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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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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의 주요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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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스펜서
Diana, Princess of Wales


파일:princess-diana.jpg

이름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출생
1961년 7월 1일
잉글랜드 노퍽주 샌드링엄 파크하우스
사망
1997년 8월 31일 (향년 36세)
프랑스 파리 13구 피티에 살페트리에르 대학병원
신체
178cm
학력
리들스워스 홀 (졸업)
웨스트 히스 여자고등학교 (유급)[1]
배우자
찰스 3세 (1981년 결혼 / 1996년 이혼)
자녀
장남 윌리엄, 차남 해리
아버지
제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어머니
프랜시스 로슈[2]
형제
언니 사라[3], 제인[4], 오빠 존[5], 남동생 찰스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서명
파일:다이애나 스펜서 서명.svg

1. 개요
2. 작위
3. 친정
4. 생애
4.1. 외로운 어린시절
4.2. 백작영애 시절
4.3.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과 약혼
4.4. 왕세자비가 되다
4.5. 불행한 결혼생활
4.5.1. 두 아들을 향한 사랑
4.6. 활발한 사회 활동
4.7. 비극적인 죽음
5. 전 세계의 추모 물결
6. 가족관계
6.1. 조상
6.2. 자녀
7. 대중매체
8. 여담
9. 관련 영상 & 링크



1. 개요[편집]


England's Rose[6]
영국의 장미
영국의 전 왕세자비[7]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윌리엄 왕세자와 5위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다이애나 비()라고 부른다. 1910년 테크의 메리 이후 약 71년 만에 나타난 웨일스 공비이다.

찰스 왕세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1992년부터 별거에 돌입한 후 1996년에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자신이 가진 대중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봉사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중의 왕세자비[8]라고 불리며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전세계적인 애도를 받았다.[9]

2. 작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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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후 쓰던 문장
이혼 이후의 문장[10]
모노그램
  • 아너러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The Honourable Diana Frances Spencer (1961년 7월 1일 ~ 1975년 6월 9일)
  • 레이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Lady Diana Frances Spencer (1975년 6월 9일 ~ 1981년 7월 29일)[11]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체스터 백작부인 Countess of Chester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콘월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ornwall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Rothesay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캐릭 백작부인 Countess of Carrick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렌프루 남작부인 Baroness of Renfrew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아일스의 레이디 Lady of the Is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 공비 Princess of Scotland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1996년 8월 28일 ~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을 때 정해진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았다.

'웨일스 공비, 체스터 백작 부인, 콘월 공작 부인, 로스시 공작 부인, 캐릭 백작 부인, 렌프루 남작 부인, 아일스의 레이디, 스코틀랜드 왕자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and Countess of Chester, Duchess of Cornwall, Duchess of Rothesay, Countess of Carrick, Baroness of Renfrew, Lady of the Isles, Princess of Scotland)'

1996년 이혼 후로는 전하[HRH] 경칭이 빠지고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이혼 이후로는 왕족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왕실 특성상 현 왕자들을 낳은 왕세자의 정부인의 의미에서 왕세자비 칭호만큼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다이애나 사후 전하 칭호를 복원시키자는 의견이 많았고, 실제로 이에 대해 왕실과 다이애나의 친정 가족들 간의 논의가 있었다. 이혼 당시 다이애나는 전하 칭호를 자발적으로 포기했기에, 가족들은 전하 칭호 복원이 생전 다이애나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라 생각해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3. 친정[편집]



파일:스펜서 가문 문장.svg

스펜서 가문의 문장[12]
흔히 알려진 인식과는 다르게 최상류층 출신이다. 다이애나의 친정인 '스펜서 백작 가문'은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 찰스 2세사생아들 중 하나였던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의 후손으로, 15세기인 1469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555년을 이어져 왔다. 다이애나의 8대조 할아버지 존 스펜서를 통해 윈스턴 처칠과도 혈연이 닿아 있으며, 존 스펜서의 방계 후손이 바로 처칠 집안 사람인 말버러 공작이다.[13] 또한 영화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에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인공으로 분한 실존인물 조지아나 스펜서도 이 가문 출신으로,[14] 정리하자면 로판이나 순정만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귀족 영애가 바로 다이애나였다. 또한 스펜서 가문의 선대들은 무역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백작 작위로 귀속된 영지와 신탁금이 귀족 사회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어마무시했으며, 아버지 8대 스펜서 백작의 개인자산도 엄청났기 때문에 다이애나와 형제들 모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스펜서 가문의 영지 울소프
스펜서 가문의 영지이자 다이애나의 친정집인 울소프는 1503년 인수되어 521년의 역사를 지닌 저택으로, 이 저택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 31개의 침실을 포함한 90여개의 방 보유

• 10만 제곱피트의 규모. 심지어 주변 영토 제외

박물관 수준의 진귀한 국보급 예술 작품과 골동품들의 집합체

• 1892년부터 수집된 1만여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 보유

넬슨 만델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윈스턴 처칠 등 수많은 유명인사와 정재계 및 상류층들이 머무른 장소


외가는 '퍼모이 남작 가문'으로, 어머니 프랜시스 로슈 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의 차녀였다. 프랜시스의 할아버지가 미국백만장자 상속녀와 결혼해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치로 가문 영지를 잃었기 때문에 아들 내외인 퍼모이 남작 부부는 엘리자베스 2세의 배려로 왕실 별장 샌드링엄 하우스에 딸린 저택에서 지냈고, 이곳이 프랜시스의 친정집이 되었다. 현재 퍼모이 남작가의 당주는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모습을 비췄던 외사촌인 6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인데, 슬하에 딸만 둘이라 가문을 물려 줄 아들이 없기 때문에 현재 남동생 에드먼드가 그의 상속인이다.

다이애나 부모의 결혼식
다이애나의 부모인 존과 프랜시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필립공, 엘리자베스 왕대비, 마거릿 공주 등의 고위 왕족들이 귀빈으로 참석했다.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리셉션 파티가 열린 이 결혼식은 '1954년 런던 올해의 웨딩'에 선정되었다. 당시의 스펜서 백작은 아버지에게 작위를 물려받기 전이였기 때문에, 두 부부는 신부의 친정이던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모두 왕실과 돈독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다이애나의 외할머니인 퍼모이 남작부인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의 절친이고, 아버지 8대 스펜서 백작은 엘리자베스 2세의 시종무관이었는데, 여왕의 개인 비디오[15]에 왕족들과 함께 뒷마당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펜서 백작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런 인연으로 다이애나의 작은언니 제인 스펜서는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 때 그의 대녀 자격으로 앤 공주와 함께 화동을 섰고,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자였다. 다이애나는 어린시절부터 여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켄싱턴 궁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다만 현재는 다이애나의 남동생이자 윌리엄과 해리의 외삼촌인 찰스 스펜서가 거듭해서 사업 실패를 한 탓에, 재산이 거의 바닥이라고 한다. 때문에 윌리엄 왕세자해리 왕자의 외사촌인 키티 스펜서아버지보다도 5살 많은 남아공 출신 섬유사업가와 결혼해 이미 성인인 의붓아들 3명을 두게 되었다. 더군다나 장남 위주로 상속이 이루어지는 영국 귀족 가문 특성상, 딸인 다이애나에게 돌아갈 몫은 많지 않다.

