열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하여, 11세기의 동서 분열과는 용어에서부터 구분이 되는데, 상대적으로[140] 16세기 쪽의 경우 교의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141]


6.7. 근세 ~ 근대[편집]


서방 교회는 중세시대까지 전 유럽권에 강력한 장악력을 보이다 중세 이후 왕권강화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파벌의 분리와 종교개혁 등의 사건을 통해 세력이 분열, 분열에 이은 재이탈로, 사목자들은 사회에서 주도적인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142] 세력 약화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한 문화권을 장악하다 관습에만 영향력을 남기게 된 상황을 근거로 쇠락했다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며 다른쪽으로는 비록 교회가 주도권을 상실했지만 이후 단일세력으로서의 최고급의 세력을 가지고 있기에 문명의 성장과 세계관 확장에 따른 상대적인 저하라고 평가한다. 기독교는 세력의 유지를 위하여 천여년의 시간에 걸쳐 과학과 세계관 확장에 탄압을 가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 가장 많은 후원을 한 것은 교회였다.[143]

또한 흑사병의 창궐로 유럽 전 인구의 30%가 죽음을 당하면서부터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면벌부 판매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교리 논쟁, 게다가 교황에게 상당량의 자금을 조달하라는 압력을 받은 유럽국가들의 왕과 제후들의 반발, 30년 전쟁 등으로 인해 가톨릭교 정치 세력은 눈에 띄게 쇠퇴한다. 또한 성 이레네오에 의해 정리된 가톨릭교 교리와 세계관이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다가 결국 계몽주의 시대가 되자 서구 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의 위치에서는 내려오게 되었다. 결국 가톨릭은 20세기 중반에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현대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동방 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조지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각지의 독립 교회를 형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느슨한 연대 체제를 형성하였다. 동유럽과 그리스, 아나톨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이슬람 지배 아래에서 여러모로 차별당하면서도 끊임없는 믿음을 이어나갔으며, 근대 들어 오스만 제국이 시름시름 앓을 때 그리스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정교회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는데 정신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분위기 때문에 동유럽~서아시아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에 의해 민족주의적인 광기+종교적인 핍박이 더해진 아르메니아 대학살 같은 핍박의 주요 희생자들이 되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는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의 주요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의 요새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세력을 가졌고, 러시아의 팽창과 강대한 국력에 힘입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지역까지 기독교(정교회) 신앙이 널리 퍼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1917년 이후 공산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소비에트 연방 및 동구권 치하에서 국가 무신론으로 혹독한 박해를 받아 매우 위축되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현대에는 착실히 재건되어 현대 러시아인들에게 중요한 종교로 남아있다.

또한 유럽의 상황과 별개로 기독교는 근세 이후 선교를 통해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 호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세계 각지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타 지역의 고유문화나 토착신앙을 파괴하기도 한 흑역사가 있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뒤 유럽의 세력이 전 세계 각 대륙에서 물러간 이후에도 조상격인 유대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범민족적이고 포용적인 교리로 인해 도태되지 않았고 오히려 세계 각지의 현지 문화와 융합하거나 적응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6.8.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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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서구 사회에서는 특정한 종교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고 서구에선 독실한 신자보다는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생활 배경, 문화적 종교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나마 미국의 경우에는 초기부터 기독교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사고 기저에 기독교적 영향이 깊게 배어들어 있고 독실한 신자들도 나름 많다. 미국 같은 경우에나 기독교가 대선의 주요 논점중 하나로 거론되는 편이다. 서유럽에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되고 있으며 유럽을 기독교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시 되고있다. 기독교의 중심은 이제 남미 아프리카 로 옮겨지는 추세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독교를 유럽이나 미국만의 주요 종교로 취급하지만 기독교인 역시 제3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서 있고, 사실상 아프리카남미의 종교로 변해가고 있다.(애초에 시작부터가 비서구인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종교다.) 거기다 현대에는 서구 대다수 지역에서의 기독교 교세는 세속화, 무신론자/비종교인/무슬림 인구 증가와 출산율 감소 등의 영향으로 갈수록 줄어들고 위축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남미, 태평양지역 등 제3세계 국가들의 기독교는 높은 인구증가율과 지속적인 선교의 영향으로 이미 신자 인구수와 교세도 서구 지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졌으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추세여서, 가까운 미래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대부분이 비서구 지역에 있을 것이라 한다.[144] 조사 결과에 의하면[145] 2050년에는 29억 2천만명이 되는 세계 기독교 인구 중 무려 74%가 중남미, 아프리카와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적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40%를 차지하여 중남미와 함께 미래 기독교의 핵심 지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만 해도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럽의 비중은 고작 15.6%, 북미까지 합쳐도 25%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독교 인구 성장의 대부분이 이러한 비서구권 국가들과 남반구, 제3세계의 기독교 인구 증가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가톨릭과 개신교는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나 20세기 말부터 교황청 내에 교회합일을 위한 기구가 신설되면서[146], 유럽루터회와 영국성공회를 비롯한 메이져급 개신교와의 일치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루터회와는 교회에서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라는 합의문을 채택했으며, 성공회와는 캔터베리대교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중이다.[147] 한편 가톨릭정교회는 분열로부터 1000년 가까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 양측을 교회 공동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148].

현대에 와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각 교파의 일치와 합일을 이루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단체가 세계교회협의회이다.


7. 이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단/기독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서양철학과의 관계[편집]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fidem, si poteris, rationemque conjunge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과 결합시키십시오

보에티우스[149]


본래 유대교는 셈족 계통의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었으나 헬레니즘 제국에 의해서 그리스 사상이 유입되었고, 이스라엘 왕국 멸망 이후 지중해 곳곳에 흩어져있던 유대인 공동체가[150] 외부 사상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온 이후, 철학의 수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였고 여기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은 자가 '아다만티우스'라는[151] 별명을 가진 오리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 쓰이던 알레고리 개념을 성경 해석에 도입하는 등 그리스 철학 전반을 기독교의 전통에 흡수하여, '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승화시켰다.[152] 이후 교부들은 플라톤 사상, 스토아 사상 등을 적극 수용했고, 훗날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용했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독교는 반지성, 반이성으로 해석되어 철학자들에게 집단다굴을 당하게 된다. 물론 이신론자들처럼 대외적으로는 기독교 간판을 건 철학자들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간판만 그러하였으니 아무튼 이 시기는 기독교에게 거의 흑역사라 보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성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근대 철학을 비판하고, 현대에 접어들어 마르틴 하이데거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며[153] 계몽주의 철학이 종언을 맞이했다. 또한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 통하는 카를 라너가, 스승인 하이데거의 사상을 새로운 신학의 집사로 부려먹은 이후 현대철학과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중이다. 그리고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프랑스 아카데미 정회원이기도 한 르네 지라르가 자신의 모방 이론을 이용,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면서 다른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대강 알 수 있겠지만, 좋든 싫든간에 기독교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오리게네스 이후부터는 서양철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인도 및 중국 철학과의 관계가 밀접하듯, 기독교는 서양 철학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서양 철학 역시도 천부인권, 평등 등의 많은 개념을 기독교에서 수용했다.[154] 또한 스콜라 철학 최강의 떡밥 중 하나인 보편논쟁은[155] 오늘날의 유물론, 관념론, 전체주의, 개인주의, 민족주의, 인권 등까지 연결되는 희대의 논쟁이기도 하다.[156] 이러한 면모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57] 이 표현이 철학도 입장에서 언짢을 수 있다면, 현대인들은 '철학과 신학은 부부이다'라고 변형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단순히 철학의 부분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만민평등의 개념과 인권의 개념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예제 폐지나 미국의 흑인운동도 모두 기독교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반해 동양철학은 이런 신에 대한 해석에서 일찍히 떠나서 발전했다. 유교, 도가, 불교 모두가 신에 대한 불신을 하고 있다. 유교는 신에 대한 관점에서 떠나서 사람의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이를 인으로 정하고 인을 따르도록 강조했고 도가에서는 신 또는 우주보다 더 높은 것을 이해하고 이를 도라고 칭하고 무위자연이 될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했으며 불교에서는 아에 자신의 형태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모든 것은 연기라고 설명하고 신적이든 철학적이든 분석적인 접근을 하지 않도록 하고 오직 원인을 고치는 일에만 생각하라고 하였다. 서양과는 다르게 동양은 신에 의한 생각을 할 시간이 적었다. 동양철학은 애초에 신에 대한 접근이 없었기에 서양철학의 시행착오같은 과정 또한 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근대, 서양심리분석가들은 동양철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관해서 많은 연구가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특히 불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9. 대한민국[편집]


한국 최대의 종교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약 19.7%), 불교(약 15.5%), 천주교(약 7.9%)가 있다. 기독교를 개신교 가톨릭으로 나누어 수치를 비교해 볼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는 개신교이며, 그 다음은 불교, 그 다음이 가톨릭 순이다. 이 중 기독교인 개신교와 가톨릭 수치를 합치면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7.6% 나 되어 명실상부 한국 최대 종교이며, 2위인 불교의 수치보다 훨씬 높다.[158] (인구수로 나타내면 2017년 통계청 기준, 개신교 968만 명, 가톨릭 389만 명, 도합 1360만 명 정도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교인들끼리만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한국은 미국이나 서양권에 비해서도 상당히 세속주의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무신론자와 세속주의자 또는 그 이외의 사유로 비종교인으로 남아있길 원하는 “무종교” 비중이 가장 높다. 2021년 기준 “무종교”와 “무응답” 응답자의 비중을 합치면 과반수를 넘어 60%에 가깝다. 그런데 이 무종교 의 비율은 관점을 달리하면 크게 낮아질수 있다. 서양쪽에서는 중요 명절 때만 교회에 나가는 나이롱 신자도 신도로 취급하곤 하는데, 이 기준을 유교에 대입시키면 무종교라고 답한 사람이더라도 설, 추석때 제사를 지낸다면 유교적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유교신자로 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독교는 기독교복음선교회가 사칭을 하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 신자 통계는 신뢰성이 부족하다.[159] 이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무종교 비율은 크게 내려갈 것이다.[160]

한편 정교회는 신자수가 약 0.005%로 매우 드문 편이다.


9.1. 역사[편집]


한반도에 최초로 전래된 기독교는 신라에 일명 경교라고도 불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는 장보고신라방으로 알려져 있듯 황해를 넘나드는 한중 교역이 활발했는데 당나라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감안하면 당나라 조정의 지지를 오랫동안 받았단 경교가 한반도까지 넘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

그 증거격 유물로 1956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출토된 석제 십자가마리아를 닮은 관음상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는데,[161] 이것을 경교 유물로 추정하기도 하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훗날 개신교와 가톨릭이 전래된 조선시대가 아니라 1천 년 앞서 통일신라로 끌어올려 소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한 전래 기록조차 남지 못했고 기독교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물만 일부 남긴 채 고려시대 이전에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절터에서도 십자가가 발굴된 바 있다.#

시간이 지나 고려 말엽에도 다시 경교가 유입된 적이 있다.[162] 몽골의 고려정벌 이후로 에르케운(也里可溫, erke'ün)[163]들이 고려로 들어와 경교가 유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정동행성의 평장정사 기와르기스(闊里吉思)[164]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당시엔 에르케운 사제들이 삭발을 하고 목탁을 두드리고 향을 지필 만큼 경교가 상당부분 불교화된 터라, 딱히 불교와 구분이 안되고 되려 불교와 동화되었고. 따라서 고려 사람들을 복음화시키거나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기에는 무의미한 수준이었다.[165]

뚜렷하게 역사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는 임진왜란 때 납치됐던 조선인 피랍자들이 이미 기독교가 전파돼 있던 일본에서 개종한 것이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인물로 오타 쥬리아, 와키타 나오카타등이 있다.

