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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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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구 분리
박찬종[A]
김정길[A]

제13대
노무현

제14대
허삼수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cfa547 서울}}}]] [[종로구(선거구)|{{{#cfa547 종로구}}}]])
제15대
이명박
[1]

제15대
노무현

제16대
정인봉
[2]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파일:노무현_대통령.jpg

출생
1946년 9월 1일[1]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30
(現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
사망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금오로 20 양산부산대학교병원[2]
사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본산리)[3][4]
묘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5]
재임기간
제16대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6]
서명
파일:노무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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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주 노씨[1]
부모
아버지 노판석, 어머니 이순례
형제자매
장형 노영현, 차형 노건평
누나 노영옥
이복누나 노명자
이부누나 김선밀
배우자
권양숙
자녀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학력
진영대창국민학교[2] (35회 / 졸업)[3]
진영중학교 (16회 / 졸업)
부산상업고등학교 (53회 / 졸업)[4]
병역
대한민국 육군 제12보병사단 상병 만기전역[5]
종교
무종교[6]
신체
168cm, 68kg, O형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3, 15
약칭
, 노통[7], MH[8]



파일:노무현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6. 정치적 성향
7. 묘소
8.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9. 어록
10. 저서
11. 각종 타이틀
12. 가족 관계
13. 선거 이력
14. 소속 정당
15. 대중 매체에서
16. 관련 문서
16.1. 사건
16.2. 발언
16.3. 기타
1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59.2. 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 1963.2. 진영중학교 졸업[7]
  • 1966.2.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6. 삼해공업 사원[8]
  • 1966. 제7회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합격
  • 1971. 육군 제1군사령부 제3군단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연대 2대대 상병 만기 제대[9]
  • 1975.3. 제17회 사법시험 합격[10]
  • 1977.8. 제7기 사법연수원 수료
  • 1977.9. 대전지방법원 판사 (형사합의부 左배석 판사[11])
  • 1978. 노무현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1. 부산YMCA 이사
  • 1982.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변호사[12]
  • 1984.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 1987.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 1987. 공정선거감시운동 부산본부장
  • 1988.5.30. ~ 1992.5.29. 제13대 국회의원 (초선 / 부산 동구 / 통일민주당)
  • 1988.6. 제13대 국회 전반기 노동위원회 간사
  • 1988.11. 제13대 국회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13]
  • 1988. 통일민주당 노·사문제특별위원장
  • 1990.7. 민주당 기획조정실장
  • 1991.9. 민주당 대변인
  • 1992.3.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 (부산 동구 / 낙선)
  • 1992.10. 제14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청년특별위원장 겸 물결유세단장
  • 1993.3. 민주당 최고위원
  • 1993.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14]
  • 1993.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15]
  • 1995.6.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
  • 1995. 통합민주당 부총재
  • 1995. 통합민주당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6.4.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통합민주당 후보 (서울 종로구)
  • 1996.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위원
  • 1997.11.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 1997.11.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파랑새유세단장
  • 1998. 새정치국민회의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8.7.22. ~ 2000.5.29. 제15대 국회의원 (재선 / 서울 종로구 / 새정치국민회의)[16]
  • 1998.7. 제15대 국회 후반기 교육위원회 위원
  • 1998.7. 제15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1998. 새정치국민회의 부당노동행위대책특별위원장
  • 1998.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노동정책과정 수료[17]
  • 1999.2. 새정치국민회의 경남도당 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북구·강서구 을 지구당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동남지역발전특위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실업대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장
  • 1999.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18]
  • 2000. 새천년민주당 북구·강서구 을 지구당위원장
  • 2000.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부산 북구·강서구 을)
  • 2000.8.7. ~ 2001.3.25.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 (국민의 정부)
  • 2001.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 2001. 법무법인 부산 변호사[19]
  • 2001.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2002.4.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 2003.2.25. ~ 2008.2.24.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04.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6.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7. 원광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8. 맑은물사랑사람들 명예고문[20]
  • 2008. 영농법인 주식회사 봉하마을 이사


3. 일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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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학력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21]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퇴하고 1978년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 사무소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하였다. 한편,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 변호사 활동 경력을 눈여겨본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초선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이른바 청문회 스타[22]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여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기 어려운 부산에 출마하여 낙선하는 그에게 지지자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4년 선거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이후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23] 직무에 복귀했다.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퇴임 후 서울특별시가 아닌 고향 봉하마을로 귀향[24]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등 친인척 비리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25]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에 1000만 명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26]

원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본인이 유서에서 화장해 달라고 의사를 밝힘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됐다.