4. 생애[편집]



4.1. 외로운 어린시절[편집]



성공회 유아세례식에서 부모와 함께
1961년 7월 1일,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국 노퍽엘리자베스 2세별장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올소프 자작 존 스펜서[16]와 올소프 자작 부인 프랜시스[17]의 3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먼 조상인 존 처칠의 외손녀이자 베드퍼드 공작부인이었던 다이애나로부터 따왔다.[18] 다이애나가 태어난 샌드링엄하우스는 과거 엘리자베스 2세가 외조부 퍼모이 남작에게 내어준 곳으로, 아버지가 백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외갓집이기도 한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리모델링 중인 샌드링엄에서 그녀가 키를 재던 문을 발견한 찰스 3세가 그 문을 떼와서 선물해 줬다고 한다.[19]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고 한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매일같이 큰 소리로 다투었고 어머니 프랜시스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모가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등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외도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볼 때도 있었다. 결국 다이애나가 6살이 되던 1967년에 다른 남자와 집을 나가버린 프랜시스로 인해 두 사람의 별거가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런던에서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인해 다시 노퍽으로 돌아갔다.

부모가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다이애나가 8살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 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재혼했으며, 이에 다이애나를 포함한 4남매는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다. 다이애나는 매주 주말마다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를 보러갔는데, 어머니는 자식들이 떠나기 전날 밤마다 "너희가 내일 가는 게 슬프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는 당시 9살이었던 다이애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남동생인 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프랜시스의 이 말은 공수표에 가까웠고, 스펜서 4남매는 사실상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태였다. 언니들과 남동생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체념했지만, 다이애나만이 문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고 한다.

아버지 존 스펜서는 그 시대 상류층 남성들이 그러하듯 체면과 명성을 비롯해 다른 일을 언제나 굉장히 중요시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20] 그의 저택에서는 늘 파티가 열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이애나의 빈 마음 속이 온전히 채워지지는 못했다. 부모의 이혼뿐만 아니라 두 언니들이 켄트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샌드링엄에는 다이애나와 남동생 찰스 단 둘뿐이었던 데다, "백작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도망갔다"라며 수근거리는 상류사회의 시선도 견뎌야 하는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예민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연히 새어머니인 레인과도 친해지지 못했고, 그녀를 산성비라고 불렀을 정도로 사이가 극악이었다고 한다. 레인의 사치스러운 씀씀이에 분노한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훗날 아버지가 사망하고 백작이 되자마자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다고 증명할 수 없으면 짐도 챙겨가지 못하게 했으며,[21] 그녀의 고용인들도 예고 없이 모조리 해고했을 정도였다. 4백만 파운드와 메이페어의 주택[22]을 내주기는 했지만, 스펜서 남매가 계모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명문 사립학교노퍽의 리들스워스 홀과 켄트의 웨스트 히스 여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두 학교는 광대한 자연에 둘러싸인 멋진 환경 속의 장엄한 저택이었다. 리들스워스 홀은 원래 귀족들의 저택으로 사용되었었고[23], 웨스트 히스 여학교는 다이애나의 재학 시절만 해도 상류층 여학생 100여 명만을 모아 교육하던 소수정예의 귀족학교였다.[24]

학창 시절의 다이애나는 스포츠 만능으로 수영테니스, 댄스를 잘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좋아했으며, 그 중에서도 발레피아노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입학하고 얼마 뒤 학교 안에 커다란 홀이 생겼는데, 이 되면 그곳에서 몰래 음악을 틀고 몇 시간씩 발레 연습을 하곤 했다. 다이애나는 학교를 무척 좋아했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짓궂은 학생이었다.[25]

14살이던 1975년, 친할아버지 7대 스펜서 백작 앨버트 스펜서(Albert Spencer)[26]이 사망하자 당시 올소프 자작이었던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했고, 역대 스펜서 백작들의 가족저인 울소프 저택(Althrop)에 입성했다. 이때 호칭도 자작의 딸인 아너러블(The Honorable)에서 백작의 딸인 레이디로 격상되어 레이디 다이애나(Lady Diana)라고 불리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유명 작가 바버라 커틀랜드[27]의 소설을 좋아했다. 참고로 이 사람의 딸이 바로 앞서 말한 새어머니 레인 맥코크데일. 의붓손녀가 자기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초기작 몇 권을 보내줬다고.[28]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푹 빠져 학업 성적이 나빠진 나머지 번번이 낙제까지 했을 정도로 항상 동화 속 왕자님과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꿨다고. 다이애나의 언니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대단한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포부에 가득 차있는 그녀를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다이애나의 인생에 걸쳐 트라우마가 되었다. 부모는 이혼 후에도 본인들의 일에만 몰두하느라 조용하고 섬세한 셋째딸 다이애나에게 깊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언론의 과도한 집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4.2. 백작영애 시절[편집]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핌리코의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치원 교사의 말에 따르면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고, 풀이 죽은 아이가 있으면 옆에 가서 위로해주곤 했다고 한다.

먼저 시집갔던 두 언니가 아이가 있는 또래 귀부인들을 소개시켜줘서 그들의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 한국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이것이 와전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보모가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마치 한 방에 인생 역전을 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다이애나는 엄연히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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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iana purple2.jpg
공부에는 소질이 없어서 중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중등학교 중퇴였다.[29] 언니들과 남동생은 모두 명문대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우등생인데 본인만 성적이 좋지 않아서 열등감을 느꼈으며, 이 역시 그녀의 소극적인 성격에 한 몫을 했다. 다만 프랑스어는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30]

이렇게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제대로 된 정규 직업을 갖지는 못했고, 전술한 것처럼 시간제 보모와 개인 파티의 웨이트리스, 지인 집의 청소부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라 대학을 가지 않고 일찍 신부수업을 받는 그 시절 양갓집 규수의 처지였다고 보면 된다.[31] 때문에 본인도 수 년 안에 결혼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념할 점은 다이애나는 생계를 위해 일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본래 영국 상류층[32]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펜서 가문이 워낙 부유한 덕분에,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와 살 때도 그 아파트가 다이애나 소유라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다이애나의 외할아버지인 퍼모이 남작이 손주들을 위해 그 땅값 비싼 런던에서 1명당 1채씩 마련해 준 것이다. 이렇듯 다이애나가 짧은 처녀 시절 동안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4.3.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과 약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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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소꿉친구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그가 영국의 다음 왕이 될 후계자라 조금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었다고 하며, 후에 본인의 남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33]

원래 찰스의 신붓감 후보로 고려되었던 여성은 다이애나의 큰언니인 사라였으나, 사라가 기자들에게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에 대해 뒷담화를 한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왕족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붓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6살 때의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갔다. 그러다 3년 뒤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가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에게 열광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절정에 달할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찰스는 다이애나와 12번 만난 후 청혼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장차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가 과연 어떤 여성을 비(妃)로 맞이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스펜서 가문은 다이애나가 왕세자의 약혼자가 되자 광영으로 여기며 크게 기뻐했다. 국민들 또한 스펜서 가의 3녀인 19살의 어린 다이애나가 찰스의 신붓감이자 미래의 왕비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흥분감 속에서 찰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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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4일,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4.4. 왕세자비가 되다[편집]