위의 사례들은 결국 현재의 한국 기독교 성립에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서학 전래(17세기) 등을 통해 조선 내에 자생적 천주교 신자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뒤이어 본격적으로 가톨릭 대목구가 설정되며 선교사들이 입국을 시작한 18세기 후반 이후부터를 유의미한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편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대목구가 설치된 것이 1831년이다. 초기 가톨릭은 제사 금지라는, 당시 조선의 성리학과 크게 충돌하는 교리 때문에 큰 박해를 여러 차례 받았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문서 참고. 그러나 신자는 차츰 늘어갔고 19세기 후반 열강과 통상수교가 시작된 이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개신교나 정교회의 경우는 역사가 더 짧아서 19세기 후반 열강과 통상수교가 개시된 뒤에야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다.(아펜젤러, 언더우드, 알렌, 메리 스크랜튼 여사 등 네임드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시기가 1884년~1886년 이후이고, 셰콥프스키 신부에 의한 러시아 정교회 선교가 시작된 시기는 아관파천을 전후한 1900년경) 유의미한 기독교 전파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2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만 봐도 현대와 비교하면 한국 내 기독교는 짧은 시간 내에 크게 성장했으며, 이를 서구권에서는 눈독들여 바라보고 연구하기까지 한다.

전래 이후의 역사는 개신교/대한민국, 가톨릭/대한민국, 정교회 참고.


9.2. 명칭의 문제[편집]


한국에서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개신교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비신자들이 '기독교와 천주교/정교회는 다르다'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은 당연하고, 천주교/정교회/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신자들 중에도 그렇게 잘못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 좋은 것을 기록한 통계는 아니지만 일반 국민도 아닌 대한민국 검찰청이라는 곳이 이렇게 '기독교'와 '천주교', '기타 종교'[166]를 별개로 적은 데서 얼마나 심한지 말 다했다.

2번의 명칭 단락에서 언급했듯 '기독교' 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한자 음역한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 문서 제일 위의 틀에서도 보이듯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여러 종파를 아우르는 말이다.

단순히 일반인들의 오해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아예 공식적인 종교 분류에서 '기독교'와 '천주교'/'정교회'로 구분하고 있다. 주특기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한 집단이라고 일축하기에는 절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이 거쳐가는 만큼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167][168]

이렇게 된 이유는 가톨릭이 한자 문화권에 전래되면서 천주교라는 명칭으로 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이런 용례는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발행한 「천주실의」등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가톨릭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면서 현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유교, 불교 등 현지 종교 및 사상에서 쓰이는 용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고자 했고, 자연히 이탈리아어 'Cristianesimo'를 음차하기보다는 야훼를 이미 유교문화권에서 쓰이던 용어인 '천주'로 번역해 '천주교'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게다가 천주실의에서는 예수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되었고, 야훼에 대한 소개와 아우구스티노의 교부 철학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은 붕 뜰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처음 설명된 책은 예수회 선교사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의 저서인『新編西竺國天主實錄』(신편서축국천주실록. 1584)으로, 그는 라틴어 'Christus'(크리스투스)를 당시 한어(漢語)로 ‘키리스두’라고 발음되는 契利斯督(계리사독)으로 표기하였다[169] 그 뒤 예수회 선교사 임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 Jr. 陽瑪諾)[170]의 번역서 『天主降生聖經直解』(천주강생성경직해)에서 전반부에는 契利斯督(계리사독)이 나타나다가 제6권부터는 基利斯督(기리사독)이 나타난다.그리고 그 뒤 문헌들은 이 基利斯督을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음역어는 '기리스두'로 발음되는 基利斯督으로 정형화 되어 간다. 그러나 이런 기리사독 표기어는 표기의 복잡성 때문에 1700년 부터 基斯督(기사독)으로 변하더니 기독(基督)으로 변했고, 이 기독이란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인 장 바쎄(Jean Basset, 白日昇, 巴設)가 세상에 남긴 중국어 성경 사본에 基利斯督과 함께 최초로 나타난다. [B]

개신교도 중국에서는 경정교(更正敎)라고 불렸었다. 하지만 基利斯督, 基督이라는 말은 줄곧 사용되었지만 정작 '基督敎(기독교)라는 용어의 등장시기는 19세기 후엽이다. 그 전에서는 야소교(耶穌敎)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경정교를 일컫는 말'로 쓰여졌었다. 이때 중국의 가톨릭은 천주교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었다. 최초로 基督敎라는 단어가 쓰여진 시기는 텐진 조약이었다. 정확히는 텐진 조약 안에 中美天津條約(중미천진조약)으로, 여기서 제29조에 그리스도교 선교를 보장하는 내용에서 '耶穌基督聖教, 又名天主教' (야소기독성교, 우명천주교)라고 기록함으로서 경정교를 의식하는 '(耶穌)基督聖教'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 이 기독교라는 이름은, 1850년대에 중국에서 생성된 뒤 조약문서나 중국 신문 등 문헌을 통해 일본에 먼저 유입되었고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한성순보 등을 통해 조선에 유입 및 소개되었다.[B]

조선에선 인조실록 등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에도 막부의 탄압으로 조선까지 탈번을 해버린 키리시탄의 압송에 대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에도 막부는 키리사탄을 吉利施端(길리시단),吉伊施端(길이시단),吉利是段(길리시단)등으로 쓰기도 했다.[171] 그 이후로 조선에 가톨릭이 전해짐과 동시에 '천주교'라는 표현이 조선에 그대로 전래되면서 한국어에서도 자연히 가톨릭을 가리키는 명칭이 '천주교'로 굳어졌는데, 성경광익(聖經廣益), 성경직해(聖經直解)등 문헌을 번역할때도 예수나 그리스도를 라틴어 칭호에 가깝게 번역했었지, 基利斯督, 基督같은 음차를 쓰지는 않았다.[B] 즉. 이미 조선 땅에서 개신교 전래 이전에 조선 가톨릭은 중국에서 들여온 명칭인 '천주교' 내지는 '서학'이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리고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원어를 존중했었다.

조선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메타는 크게 다르지는 않아 초기엔 중국어 성경을 썼지만. 로스(John Ross, 羅约翰) 선교사가 펴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와 『예수셩교젼셔』(1887)에서 주님의 칭호를 중국어 성경과는 달리 ‘키리스토’(눅2:11, 1882)나 ‘키리쓰토’(1887) 또는 ‘예수키리쓰토’(마1:1, 1887)로 음역해 표기하였다. 또,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 선생은 그가 번역한『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1885)를 저본으로 삼은 『耶穌基督救世主新約全書』(야소기독구세주신약전서)와는 달리 耶穌基督이라는 한자어 위에 ‘예슈쓰크리슈도스’라고 표기함으로써 신약성경 그리스(헬라)어로 표기된 예수 그리스도 고유의 이름을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중국식 표기인 基督이라는 말은 쓰긴 했으나. 원어의 발음은 존중하려고 애썼던 셈이다.[B] 그러나 그 당시엔 야소교, 예수교라는 명칭이 혼합되어 쓰이다가 기독이라는 이름이 일본에서까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고, 1880년에 도쿄YMCA(東京基督敎靑年會), 1903년에 황성YMCA 황성긔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가 창립되는 등 점차 개신교계에서 기독교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는 등 여러 용례들이 나오게 되면서 오랜 기간동안 기독교라는 이름이 개신교를 칭하는 말로 통하게 되었다.

9.2.1. 한국 가톨릭의 입장[편집]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기독교라 함은 가톨릭 교회 역시 통칭한다. 따라서 기독교를 개신교 만을 지칭하여 쓰는 것은 이러한 단어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 용례이다.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파를 말하며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외 기타 종파를 포함해서 부르는 명칭으로 써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정부나 언론 등 공식 기관에서 기독교라는 명칭을 오용하는 것을 수정하기를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때문에 신자들도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꽤 많다. 기독교 오용으로 제일 유명한 군대에서도 가톨릭을 가면 반드시 언급한다.

'기독교' 뿐 아니라 교회라는 명칭도 비슷한 처지인데, 풀어쓰면 기독교 신자들의 모임이지만 한국에서 교회라고 하면 개신교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통용되고, 천주교 (및 정교회) 신자들이 미사를 보는 곳은 성당이라고 칭한다.[172] 교리서나 미사 통상문, 가톨릭 서적을 보면 교회라는 단어는 가톨릭을 뜻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개신교는 원칙적으로는 신앙 공동체이지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교리에 대해 보수적인 일부 신자는 개신교를 교회나 개신교, 기독교라고 조차 부르지 않고 가톨릭에서 분열해 나간 교인들이라는 의미의 '열교'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20세기 초반까지만에도 이것이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과 이론상의 이야기. 현대 가톨릭 교계는 개신교계와 교류하자는 입장이라 자신들만의 관점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 '기독교' 명칭은 몰라도 '교회' 명칭은 크게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교회'는 개신교 교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만 하고 대충 넘어간다. 언중에서는 가톨릭 (및 정교회)은 성당, 개신교는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나, 내부 문헌이나 교회 내부에서는 "교회"라는 명칭을 쓴다.

9.2.2. 개신교의 입장[편집]


개신교 교파 전체를 통칭할 때 여전히 '기독교'나 '한국교회'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개신교 교파의 교단 연합 단체 대부분은 '기독교'라는 표현을 정식명칭에 포함하고 있다. 각 교단의 정식 명칭에도 '개신교'를 넣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구세군대한본영, 그리스도의 교회,[173] 대한성공회[174]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기독교' 또는 '예수교'를 명시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한국루터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같은 식이다. 호주 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8–1954)에 의해 갱정교(更正敎)라는 표현이 고안되기도 했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관련 자료.

개신교 입장에서는 '기독교'라는 표현을 개신교 전래 당시부터 더 보편적으로 써 왔기에 기독교라는 명칭을 선점해낸 현재 상황을 그다지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 개신교 신자들 입장에서는 굳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해야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굳이 '기독교'라는 명칭을 쓰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여담으로 '기독교'라는 표현이 특정 교파만을 가리키는 용례는 비단 한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175], 러시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더불어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에서는 "천주교는 그릇된 믿음이며 개혁된 기독교인 개신교가 참된 믿음"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는지라 개신교 입장에서는 신학적 관점에서도 굳이 '기독교'라는 명칭을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는 개신교의 성립 자체가 천주교에 대한 반발인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교회 일치 운동을 수용하는 개신교 교파라 할지라도 표현하는 수위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 더 나아가 한자 문화권에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유래한 '천주교(天主敎)'를 비롯해 '천주공교(天主公敎)'와 '천주성교(天主聖敎)'라는 표현을 조선시대부터 굉장히 자주 써 왔으며, 이미 개신교 전래 전부터 '천주교'라는 명칭이 가톨릭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반면 개신교는 전래 당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라는 표현을 쓰는 빈도가 더 많아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이라 딱히 기이한 현상이라고 보기는 좀 힘들다. 사실 개신교가 조선에 전래될 당시에는 이미 가톨릭은 천주교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던데다 교파를 막론하고 기독교 자체가 다수의 민중에게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굳이 '기독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일단 '기독교'라는 명칭을 오래전부터 더 보편적으로 사용한 건 개신교측이라 할 수 있다.


9.2.3. 정교회의 입장[편집]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정교회 신자수가 약 0.005%로 굉장히 적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정교회 측 입장은 천주교 및 개신교에 비해 찾기 어려운 편이다.


9.3. '하느님'과 '하나님'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하느님과 하나님

한국에는 가톨릭 / 정교회 / 개신교의 각 교파들이 각각 다른 루트로 들어와서 상호간에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쓰는 용어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다. 그 대표격이 '하느님'으로, 현 한국 가톨릭 / 한국정교회 / 대한성공회는 신명(神名)으로 하느님을 쓰고 대한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의 나머지 교파들은 하나님을 사용한다.

본디 한국 가톨릭에서는 지금처럼 하느님이 아닌 천주라는 신명만 사용하였다.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에서 '천주'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동아시아의 경천신앙과 기독교의 신에 대한 신앙이 본질적으로 같은것이라 생각한 마테오 리치 신부가 천(天)에다가 인격신이라는 의미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주(主)를 붙인 것이다. 나아가 마태오 리치 신부는 상제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라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마태오 리치 신부의 이 해석도 가톨릭 내에서 논란이 많았고, 교황의 칙서로 '천'이라는 신명과 '상제'라는 신명은 금지되고 오직 천주만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천주의 개념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외래어를 직역하기 보단 동아시아적 세계관에 어울릴만한 대체어를 찾은것에 가깝다.[176] 그리하여 한문본으로 유학자에게 들어온 조선에 들어온 초기에 가톨릭 서적에는 하느님, 하나님이라 적지 않고 천주라고 적어놨었다.