3.1. 참여정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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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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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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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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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적 성향[편집]


진보적 자유주의자다. 정치적으로도 이전 정권에 비해서 탈권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도 이전 시대에는 금기시 되었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더 수용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이어나갔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보수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섞여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철저하게 제3의 길을 따른 사회자유주의 노선을 따랐다.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정부대북포용정책을 이어나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대미관계에서 좀더 자주성을 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지향성은 사실상 노무현이 확립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민주당의 기존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대북송금 특검의 여파도 있겠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호남에서의 민심이 좋지도 못했고,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 또한 분당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수정당에 뿌리를 둔 기존 민주당계 정당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영향 때문인지, 사회문화적으로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역대 집권 자유주의 정권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다.[27][28]

이러한 정치성향은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스웨덴올로프 팔메 총리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참여정부 당시에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노 대통령은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얘기를 자주하며 부러워하곤 했다. 퇴근 후에 경호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결국 부인과 함께 경호원 없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나오다가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맞긴 했지만, 업무시간 외의 사생활을 보통사람처럼 자유롭게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 나라를 꿈꿨다.” (222)

노무현 스스로도 회고록에서

“스웨덴의 훌륭한 지도자가 1986년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저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계엄이 선포되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지도자가 없고, 시민과 같은 높이에서 걸어 다니는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웨덴이란 나라가 부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0)

라고 언급한 것은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국가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7. 묘소[편집]



파일:external/www.knowhow.or.kr/600_1274438786-3-20100521195501.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wulldQXcAAMUEX.jpg


파일:故노무현 대통령 묘역.jpg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봉하마을에 위치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보건복지가족부 국가보존묘지 심의 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화장하고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는 부탁이 있었다. 정작 만들어진 건 엄청 큰 묘소였지만... 유족들은 고민 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29]

봉화산에서 구해온 너럭바위 위에는 지관 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 묘판에는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가 적혀 있다. 박석(바닥석)에는 국민 참여로 이루어진 추모하는 문구가 새겨저 있다.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훼손 기도, 오물 투척 등 경악스러운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한동안은 묘소 근처는 못 가고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가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으로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고인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했는데 지지자와 유족들에 의해 가장 큰 무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은 윤보선[30], 노태우 대통령과 같이 묘지가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국립묘지 대우를 받는다.[31]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 개정안에 의거해서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은 전직 대통령의 묘는 대통령령에 따라서 청와대 및 정부가 예산을 사용하여 관리, 보존, 경비가 되도록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은 앞으로도 국립묘지 대우를 받으며 관리 될 것이 확실해졌다.

선거철이 되면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32] 보수정당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편이다.


8.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편집]



8.1. 친노[편집]


파일:/news/200909/10/yonhap/20090910171612395.jpg

왼쪽에서부터 정세균, 이해찬, 한명숙, 문재인[33], 이병완, 이광재가 보이며 그 뒤로 또 다른 참모진들이 앉아있다.

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노무현이 초선 의원이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계파이며, 2002년 노풍을 필두로 한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2004년 탄핵 사건 등으로 인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차지 등 2000년대 초~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6년부터 참여정부 심판론이 시작되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바닥을 쳤고, 결국 2007년 12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며 친노는 정치 계파에서 완전히 비주류로 전락하고 만다. 한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사망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 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 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34]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띤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참여정부 시기의 문희상,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김병준, 조경태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유시민 또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친문이나 안희정계[35]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드는 추세였다. 친노는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 이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문서로.


8.2. 김영삼[편집]


파일:노무현_김영삼.jpg

김영삼은 평소에 인재 욕심이 많아서 손학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이재오,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노무현 역시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처음 입문했다. 제5공화국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에게 정계 입문을 제안했고[36] 노무현이 이를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37]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김종필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38],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1990년의 민주당은 당시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김대중의 후임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 노무현이 영남후보론을 내걸고 16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고서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YS를 통해 PK지역의 지지를 얻고자 김영삼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주에 김영삼을 예방하고는 금융실명제통일민주당 시절 이야기 등에 대해 서로 덕담을 나누며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 때 노무현이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정을 언급했다가 YS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호남 지지층과 아직 IMF의 기억이 생생한[39]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진다. 결국 김영삼은 11월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게 되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의 관계는 복원되지 못한다.

이때는 노무현도 김영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40]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 두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회동은 지지율은 지지율대로 떨어지고 김영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 최악의 한수가 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도 YS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탓이라며 "사필귀정"이라는 말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였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회의장이 상도동계에 속한 박관용 의장이었다.

김영삼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를 하며 대립했다. 이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2006년 10월 11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청와대에서 이루어진 전직 대통령 회동에서의 일화다. 당시 회동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이 참석해 노무현과 오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북한의 핵실험은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준비해온 성명서를 꺼내 "김대중과 노무현은 사죄하라!" 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싸우자는 거냐. 그만 좀 해라" 라고 김영삼을 말렸을 정도였다고. YTN 돌발영상 인터뷰에도 이 날의 상황이 남아있다. 이 날의 회동 외에도 김영삼은 민주동지회 신년 인사회 같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여러 정치인들이 상도동 자택을 예방했을 때도 노무현에 대해 두고두고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애도성명을 내고 국민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했는지, 국민장 2개월 뒤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다만, 김기수의 해명 또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8.3. 김대중[편집]