5개월 후인 7월 29일 전세계 수억 명의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왕세자와 함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34] 이때 다이애나의 나이는 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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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엘리자베스 에마누엘 부부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 드레스에 장식된 수천 개의 진주와 스팽글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7m의 긴 트레인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결혼식장인 성당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 너무 긴 트레인 때문에 들러리들이 고생했다고 한다.[35]

더군다나 드레스의 재질은 '실크 태피터'라는 상당히 잘 구겨지는 재질이였는데, 결혼식장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동행한 다이애나와 친정아버지 스펜서 백작은 드레스의 풍성함과 트레인 길이로 인한 부피 압박으로 꾸깃꾸깃한 상태가 될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결혼식 영상에서도 디자이너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드레스의 주름을 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찰스의 내연녀였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움직일 때마다 구겨짐이 심해져서 폐지를 입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이 드레스를 골라 주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으나, 낭설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가 될 예정인 엄연한 정식 약혼녀였고, 카밀라는(귀족의 핏줄이 흐르긴 하지만) 작위 하나 없는 평민 여성이자 왕실 입장에선 완전한 외부인이기에 두 사람의 결혼식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전혀 없었다. "카밀라가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 준비 초반에 개입하려 했으나, 한 성깔 하던 다이애나의 큰언니 세라 스펜서가 얼씬도 못 하도록 쫓아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파일:diana with girls.jpg

이후 옅은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가 화이트를 앞서기 시작했고, 어깨 부분의 풍성한 퍼프 소매, 긴 트레인은 1980년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티아라를 대여하지 않고, 대대로 친정 스펜서 가문에 물려 내려오는 티아라를 썼다. 본래 엘리자베스 2세는 큰며느리 다이애나가 결혼식 때 친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주얼리 컬렉션 중 하나인 러버즈 노트 티아라를 쓰길 바랐지만, 티아라 위에 있던 수십 개의 진주 장식 때문에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36]

20세기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영국의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세기의 결혼식신혼여행을 거치며, 다이애나는 "결혼식이 끝났으니, 더 이상 언론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했던 그녀의 착각이었다. 파파라치들은 끊임없이,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파파라치의 지나친 사생활 침해가 계속되자, 이를 보다못한 여왕이 직접 나서서 언론사 편집인들을 불러 회견을 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언론 담당 비서였던 마이클 시어가 "지나친 사생활 침해가 다이애나를 실의에 빠트리는 바람에 그녀가 집 밖을 나가는 일조차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자,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편집장은 오히려 "왕세자비는 왜 시종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가게로 캔디를 사러 가기 위해 외출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여왕이 인내심을 깨고 "그렇게 오만 방자한 말은 내 평생 처음 듣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왕의 이례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를 향한 언론의 관심은 더 커져 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을 찍힌 여성 인물(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 된다. 실제로 이것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파파라치들의 돈줄이었다.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많은 사진이 찍혔으니 말 다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전무하다.

다이애나에게 쏟아지는 이런 대중의 관심은 영국 왕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 중에는 남편 찰스 왕세자도 있었다. 찰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는 생애 단 한 번도 사람들의 관심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쳐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어린 아내가 찰스보다 훨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부부 동반으로 타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수행해 온 사람'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37] 사람들은 '찰스가 어린 아내에게 대중의 관심을 빼앗기고도,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답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5. 불행한 결혼생활[편집]




넷플릭스 더 크라운에서 묘사된 다이애나와 찰스 부부 간의 갈등

옛날에, 한 아름다운 소녀멋진 왕자님에게 홀딱 반했어요. 하지만 그 왕자님은 딴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여자는 딴 남자를 사랑했죠. 결국 모두 불행하게 살았답니다.

둘은 이미 나이 차가 큰데, 찰스는 또래보다 성숙하고 다이애나는 미성숙하니, 거의 세대차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죠. 표면상 둘은 비슷한 계층 출신이지만, 성격은 다른 행성급으로 딴판이에요. 관심사도 다르고, 교우 범위도 달라서, 찰스도 다이애나도 서로를 이해 못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이제까지 잘해 온 거죠.

하지만... 제 경험에서 말씀드리면, 무너져 가는 결혼에는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언제나 오고, 흐름에 맡기는 게 더 편해져요. 해리가 태어나 의무를 다한 순간 결혼은 사실상 무너졌고, 둘은 다른 이들의 품에 기대기 시작했어요.

더 크라운 시즌 4 9회에서 앤 공주의 대사.[38]

남편인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연인이었다. 카밀라가 이미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륜은 계속되었다. 다이애나는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전에도 찰스가 카밀라와 불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약혼이 발표된 후였던 데다 친정 식구들도 결혼을 강요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본인 역시 잠깐의 찰스의 이런 생활을 젊은 시절의 바람 정도로만 생각하며, 마지막엔 본부인이자 왕손들의 생모가 될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혼 당시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게 맞냐"고 질문하자 찰스 왕세자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Interviewer: And I suppose in love? (두 분 사랑하시는 거 맞나요?)

Diana: Course. (당연하죠.)

Charles: Whatever in love means...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약혼 인터뷰 中

찰스는 '왕위'와 '사랑'이라는 2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어리고 순결한데다 세상물정 모르고 귀족 영애인 성공회 신자 다이애나를 순종적인 아내로서 선택한 것.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다이애나는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거식증폭식증을 앓았다.

다이애나는 첫 아이 윌리엄 왕자임신한 후 심한 입덧으로 고생했는데, 이 때문에 여러 공무에 참석하는 것이 무척 고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왕실 여성들 중에선 입덧을 겪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 이상하네. 우리는 그런 적 없었는데’ 라는 반응만 보이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39] 이때까지 영국 왕실의 딸들과 며느리들 중에서는 다이애나만큼의 심한 입덧을 했던 여성이 없었기에, 다이애나는 거의 아무런 배려를 받지 못했다.[40]

게다가 남편 찰스는 폴로사냥 등의 사교활동을 하러 집을 자주 비웠다. 그 역시 일종의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해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했지만, 경험이 없으니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게 흐지부지 되고 만다. 더군다나 다이애나의 어머니 역시 다른 남자와 외국에서 새살림을 차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임신한 그녀기 심적으로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자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매달려 "너무 괴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내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해 "그만 좀 하라"고 핀잔을 준 후 집을 나섰고, 이에 다이애나는 자의로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 본인이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로. 다행히 배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정도로 그쳤고 뱃속의 아기는 무사했으며, 대경실색한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한달음에 달려와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찰스는 이 사실을 모른척 했다고.