그리고 개신교는 처음에는 오히려 하느님이라는 신명을 썼다. 장로회 목사 존 로스가 최초로 한글 성경인《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의 1882년 본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 역시 천주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경천사상이 기독교의 신과 같다고 본 해석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을 거쳐 전파된 가톨릭과 달리 한국에 직접 선교하는 특성상 한국인에게 더 쉬운 이름을 선택한 것. 그러던 것이 1887년의 판본에서는 맞춤법을 전체적으로 수정하면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다. 1887년 당시에는 아직 서울말을 중심으로 통일된 표준어가 없어서 오히려 현대 표준어와 다르게 된 것.

구체적으로 '하ᄂᆞ님'은 17세기 편지글에서 '하ᄂᆞ님'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형태는 북한 평안도 방언으로[177] '하ᄂᆞᆯ + -님'의 결합에서 'ㄴ' 앞의 'ㄹ'이 탈락된 결과이다. 물론 이 글에서 '하ᄂᆞ님'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의 '하늘에 계신 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편지글이 아닌 문헌자료에서는 18세기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에는 '하ᄂᆞᆯ님'으로부터 '한우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하ᄂᆞᆯ님'은 원래의 구성인 '하ᄂᆞᆯ + -님'을 의식하여 적은 것이며, '한우님'은 '하느님'의 모음이 전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원래 구성인 '하ᄂᆞᆯ님'에서 현재의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의미상의 큰 변화를 입지는 않았다. 출처: 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한민족 언어 정보, 국어 어휘의 역사 즉 흔히 알려져 있는 '하나밖에 없는 님(유일신)이라 하나님이다' 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가톨릭이 개신교와 화해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1960년대 공동번역성서에서는 기존에 쓰던 신명인 천주를 포기하고 개신교의 신명을 수용하되, 표준어에 어긋나는 하나님 대신 원 형태가 보다 잘 살려져 있는 하느님을 쓰기로 개신교측(?)과 합의한다. 그러나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참여한 문익환 목사의 교파는 상대적으로 개신교에서 교세가 마이너한 '한국기독교'장로회였고, 이들이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 가장 교세가 강한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비롯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이란 신명을 고집하고 공동번역성서의 사용률도 저조하다.

한국에서 성공회가 '하느님' 표기를 채택한 이유도 대한성공회에서 상기한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한국 정교회에서는 아직 독자적 한국번역판이 나온적이 없기에 여기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실인 공동번역성서에 따라서 '하느님'을 표준 발음으로 한다. 또한 공동번역성서를 내놓은 장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자기들 거라고 공동번역성서를 많이 쓰므로 역시 하느님이라고 한다.[178]

한편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신=이슬람의 신으로 보므로, 한국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한국어 번역을 '하나님'이라고 못박아 통일해버렸다. 또한 하나님이란 단어가 1(하나) + 님이라는 민간어원설도 그대로 수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일신을 그 누구보다도 강조하는 동네라 삼위일체론이나 예수의 신성조차 부정하는 판이니 저 민간어원설이 더 구미에 맞은 모양.

결론적으로 언어의 사회성을 고려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제 하나님이란 말은 맞춤법에 어긋난 비어(非語)라기 보다는 보편화되어 있는 새 말에 가깝다 보는게 바람직하다. 동시에 하느님과 어원적으로 같으며 같은 의미라는 사실 역시 잊거나 왜곡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이를 인정해 표준대사전에서는 '하느님을 개신교에서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9.4. 정치적 성향[편집]


처음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야 당연히 천주교개신교든 진보를 넘어 급진적인 사상이었겠지만 개화가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이 현대로 접어들면서 대체로 개신교는 보수적이고 정권에 친화적이며 천주교는 진보적이고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여왔다.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향린교회도 민주화 역사에 중요한 장소들이지만, 이들 교파의 세가 개신교 내에서 너무 작다. 진보적인 개신교가 미약하지만 군부정권을 거치며 대한민국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면서 자극을 받은 한경직 등 보수 교계 원로 목사가 주동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창립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개신교하면 보수 우파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의 한미 FTA를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가톨릭 사제 모임인 정의구현사제단시국미사를 집전했으나, 대체로 가톨릭에서는 가시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수장인 전종훈 시몬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령함으로써 부정적인 입장을 소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성직자의 사회참여에 대한 우려의 여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그럼 용산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저는 신부님의 사목을 받는 신자가 아닙니까'와 같은 의문이 잇따랐고 신자들 간 분쟁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가톨릭 역시 과거에 비해 점차 보수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 참조. 전반적으로 가톨릭이 보수화되는 것은 사실로,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논쟁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가톨릭이 중산층의 종교로 변모하면서 빈자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구원보다는 개인구원에 치중하게 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가톨릭 내 정치적 진보파가 비판, 염려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가톨릭의 경우는 그 내부에 진보와 보수가 섞여 있는 경우가 있으며, 사실상 종교단체 자체가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기는 힘들다. 단지 추기경 및 지역교단 주류세력이 어떤 계열인지를 따져서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

개신교한국의 개신교계의 역사적 특성상 교파가 굉장히 많고, 교파마다 정치적 시각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또 각 개별교회가 별도의 자립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개신교 전체를 망라하는 정치적 입장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 영향을 큰 영향을 끼치는 대형 교회와 주요 교파들은 보수적인 성격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실상 보수라고 봐야 한다. 이유인즉 그 대형교회 주요 교파들의 신자 수 비중은 대부분을 넘어서게 된다.[179]

그러나 단순히 주류 교단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이며, 대형교회 목사들이 보수적인 성향이라고 해서 주류 기독교 신자들이 보수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하는건 매우 곤란하다. 일단 기독교 우파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에서는 개인의 종교적인 스탠스가 정치적 성향으로 연결되는 경향이 별로 없다시피 하며,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 역시 한국 평균 정치 성향과 딱히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또한 신학적으로 보수=정치적으로도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아무리 보수 교단에 속한 목사라도 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적일 수 있으며, 그 반대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180] 또, 목회자의 정치적 성향과 교인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반드시 같으란 법도 없다. 사실 이건 미국이나 다른 개신교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인 소리.[181] 예를 들어 조지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신학적으로 '메인라인'에 속하는 진보 교단인 감리회 신자이나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개신교 주류 교단이나 대형 교회 목사들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보수적인 편인 것은 맞으나, 이런 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의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목회자나 교단의 정치적 성향과는 거의 무관하다시피하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가 기독교 종파 중 교세가 상대적으로 더 크고, '기독교'라는 명칭을 가톨릭보다 자주 사용하며, 가톨릭에서는 '천주교'라는 명칭을 혼용하는 관계로, 가톨릭은 다른 종파인지 알면서도 기독교에는 포함되는지 헷갈리게 한다. 전세계에선 각 지역의 주류 종파를 기독교로 알아주며, 대표적으로 아랍권에선 기독교 하면 정교회를 더 먼저 생각한다. 단성론 기독교가 이슬람에 영향을 크게 준 점과 같이 오스만 제국에선 정교회와 공존하였고 아랍 토속 기독교인 시리아 정교회같이 정교회에 더 친근하게 가깝기 때문. 그래서 아랍에서 대대로 남은 기독교라면 거의 정교회다. 더불어 아랍권의 무슬림들에겐 가톨릭은 옛날 십자군 전쟁이나 제국주의 시절 침략자의 이미지로, 개신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한패인 종교로 여기기에 그나마 정교회가 가장 낫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이 대립이 상당히 애매한 편. 남부 침례회측은 대부분 보수이며, 바이블벨트 지역의 교단들은 보수이다. 반면 동북부 지역의 경우는 진보(리버럴)교단이 많은 것이 사실. 이 경우 진보교단은 인디언과 원주민 박해에 대해 사과를 하고,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 이스라엘을 깐다. 즉 보수교단과는 정반대이며, 이쪽에서는 아예 교회에서 성교육을 하자고 주장하는 예도 있다. 반면 그 보수교단은 교진추를 보는 듯한 갑갑함을 비롯하여 정치적으로도 팍스 아메리카나를 주장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등의 형태로 여러모로 정반대 성향을 띄고 있다.


9.5. 기복신앙[편집]


한국 종교가 대부분 그렇듯 한국의 개신교 역시 믿는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하는 일이 성공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거라는 기복신앙의 측면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엄청나게 강한 편이다.

물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믿는다해서 잘 사는 건 아니고 못 사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으니 어려워도 행복, 잘 살아도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는게 보통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마인드. 당장 성경을 펼쳐놓고 욥기만 읽어도, '신앙=세속적인 부'라는 식은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는 오히려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 고통받는 선지자의 고뇌를 볼수있다[182][183]

사실 성경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오는 핍박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184] 한국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러한 것을 비판하는 소리가 다방면에서 높아지고 있는데, 탈성장주의를 외치는 교단이나 목사들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복적인 면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워낙 초대형 교회들이라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신학적인 견해로서의)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넘어 한국의 정식 신학교에서 저런 기복적인 주장을 지지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몇몇 이단은 제외하고는 말이다.

다만 상기되었다시피, 구약에서는 기복적인 면모가 강하기도 하고 외국에서도 일반 평신도들은 기복신앙적인 면을 자주 보인다는 점은 기억하자. 기복신앙을 이단으로 보는 것은 교리를 깊게 파고들어 엄밀히 따지는 경우라는 것. 그리고 엄밀히 말해 주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바라고 요청하는 행위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지 옆집 '아저씨' 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반 신자가 아니라 주류 목사나 교단이 대놓고 해대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사실 별 특이할 것도 없는 것이, 기복신앙은 기독교 뿐 아니라 우리나라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이다. 불교 역시 세계적으로 기복적 특색이 강한 것이 한국 불교이다. 이러한 기복신앙이 부패를 조장하긴 하지만 오히려 종교전쟁 같은 극단적인 대형사고는 줄어든다는 견해도 있다. 기복신앙 문서를 참고.

한편 천주교의 경우에는 기복신앙을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본다. 기복신앙은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위해 봉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주소지에 따라 교적을 옮기고 계속 신부를 순환 발령시키는 한국 천주교 특성상 명동성당 같은 곳이 크고 유명하긴 해도 특정 사제와 연관된 대형 교회라는 게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몇 년 지나면 다른 보직으로 갈 사제들이 굳이 예물 액수나 기복적인 메시지를 강조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들의 종교관 자체가 세속적이고 기복신앙적 성향이 있다보니 평신도들의 경우 소소하게나마 기복신앙과 미신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꽤 많다.[185]

9.6. 자원봉사[편집]


국내 자선-봉사 단체의 상당수가 기독교 계열로 국내 자선-봉사 활동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22% 정도로 적지 않다.

기독교 신자들은 봉사를 하며 선교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봉사의 의도가 순수성이 없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세금을 내거나 기부를 하는 등의 행위는 뭐라 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종교적 믿음에 어찌 보면 반 강제적일 수도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186] 자원봉사는 그 행위의 목적 자체가 폭력성을 띠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187] 심지어 기독교의 봉사 활동이 신도들의 돈을 빼앗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도들의 노력과 재능과 시간을 교회를 위해서 기부할 것을 강제하기 때문이다.[188]

9.7. 교민사회에서의 역할[편집]


외국(특히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의 재외국민이나, 유학생 등이 단합하고 모이게 하는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그 때문에 신자가 아닌 사람도 외국에 나가서는 한인교회나 한인 성당에 나가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9.8. 교파의 분화와 이단[편집]


유럽대륙과 남아메리카 지역은 가톨릭이 절대적 강세지만, 영국미국, 한국 등에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만큼 한국에서 만나는 기독교는 높은 확률로 개신교에 연관된 경우가 많다.[189]

문제는 개신교 교회 중에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로 여겨지는 교파가 많다. 천주교는 중앙집권 체제라 이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개신교는 종파가 많아서 교리 해석과 정책 같은 게 제각각이다. 분화가 꾸준히 일어나다 보니 '어디까지가 구원이 있는 교파고 어디부터가 이단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가 없다. 심지어는 목사의 머릿수만큼 교파가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과거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가 현재는 인정받고 자리잡은 교파도 있으며, 유대교나 불교, 이슬람같은 타종교까지도 인정[190]해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191] 그렇지 않은 곳이 아직은 훨씬 많다. 당연히 같은 기독교 내에서조차 타 교파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게 나뉘는 편이다.