파일:노무현_김대중.jpg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세력들은 서로 계파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이 시기에 김대중은 2000년에 노무현에게 해양수산부장관 직을 맡겨서 국무위원으로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 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중이었는데, 그 날 새벽 노무현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가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지 3개월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8.4. 이명박[편집]


파일:노무현_이명박.jpg

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이 이겼지만, 이후 이명박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여기에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41]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2002년 제16대 대선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42]

대표적인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자본주의하에는 열배남는 장사도 있다.”고 일축, 탄핵 역풍으로 결집되었던 지지율도 날아가게 된다. 그 후 임기 내내 온갖 구설수와 정책실패, 대연정 등의 헛발질만 거듭한 끝에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67%의 득표율을 기록, 26.14%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43]

노 전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MB가 당선인 신분으로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선 직전에는 이회창 측에서 이른바 "노명박" 체제라는 프레임으로 이명박의 BBK 관련 조사에서 노무현의 입김이 들어간 검찰이 이명박 측에 대해 봐주기 수사를 진행했다는 의혹을 대거 주장했을 정도.[44] 허나,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이 노무현의 비리를 조사할때 노무현과 술자리를 가졌던 사람들[45]과 악수한번 했던 편의점 점장 등 노무현과 한번이라도 엮인 민간인을 상대로 검찰조사를 하여 노무현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측근과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은 결국 2009년 5월 23일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피의자인 노무현의 자살로 기소가 불가능해진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범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혐의 처분과는 다르다.


9. 어록[편집]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재임 중 자신에게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어떠한 번영도 있을 수 없다”

- 검찰개혁 연설 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 1988.7.8. 제 142회 임시국회 대정부질의 中[46]


“그럼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 1989.12.31. 5공 청문회 명패를 집어 던지기 직전[47]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연설 中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이 노무현이 열겠습니다.”

- 2000.4.1. 16대 총선 거리유세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 2001.12.10. 제16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국민 경선 출마 연설문 #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주십시오.

한나라당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48]

- 2002.4.6.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인천지역 국민경선 연설문[49]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 2002.4.27.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에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세상. 어느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어느 꿈은 아직 땀을 더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회창, 권영길 후보님. 수고 하셨습니다.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광고 ‘노무현의 편지’


노무현: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유시민: 아, 오지요. 100% 오지요.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노무현: 아,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중략)

유시민: 근데 가시고 싶은 데까지 못 가실 수도 있죠. 그런데 언젠가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 거예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야 뭐 후보님이 거기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있나요?

노무현: 하긴 그래요.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 2002년 대선 후보 시절 노무현이 유시민과 나눈 대화


“대통령이 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하다가는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그 위기감이 생깁니다.”

- 2003.5.21. 5.18 행사추진위 간부 접견 中 영상[50]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 2004.3.11. TV 생중계 기자회견 중 #[51]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 2004.11.13. LA연설


나는 초선의원 시절부터 (스웨덴의) 팔메 수상을 이야기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려왔습니다.

2006.3.25.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보낸 이메일 [52]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 2006.4.3.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 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 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 2006.4.25.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53]


“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 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 2006.8.28.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中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주 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한 번씩 배짱이라도 내볼 수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2사단 빠지면 다 죽게 생긴 나라에서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사시나무 떠는듯이 떠는 나라에서

무슨 대통령이, 무슨 외교부장관이 미국의 공무원들하고 만나서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심리적인 이 의존관계를 해소해야 된다.

- 2006.12.21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 연설 中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 2007.6.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 2008.4.25. 방명록에서.[54]


지금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의 집[55]

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9.4.7. 수뢰혐의에 대한 사과문 中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2009.5.23. 사망 직전에 작성한 유서 中



9.1. 제16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시대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으로, 저는 대한민국의 새 정부를 운영할 영광스러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뜨거운 감사를 올리면서, 이 벅찬 소명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완수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아울러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전임 대통령 여러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축 사절과 내외 귀빈 여러분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 자리를 빌려,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빌면서, 유가족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게, 재난관리체계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획기적으로 개선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의 역사는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습니다. 열강의 틈에 놓인 한반도에서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반만년 동안 민족의 자존과 독자적 문화를 지켜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과 전쟁과 가난을 딛고, 반세기만에 세계 열 두번째의 경제 강국을 건설했습니다. 우리는 농경시대에서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화 시대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세계사적 전환점에 직면했습니다. 도약이냐 후퇴냐, 평화냐 긴장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세계의 안보 상황이 불안합니다. 이라크 정세가 긴박합니다. 특히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평화를 지키고 더욱 굳건히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