1982년, 출산 후 퇴원하는 다이애나 비
시간이 지나 만삭이 된 다이애나는 언론의 압박과 전 국민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모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져 1982년, 유도분만으로 윌리엄 왕자를 출산한다. 심한 난산이었으나 후계자인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15년 간의 왕실 생활을 하며 괴로워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왕족들 때문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고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이 제외시켰다. 왕족들은 찰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해 비밀리에 악의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도 마치 다이애나가 문제인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데에 바빴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다. 찰스 왕세자의 귀족 친구들은 타블로이드에 다이애나를 향한 악의적인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고,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했으며, 휴지통을 뒤져 그녀가 사용한 서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궁정인들의 행보와 숨 막힐 듯하고 폐소공포적인 왕실 생활에,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함은 고조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왕족들과 가식적이며 허울뿐인 군주제에 불만을 품었다. 다이애나는 그녀가 국민들을 만날 때 혹은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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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켄싱턴 궁전에서 취재진들에게 [\br] 큰아들 윌리엄 왕자를 보여주고 있는 다이애나
1983년, 윌리엄 왕자와 호주 순방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바시어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참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이애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었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녀는 "왕실은 다이애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그녀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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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남편 찰스와 두 아들 윌리엄, 해리와 함께한 가족 사진.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결혼하기 전부터 다이애나의 시이모인 마거릿 공주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이 결혼이 절대 좋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다이애나는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을 때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말로만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대답만 반복할 뿐, 찰스에게 어떤 제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륜을 방관했다. 유일하게 시아버지필립 마운트배튼 공만이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 주고 아픔을 위로해 주었다. 내연 의혹이 있거나 의혹이 아닌 사실이라 해도 이혼을 죄악시하는 보수성 때문에 쇼윈도를 유지하는 영국 왕실과 귀족 문화에 다이애나 스펜서는 순응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에 불륜가정폭력을 목격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했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잇과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고,[41]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그 당시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인 것처럼, 마치 다이애나가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 마냥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토해냈다. 결국 10여년 간 참고 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한 이유였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11월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했다.[42][43]

훗날 BBC와의 1995년 당시 인터뷰 비화가 공개되었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 백작은 마틴 바시어라는 무명 언론인[44]을 다이애나에게 소개해 인터뷰가 가능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후 스펜서 백작은 바시어가 자신과 다이애나 비에게 거짓말과 위조된 서류 등을 토대로 신뢰를 얻어 인터뷰를 따냈다고 말했다.#

2021년 5월, BBC 직원 마틴 바시어의 사기 행위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로 인해 BBC에 수신료 삭감과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시어는 다이애나가 방송 내용에 전혀 불만을 품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방송 후에도 친구로 지냈다고 주장했다.## 두 아들에게 마음속 깊이 미안함을 느끼지만 이 인터뷰가 다이애나비를 고립시키고, 편집증을 부추겼다는 윌리엄 왕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로 다이애나비 인터뷰로 거둔 수익금 142만파운드(약 22억 3천만원)를 기부했다.#

이혼 후 '전하(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여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다.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고액의 위자료[45]을 받았다.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과 국민 여론이 반대했다. 왕실은 카밀라가 'Queen consort'보다 한 단계 낮은 'Princess consort' 칭호를 쓰도록 했다. 하지만 2018년 기준으로 이 내용에 관련된 언급이 모두 삭제됐고, 찰스가 왕이 되면 Queen Consort를 쓸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3월, 왕세자 측은 찰스가 왕위에 올라도 카밀라가 Princess Consort를 사용할 것이라고 재확인 하였다.#

그러나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승하한 직후 버킹엄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Queen Consort'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훗날 공개된 다이애나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미 결혼 직후부터 불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한다.2004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원본 영상.[46]


4.5.1. 두 아들을 향한 사랑[편집]


아들들은 나의 보물 같은 존재예요.

다이애나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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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윌리엄 왕자와 함께

다이애나는 비록 찰스 왕세자에게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슬하에 두 아들 윌리엄 왕자해리 왕자를 낳아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아들들을 끊임없는 애정과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동서고금 어린 왕자공주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하였다.[47] 또한 아들들의 학교 행사에서도 평범하게 참여하고는 했으며, 1991년 차남 해리의 가을 운동회 때 어머니들의 달리기 대회에서 치마를 입은 채로 열심히 맨발로 뛰어 2등으로 완주한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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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윌리엄 왕자, 차남 해리 왕자와 함께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과 해리는 현재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본인의 어린시절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아들들이 불행해질까봐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을 15년 간 지속했다.

또한 아들들을 평소에는 매우 사랑해도 아이들이 버릇없게 굴면 이를 따끔하게 제지하는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0년 윌리엄 왕자가 학교 운동회 도중 버릇없이 행동하고 운동회가 끝날 때 즈음 다이애나가 아들을 데리고 집에 가려할 때 윌리엄이 도망가자 결국 화가 폭발한 다이애나가 멀리서 달려와 윌리엄의 엉덩이를 때리며 차로 끌고가서 크게 혼냈으며, 이때 윌리엄은 엄마에게 끌려가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 또한 작은아들 해리 왕자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인터뷰 도중 계속 소리를 내며 방해하자 다이애나가 진지한 모습으로 해리에게 "조용히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제지하기도 했다.# 해리가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계속 자신을 치며 장난치는 사촌동생 베아트리스 공주를 팔로 때렸을때도 이를 제지했다.#


4.6. 활발한 사회 활동[편집]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사망하여, 세계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이애나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 운동이었다. 다이애나가 사망한 직후인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열성적이고 진심 어린 다이애나의 사회 활동을 두고 전 세계가 감동했고, 다이애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당연히 그에 반비례해 영국 왕실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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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1997년 1월, 앙골라를 방문해 대인지뢰 제거 현장을 찾은 다이애나


4.7. 비극적인 죽음[편집]




영국 시간으로 오전 7시(한국 시간 오후 3시)쯤에 방송된 BBC의 추모방송.[48] 느린 영국 국가와 함께 유니언 잭이 반기 형태로 걸린 영상과 함께 'Diana, Princess of Wales(다이애나 왕세자비) 1961-1997'이라는 자막을 송출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원래라면 왕가[49]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내보내야 하는데 유니언 잭을 내보냈다고 댓글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방송은 녹화해 CNN에서 다시 내보냈다.

(여자 아나운서)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뉴스 스튜디오에서 마틴 루이스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마틴 루이스 앵커) 여기는 런던에서 전해드리는 BBC 텔레비전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오늘 새벽 5시에 다이애나 공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버킹엄 궁전 측에서는 곧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아름다움과 명성과 부를 한몸에 지닌 화려한 일생이었지만 단 하나, 행복만은 그녀를 비켜갔습니다.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비가 오늘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올해 나이 36살. 그의 곁에는 세계적인 헤롯백화점 사주 알파예드가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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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석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KBS 뉴스 9의 오프닝 멘트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늘 지구촌의 톱 뉴스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지 1년 만에 다이애나 비는 오늘 새벽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녀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던 이집트의 억만장자 애인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20살에 왕세자비가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숱한 얘깃거리를 안고 살아온 다이애나 비는, 마치 프랑스 영화의 슬픈 피날레처럼 36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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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홍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MBC 뉴스데스크의 오프닝 멘트

다이애나가 이혼한 후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벽히 따돌릴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1명을 잡아 두들겨 팼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여, '마틴'이라는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에게 접근금지명령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적반하장으로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요!"라고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고, 그녀가 도티 알파예드[50]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 원에 팔렸다.[51]이러니 파파라치들 눈이 안 뒤집어질 수가 있을까.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 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 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까지 했다.관련 보도 또한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00시 20분, 리츠파리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W140 S클래스에 탑승한 다이애나와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00시 23분, 벤츠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하고 만다.[52] 운전사 앙리 폴[53]과 도디 알파예드는 충돌 순간에 즉사했으나, 다이애나와 경호원 리스 존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54] 하지만,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신속히 구출하거나 신고하기는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마구 터뜨려댔다. 심지어 보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다이애나가 앉아있는 조수석 뒷편 좌석의 문을 열고 중태에 처한 다이애나의 손 위치를 함부로 조정하는 짓까지 했다고 한다. 00시 30분, 충돌 약 10분 뒤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으며, 경찰 도착 5분 후 구급차가 뒤이어 도착했다. 하지만 구조대가 도착한 뒤에도 파파라치들은 현장을 촬영하기 바빠 구조를 더디게 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프랑스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계속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대는 파파라치들을 저지하기 위해 증원 요청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1시 00분, 심하게 파손된 차량 상태로 인해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30분이 지나서야 차에서 꺼내졌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심장과 폐에 급격히 피가 차오르는 쇼크 증세를 겪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심정지가 온 상태였다.[55]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맥박이 약하게나마 다시 뛰긴 했지만, 후술할 프랑스 응급의료 서비스인 SAMU는 어째서인지 20분 후에나 도착했고, 현장 이탈 또한 20분이나 지나고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근처의 병원이 아닌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으로 천천히 이송됐다[56].