거기다 이단들이 신자를 모으기 위해서 간판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유명 교파명을 적어 놓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독교인조차 작정하고 조사하지 않는 이상 이단 여부를 알기가 힘들다. 심지어 해당 교회에 다니는 사람조차 자기 교회가 사이비인줄 모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여러가지 민폐 역시 개신교 그룹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한국에서는 개신교를 기독교라 말하는 게 보통이라 그 민폐를 접하는 일반인들에겐 당최 그들이 어느 교파인지 알기 힘들기에 "에휴 저 예수쟁이들" 하면서 기독교 전체가 싸잡아 욕먹기도 한다.

사실 지금은 비교적 원만한 사이인 가톨릭, 정교회, 주류 개신교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는 서로 "너 파문!", "너 이단!"을 외치던 사이였다. 하지만 현재에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서로의 교리를 모두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하자. 물론 이것은 비신자 입장에서는 오해하기 쉬우나 기독교인 사이에 이단이든 사이비든 자기 입장에선 틀린 것이다.[192] 다만 대부분의 이단들이 교리나 각종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다.

이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도 이슬람만큼이나 이단에 상당히 반감을 가지는 편이다. 교리상으로 생각해보면 이단들은 지옥행 초고속열차표를 끊어주는 셈이니 당연히 배척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 와서는 기독교는 그러한 공격성의 정도가 많이 낮아졌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많아진 현대에 와서 마음에 안든다고 옛날처럼 냅다 물리적으로 적대시 할 수 없기도 하고... 다만 여전히 멀리하고 경계하는 태도는 버리지 않고 있으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당장 성경에만 봐도 거짓 예언자나 이단들을 경계하라는 교리가 아주 많다. 누가 참이고 거짓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로 분열된 건 함정이지만.

10. 비판[편집]




11. 박해[편집]




12. 역사적 의의[편집]


21세기 들어 반기독교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기독교가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각종 전쟁과 악습, 미신의 원인으로만 작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중세와 대비되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근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역사관에 가깝다.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 중세가 마냥 '암흑시대'가 아니었음은 학계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사항이다. 나아가 르네상스가 그렇게 혁명적으로 진일보한 시기였는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많다. 나아가 로마 제국의 멸망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기독교로 지목한 에드워드 기번 등의 근대 역사가의 서술도 이에 한몫했다. 이런 오해에는 서로마의 멸망으로 향하는 쇠퇴가 기독교 군주인 테오도시우스 1세의 내전 승리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즉 여러 우발적인 사태가 서로마의 기독교 국교화와 거의 동시에 일어나다 보니, 마치 기독교가 서로마를 지배하자 서로마가 쇠퇴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 것.

그러나 중세기가 단순히 쇠퇴하는 시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기독교가 새로이 소개하고 발달시킨 개념은 결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의 기틀이 될 수 있었던 자료들은 아랍어권의 고대 그리스의 번역서적이지만, 이를 중동권에서 수입해 다시 번역한 것은 바로 당대의 지식인층이었던 중세 수도회였다. 현대의 대학 시스템의 시초가 되는 대학들 역시도 기독교적 전통 아래에서 설립되고 유지되었다.

또한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지역종교였고 그랬기에 유대인들만을 우위로 두는 유대교의 교리를 수정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을 소개한 것도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가 처음 동아시아권에 소개되었을 때에 동아시아의 백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지배층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도 그러한 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일방적으로 기독교 (나아가서 종교가) 인류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기독교 (혹은 종교)에 대한 반감에 따른 반신론적 관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3. 각종 오해와 통념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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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자적으로 예수만 믿으면 어떤 잘못된 생각이나 삶을 살았건간에 천국에 갈 수 있다.
    • 본 문서의 교리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한다고 본인이 무슨 짓을 하건간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 교리상으로도 매우 큰 잘못 중 하나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예수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삶에 있어서 예수를 죄책감을 면피하려는 도구 내지는 수단으로 삼는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그리고 자신의 회개에 필요한 삶의 태도변화, 신앙에 뒤따르는 여러가지 고난이나 어려움(이를 그리스도를 뒤따라 십자가를 진다는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한다) 등을 반드시 따르겠다는 각오, 실천 등이 뒷받침되어야만 제대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는 개신교만을 말하는 단어이다.
    • 전혀 그렇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한자로 바꾼것으로 음차하면 기리사독교(基利斯督敎)이고 이 기리사독교를 줄여 기독교(基督敎)가 된 것이다. 이상하게 이것이 미국과 한국에서만 와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 고쳐지는 이유는 개신교 측에서는 자기들을 기독교라고 부르는데 천주교 및 정교회는 각각 '천주교', '정교회'라고 자칭하는 것이 크며 군대에서도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며 각인시키는 것도 크게 작용한다. 한국에서 군대는 거의 모든 남성들에게 재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꽤 많은 갈래들이 있다. 기독교는 크게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등으로 갈라져있으며, 개신교 안에 또 수많은 교파들이 존재한다.


  • 기독교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선량한 타 종교들을 탄압하고 괴롭히고 있다.
    • 국내나 특정국가들의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몇몇 깽판을 가지고 세계적인 수준에까지 일반화하는 대표적 오류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하는)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사회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문화권이나 국가들의 상당수는 타 종교권이 주가 된 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종교의 신앙의 자유나 전반적인 종교의 자유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세속화 정도가 심한 서구권이든 그렇지 않은 중남미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든 전반적인 추세는 비슷하다. 종교자유 지도를 참고해도 종교의 자유가 '그나마' 괜찮은 수준인 지역의 상당수는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가 태생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던 종교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가령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았던 사마리아인과 관련된 이야기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복음서 9:51-56에서의 일화[193]를 보아도, 초기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정치적 올바름과 사회정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의외로 기독교가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중세 유럽에서도 자국 내 유대교 신자나 무슬림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를 금지했고, 19세기 말엽부터 타 종교, 타 종파에 대한 관용의 움직임이 다시금 불이 붙으면서 가톨릭제2차 바티칸 공의회개신교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 또한 종교 박해에 대해서 팩트를 따진다면,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다. 한 예로 영국 의회의 조사 결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적으로 매 11분마다 1명의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에 의한 (대부분이 무슬림의 기독교 탄압) 종교박해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공포증, 반기독교 문서도 함께 참고.
    • 다만, 일부 국가에서는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기독교가 종교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나라들에서 저런 만행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데, 미국의 기득권층의 거의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인 것인데서 이들의 묵인이나 직,간접적인 지원 하에 개신교 근본주의 성향의 목사나 평신도들이 벌이는 갖가지 망언들이 대표적이다. 최소한 20세기 중반까지는 기독교가 우세한 나라에서 진짜로 타 종교 신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탄압이나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진 바 있다. 가령,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하던 시절에는 대놓고 비(非) 개신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벌인 바 있으며, 레바논은 노골적으로 동방 가톨릭의 일파인 마론파 신자들만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가 이것이 레바논 내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러시아 정교회가 사실상의 국교가 된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을 상대로 한 제노포비아 여론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측에서 부추기거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필두로 한 통합 러시아당 측과의 긴밀한 유착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진다. 사실, 상술한대로 기독교 국가들의 대부분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는 것은, 이런 식의 홍역을 수도 없이 겪은 후에 근본주의에 대한 자성 여론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타 종교에 대한 박해를 금기시하게 된 탓이 크다[194][195].

  • 십자가우상 숭배다.
    • 아니다.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다. 다만 십자가 자체를 예수로 받아들이는 경우나 십자가를 부적과 같이 효험을 가져다주는 물건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우상숭배가 맞다. 성모상이나 십자고상, 이콘 등도 마찬가지. 그런데 십자가를 보고 ‘저건 예수님이다’라고 하는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은 없다.

  • 성경은 전부 엄숙하고 경건하며 지루한 내용이며, 말투가 딱딱하다.
    • 이러한 분위기를 내는 것은 아마도 개신교의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특유의 번역상의 문제 때문일 수 있다. 공동번역성서, 새번역성경, 현대인의 성경, 쉬운성경 등과 같이 현대인을 위한 역본들이 지금도 활발히 출판되고 있으므로 이쪽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엄숙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일례로 욥기는 등장인물들이 오늘날의 키보드 워리어들이나 할 법한 키배를 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성전 정화에도 거침없는 표현들이 담긴 만만치 않은 설전들도 나온다. 또 다른 예로, 창세기에는 질외사정을 했다가 천벌받아서 죽은 "오난" 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된다면 빙고. 자위행위를 의미하는 단어 "오나니" 가 여기서 왔다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 신의 말씀을 꼭 진지하게만 전해야 하는가?
    • 성경 자체가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여겨져서 사랑받는 경우도 많다. 킹 제임스 성경만 해도 무신론자리처드 도킨스[196]조차도 내용 자체는 아름답다며 크게 호평했을 만큼, 근대 영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또 예수의 언행과 이를 바탕으로 정립된 기독교 교리를 주로 다루는 신약 성서와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로서의 성격이 들어가있는 구약 성서다윗골리앗의 이야기같이 역덕후라면 매우 흥미로울 내용들이 잔뜩 있어서, 기독교 문화권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을 다룬 더 킹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제작되었을 정도다.

  • 성경의 예언자들은 전부 미래를 예측하고 맞출 수 있다고 선전하고 다닌 사람들이었다. 짧게 말해, 이스라엘 점쟁이다.
    • 오늘날 "예언" 이라고 불리는 활동은 그 의미가 과거보다 축소되었다. 성경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야훼가 하고 싶은 말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대신 외쳐 주는 사람" 에 더 가까웠다. 예언자 문서에도 나오지만 심지어 야훼조차 종종 세태를 비판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고발하는 예언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따지고 보면 비단 기독교 전통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3세계의 샤먼이나 주술사들 역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신의 의중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신의 초월성 때문에 "신이 앞으로 이렇게 할 것이다!"의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을 뿐.

  •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에 나온다.
    • 도리어 그쪽에는 단 한 단어도 나오지 않으며, 요한의 첫째 편지/요한1서와 요한의 둘째 편지/요한2서에만 나온다. 다만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존재가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은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며 사람들을 겁주고 두려움에 떨게 해서 교회나오게 하려는 책이다.
    •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은 독자를 겁주려는 책이 아니라, 박해받으며 고난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 였던 각지의 기독교도들에게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며 위로하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다.

  • 예수는 긴 머리와 짧은 수염을 가잔 잘생긴 유럽계 백인 청년이었으며 호리호리한 체형에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 일단,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풍속은 남자가 장발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 풍속에 따라 단발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현대의 유대인 중에서 유럽계 백인 계통이 주류가 된 것은 수천년간 이방 지역에서 혼혈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의 분류가 혈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셈족 계통인 현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계통 원주민들과 외모가 유사했다. 예수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외모를 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 오늘날 알려진 미청년 이미지의 예수는 유럽권 화가들이 자기 문화권의 신자들에게 익숙한 유럽인처럼 생긴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라고 많이들 알려져 있으나, 예수의 모습을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처음 묘사한 곳은 다름아닌 중동이었다.
    • 당장 성경의 《이사야》 53장에서부터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하찮아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며, 흠모할 만한 아무런 매력이 없다" 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사실 이 대목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신학적 가교의 역할을 담당한다.
    • 이와 관련해서는 예수의 성전 정화도 함께 참고.