대외 경제 환경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끝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후발국들은 무섭게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성장 동력과 발전 전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도 국가의 명운을 결정지을 많은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들 과제는 국민 여러분의 지혜와 결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도전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저력으로 우리는 외환 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벗어났습니다. 지난해에는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의 전 과정을 통해 참여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의 미래는 한반도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동북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세계의 변방에 머물던 동북아가, 이제 세계 경제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올랐습니다. 21세기는 동북아 시대가 될 것이라는 세계 석학들의 예측이 착착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경제규모는 세계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장차 3분의 1에 도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중.일 3국에만 유럽연합의 네 배가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가 지난 날에는 우리에게 숱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급 두뇌와 창의력, 세계 일류의 정보화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천공항, 부산공항, 광양항과 고속철도 등 하늘과 바다와 땅의 물류기반도 착착 구비해 가고 있습니다. 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 나갈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을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동북아의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날 것 입니다. 동북아 시대는 경제에서 출발합니다. 동북아에 '번영의 공동체'를 이룩하고 이를 통해 세계의 번영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평화의 공동체'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의 유럽연합과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북아에도 구축되게하는 것이 저의 오랜 꿈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동북아 시대는 완성됩니다. 그런 날이 가까워지도록 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진정한 동북아 시대를 열자면 먼저 한반도에 평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야 합니다. 한반도가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로 남은 것은 20세기의 불행한 유산입니다. 그런 한반도가 21세기에는 세계를 향해 평화의 신로를 발신하는 평화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동북아의 평화로운 관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부산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겨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합니다. 남북한 사이에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일상적인 일처럼 빈번해졌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길이 모두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책의 추진과정에서는 더욱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가 이룩한 그 동안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정책의 추진방식은 개선해 나가고자 합니다.

저는 한반도 평화증진과 공동번영을 목표로 하는 '평화와 번영정책'을, 몇가지 원칙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첫째, 모든 현안은 대화를 통해 풀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상호신뢰를 우선하고 호혜주의를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셋째, 남북 당사자 원칙에 기초해서 원활한 국제협력을 추구하겠습니다. 넷째, 대내외적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참여를 확대하며 초당적 협력을 얻겠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평화번영정책'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 개발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해야 합니다.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한다면, 우리와 국제사회는 북한이 원하는 많은 것을 제공할 것입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할 것인지, 아니면 체제안전과 경제지원을 약속받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북한 핵 문제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서는 안됩니다. 북한핵 문제가 대화를 통해 해결되도록, 우리는 미국, 일본과의 공조를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중국.러시아.유럽연합 등과도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겠습니다. 올해는 한미동맹 50주년입니다. 한미동맹은 우리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소중하게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호혜와 평등의 관계로 더욱 성숙시켜 나갈 것입니다. 전통우방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도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동북아 시대를 열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과 비전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개혁과 통합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개혁은 성장의 동력이고, 통합은 도약의 디딤돌입니다. 새 정부는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로 가기 위해 저는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을 새 정부 국정운영의 원리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 분야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합니다.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제반요인들은 아직도 극복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시장과 제도를 세계기준에 맞게 공정하고 투명하게 개혁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자면 정치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인 정치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당리당략보다 국리와 민복을 우선하는 정치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가 자리잡았으면 합니다. 저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해 나가겠습니다. 과학기술을 부단히 혁신해서 '제2의 과학기술 입국'을 이루겠습니다. 지식정보화기반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신산업을 육성하고자 합니다. 문화를 함양하고 문화산업의 발전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이러한 국가목표에 부응할 수 있도록 교육도 혁신되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서 저마다의 소질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도,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반드시 부정부패를 없애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구조적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겠습니다. 특히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요망합니다. 지나친 중앙 집권과 수도권 집중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지방분권과 국가 균형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중앙과 지방은 조화와균형을 이루며 발전해야 합니다. 지방은 자신의 미래를 자율적으로 설계하고, 중앙은 이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비상한 결의로 이를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국민통합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지역구도를 완화하기 위해 새 정부는 지역간 탕평인사를 포함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 나갈 것입니다. 소득격차를 비롯한 계층간 격차를 좁히기 위해 교육과 세제 등의 개선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노사화합과 협력의 문화를 이루도록 노사 여러분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약자를 비롯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복지정책을 내실화하고자 합니다.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 나가겠습니다. 양성 평등사회를 지향해 나가겠습니다. 개방화 시대를 맞아 농어업과 농어민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고령사회의 도래에 대한 준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합니다.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국민이 보람을 느끼게 해드려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변방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의존의 역사를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국가로 웅비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살려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 많은 도전을 극복한 역량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기마저도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있습니다.이 지혜와 저력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친 도전을 극복합시다.

오늘 우리가 선조들을 기리는 것처럼, 먼 훗날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하게 합시다. 우리는 마음만 합치면 기적을 이루어 내는 국민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읍시다.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새 역사를 만드는 이 위대한 도정에 모두 함께 동참합시다.