결국 사고 발생 약 2시간 만에야 다이애나는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지만, 현지 의료진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04시에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외상은 왼쪽 뺨에 난 상처 정도만 있을 정도로 심하지 않았지만, 머리와 가슴에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특히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내장파열이 심했다고 한다. 정상인이라면 중앙에서 왼쪽을 향해 있어야 하는 심장오른쪽으로 이동해 있을 정도였고, 폐정맥과 심벽도 크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검 결과, 사망선고가 04시에 내려졌을 뿐이지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약 20분 만에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파파라치 등 때문에 다이애나가 병원으로 늦게 이송된 점은 안타깝지만, 부검 결과에 따르면 사고로 입은 부상이 심각했으므로 이송이 제대로 신속히 이뤄졌다 해도 의료진이 다이애나를 소생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언니들은 물론이고 모친보다 먼저 죽었다.[57] 이 점은 시외할아버지인 조지 6세[58]가 1952년 2월 6일에 폐암으로 형이자 자신의 큰시외할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와 모친이자 자신의 시외증조할머니인 메리 대왕대비보다 먼저 죽는 것, 즉 윗형제와 모친보다 먼저 죽는 것과 유사하다. 또 시이모인 마거릿 공주도 2002년 2월 9일에 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와 모친이자 자신의 시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보다 먼저 죽었다. 36년 61일의 짧은 삶이었다.

파파라치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선한 사마리아인 법)로 체포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체포 당시 머그샷과 이름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무죄를 받았고, 주범 격의 3명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1유로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비난에서 벗어날 순 없었고 이들 파파라치 중 1명은 자살까지 했다.

정신 못 차린 잡지사들은 죽어가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사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비밀리에 수억 원의 돈을 제시했다가 CNN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이애나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 백작이 "파파라치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다이애나 사진만 찍게 한 신문사들이여, 기어이 당신들의 두 손에 우리 누님의 피를 묻히게 되었구나!"라며 매우 격앙된 비난을 하였다. 이 영상(1분 11초)을 보면 다이애나 비 사후에 추모 인파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기자를 향해 "너희가 다이애나를 죽였어, 너희는 쓰레기들이야!"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한 남성이 나오는데,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동감의 뜻을 나타내며, 같은 자리에 있던 여성은 "그 망할 카메라 좀 꺼!"라며 촬영기자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사후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파예드는 그의 아들과 다이애나의 죽음에 영국 왕실, 특히 다이애나의 시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사실 영국 왕실가 사람들 중 다이애나가 힘들때 위로해준 유일한 사람이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 참고로 알파예드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지만, 영국과 유럽에서의 현지 평판이 원래 매우 나쁜 인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폭이 유력 기업을 소유한 꼴이었다. 그래서 다이애나가 그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와 연인 의혹이 있다는 것에 더욱 왕실의 분노를 샀다.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 심지어 무슬림과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도디 알파예드는 유명한 바람둥이에 마약 중독자였다. 영화 제작자 신분으로 헐리우드의 스타급 여배우들과 두루 알고 지냈는데 영화 촬영장에서 스탭들에게도 자신이 하던 코카인을 나눠주는 일을 저질러 제작사 대표에게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의붓 숙부에 따르면 어디를 가든 에이전시에서 보내준 모델들에 둘러싸여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전 세계에 있는 그의 별장들을 순회할 때마다 각 지역의 모델들을 불러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첫번째 결혼을 8개월만에 끝내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자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나 미국 출신 모델인 켈리 피셔와 약혼했고 아이를 가질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피셔와의 결혼을 얼마 안 앞둔 시점에 아버지이자 헤롯 백화점 소유주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휴가 초대를 받아들인 다이애나와 만나고 교제하게 되면서 피셔에게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했다. 이에 피셔가 기자회견을 열어 파혼당했다고 울며 도디에게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통보한 바람에 영국의 전 매체가 다이애나가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과 사귈 수 있느냐며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보도를 내기도 했다[59].

아직도 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세계에서 알아줄 정도로 높은 수준인 프랑스의 응급 의료 서비스 SAMU가 다이애나에겐 즉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국가의 응급 의료 시스템이 훈련된 구급대원을 사고 현장에 파견해 이송 중인 환자 상태의 악화를 방지 또는 지연시킬 목표로 피동적 대응을 한다면, SAMU는 현장에 구급대원만이 아닌 의사를 동행시켜 악화 방지, 지연 뿐만 아니라 환자 상태 파악, 진단과 그에 따른 조치 등 좀 더 적극적인 의료 대응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60]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이애나 사고 당시엔 1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다이애나의 교통사고가 영국 왕실 & 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다른 의혹들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를 참고하자.

그리고 다이애나비가 사망한 1997년 만들어진 '다이애나비 추모 기금'이 있으며 2013년 윌리엄 왕자 부부와 해리 왕자 부부가 함께 활동한 '왕립재단'에 불입되었으며 수년간 모금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유산이나 기부금을 통해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5. 전 세계의 추모 물결[편집]


"나의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러웠던, 한 여인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독특하고 복잡하고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던 다이애나.

내적, 외적으로 모두 아름다웠던 그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Above all we give thanks for the life of a woman I am so proud to be able to call my sister, the unique, the complex, the extraordinary and irreplaceable Diana whose beauty, both internal and external, will never be extinguished from our minds."

남동생이자 현 제9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읽은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공화주의자 계층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당시 영상[61] 해당 영상을 보면 다이애나가 차사고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오히려 괜찮을 거라고 웃어넘기는 반응이었지만, 그녀의 부고를 전해듣자마자 전부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할말을 잃고 뉴스만 봤으며 영상 속 기자도 울음을 참느라 울먹이고 있다. 당시 영국인 상당수의 반응이 이랬다.

여왕 폐하, 당신이 그녀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Show us your care!)

익스프레스


우리의 여왕 폐하는 어디 가신 것인가? 폐하의 조기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Where is our queen? Where is her flag?)

더 선


군중이 왕정으로 돌아서고 있다.(The mood is turning anti-Royal.)

인디펜던트


여왕은 우리처럼 애도를 표하기 위해 나와야 한다.(The Queen should be here to show her respect, like US.)