  • 예수십자가 박힐 때에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
    • 실제로 손바닥에 못이 박히면 체중을 견뎌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아마 못을 박았다면 손목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예수의 옆에서 회개한 강도는 오른편에 매달렸다.
    • 훗날 성 디스마(St. Dismas)라고 알려진 이 사람이 과연 오른편에 매달렸는지는 어디에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 이에 대해서 ‘오른쪽을 긍정적으로, 왼쪽을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성공회나 여타 진보-중도 성향의 교단들처럼 역사에 반대하지 않는 종파들이 존재한다. 개신교인들 중에서도 인류의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반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만 신흥종교 혹은 극도로 폐쇄된 교파 계열에서는 아직도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개신교의 경우 수많은 종파들의 집합이라 의견이 조금씩 틀리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지구창조 6000년을 주장하는 경우 한국의 구석기, 신석기 유적의 존재를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도 있고 어지간히 이상한 이단 아니면 보기 힘들다.

  • 믿음있는 기독교인이라면 타 종교를 배척하고 지구가 6000년이라고 믿으며, 동성애자를 싫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 흔히 반기독교측에서 많이 써먹는 소리인데 자신들이 공격할 때 상대가 유신론적 진화론자이거나 행실이 훌륭한 기독교인인 경우 이런 궤변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주장은 (기독교를 싫어하는) 자신들이 공격하기 좋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는 소리이거나 정말 종교에 무지해서 하는 소리다. 한국의 개신교가 신학적으로 워낙 보수적인 종파가 많아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보면 지구가 6000년이라는 소리는 오히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잘 안 믿는다. 기독교인들도 다 아프면 병원가서 치료받고 이를 합당한 처사로 본다. 많은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재단에서도 의료/병원사업에 노력을 쏟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기독교를 떠나 정상적인 종교라면 어딜 가던지 아프면 병원가서 치료받고 기도도 같이 받으라고 하지 기도만 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병 치료와 기도는 별개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의학적 치료를 배척하는 태도는 믿음 있는 행동이 아니다. 타 종교와 동성애자들과의 관계에서는, 그들의 타종교적 신념이나 동성애 행실 등을 교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주류 기독교 종파들의 보편적 믿음임은 확실하지만, 이건 신앙신념 및 사상/종교의 자유 안에 드는 범위이고, 타종교인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행사같은 배척은 기독교적이지 못한 태도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동성애는 배척하지만 동성애자 개개인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배려는 잃지 말자는 주장의 기독교 교파와 신자들도 많다.