항상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과 항상 국민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것을 국가와 민족, 여러분 앞에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10. 저서[편집]


  •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1월 30일 #
  •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2년 3월 5일, #
  •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2002년 4월 17일 #, #개정판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정가와 CEO를 위한 리더십의 8가지 원리>, 행복한책읽기, 2002년 10월 15일 #, #개정판
  • 공저,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 고시계사, 2007년 6월 1일, #
  • <진보의 미래>, 동녘, 2009년 11월 27일 #, #개정판
  •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년 9월 22일 #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돌베개, 2010년 4월 26일 #
  • 공저, 김경수 엮음,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부키, 2012년 1월 12일 #


11. 각종 타이틀[편집]


  • 최초의 현역 일반병(상병) 만기전역 출신 대통령[56]

  • 최초의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자 유일한 판사 출신 대통령[57]

  • 최초로 여당옮긴 대통령[58]

  • 유일하게 당선 경력보다 낙선 경력이 많은 대통령[59]

  • 최초의 경상도 출신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60]

  • 최초의 무종교인 대통령[61]

  • 헌정상 최초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된 대통령[62]이자 헌정사상 유일하게 탄핵이 기각되어 직무로 복귀한 대통령

  • 유일하게 퇴임 후 고향으로 귀향한 대통령[63]

  • 최초로 해방 이후에 태어난 대통령[64]

  • 유일하게 미군정 시기에 태어난 대통령[65][66]

  • 역대 네 번째 국무위원(해수부장관) 출신 대통령[67]

  •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이후 두 번째 최연소 대통령(당시 만 57세)이자 2023년 현재 마지막으로 50대에 취임한 대통령[68][69]

  • 김대중과 더불어 유이한 고졸 출신 대통령 [70][71]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내는 시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72][73]

  • 최초로 대통령의 시신이 화장된 대통령[74]

  • 가장 넓은 묘역에 안장된 대통령[75]

  • 최초로 국가보존묘지 1호로 등록된 대통령[76]

  •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통령[77]

  • 마지막으로 국민장이 실시된 대통령[78]

  • 빈소와 영결식장의 거리가 가장 긴 대통령[79]

  • 두 번째로 단명한 대통령[80]


12. 가족 관계[편집]


  • 고조부 노응호
  • 증조부 노상호 / 증조모 이사산
  • 조부 노학용 (? ~ 1945) / 조모 안퇴래 (? ~ ?)
  • 아버지 노판석 (1900 ~ 1976) / 어머니 이순례 (1914 ~ 1998)
    • 누나 노명자 (1928 ~ 2013)
    • 큰형 노영현 (1934 ~ 1973)
    • 누나 노영옥 (1938 ~ )
    • 작은형 노건평 (1942 ~ ) / 妻 민미영
    • 본인 노무현 (1946 ~ 2009) / 妻 권양숙 (1948 ~ )
      • 아들 노건호 (1973 ~ ) / 妻 배정민 (1976 ~ )
        • 손녀 노서은 (2004 ~ )
        • 손자 노하진 (2008 ~ )
        • 손녀 노영진
      • 딸 노정연 (1975 ~ ) / 夫 곽상언 (1971 ~ )
        • 슬하 1남 2녀


1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53,075 (51.00%)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30,397 (32.25%)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647,297 (37.5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17,330 (17.66%)
낙선 (3위)

1998
7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26,251 (54.44%)
당선 (1위)
재선[81]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7,136 (35.69%)
낙선 (2위)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2,014,277 (48.91%)
당선 (1위)
[82]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한[83] 모든 선거에서 기호 2번을 부여받았다.[84]


1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8 - 1990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0
탈당[85]

파일:민주당 1990년 글자.svg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86]


1995 - 1997
합당[87]

1997
탈당[88]

1997 - 2000
입당

2000 - 2003
합당[89]

2003 - 2004
탈당[90]

2004 - 2007
입당

2007 - 2009
탈당[91]
정계 은퇴
사망

15. 대중 매체에서[편집]


대통령 집권 당시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주인공 프란체스카에게 표창장을 주는 영상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물론 직접 출연한 것은 아니고 다른 영상에 배우 심혜진이 연기한 영상을 합성하여 사용하였다. #

파일:노무현변호인.jpg
파일:노무현변호인2.jpg
송강호가 연기한 노무현 (영화 변호인)
2013년 그의 부림사건 시절 활약상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송강호가 주연으로 활약한 영화 변호인이 개봉되었다. 송우석(노무현 모티브 캐릭터) 역은 송강호가 연기했으며, 1000만 관객을 기록하여 흥행하였다.[92] 임시완이 연기한 진우는 부림사건 당시 고문받은 피해자 고 아무개 씨와 송 아무개 씨의 일화를 합쳐서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몇몇 장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관련 내용)

위의 두 영화는 노무현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박근혜 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상영관 축소 등 각종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각 영화 문서 내용을 참고할 것.

격동 50년에서는 최석필이상훈[93]이 맡았다.[94]


2016년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6년 더 킹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과 죽음은 영화의 전환점으로 작용하였으며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2017년 노무현입니다의 사실상 주역이 되었다.

2017년 오디오 드라마 그 사람 노무현에선 성우 홍진욱이 노무현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2007년에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등장인물인 이순재와 박해미가 이런저런 이유로 청와대에 초청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상황이었는데, 하이킥 방영 당시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다. 1회성 출연에 배우 얼굴도 안 나오긴 했지만 해당 화 마지막 부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순재, 박해미가 찍은 사진까지 나왔으니 극 중 순재와 해미가 만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 맞다.[95]#

2019년 노무현과 바보들이 개봉하였고, 잇달아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의 귀향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 물의 기억시민 노무현이 개봉했다. 2019년 상반기에만 노무현 관련 영화가 세 편 개봉한 셈.