마지막까지 모욕. 어딜 가든 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버킹엄 궁전만 빼고.(The final Insult. Everywhere you look there are flagpoles with flags at half mast... Except Buckingham palace.)

영국 왕실의 미지근한 반응에 분노한 영국 언론의 헤드라인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적인 추모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owers_for_Princess_Diana's_Funera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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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켄싱턴 궁전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62][63][64] 사고 발생 당시 스코틀랜드 벨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여왕과 왕실은 왕실에서 나간 사람이니 그녀의 죽음은 스펜서 가문의 일이라며 무대응했고 스펜서 가문의 가족장으로 진행하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찰스만이 해당 대응에 크게 반발하며 웨일스의 공비로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논란이 오가던 도중 왕실은 조기는 커녕 기존의 관례대로 여왕이 부재 중이라는 뜻으로 버킹엄 궁전의 왕실기를 게양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왕실의 반응은 영국 국민들의 매우 커다란 분노를 불러왔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대해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가서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해줄 것"을 권유하며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하도록 하였으며 1997년 9월 4일에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추모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방영하였다.[65][66]



1997년 9월 4일 BBC1에 방영된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국민 메시지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 년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67]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아직도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과 죽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왕실을 개편해 왕실 지지율을 올린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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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 필립 마운트배튼, 윌리엄 왕자,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 해리 왕자, 찰스 3세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엘튼 존은 생전 다이애나 스펜서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 추모 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역시 김영삼 대통령이 김용태 비서실장을 통해 애도를 표시했고 주영한국대사관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치러졌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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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의 무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자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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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다이애나 & 찰스 3세의 약혼 반지
(오른쪽)캐서린 미들턴 & 윌리엄 왕자가 물려받은 결혼 반지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약혼자인 캐서린 미들턴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가 아버지 찰스가 어머니 다이애나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 반지였다. 이 반지는 원래 차남인 해리가 물려받았으나, 윌리엄은 청혼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이애나의 유품인 시계와 교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 당일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성가 <전능하신 주 하느님>은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69]

사고 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마이클 잭슨이 HIStory World Tour를 진행할 때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날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곧 진행된 투어를 다이애나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Heal the World'를 공연할 때 그녀의 사진을 3분간 게시하였으며, 추모의 의미로 'Gone Too Soon'을 불렀다.


6. 가족관계[편집]



6.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제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John Spencer, 8th Earl Spencer)
제7대 스펜서 백작
앨버트 스펜서
(Albert Spencer, 7th Earl Spencer)
제6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
(Charles Spencer, 6th Earl Spencer)
마거릿 배어링
(Margaret Baring)
신시아 해밀턴
(Cynthia Hamilton)
제3대 애버콘 공작
제임스 해밀턴
(James Hamilton, 3rd Duke of Abercorn)
로잘린드 빙엄
(Rosalind Bingham)
프랜시스 로슈
(Frances Roche)
제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
(Maurice Roche, 4th Baron Fermoy)
제3대 퍼모이 남작
제임스 로슈
(James Roche, 3rd Baron Fermoy)
프랜시스 엘렌 워크
(Frances Ellen Work)
루스 길
(Ruth Gill)
윌리엄 스미스 길
(William Smith Gill)
루스 리틀존
(Ruth Littlejohn)


6.2. 자녀[편집]


1995년 아들들과 함께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찰스 3세
(Charles III)
1남
웨일스 공 윌리엄
(William, Prince of Wales)
1982년 6월 21일 (41세)
캐서린 미들턴
슬하 2남 1녀[70]
2남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Prince Harry, Duke of Sussex)
1984년 9월 15일 (39세)
메건 마클
슬하 1남 1녀[71]


7. 대중매체[편집]


노래
  • 영국의 락 밴드 오아시스의 곡 'Falling Down'의 뮤직비디오에서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영국 왕실에서 결혼으로 맺어진 왕가의 일원, 불륜, 그리고 결정타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찰스 3세까지 다이애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동생으로, 스캔들이 엄청났던 마거릿 공주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이애나가 오아시스 멤버들에게 경멸받을 만큼 먼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으며, 배우의 생김새도 마거릿 공주와 닮았다. 결정적으로 뮤직 비디오를 감독한 위즈가 "윌리엄해리의 일종의 가상 남매로 마거릿 공주를 설정했다"고 밝혔다.기사[72] 결국 영국 왕실의 이면을 혼합한 것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
영화
작중 미래인 2015년 10월 21일 USA 투데이 신문 1면을 보면 '워싱턴이 다이애나 왕비의 미국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는 문구가 있다. 물론 다이애나는 영화 개봉 8년 후인 1997년에 사망해 2015년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찰스 3세가 즉위한 년도도 2022년이니 만약 살아있다해도 다이애나 세자 빈이나 그저 자유인 신분이었을 것이다.

다이애나의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가 아니라 파키스탄 외과의사와의 열애를 다룬 작품으로,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 나오미 왓츠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첫 주 흥행은 겨우 62만 파운드에 그쳤다.[73] 전체적으로 어디에 중점을 맞춰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도디 알파예드는 영화 막판에 5분 정도밖에 안 나오며, 찰스 3세나 왕실의 주요 일원들은 등장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윌리엄해리는 딱 한 컷 얼굴은 보인다.

평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2022년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
드라마
다이애나의 죽음이 계획되었다는 설정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고, 사고가 맞았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he Crown.Diana Spencer.jpg}}} ||
  •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4~6: 엠마 코린(시즌 4)[74], 엘리자베스 데비키(시즌 5~6)
시즌 4에서는 밝고 발랄한 모습의 소녀로 첫 등장한다. 카밀라와의 결혼에 실패한 찰스 3세가 '과거사가 깨끗하고 정숙한 여성'을 왕세자비 감으로 찾던 중, 자신의 기준에 딱 맞고 명문가 귀족 출신이기까지 한 다이애나를 신부감으로 낙점한다. 친가와 외가까지 나서서 왕세자와의 교제를 부추기고, 왕실 일원들도 둘의 만남을 흡족해하자 계속 찰스와 만남을 이어가다가 결혼하게 된다. 처음에는 왕세자비가 되는 것과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응원에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폐쇄적이고 숨막히는 왕실에서의 생활, 여왕을 포함한 왕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75], 찰스의 불륜과 열폭[76]으로 인해 폭식과 거식증 증세가 반복되고 스트레스를 받아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동시에 외부인들에게는 엄청난 인기와 추앙을 받아왔다는 당시의 분위기도 같이 묘사된다.

-
다큐멘터리
  • 《다이애나 - 그녀 자신의 목소리>(Diana: In Her Own Words)》 (2017)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생전의 비공개 인터뷰와 영상들을 모아서 제작.


비디오 게임
  • <파파라치> (1997)
G.O.D.D.이라는 집단이 제작한 게임인데, 다이애나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1인칭 시점에서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해야하는 게임이다. 제작시기로 미루어봤을때 다이애나 왕비 사망사건 이슈에 편승하기 위해서 만든 게임으로, 불근신 게임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아무튼 다이애나 사망사건이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다보니 한국에서도 PC통신 자료실 게임이나 PC/PC게임잡지부록 CD 등을 통해 드문드문 알려진것으로 보인다. 플레이 영상


뮤지컬
  • 《다이애나》 (2021)
본 조비의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 다만 평은 혹평 일색이었다.