  • 서양인들이 문어 등의 두족류를 안먹는 이유는, 기독교의 교리적 이유 때문이다.
    • 레위기에 두족류를 먹지 말라고 되어있는 건 사실이나, 레위기의 음식 관련 규정은 현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문자 그대로의 율법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이는 정말 극단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중시하는 일부 종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의 공통된 사항이다. 대부분의 주류 종파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약의 음식 관련 규정이 폐지되었다고 본다. 레위기 때문에 두족류를 먹어서 안 된다면, 레위기에 똑같이 금지되어있는 돼지고기도 먹어선 안 된다. 서양인들이 두족류를 안 먹는 건 교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문화적으로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여겨서 그런 거다.[197] 심지어 이는 같은 유럽이라도 지역마다 다르다. 주로 영국, 독일, 북유럽 등의 게르만 국가와 미국 등 이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주류였던 국가에서 두족류에 대한 혐오감이 더 심한 편이고 애초에 이 지역들은 대구(어류)연어 등, 북해를 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한정적인 종류의 어류만 소비한다. 반면 지중해 주변의 그리스스페인 등 라틴 유럽 국가들은 두족류를 잘만 먹는다. 좋은 반례로, 에스파냐갈리시아[198] 지방에는 전통 방식의 문어 요리가 있으며, 이 레시피는 이베리아 전역에 ‘Pulpo gallego’(갈리시아식 문어 요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 야훼는 성부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 야훼는 주(Dominus)에 대응되는 말이지, 성부에 대응되는 말이 아니다. 즉 예수 역시도 야훼이다. 다만 잘못 사용된다고 보기까진 무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성부를 지칭할 때 야훼라고 하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따지면 틀린 것이 아니다. 야훼의 위격 중 하나인 성부를 야훼라고 부르는 게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엄밀히 따져서 양태론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세 위격을 하느님이 그저 다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성부를 지칭할 땐 야훼라고 지칭하면 안 되고 성부 성자 성령을 같이 지칭할 때만 야훼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야훼가 성부만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틀린 것이라고 봐도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적인 서술에서는 성부를 편의상 야훼라고 할 뿐이다. 그 어디에도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는 서술은 찾기 힘들다. 물론 성자와 성부를 구분지어 말할 때 예수와 야훼로 구분짓는 건 틀린 게 맞고 따로 성부라고 지칭하는 게 맞지만 성부의 아들 성자를 지칭할 때 편의상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라고 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또한 성부를 야훼라고 부르는 것이 틀렸다는 주장은 성경으로도 논박이 가능하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위격인 성부를 지칭할 때 그대로 야훼에 대응되는 '하느님/하나님'(야훼/엘로힘)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기독교는 보수적이다?
    • 대한민국에서는 관점에 따라 보수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군사정권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유를 누리기 어려웠던 1987년 6.29 선언 이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단체는 거의 "개혁"의 중심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여학생은 단발머리, 남학생은 스포츠 머리로 짧게 머리를 하고 다녀야 했는데 기독교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최소한의 멋을 내는것을 그나마 허용해주는 편이었기 때문. 또한 당시에는 학교에서 사회적으로 폭력과 체벌이 만연해있는 환경이었는데 기독교 학교는 체벌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자유가 훨씬 더 많아지면서[199] 이제는 오히려 기독교 단체가 더 지나친 세속주의를 살짝 경계할 만큼 더 보수적이라고 느껴지는 경우는 있다. 아울러 성관념에 있어서는 한국 기독교는 대체로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령 성소수자에 대한 관점이라던가 간음의 교리 등은 일반적인 무교의 관점에서 봤을때 보수적인 성관념이라 할 수 있다.
    • 물론 종파나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다르긴 하나, 기독교가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곳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보수주의 진영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스페인이 대표적인데, 오랫동안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자국 내 우익 세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층으로 군림한 역사가 있으며, 20세기 이후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가 전향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기 전까지는, 교회가 기득권 세력의 첨병 역할을 한 역사가 있다. 기독교 우파가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 일부 젊은 세대들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 사실 기독교 자체에 회의를 느끼기 보다는 특정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기독교와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다. 당연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거나 10대, 20대들은 인간의 위선적인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일부 교회에서 권위있는 목사나 장로가 앞에서 온갖 좋은말은 다 하면서 막상 본인들은 전형적인 권위주의와 돈맛, 가식적인 행동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교회를 가던 젊은이들도 교회를 안 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도 나이가 30대 정도가 되어 적당히 성숙해지면 위선적인 면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성향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 한구석에 한조각 정도는 욕심도 있고 흑심도 있는 존재이며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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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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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기준 출처[2] 종파는 크게 가톨릭(1,300,000,000명), 정교회(300,000,000명), 개신교(800,000,000명)로 나뉜다. 1054년의 동서 대분열로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졌고,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다.[3] 이슬람 신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무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알려졌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선진국에서는 줄어드는 추세인 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신자 수가 증가하고 있어서 격차에 큰 변화는 없다.[4] 미국유럽연합 등 서구권 국가의 과반수가 기독교 문화권이다.[5] 출처[6] 다만, 실제 출생일은 원년이 아니라 보는 게 정설이다.[7] 하지만 학술적인 견해와 별개로 일부 개신교 신학과 상당수의 기독교 전통주의·근본주의 신학에서는 이슬람에 대해 '아브라함 계통의 계시종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8] 일단 기독교 최대 종파인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슬람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인정한 바가 있다. 다만 이러한 결정이 이슬람 신자들의 구원을 긍정하는 결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이슬람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기독교 만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9] 하느님의 영감(靈感)을 받아 쓰였다고 인정된, 공인된 경전.[10]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 번역이 '하나님'이다.[11] 주의할 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른 위격을 가지며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성자=성령이 아니며 성부=하느님, 성자=하느님, 성령=하느님이시고 그 셋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이 헷갈리는 부분이다.[12] 군종에서는 아예 기독교가 공식 명칭인데, 앞에서도 거듭 서술했듯 개신교가 정확한 표현이다.[13] 실제로는 천주교·정교회에서도 내부적으로 '교회'라는 말을 쓰지만, 비신자 대중에게는 개신교가 교회, 천주교 및 정교회가 성당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14] 성공회는 개신교에 속하지만 주교제교회로서 가톨릭, 정교회와 같은 사도전승과 삼성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가톨릭에서는 인정 안함) 다른 개신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통용되지 않는다.[15] '가톨릭'의 잘못된 한국명칭. 바리에이션으로 카돌릭, 카도릭, 가토릭, 캐토릭, 캐도릭 등이 있다.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 이렇게 부른다. 외래어라 별 상관없지 않느냐고 하는데, '가톨릭'이 한국 천주교의 공식 표기인 만큼 적어도 천주교인들 앞에서는 웬만하면 정확하게 불러주자. 이렇게 부르면 간혹 비하하는 뉘앙스가 되기도 하니 더더욱. 물론 가끔씩 천주교인들이 이렇게 부를 때도 있다.[16] 다만 교황청을 따르지 않고 신학도 다른 면이 있는 비오 10세회 등이 있긴한데, 그 숫자가 아주 적다.[17] 역사 교과서 등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엄밀히 말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엄연히 다르다.[18] 다만 정교회는 가톨릭에 비하면 통일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19] 개신교에서 스스로를 지칭할 때는 대강 기독교라고 하지만, 가톨릭정교회에서 스스로를 지칭할 때는 '가톨릭(천주교)' , '정교회' 등의 정확한 명칭을 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국 개신교 단체들이 교세를 따질 때는 천주교, 정교회까지 합쳐서 신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실에서는 천주교 및 정교회를 적대시하는 교파들이 적잖은 데다가 반(反)가톨릭 정서가 심한 몇몇 교파들에서는 천주교 및 정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개신교가 다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라서, 천주교 및 정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개신교 교파도 있다. 즉 천주교에 대한 스탠스는 교파마다 혹은 교회마다 그 차이가 크지만, 기독교의 한 종파로 인정할지언정 역사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호의적이지는 않다.[20] 물론 개신교 또한 교파에 따라 성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를 논할 때에도 교파를 구분한다면 더욱 명확한 의미전달이 가능할 것이다.[21] 'Christ'를 '기독'이라고 번역하면 어색해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Christian)'이란 단어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번역하지, '기독인'으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굳이 '기독'을 넣자면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신자' 정도로 '기독교'라는 어휘를 이용해 조어(造語)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기독'이라는 어휘를 쓰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순수하게 떠올리기 보다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색채가 어떻게든 묻어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와 "저는 기독교인입니다."의 뉘앙스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Christ Cathedral'을 번역해도 '그리스도 대성당'으로 하지, '기독 대성당'이라는 단어는 어색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런 활용의 연장선에서 보면 'Christianity'도 '기독교'보다 아예 '그리스도교'로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22] 종교 개혁 이후 출현한 주요 개신교 3교파는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사실상 장로회)이며, 이들 역시 시간이 흐르며 내부에서 교파가 다양하게 갈라진다.[23] 동방 전례를 따르면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가톨릭이다.[24] 칼케돈 공의회(제4차 세계 공의회)를 인정하는 기독교 종파이다.[25] 칼케돈 공의회(제4차 세계 공의회) 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종파이다.[26] 초기의 은둔적이고 사도적이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 성경을 매우 중시하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27] 하지만 가톨릭이 절대다수였던 과거와 달리 많은 남미 국가에서 복음주의 개신교가 크게 성장해 가톨릭만이 남미의 절대적인 종파라는 인식은 옛말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남미에서 가장 큰 교세와 영향력이 막대한 종파다.[28] 예) 레바논의 마론 교회(가톨릭),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시리아 그리스도교의 경우 시리아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시리아 그리스 정교회(정교회), 가톨릭(90% 정도는 동방 예법)이 각각 1/3씩을 차지한다.[29] 남미는 전통적인 가톨릭 강세 지역이나, 최근들어 가톨릭 신자가 줄고 개신교 신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몇십년 뒤에는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신자보다 더 많아질 예정이다.[30] 많은 국가들이 루터회성공회를 믿고있다.[31] 최근 중국 개신교 인구가 적게는 1억 2천에서 많게는 1억 5천까지 있다고 한다.[32] 대표적으로 남아공 등에 많은 시온 크리스티안 교회, 콩고 지역에서 세력이 큰 킴방기즘 기독교나 알라두라 사도교회 같은 토착 독립교회에서 이런 문제나 혼합주의 내지는 이단시비가 많다.[33] 북아프리카에티오피아는 초대교회~교부 시대부터 기독교 신앙이 자라잡았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 서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광범위한 기독교화가 시작된 것은 제국주의 시기 이후이다. 그나마도 이때는 대다수가 이슬람과 토착 신앙을 믿었지 막 진출한 기독교가 이 지역의 보편적인 종교로서 자리잡지는 못했었다. 기독교가 사하라 이남 주민 상당수~대다수의 종교로 널리 자리잡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기가 끝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즉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기독교화는 생각보다 역사가 짧은 편.[34] 나갈랜드, 메갈라야, 미조람, 마니푸르 일부 지역 등[35] 이쪽(시로 말랑카라, 시로 말라바르 기독교)은 아예 초대교회 직후 시기부터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다.[36] (책 속 주석) 참조: 이 책 제4장 167쪽 이하.[37] 프랑스의 가톨릭 성서학자. 학생 시절 시온회(유다인으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서품받은 사제들로 구성됨) 사제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1세기 유다교 연구에 천착했으며, 학자로서의 주 분야도 1세기 유다교와 역사적 예수 등이다.[38] 아람어로 인자(바르 에나샤)는 원래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인류'를 가리킨다 (벨하우젠).[39]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었을 것이다.[40] 세미하사[41] 특히 악인[42] 셰올과 달리 32장, 56장 등에서 비유적으로 언급된다.[43] 이후 천상의 존재의 죽음에까지 확장되었다.[44] 이는 내 영혼을 음부(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45]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46] 통상 '복음' 혹은 '기쁜 소식'으로 번역되는 에우앙겔리온은, 종교적으로는 구원(σωτηρία), 행운(τύχη)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의 탄생 혹은 즉위를 가리키기도 했다. 또한 왕이 죄수를 사면하거나 유공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포상, 백성에게 베푸는 특혜나 선정(善政)도 에우앙겔리온이라 했다. 가령 소아시아에 자리한 프리에네의 연감 비문은 주로 황제의 인물과 관련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번영을 비롯한 여러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모든 삶을 주재하는 신은 당신의 섭리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분을 이러한 선물로 채우시면서 우리와 다가올 세대에게 구원자(sotēr)로 보냈다. 그분은 모든 전쟁을 끝낼 것이며, 모든 것을 뛰어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 그분이 나타남(epiphaneia)으로써 선조들의 희망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간이 창조된 이후, 선행을 베푼 모든 이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황제께서 태어나신 날은 세상을 위한 '에우앙겔리온'(euangelion)의 시작이었다. 이 에우앙겔리온은 황제 때문에 생겨났다."
곧, 1세기 교회는 예수를 단지 지혜의 스승이나 윤리 교사로 기억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로마의 공권력을 딱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요 신'(dominus et deus / 수에토니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 전기』 13,1-2)인 황제의 에우앙겔리온이 메아리치는 지중해 세계에서 황제의 위치를 상대화시키고는,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예수의 에우앙겔리온을 선포한 것이다.
[47] 친형제 여부는 텍스트가 단편적이고 애매하여 단언하기 어렵지만, 일단 성경에서는 형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신학에선 친형제가 아니라고 보고 개신교 신학에서는 대체로 친형제로 보지만, 꼭 교단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가톨릭 신학자 John P. Meier는 "증거가 너무 적아서 절대적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Needless to say, all of these arguments, even when taken together, cannot produce absolute certitude in a matter for which there is so little evidence")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신약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친형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A Marginal Jew》. volume 1, Doubleday, 1991) 한편 개신교 신학자들인 William David Davies와 Dale C. Allison은 마태오 13장의 형제들이 친형제가 아니라 본다.(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J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3 vols.;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dinburgh: T. & T. Clark,
[
1988, 1991, 1997
]
, 2:458.)