2022년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14회에 대통령 당선인으로 등장하는데, 작중 최창제에게 전화를 걸어 법무부장관직을 제안한다.[96]

2023년 교섭에 잠깐이나마 출연하여 주인공에게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허가한다.


16. 관련 문서[편집]


'참여정부'가 아닌, '노무현' 개인과 관련된 문서만 추가할 것.


16.1. 사건[편집]




16.2. 발언[편집]




16.3. 기타[편집]




17. 여담[편집]





18. 둘러보기[편집]














[1] 음력 1946년 8월 6일.[2] 병원 이송 중 경호차량에서 사망.[3] 생전 거주지, 퇴임 후 이곳에서 지냈으며 생가 건너편이다.[4] 취임 전 거주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9길 24, 302호 (명륜1가, 현대하이츠빌라).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이사 온 집이다. 1997년부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선 후 청와대로 가면서 "꼭 6년 전 이사 와 15대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짧은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해당 집은 전직 중소기업인에게 팔렸다고 한다.[5] 생가 동쪽에 위치해 있다.# 국립묘지가 아닌 이곳에 안장된 이유는 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6] 2004헌나1에 의한 직무정지 기간: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7] 국민학교는 1959년 졸업했지만 중학교 입시를 1년 재수하여 1960년에 진영중학교에 입학했다.[8] 학교에서 주선해 준 회사로, 어망제조회사였다. 해당 업체로 추정된다(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농협 입사시험에 떨어진 후 친구들과 함께 입사했지만 적은 월급 때문에 한 달 반만에 퇴사한 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고시공부를 시작했다.[9] 원래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가 전방 차출을 자원했다고 한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병장진급이 TO제 였기 때문에 파병, 특수임무수행자 등 위주로만 병장 진급을 내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복무 중이던 장병들은 상병 만기제대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10] 盧 대통령 동기 사시 17회 '전성기' (법률신문 : 2005-10-25)[11] 商高졸업후 司試도전, 9년만에 합격 (법률신문 : 2002-12-20)[12] 두 사람의 합동법률사무소 내에 무료로 상담해주는 노동법률상담소도 있었다. 결국, 이 법률사무소는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다.[13] 이른바 5공 청문회 활동이다.[14] 안희정이 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15] 해마루 홈페이지. 국회의원 임기 만료 후 할 일이 없자, 천정배에 의해 스카웃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같이 일한 사람이 천정배, 전해철, 임종인이었다. 1998년까지 근무.[16]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 전임자는 바로 이명박이다.[17] 비학위과정.[18] 비학위과정[19] 과거 자신이 일하던 법률사무소로 복귀한 셈이다.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 전까지 변호사로 이름을 올렸다가 취임 직전 퇴사했다.[20] 퇴임 후 첫 직함으로, 낙동강 개선을 위한 지역 환경 단체의 고문직을 맡았다.[21] 당시 전체 합격자 60명 중에 단 둘뿐인 고졸 합격자였으나 나머지 1명인 안대희대법관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으로서 고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대희 전 대법관은 고졸이 아니라 서울법대 출신 합격자로 기억하고 노무현만 고졸로 기억한다.[22]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노무현 전 대통령 전기다큐 3편] '청문회 스타의 탄생' (출처 :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23] 헌재결정례 (전원재판부 2004헌나1, 2004.5.14.)[24]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다큐3일] 대통령의 귀향, 봉하마을 3일간의 기록(1/2)[25] 처음에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 소재한 인근 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26] <盧전대통령 서거> 조문인파 역대 최대 전망 (연합뉴스 : 2009-05-26)[27] 실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전경련 등 일부 보수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28] 영어 위키백과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문서에서도 노무현을 , 나우만, FDR, 트뤼도, 모사데크, 올린, 포퍼, 누스바움 같은 대표적인 사회자유주의 정치인이나 권위 있는 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저명한 사상가(Notable thinkers)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보면 국제적으로도 사회자유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having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evolution of social liberalism)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듯하다(!!).[29]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는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출처, 사진 블로그 출처)[30] 박정희 같은 독재자와 같은 곳에 묻히기 싫다고 사후 서울현충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박정희는 1979년 사망, 윤보선은 1990년 사망. 박정희윤보선보다 스무 살 어리지만 윤보선보다 11년 빨리 죽었다.[31] 묘지 관리는 국가 외에도 봉하마을과 노무현재단도 공동으로 하는 듯 하다.[32] 특히 2022년 13주기 추도식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과 겹쳐서 민주당 전통 지지층 표심 결집을 위해 민주당 주요 인물들이 봉하마을에 총출동했다.[33] 정세균은 20대 국회 상반기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지냈고, 문재인은 이들보다는 조금 늦은 2011년 정계에 입문해 대통령의 자리까리 올랐다. 문재인은 이후 친문이라는 친노의 후신 계파를 이루었다. 한명숙은 2015년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2년, 피선거권 10년 박탈 등의 처벌을 받으며 현재는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34] 친노이자 청와대 참모진을 거치고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와 대한민국 대통령을 거쳐 현재 전직 대통령이 된 문재인을 따르는 소위 '친문'까지 포섭하는 경향도 보인다.[35] 그러나 안희정계는 현재 안희정 성폭력 사건으로 안희정이 구속되면서 해체되었다.[36] 노무현과 같이 인권변호사 일을 하던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안했지만, 당시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37] 연접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 의원은 김영삼이었으며 김영삼과의 합동유세로 3허였던 허삼수를 꺾고 당선되었다.