8. 여담[편집]


  • 사후 토니 블레어 총리는 추도 연설에서 그녀를 People's Princess(민중의 왕세자비)라고 불렀는데,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호칭보다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파일:1140-princess-diana-travel-sydney-australia-1983.web.jpg
  •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연방 왕국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83년에 찰스와 당시 갓난아기였던 윌리엄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찰스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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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왕자 첫 번째 유모 바버라 반스[77]

  •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던 어린 시절 때문에 아들들에 대한 애정이 강했는데, 왕자들이 자신보다 유모들과 더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왕실로 갓 시집와 어린 나이에 첫 아이이자 후계자 윌리엄을 낳았을 때에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던 다이애나 본인은 윌리엄만이 가장 소중했을 시기라[78] 아기였던 윌리엄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욱 좋아하자[79] 첫 번째 유모였던 바버라 반스를[80] 해고했다.[81]

  • 마이클 잭슨과 친밀한 관계였다. 2명 모두 20세기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많은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의 아픔을 이해했다고 한다. 1988년 잭슨은 Bad World Tour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콘서트 직전 다이애나와 찰스를 만나 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다이애나는 잭슨에게 그의 히트곡 'Dirty Diana'[82]를 공연할 것인지 물었고, 잭슨은 그녀를 위해 당시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요."라고 말했고, 그 노래는 콘서트에서 공연되었다.

  •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파바로티의 영국 공연 당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모두가 우산을 쓰고 공연을 보느라 앞줄의 관객을 제외하곤 관객들이 파바로티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자 파바로티가 대단히 강한 비가 아니니 가급적 우산을 치우고 공연을 볼 것을 요청했고, 다이애나가 솔선수범해서 우산을 접으면서 관객들이 모두 우산을 치워 성공적으로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공연 후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고 훗날 다이애나가 사망한 후에 파바로티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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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11월,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회동 및 만찬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남편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공개 석상에서조차 불편한 티를 냈다.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한 게 바로 방한 1달 후. 청와대 영빈관 만찬 영상을 보면 찰스가 환영 만찬의 답사를 읽을 때 다이애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나마 최대한 신경써서 편집한 대한뉴스 영상에서조차도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한다.[83] 다시 말해 당시의 대한민국 방문은 찰스, 다이애나 두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수행한 마지막 공무였던 셈이고, 때문에 지금까지도 둘의 비극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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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은 북한과 관련된 우표는 하나도 만들지 않았지만, 북한에서는 기념우표를 만들었다. 북한이 외화를 벌기 위해 기념우표를 남발하여 수출하는 경우 중 하나이다.[84] 실제로 이 우표들은 북한으로 역수입되어 유통되지 못하게 소인이 찍혀 있다. 반대로 말하면 다이애나는 이런 막장 반국가단체에서조차 기념우표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많은 스타라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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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7월 1일, 살아 있었다면 50세가 되었을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뉴스위크지가 그녀의 50세 모습을 CG로 합성해 고인드립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저 표지가 실린 뉴스위크지에는 "다이애나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어땠을까"를 다룬 가상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적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트위터 팔로워를 1,000만명 이상 거느리며,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젊은 며느리의 등장으로 다이애나의 위치가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고, 도디 알파예드와 이혼한 뒤에는 뉴욕에서 거주하며 각종 자선사업의 후원자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할 것' 등이었다.

  • 신장이 178cm로, 키가 상당히 크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발레에 소질이 있었지만, 키가 너무 커서 계속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 올라와 있는 노태우테레사 수녀와 같이 찍은 사진만 보아도, 다이애나가 얼마나 키가 큰지 알 수 있다. 생전에 방일했을 때 나루히토 일왕[85]같이 찍힌 사진에서도 그보다 훨씬 더 컸다.[86] 다이애나가 장신인 덕분에 그녀 소생인 윌리엄 왕자, 해리 왕자 모두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으로 자랐다. 심지어 찰스 3세는 결혼 기간 내내 다이애나가 자신보다 키가 커 보일까봐 같이 다닐 때 아내가 하이힐을 신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한다.[87]

  • 큰 키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답게 패션센스#도 평균 이상으로 갖췄는데, 항상 다리 뒤쪽으로 봉제선이 있는 팬티스타킹 중에서도 발 뒷꿈치에 장식이 달린 원 포인트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비록 이혼했으나 한때 영국 왕실의 구성원이었고, 유행을 만드는 패션센스로 인해 언제나 파파라치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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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있는 패션 센스로 인해 주목받은 핸드백도 있다. 크리스찬 디올레이디 디올 백. # 레이디 디올 백의 원래 이름은 슈슈백이었는데, 프랑스 영부인이 다이애나에게 슈슈백을 선물하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다이애나가 색상과 재질별로 여러가지 슈슈백을 크리스찬 디올에 주문을 해서 자주 들고다녀 주목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슈슈백이 레이디 다이애나 백으로 불리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디올 측에서 다이애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레이디 디올 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외에도 2021년 재출시된 구찌의 다이애나 백도 다이애나가 들고 다닌 적이 있었던 가방을 다시 출시한거라 다이애나 스펜서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가방이다.

  • 찰스 2세제임스 2세의 사생아계 후손이다. 찰스 2세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의 5대손이 다이애나의 고조할머니다.

  • 2015년 5월 2일, 아들 윌리엄 왕자와 며느리 캐서린 미들턴의 둘째이자 장녀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가 태어났다. 샬럿은 왕족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어 할아버지 이름의 여성형, 조지 3세왕비의 이름, 혹은 이모 피파 미들턴의 미들네임에서 따온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혹은 외할머니어머니의 미들네임 붙였다는 해석이 분분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샬럿의 할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뿐이다.[88] 윌리엄이 "딸을 낳으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다이애나라 짓겠다"고 평소에 말하고 다녔던 것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애너그램이 있다. Princess Diana(다이애나 왕세자비) → End is a car spin(끝은 교통사고). 원래 이런 식의 애너그램은 짜 맞추기이므로 그냥 재미로만 보자.

  • 엘튼 존의 절친이라는 사실 때문에 게이 커뮤니티에서 환영받는 인사 중 하나다. 특히 에이즈 발견 초기의 환자와 의료진들과 장갑도 끼지 않고 악수한 일화와 사진이 유명하다. 당시에는 의사들도 에이즈 환자는 진찰하지 않겠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을 정도로 에이즈는 꺼려지는 병이었으나, 다이애나의 활동으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이 알려지자 수많은 게이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에서도 작중에서 게이인 캐머런 터커의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을 접했을 때라고."라는 대사가 있었다.

  • 2002년 영국 BBC에서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하였는데 다이애나가 무려 3위에 올랐다. 그녀가 사망한지 몇년 지나지 않아 조사한 결과이긴 하지만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나 인류 역사에 남을만한 획기적인 업적을 세운 발명가 또는 학자, 영국을 대표하는 숱한 대중문화인들을 제끼고 저 순위에 오른 것을 보아 다이애나가 얼마나 영국인들에게 사랑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 2017년에 서거 20주기를 맞아 런던 켄싱턴 궁전에 다이애나 비의 모습을 새긴 영구적인 동상이 세워졌다.# 2020년에는 생전에 즐겨 입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검은 양' 문양의 스웨터가 26년 만에 재출시됐다.#



  • 윌리엄 왕세자의 자녀들은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가가(GAGA)'라고 부른다고 카밀라가 직접 밝혔다.[89] 하지만 2021년 어머니의 날에 발표한 다이애나에게 쓴 편지를 보면 아직 글을 쓰지 못하는 루이 왕자를 제외한 조지 왕자샬럿 공주는 다이애나에게 granny라는 표현을 사용한 걸로 봐서 다이애나만을 친할머니로 인정하는 듯 하다.