[48] 이러한 성장환경의 공백 때문에 현대에 각종 넘겨짚기들, 심지어는 예수 불자설 같은 유사역사학까지 붙지만, 결국 텍스트가 없기에 상상의 영역이다.[49] 「예수는 한동안 세례자의 제자 동아리에 속했다는 주장이 있다. ...예수가 한동안 요한의 제자였다고 인정하는 데서 더욱 강력하게 발생하는 문제인즉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의 나중 활동이 세례자의 활동과 적지않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는 요한과 관계를 끊어 버렸거나 아니면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수임 또는 소명에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다 그러나 그런점을 가리키는 대목은 없다. 마르 1,10-11도 후자의 근거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확실히 예수도 심판을 고지했다. 그러나 예수의 심파설교는 독자적인 함축이 있고 하느님 나라 설교와 떨어질 수 없다.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로도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한 결론인즉 그러므로,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되, 그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서 세례자 운동을 수용하고 그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111-113쪽.) 세례자 요한의 제자 여부 대해서는 요아힘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Neutestamentliche Theologie. Erster Teil: Die Verkündigung Jesu, Gütersloh 21973,51-53을 참고하라.[50] 물론 예수의 메시지에 시민윤리나 심리치료 등의 요소는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를 이러한 근대적 시민운동가나 심리치료사로 환원시키고 기적 이야기를 '덧붙여진 것', '없어도 되는 것'으로 희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연구에서는 더더욱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티나의 문화 맥락을 중요시한다. 1세기 유다인 예수가 19세기 종교적 개인주의자처럼 생각했다는 발상부터가 역사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된다.[51]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같은 책 169쪽)[52]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53] 살인하지 마라 → 성내지도 마라 / 간음하지 마라 → 음욕을 품고 바라봐서도 안된다 /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 복수를 할 때는 니가 당한 것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 복수하지 마라 / 이웃을 사랑해라 → 원수도 사랑해라 [54] 공동번역, 개역성경, 가톨릭새번역에서는 능동태("..라고 하신 말씀")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신적수동태(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말하는 유다인 문화의 화법)이다. 즉 예수의 화법에서는 시나이 율법을 입법한 주체로 분명히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다.[55] 이건 율법학자들도 했다.[56] 복음서 텍스트 자체와 반대되는 오독이다.[57] 물론 예수가 당시 성전에서 벌어지는 실태를 반대한 것은 맞다. 하지만 사건을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예수의 뜻도, 최고의회의 뜻도 간과하게 만든다.[58]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메시아'를 인정하는 장면이 더 뒤의 장면인 14장 61-62절에서야 나오지만, 예수가 메시아적 암시는 그 이전에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직접 입으로 발언했는지는 다소 모호하다. 그러나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로 잘 설명되는 건 맞다. 「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게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 R. Marlè 프랑스어 번역, Paris 1965, p.100)[59]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입성 다음에 곧바로 일어난다. 마르코에서는 하루 뒤.[60] (책 속 주석)이 점은 마리우스 라이저가 내게 지적해 주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 자기 임의로 대사제를 해임하거나 임명했던 이들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영주,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로마 행정관들, 아그리파 1세와 2세, 칼키스의 헤로데 등이 있다. 임명권을 행사했던 이들의 인명에 따른 전체 목록은 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175 B..D.-A.D. 135). A New English Version revised and edited by G. Vermes, F. Millar and M. Black, Vol, II, Edinburgh 1979,229-2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sephus, Antiquitates 20,224-251 참조.[61] 유다교는 엄연히 당시 로마 제국이 인정한 국가공인 종교였다. 로마인들은 유다인처럼 유일신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다신교 세계관을 통해서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신' 야훼에게 경외심을 느꼈다.[62]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4-435쪽[63] '교회'ekklēsia는 1세대 예루살렘 공동체가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었다가,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로 확산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수가 '교회'라는 단어를 직접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세대 예루살렘 공동체가 '교회'ekklēsia와 '예수의 이스라엘'을 분리된 공동체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64] 바울로 친서 뿐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처럼 유다계의 교회의 맥락에서 나온 텍스트에서도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이방인 입교 여부 문제는 바울로 이전에 이미 베드로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결론이 난 논쟁이다. 바울로 시대의 논쟁은 어디까지나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도 유다인이 되어야 하는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2등급 신자인가?"라는 문제였으며, 이미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되는 논쟁이다.[65] 아우구스트 프란츤August Franzen, 《세계교회사》Kleine Kirchengeschichte, 최석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1, 21쪽[66] (책 속 주석) 그리스어 성서 번역에서 이스라엘이 자주 "엑클레시아", "주님의 엑클레시아" 등으로 일컬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명 23,1.2; 판관 20,2; 3열왕 8,14.22.55; 1역대 13,2 등. 히브리어 해당어는 대개 "카할"이다.[67] (책 속 주석) 스키토폴리스만이 요르단 서쪽에 있었는데, 역시 열 도시에 꼽혔다.[68] 직역: '영(靈)이 가난한'[69] (책 속 주석)참조: 호세 1~3장; 이사 62,5; 에제 26장 그리고 시편 45에 관한 타르굼의 독서는 이 시편을 하느님과 그의 신부인 시나고구에 적용시키고 있다.[70] 병행구: 마르 2,19-20; 루카 5,34-35[71] 병행구: 루카 14,15-24[72] 역사적 어록으로 추정되는 마태오 10:32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나'로 지칭하는 것과 비교할 때 차이가 두드러진다.[73] 마태오 16의 교의적 심문 (마르코 8:27, 9:1, 및 루가 9:27 간의 비교); 마르코 10:45 (루가 22:27과의 비교)[74] 마태오 8:20, 10:23 (이 구절은 교회가 유다인에 한정되어 있었던 극초기 예수 숭배의 반영이다), 11:19, 12:39-41 (마르코 8:12와의 비교; 요나의 표적과 인자 교의 간의 연결); 13:37, 13:41, 18:11, 19:10, 24:27, 24:37, 24:39, 25:31, 마르코 2:10, 2:28, 8:31, 8:38b, 9:9, 9:12b, 9:31, 10:33, 13:26, 13:29, 13:35 (마태오 24:44-루가 12:40이 원본이다), 14:21, 14:41, 14:62, 16:8, 루가 6:22 (마태오 5:11 간의 비교), 7:34, 9:26 (마태오 16:27 간의 비교), 9:58, 11:29-30 (막 8:12), 12:8, 12:10 (마르코 3:28과의 비교), 17:22 (17:23 이후 덧붙임), 17:23, 17:26, 17:30, 18:8b, 24:7[75] 루가 21:36과 22:48[76] 단어의 오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세트는 이 용어의 메시아적 사용 설명될 수 있음을 해명했다. Bousset, 《퀴리오스 크리스토스(상)》 (1913; Trans. 진규선)[77] Lietzmann, Der Menschensohn (1896). Eerdmans, Tijdschr (1894).[78]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같은 책 132쪽.[79]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2-133쪽.[80] 샤를르 페로, 《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12 개정 1판), 297쪽에 인용된 것을 발췌함.[81] (책 속 주석)참조: I. De La Potterie, "La confessione messianica di Pietro in Mc 8,27-[math({33}^{n})], in II Messianismo', Atti della XVIII settimana biblica dell'ABI, Paidia, Brescia 1966, pp. 59-77; R. Pesch, "Das Messiabekenntnis des Petrus(Mk 8,27-30). Neuverhandlung einer alten Frange", in Biblische Zeitschrif'' 17(1973), pp. 178-195; 18(1974), pp. 20-31[82] (책 속 주석)참조: K. Schubert, Jésus à la lumière du Judaisme du premier siècle, Cerf, Paris 1974, p. 157[83] 참고: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3쪽[84] 부활 자체는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이라고 표현되는 무언가 특별한 충격적 사건을 겪었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이를 '부활 체험'이라 표현한다. 이는 직접적인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어떤 무언가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85]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현실을 이겨내고 재해석할 만큼의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십자가형 당시 스승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였으며, 복음서는 부활을 제자들조차 기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여기에 대해 '제자단에 대한 묘사는 부활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각색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복음서의 텍스트는 제자단을 그래도 덜 한심하게 묘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베드로와 동료들은 십자가형 당시 예루살렘에 머무른 게 아니라 아예 갈릴래아까지 도주했으며, 갈릴래아로 도주한 핵심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머문 여제자들이 별개의 루트로 부활 체험을 한 것이다.(참고: Gerhard Lohfink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제18장.) 즉 역사적으로 제자단은 복음서 텍스트보다 더 소시민적이고 더 우스꽝스럽고 더 한심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이런 제자단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체험이 온 것이다.[86]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87] (논문내 주석)R. Penna, I ritratti originali di Gesù il Cristo. Inizi e sviluppi della cristologia neotestamentaria. I. Gli inizi (Studia sulla Bibblia e il suo ambiente), Milan, san Paolo, 1996. pp. 180-181 참조.[88] (논문 내 주석) D. Marmuerat, "Cequ'ils n'ont pas dit de Pâques", MB 25 (marsavril 2000), pp. 31-35(p.32).[89] (논문 내 주석)R. Pesch, "La genèse de la foi en la résurrection de Jésus. Une nouvelle tentative", dans M. Nenzerath, A. Schmid et J. Guillêt èds. La Pâque du Christ, Mystère de salut. Mélanges F. X. Durrwell (Lectio Divina 112), Paris, Cerf, 1982, pp. 51-74(p.54)에서 인용.[90] 위-클레멘스, Hom. 3.20, Rek. II, 22. Hom. 17.4. 에피파니우스, Haer. 30.3[91] Bousset, 《퀴리오스 크리스토스(상)》 pp. 67-75 (1913; Trans. 진규선)[92] 필립비서는 역사비평적으로 AD 55년쯤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로 여겨진다.[93] all hēmīn _heis theos ho patēr_ ex hou ta panta kai hēmeis eis auton,
kai _heis kyrios Iēsous Christos_ di hou ta panta kai hēmeis di autou.
[94] 그 외에, 글의 구성에서 보더라도 의도적으로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대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95] 상기한 성경 인용들은 의도적으로 헬레니즘적 텍스트들과 요한 복음서를 배제하고 발췌한 것이다.[96] Gerd Theißen, 《Die Religion der ersten Christen. Eine Theorie des Urchristentums》, Gütersloh 42008, 73쪽.[97] Theißen, 같은 책, 같은 쪽[98] 애당초 할례 논쟁은 "교회에 받아들여진 이방인은 이제 유다인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맥락에서 나온 논쟁이다. 곧, 이방인과 유다인이 함께 종말론적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전제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논쟁이다.[99] 정확히 말하면,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역사적 루가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책이 동일 저자의 저술인 건 주석학적으로 확실하며, 이 저자는 헬레니즘화된 유다인이거나 혹은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자를 관습적으로 '루가'라 부른다.[100]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142쪽[101] 천주교요리문답[102] 굳이 옛 번역을 인용한 이유는 직역된 것을 인용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가톨릭의 현행 번역에서는 '지옥' 대신 '저승'으로 희석하여 의역했으며, 한국 개신교에서는 아예 해당 부분을 삭제해버렸다.[103] 현재의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가 넓은 의미의 지옥을 각각 '저승'과 '음부'로 의역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의역은 교리교육적으로 오해를 막는 장점은 있지만, 원문의 어감을 지나치게 희석시켜버리고 신학적 엄밀함을 떨어트리는 단점이 있다.[104] tout estin Christon ek nekrōn anagagein.[105] hōsper gar ēn Iōnās en tēi koiliāi tou kētous treis hēmeras kai treis nyktas, houtōs estai ho huios tou anthrōpou en tēi kardiāi tēs gēs treis hēmeras kai treis nyktas.[106] 18hoti kai Christos hapax peri hamartiōn epathen,dikaios hyper adikōn,hina hymās prosagagēi tōi theōi thanatōtheis men sarki,zōiopoiētheis de pneumati·19en hōi kai tois en phylakēi pneumasin poreutheis ekēryxen20apeithēsasin pote, hote apexedecheto hē tou theou makrothymia en hēmerais Nōe kataskeuazomenēs kibōtou eis hēn oligoi, tout estin oktō psychai, diesōthēsan di hydatos 21ho kai hymās antitypon nȳn sōizei baptisma, ou sarkos apothesis rhypou alla syneidēseōs agathēs eperōtēma eis theon, di anastaseōs Iēsou Christou 22hos estin en dexiāi tou theou poreutheis eis ouranon hypotagentōn autōi angelōn kai exousiōn kai dynameōn.[107] 5hoi apodōsousin logon tōi hetoimōs echonti krīnai zōntas kai nekrous. 6eis touto gar kai nekrois euēngelisthē, hina krithōsin men kata anthrōpous sarki, zōsin de kata theon pneumati.[108] 가설①: 셔올의 의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
가설②: 셔올의 악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
가설③: 벌을 받는 천사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
[109]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 91.[110] (발췌자 주석) 이 논문의 문맥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십자가 죽는 것'과 '죽어있는 상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성토요일은 금요일 23시 59분 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예수를 의미한다.[111]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112]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Von Balthasar antwortet Boros”, Orientierung 34, 1974, 38.[113]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Die Schlüssel des Todes und der Hölle”, SKZ 14, 1969, 198.[114] 또는 원루가 복음서로서 마르키온[115] 조금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교리상으론 이 말이 진짜다. 외형상으로는 빵과 포도주이지만,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했다고 믿기 때문이다(성변화). 물론 로마인들이 오해하던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116] 참고로 기독교 신약성경의 마지막 권인 요한묵시록이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한다.[117] Frend, W. H. C. (2014). Martyrdom and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A study of conflict from the Maccabees to Donatus. Wipf and Stock Publishers.[118] 라이첸슈타인은 태고의 사람과 '세계-영혼'의 동일시와 마니교의 태고의 사람과 세계-영혼의 동일시의 유사성을 연구했다.[119] 제우스를 비롯한 다신교 신들이 예수와 천사들의 군대를 피하여 어둠 속으로 도망가고 있다.[120] 상류층까지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된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일이다.[A] A B 송혜경, 《사탄, 악마가 된 고발자》 207-210쪽 참고.[121] 데키우스 황제는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 포로로 잡힌다.[122]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당시 나름 탄탄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개념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 사회의 통합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독교는 당대부터 자기네들끼리의 이단 논쟁에 휩쓸려 끊임없이 싸워댔기에, 예상과 달리 오히려 분열의 씨앗을 들인 셈이 됐다. 이들의 대립과 분열은 이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겨주었다.[123] 물론 그렇다고 100% 순수하게 정치적 이유만으로 이용했다고 보기엔 어렵고, 아무리 낮춰잡아도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호감과 미미한 믿음 정도는 있었다고 여겨진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모친 따라 어릴 때부터 성당에 익숙하고 가끔 미사에도 나오지만, 딱히 열심하지도 않고 가끔씩은 점집도 가보는 널널한 믿음(?)을 가진 동네 아저씨 정도로 보면 얼추 맞을 것이다.[124] 가톨릭 신학에서는 세례가 죄를 씻어 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례 이후 죄를 지었다면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봐야한다.[125] 율리아누스는 361년에 기독교의 입김을 정치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 중 전사하고 만다.[126] 그 이전에 아르메니아가 서기 301년에, 조지아가 337년, 에티오피아(악숨 왕국)가 328년, 혹은 339년 국교로 선포했다.[127]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 history of Rome had become inextricably linked with the history of Christianity;'[128] 참고로 일 칸국이 1290년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긴 했다.[12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as a result, Syriac-speaking Christians were interested in Roman history regardless whether they were living under Roman rule.' In a thirteenth-century Syriac gospel lectionary,the pagan Mongol khan Hülägü could be portrayed as a new Constantine.'[130] 한 개인이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건 그리스도교 신학이지 고대 다신교의 신학이 아니다.[131] 특히 유피테르를 믿었다.[132] 번역은 다음의 책에서 인용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270쪽[133] 가령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학을 따랐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을 지지했다. 이는 황제 부부가 신앙 문제에서 갈라졌다기보단, 황제 부부가 함께 갈등을 중재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아리우스파 역시도 니케아 공의회 이후 제국에서 박해를 받은 게 아니라, 거의 대등한 조건에서 삼위일체론과 경쟁했다. 