[38] 훗날, 노무현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부산 지역의 선대 위원장을 맡으며, 부산에 초록 깃발을 꽂는 데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39] 김영삼 사후에야 IMF는 김영삼만의 탓으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주류가 되며 재평가가 상당수 이루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하면 외환위기를 불러온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40] 3당 합당 당시에는 군사정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지만,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41]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종로구에서는 선임-후임 의원이였던 두 사람이 10여년 이후에는 뒤바뀌어서 대통령 선임-후임이 되었다는게 아이러니.[42]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청계천 복원 등 진보 대통령과 야당 시장으로 훈훈했던 시기도 있었다. 국무회의에 서울시장이 참석할 때도, 생사를 가르며 첨예하게 대립한 한나라당 당내 분위기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43] 역사상 최대의 득표율 차이었다. 군사독재 때조차도 이 정도의 차이를 낸 적이 없다. 19대 대선에서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득표수 차이는 경신했지만 득표율 차이는 끝내 깨지 못했다.[44] ##[45] 고향 사람들까지 포함[46] 그러나 본인도 이라크 전쟁 파병에 가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발언을 지키지 못하였다.[47] 노무현을 본격적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게 한 발언이다.[48] 절묘하게도 이 발언 직후 연설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49] 노무현 지지자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사도신경, 반야심경 급으로 대접받는 명문.[50] 이게 그 유명한 "대통령 못해먹겠다"의 원본이다. 조중동에서 앞뒤 다 자르고 보도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51] 이 발언 직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52] 새천년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에서 강조한 친구같은 대통령이 평소 경호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며 소탈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올로프 팔메 총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53] 참고로 이 담화문은 노무현이 직접 일필휘지 한 것이라고.[54] 깨어있는 시민과 더불어 노무현의 가장 대표적인 어록 중 하나로 손꼽힌다.[55]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 여사를 말한다.[56] 다만, 만기 제대임에도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전역하였다. 이는 당시엔 병장을 달기 위해서는 분대장이 되어야 했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병사들이 분대장을 다는 바람에 TO가 없었기 때문.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이 최초의 병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57] 그의 동지였던 문재인이 두 번째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다. 현재는 윤석열이 추가되었다.[58]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은 그 이전에 여당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민자당은 노태우의 소속정당인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원래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이 만든 정당이다.[59] 당선 3회, 낙선 4회. 이는 그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 탓이 컸다. 참고로 당선, 낙선 횟수가 같은 대통령은 김대중이 유일하며 (당선 7회, 낙선 7회) 나머지 대통령들은 당선 횟수가 더 많거나 (윤보선, 김영삼, 문재인) 당선 경력밖에 없다.(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60]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은 충청도 출신 윤보선이고 그 다음 민주당계 출신 대통령은 전라도 출신 김대중이다. 그 외 경상도 출신 대통령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박근혜는 모두 보수정당 대통령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이 두번째 경상도 출신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이 되었다.[61] 노무현 이전 타 대통령들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종교를 믿지만(최규하는 예외적으로 유교였다. 박정희는 본인의 주장으로는 무종교였다지만, 공식 약력에는 불교로 되어 있고,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지만 실상은 확실한 종교관을 알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종교인들과의 관계가 두터울지언정 종교를 가진 적은 없었다. 이후 또다른 무종교 윤석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유일한 무종교인 대통령 기록은 깨지게 되었다.[62]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정족수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탄핵소추되었으나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었다. 18대 대통령 박근혜가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이 소추되고 2017년 3월 10일 헌재에서 인용되면서 헌정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 되었다.[63]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퇴임 후 낙향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고, 박정희는 임기 중에 사망하여 애초에 퇴임이랄 게 없었으니 논외. 문재인은 퇴임 후 본인의 고향인 거제시가 아니라 자신의 사저가 있는 양산시로 갔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현직 대통령 윤석열은 애시당초 서울 태생이라 퇴임 후 서울에 계속 눌러앉아도 '귀'향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고로 이 기록이 깨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64] 이승만과 윤보선은 각각 일제강점기 이전에 태어났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65] 해방 이후에 태어난 대통령은 노무현을 포함하여 여럿이 있지만 미군정 시기에 태어나 대통령이 된 사람은 현재까지 노무현이 유일하다. 미군정 시기 자체가 매우 짧은데다 이 시기 출신인물들은 현재 고령으로 정계에서 물러나는 중이기 때문에, 아마 전무후무한 미군정 출생 대통령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66] 2023년 현재 현역인 미군정 출생 정치인은 국민의힘의 홍문표 의원 더불어민주당의 김진표 현 국회의장, 변재일 의원 뿐이다. 