당장 교부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 때문에 황제에게 유배당한 게, 니케아 공의회(AD 325) 이후 10년 지나서의 일이다.(AD 335)[134]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동로마에서도 수세기 가량은 이신교 교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참고.[135] 이 인용문은 가톨릭의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추기경의 저서인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Je crois en l'Esprit Saint 제3권에서 찬성과 함께 언급되었다.(본문의 인용문도 콩가르 추기경의 이 책 한국어판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이 두 주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필리오퀘에 대한 논쟁은 동일한 신앙에 대한 두 표현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6세기엔 필리오퀘가 개별 교부의 견해를 넘어서 서방의 지역 시노드 차원에서 채택되었고, 동서방의 개별 교회들은 이를 친교 속에서 받아들였으며, 수백 년간 단죄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선 필리오퀘에 대한 교의는 물론이고, 논쟁 그 자체도 동서분열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정교회의 경우 인용된 다마스키노스 대주교를 포함해서, 바실리 볼로토프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лотов, 세르게이 불가코프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파벨 에브도키모프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Евдокимов 등의 성직자/신학자들이 필리오퀘 논쟁이 가톨릭과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136] 번역은 Yves Congar 지음, 윤주현 옮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 제3권 113-114쪽에서 발췌.[137] 가령 교황의 실질 수위권 논쟁만 하더라도, 이미 1000년의 교회사 동안 쌓인 기존 사례들과 관습들이 있었기에, 양측 모두 이걸 어떻게 법적으로 표현할지의 생각은 달랐어도 나름대로 대화의 틀은 있었다.[138] 여기에 대해 가톨릭은 정교가 가톨릭으로부터, 정교는 가톨릭이 정교로부터 분열되었다고 인식하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가톨릭 우위의 역사관이든 정교 우위의 역사관이든) 가톨릭과 정교가 분열 이전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139] 발췌자 주석: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140] 물론 동서 분열에서도 필리오케 논쟁이라는 신학적 논쟁은 있었지만 루터의 경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141] 다만 개혁(reform)이라는 말에서 '진보' 혹은 '미래'를 떠올리는 현대인의 관념과는 달리, 루터가 지향한 것은 '원래의 그리스도교'이지 어떤 신생 교리가 아니었고, 바라본 것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칼뱅도, 가톨릭도 전에는 없던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의도가 없었고, 지향한 것은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진보의 개신교 vs 보수의 가톨릭' 혹은 '원천을 찾는 개신교 vs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가톨릭'으로 파악해선 안된다는 말이다.[142] 그러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인의 사고를 주도했다.[143] 조금 의외일수도 있지만, 독실한 가톨릭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종교가 흔들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교의 교리는 자명한 진리이니 과학이 발전하면 하느님의 섭리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 학문의 발전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때마침 계몽주의 철학이 성행하면서 과학계 또한 유물론과 회의론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144] 현대에 들어 기독교 자체도 세속화가 많이 진행되었으며, 현재 세계에서 발전된 축에 속하는 나라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가 많은 국가라는 점이 현대에 들어 기독교가 세계화되는데 많은 영향을 준 듯 보인다.[145] 미국의 2015 Pew reserch, 《세계종교 미래 보고서》[146] 이것이 교회합일을 교황청 주도의 합일로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이런 우려는 비단 개신교도들 뿐만 아니라 한 때 왕 위에 군림했던 군주와 마찬가지였던 교황의 파워가 현대사회에서 이런 활동으로 다시 이루어지는것이 민주정치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일례로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에스파냐(스페인)이 영토문제로 다툰 것을 교황의 권위로 세상을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이쪽, 반대쪽은 저쪽 이런 식으로 분배 해 버린 것이나, 그것을 따라 복종 한 사례와 비슷한 일이 적지 않았다. 또 기존 정부의 통제가 강한 공산권에서도 이런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정교회의 경우 독립교회 구조로 구성되지만, 가톨릭은 모두가 알다시피, 교황의 교도권 하에 조직되기에...[147] 루터교회와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파들에 비하면 교리나 전례면에서 가톨릭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는 종교개혁 당시 교회의 전통들 가운데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모두 폐기한 개혁교회/장로교회나 침례교회와는 달리, 루터교회와 성공회는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 전통은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148] 이 둘이 '교회 조직'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 자신과 상대방밖에 없다.[149] 요셉 피퍼,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김진태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3, p50[150]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주석성경에 의하면, BC 2세기경이 되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티나 전체 인구보다 더 많았다.[151] 아다만티움을 변형시킨 별명이다. 우리말로 번역할때는 '강철인간', '강철의 철학자', '강철의 신학자' 등으로도 옮긴다.[152] 이 때문에 오리게네스를 최초의 신학자로 보는 견해도 강하다. 이를테면 가톨릭출판사에서 나온 서적인 <신학사>가 그러하다.[153] 물론 니체는 비판 대상에 종교 또한 포함되어 있다.[154] 물론 미국 독립선언서를 쓴 토마스 제퍼슨의 사례처럼, 근대의 평등사상은 상당 수 이신론적 가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근본에서는 결국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시기 이신론자 중 상당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155] '보편'이라는 게 진짜로 실재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뿐인지의 논쟁이다. 전자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수용할 경우 전체주의 등으로 변질될 수 있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또한 후자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수용할 경우, 인권이라는 게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권리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얻는 권리로 바뀌는 폐단이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개념 역시도 단지 사람들이 편의상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일 뿐이며, '보편적인 인간'이라는건 비실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연히 상식적으로 중도론이 나오게 되고, 신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중도론을 밀고 있다. 물론 그 중도라는게 도대체 어느 지점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156] 20세기 중반에 전체주의 때문에 대전쟁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결코 실제 생활과 동떨어진 논쟁이 아니다.[157] 토마스 아퀴나스표현을 빌리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유능한 집사를 고용한 셈이다[158] 물론 개신교와 천주교에 모두 신자로 등록된 이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이 수치는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159] 전형적인 통계의 오류인데, 막상 지금의 서양 사회에서는 기독교인이라면 불가피한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 일요일마다 교회에 오라는 불문율이 없으며, 북미나 서유럽 선진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경조사가 있을 때나 교회에 온다. 반대로 한국에서 교회(성당)를 다니는 사람들은 주1회 교회 출석은 기본이요, 심지어 시간만 된다면 새벽기도나 교회 특별행사에도 참여한다.[160] 한국의 이슬람교도들 역시 상당수가 중앙아시아에서 온 튀르크계 이슬람인데 하루에 5번씩 메카에다 절을 하며 전통 의복(히잡 등)과 할랄 식품만 고집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그쪽 역시 세속주의 성향이 강해서 개인과 사회의 신념보다는 의례용 관습에 더 가까워서, 한국인들이 제사 지내듯 설렁설렁 믿는다.[161] 세계 어디든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래될 때는 원래 있던 유물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서는 예수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중남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그려지는 식이다. 즉 해당 유물이 한국 최초의 '아기예수를 품은 마리아상'이라면 다른 불상과 닮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162]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폴로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르코폴로의 견문록에 한반도 북부 (정확한 워딩은 고려의 북부), 만주 일대의 군벌이자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소개되는 실존인물 나얀도 경교 신자였기 때문에 고려에 경교가 유입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163] '복음을 믿는 사람' 혹은 '복된 사람(有福分的人)'이라는 뜻의 몽골어에서 유래한다고 하나, 주변국의 언어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원래는 네스토리우스파 성직자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으나 의미가 확산되어 평신도를 지칭하기도 했다.[164] 게오르기우스의 몽골식 발음.[165] 《한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역사 류대영. 2019. 18-19p[166] 정교회는 여기에 해당된다.[167] 개신교도 교파가 여럿 있기 때문에 개신교라고 해서 종교활동이 다 제대로 되는 건 아니다. 군종 목사는 교파를 따지지 않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예배를 볼 때는 자신이 편한대로 진행하는데, 한국에서는 장로회가 제일 세가 커서 군목들도 장로회 소속이 많다. 때문에 장로회가 아닌 경우(감리회, 구세군, 루터회, 성공회 등) 다른 종파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어떤 병사는 대대로 성공회를 믿어오던 집안 출신인데, 성공회도 개신교라며 진중 성당이 아닌 진중 교회로 다녔다고 한다.[168] 성공회는 교회일치에 매우 적극적인 교파여서, 상황에 맞추어 다른 교파 예배에 적응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갖지 않는다. 물론 자기 교파의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것을 제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169] 馬雲霞, “早期傳敎士作品中的新詞創制,” 「山西大同大學學報」(社會科學版) 第29卷[170] 천문략을 발간한 선교사이다.[B] A B C D '기독(교)' 의 어원, 도입 및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정착 과정. 신학과 사회 36(1) 2022pp. 107 - 135. 김형곤.[171] 김석주,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인조실록(仁祖實錄)〉을 중심으로,”「교회사학」 제14호(2017), 189-191; 김형곤, “‘기독(교)’基督(敎)이라는 용어의 형성과정과 이 용어 사용에 대한 반성적 고찰,” 97[172] 가톨릭 교회론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이 예배를 보는 곳이 아니라 가톨릭 등 사도전승을 보존한 종파만을 말하는 것이다.[173] 193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포교관리자설치계에는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東京四谷宣敎會基督敎會)'로 등록했다. 관련 자료.[174] 사실 대한성공회도 1997년 즈음 기도서 개정 과정에서 여러 용어를 개정할 때 개신교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교단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공회' 라고 수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전국의회에서 부결되었다.[175]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라는 표현이 주로 개신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176] 마테오 리치 신부는 언어에 천재적 재능이 있어서 사서삼경을 서양식으로 번역하고, 동아시아 고전을 천주교 세계관에 따라 주석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한때 중국 문인들의 관심을 끌긴 했으나 너무 많은 허점이 있어서 받아들이진 않았다. 물론 현재 문헌고증학적으론 마테오 리치의 동아시아 고전해석은 별 근거는 없다.[177]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는 평안도 쪽에 신자가 많았으며, 평안도 방언으로는 '하늘'을 '하날'이라고 한다.[178] 단상에서 성경 말씀을 낭독할 때 주로 쓰인다.[179] 실제로 교회수별 신자 수를 나눠 보면 실은 70~80명씩 배분되는 정원이 생겨야 하지만, 메가처치들이 10만 20만씩을 먹고 있으며 이 메가처치들은 거의 보수다. 즉 교회수가 많아도 신자 머리수를 보면 보수교단에 소속된 신자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점은 계산상 어쩔 수 없다.[180] 예를 들어 예장합동, 침례회 같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에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목사들이나 신자들이 존재하며,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감리회성공회에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신자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181] 단 미국의 경우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우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경우가 꽤나 많다.[182] 가끔 기독교 믿는 나라들이 아닌 나라보다 더 잘산다거나 가톨릭 믿는 나라는 가난하다거나 미국이 기독교 믿어서 잘산다거나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신자들이 있다. 이는 신앙적인 면에서 생각해보더라도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주장들이다. 애초에 사실 관계도 맞지 않을뿐더러(기독교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은 부유한 지역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아니고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적 풍요의 보장이 절대 아니다. 성경에도 예수가 '세상의 평화'와 '내가 주는 평화'는 다르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183] 다만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직업에 충실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개신교의 특징들이 자본주의의 발달과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 자체는 막스 베버와 같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이 곧 일부 잘못된 종교인들에 의해 '기독교 믿으면 부자된다'는 기적의 논리로 치환되어 오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184] 참고할 만한 건, 예수 그리스도12사도 등 신약이 될수록 믿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복을 받기는커녕 가난하고 박해받는 생활을 하다 간 사람들이 많으며, 제명에 죽은 사람은 사도 요한 하나뿐, 나머지는 전부 순교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죽은 사람부터 맞아 죽은 사람까지 순교 방법도 제각각. 사도 요한도 인생을 곱게 보내지 못했고, 토마스 같은 경우는 인도까지 가서 순교했다. 신자들도 초대교회를 비롯해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비참했는데, 차별은 당연하고 툭하면 잡아다 원형경기장에 사자밥으로 풀어 놓았다. 네로 황제의 방화사건의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고.[185] 예를 들어 수능 백일 기도를 드릴 때 당연히 사제들은 '우리 아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같은 식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지만 학부모 입장에선 수능대박, 고득점을 비는 경우가 흔하다. 또 성체를 영할 때 사제가 쪼갠 대제병 성체(참고로 사제가 영하는 성체가 더 큰 것은 거양성체 시에 멀리서도 잘 보이라고 크기를 키운 것이지 다른 의미는 일절 없다.)를 영하면 일반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용도의 소제병 성체를 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운을 준다거나, 유아세례 때 특정한 세례명을 쓰면 아이가 잘 먹고 잘 산단다더라 같은 신학적 근거가 없는 소문이 (주로 나이 있는 주부 신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있는데 이런 것을 믿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주의해야 한다.[186] 어려운 사람들은 도움을 얻으면 뭔가 갚아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187] 이것은 세금 감면을 목적으로 한 기부행위와는 다른 차원의 비판이다. 세금 감면을 목적으로 한 기부행위는 타인의 행위 양태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는 그다지 없을 것이기 때문.[188] 그러나 웬만한 교회에서는 자비로 선교하며 교회의 예산을 사용할 시 동의를 구한다.[189] 물론 한국에서든 세계적으로든 가장 신자수가 많은 종파는 가톨릭이지만, 개신교 전체를 하나로 묶을 경우 한국·미국 같은 특정 지역에선 개신교의 세력이 더 강하다. 개신교 자체는 절대로 단일 종파가 아니지만,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빼고 자기들끼리 하나의 종교임을 강조하며 여러 분야에서 잘 뭉쳐있고 대외적으로 종교계의 큰 목소리를 낼 때는 '기독교', '한국교회'등의 명칭을 고수하며 종파들끼리 교류도 많다.[190]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되 종교 간의 화해와 화합을 위해 서로 호의와 협력을 표하는 수준으로 그치는 교단들이 대다수이다.[191] 단, 종교적으로 명확한 입장표명인지 친목적 인사치레인지는 분명하지 않다.[192] 이단 종파들이 항상 언급하는 순복음교회 같은 경우야 특이한 경우고, 사실 순복음교회는 이단적 설교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취소함으로 정통 반열에 오른 것이다. 거기다 아직도 순복음교회에 대한 비판은 많은 편이다. 신사도 운동과 연계되어 있다든지.[193]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사마리아인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박대하자 분노한 야고보사도 요한"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라고 말했다가 예수에게 꾸지람을 듣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다.[194] 인종차별호모포비아, 제노포비아로 인한 폐단을 숱하게 겪은 후에, 이에 대한 반성으로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여론이 지배적이게 된 서구 사회의 경우와 같다.[195] 사실 이런 문제때문에, 기독교가 주류 종교로 있는 나라에서 박해가 일어나더라도 타 종교가 주류로 있는 곳에 비하면 꽤 온건한 편이었다. 가령, 상술한 러시아도 비 러시아 정교회 신자에 대한 차별은 있을지언정, 이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박해를 종용하는 경우는 엄벌에 처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잊을만하면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의 종파에서 타 종교에 대한 린치를 종용하는 일이 벌어지나, 그때마다 미국인들의 여론은 같은 기독교 신자 사이에서도 냉담한 상황이다.[196] 그냥 무신론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대놓고 반종교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이다.[197] 터키 등 몇몇 세속적인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 술은 잘먹으면서 돼지고기는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슷하게 문화적으로 혐오적인 음식이라는 관념이 박혀서 그렇다.[198] 유서깊은 성지 순례길의 종착지로 유명하다.[199] 2010년 이후에는 체벌도 학교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