손학규, 안상수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67] 최초의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은 윤보선(상공부장관), 두 번째는 최규하(외무부장관), 세 번째는 노태우(내무부장관)다. 이후 현재까지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은 나오지 않고 있다.[68] 대한민국 제6공화국으로 한정하면 노태우(당시 만 56세) 다음으로 최연소지만, 이전까지 넓혀보면 대한민국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만 46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이다. 최고령 나이로 취임한 대통령은 당시 만 74세에 취임한 김대중 이고 최고령 나이로 퇴임한 대통령은 당시 만 85세 였던 이승만 이다. 반면 최연소로 퇴임한 대통령은 당시 만 57세 였던 전두환 이다.[69] 본인 이후로 취임한 대통령은 60대를 넘겨서야 대통령이 되었다.[70] 노무현의 후임 대통령들은 다 대졸자이다. 이명박은 고려대학교,박근혜는 서강대학교,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윤석열은 서울대학교.[71] 반면 전임 대통령까지 넓혀보면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는 각각 미국, 영국, 일본에서 대학졸업했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김영삼은 서울대학교.[72] 퇴임 후 불과 1년 3개월(15개월) 만에 자살하였으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이 5년 3개월로 가장 짧다.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73]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내는 기간이 가장 긴 대통령은 전두환(33년 9개월)이다.[74] 유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은 수원 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되어 고향 봉하마을에 안장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충남 아산의 선산에,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13대 노태우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유지에 따라서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밟고 경기도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 이후에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정식으로 안장된다. 이로서 노씨 성을 가진 대통령 모두 서거 후 화장 의식이 거행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2대 전두환 대통령도 가족장으로 치뤄졌지만 후임 노태우와 같은 장소에서 화장되었다.3의 과오도 있지만 7의 공을 인정받아 국가장으로 치뤄져서 주민등록상 거주지의 화장비용만 지원받은 노태우 대통령과 대통령 예우가 완전히 박탈된 전두환 대통령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공통면제대상이 되어서 화장된 대통령인데,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의해 화장터에서 공통면제대상이 된 유일한 대통령이란 뜻도 된다. 대통령 예우가 완전히 박탈될 경우에는 공통면제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태우 13대 대통령의 경우에는 일부만 온전히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아서 국가장으로 치뤄져 주민등록상 거주지의 화장 비용만 지원받았다. 공교롭게도 서거한 전직 대통령 중 화장 의식을 치룬 세 대통령 모두 검찰에 소환이 된 대통령이다.[75] 3206 제곱미터이다.[76] 봉하마을에 있는 묘역이 최초로 국가보존묘지 1호로 등록되었으며, 이후 충남 아산에 있는 윤보선 4대 대통령은 국가보존묘지 2호(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로, 동화경모공원에 있는 노태우 13대 대통령이 국가보존묘지 3호로 지정되었다.[77] 현재 기준으로 사망한 전직 대통령들은 타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모두 자연사로 운명을 달리 하였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측근의 비리 혐의 수사 과정에서 강압 수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되었다.[78] 사망 당시엔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러온 선례를 따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진행되었으나, 3달 뒤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가 논쟁 끝에 국장으로 치러지며 국장과 국민장의 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2011년 법률 개정으로 기존의 국장과 국민장을 국가장으로 통합하게 되며 국민장으로 장례 절차가 거행된 마지막 인물로 남게 되었다.[79] 김해 봉하마을에 빈소가 차려졌으나 영결식을 서울 경복궁에서 치뤘고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80] 가장 단명한 대통령은 박정희이다. 다만 그 시대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노무현이 가장 단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81] 전임자 이명박 사퇴 (불법 선거 운동)[82] 2003.9.29.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탈당.
2004.5.20.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입당.
2007.2.28.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탈당.
[83] 이때는 소속 정당인 민주당이 원내 제3당이었기에 기호 3번을 부여받았다.[84] 원내 제1당 소속으로 선거를 치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치뤄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본인의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제2공화국 내각제 시절 이후로는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으로써 원내 제1당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85]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86]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87]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8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통합민주당 합당 반대)
[89]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90]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한 탈당.[91]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2월 28일자로 탈당.[92]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 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93] 오랜 민주당 지지자이다.[94] 최석필은 김종성이 해설할 때, 이상훈은 원호섭이 해설을 맡은 뒤 연기했다.[95] 물론 사진은 합성이다. 이 사진은 순재네 병원에 걸려 마지막화까지 뒷배경으로 쭉 등장한다.[96] 실제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강금실 이다.[97]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기 짐(이게 지금)'이 유력하다.[98] 노무현이 정계 진출하기 전의 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