  • 그녀가 사망한 지 25년 10일 후 전 남편이 즉위했다.

  • 도널드 트럼프가 다이애나에게 연정을 품고 적극적으로 접근했으나 퇴짜를 맞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9. 관련 영상 & 링크[편집]




[1]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중퇴이다.[2] 1936. 01. 20 ~ 2004. 06. 03. 향년 68세. 여담으로, 다이애나의 시외증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의 기일에 태어났고 조지 5세의 생일에 죽었으니 생몰년도가 모두 조지 5세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남편 존 스펜서는 다이애나비가 31세 때 이미 사망했으나 이쪽은 다이애나비가 죽고 7년을 더 살았다.[3] 1955. 03. 19 ~ [4] 펠로우스 남작부인. 1957. 02. 11 ~[5] 1960년 태어났지만 10시간 만에 요절했기 때문에 다이애나가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6] 엘튼 존버니 토핀이 자신의 노래를 개사한 유명한 Candle in the Wind 1997의 첫 마디가 "Goodbye England's rose"였다.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영국인들의 기억에 적절한 단어.[7] 엄밀히 말하면 틀린 호칭이라는 주장이 있다. 원래 동양에서 왕세자는 왕국 중에서도 제후국의 왕위 후계자가 받는 칭호이고, 자주국의 후계자가 받는 칭호는 왕태자인데 영국은 제후국이 아닌 이상 crown princess를 왕세자비로 번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동아시아유럽의 왕실 작위 체계는 개념과 인식부터 권한의 크기까지 완전히 달라 이를 1:1 대응시키는 것은 어려운 관계로, 주한영국대사관의 공식 번역을 따라 왕세자비로 호칭하고 있다.[8] People's Princess.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인품,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으로 많은 국민들이 사랑했던 왕세자비라는 의미.[9] 비록 후계자인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들을 낳았으나 찰스 3세의 즉위 전에 사망하였기에 당연히도 왕비가 되진 못하였다.[10] 왕가를 상징하는 왼편의 상징들이 빠지고, 가운데의 기존 스펜서 가의 문장을 마름모꼴로 바꾸었다. 마름모형 문장은 미혼을 상징한다. 다이애나와는 반대의 케이스로, 현 왕세자비 캐서린 미들턴은 결혼 전에는 마름모꼴 문장을 제작해서 쓰다가 결혼 후 아예 새 문장을 만들었다.[11]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위를 승계하면서 자연스럽게 백작의 딸이 되자 레이디의 경칭을 받았다. 그전까진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위의 예우경칭인 남작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딸인 다이애나도 남작의 딸에 대한 경칭인 아너러블(Honourable)로 호칭되고 있었다.[HRH] His/Her Royal Highness[12] 다이애나의 개인 문장에 들어가 있는 조개 3개가 스펜서 가문의 문장이다.[13] 때문에 말버러 공작가 사람들의 성은 '스펜서 처칠'이다. 윈저 왕가 사람들 중 엘리자베스 2세필립 공의 후손들은 성이 '마운트배튼윈저'인 것과 같은 예.[14] 다이애나의 현조할아버지의 여동생, 즉 5대조 고모이다.[15]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름 카메라로 직접 가족과 친지들의 모습을 찍었다.[16] 1924~1992. 후에 스펜서 백작위를 승계받아 8대 스펜서 백작이 된다.[17] 1936~2004.[18] 베드퍼드 공작부인 다이애나 또한 조지 2세의 아들 프레더릭 왕세자의 유력한 왕세자비 후보였고, 외할머니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도 아끼는 손녀를 왕실로 시집보내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그 자리는 독일 출신 공주에게 돌아갔다.[19] 아이러니하게 일찍이 파탄나 버린 부부 사이와는 별개로, 찰스 3세는 결혼생활 동안 다이애나의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선물들을 많이 해줬다.[20]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귀족 남성들은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다이애나의 시할머니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21] 레인의 방에는 루이비통 수트케이스 4개가 있었는데, 이니셜 S가 엠보싱되어 있다는 이유로 다이애나가 모두 뺏었기 때문에 짐을 쓰레기봉투에 들고 가야 했다고 한다.[22] 뉴욕이나 런던 하면 생각나는 위로 길쭉하고 좁은 형태의 타운하우스이다.[23] 2023년 4월에 폐교됐다.[24] 현재는 재정난으로 1997년에 매각되어 이름도 바뀌고, 학습 부진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남녀공학으로 완전히 달라졌다.[25] 여담으로 이때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틸다 스윈튼이었다.[26] 생몰년도: 1892년 ~ 1975년[27] '로맨스 소설계의 대모'라는 호칭도 있을 정도로 영국 로맨스 소설계에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이자 현재까지 마니아 팬층도 두터운 작가다.[28]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자 한동안 서운해했다고 한다. 참고로 딸인 레인에 대하여 5대 서덜랜드 백작의 딸이거나,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딸이라고 주장했다.[29] 영국의 교육과정은 중학교고등학교 구분없이 아예 중등학교로 통합되어 일원화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초졸인 셈이다. 물론 중학교 3학년 나이까진 학업을 이어나간건 사실이라 다소 억울한 면이 있긴 하지만.[30] 서양인들은 프랑스어를 습득하기 유리한 것 아니냐고 생각 할 수 있는데,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소설 등의 작품에서 어렵다는 묘사가 빈번하게 나올 정도로 습득하기 까다로운 언어다. 그 예로 소설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 크루가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자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장면이 나온다.[31] 더군다나 한국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고등학교도 고학력으로 쳐줬으며, 혼기가 찼다며 대학교를 중퇴하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32] 귀족젠트리.[33] 아무래도 둘의 나이차이도 컸고, 굳이 따지자면 앤드루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더 유력한 상황이었다.[34] 이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뮤지션 마이크 올드필드가 작곡한 'Royal Wedding Anthem'이다.[35] 결혼식을 마치고 버킹엄 궁전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도, 마부들이 트레인을 정리해 주느라 입장이 지체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찰스 왕세자마저도 트레인을 함께 정리해 줬다.[36] 이 러버즈 노트 티아라는 결혼 이후에 다이애나가 공식 석상에서 자주 착용하면서 거의 그녀의 상징으로 대두됐으나, 정작 다이애나는 이 티아라가 두통을 유발한다고 착용할 때마다 힘들어했다고 한다.[37] 비슷한 드립을 존 F. 케네디도 친 적이 있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인 자신보다 젊은 영부인재클린이 더 많은 관심을 받자,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한 것. 물론 이쪽은 찰스와 달리, JFK의 여유와 유머를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38] 후술할 결혼생활에서 카밀라 파커 볼스의 존재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39] 임신부입덧은 워낙 편차가 심해서, 아예 입덧이 없는 사람이나 가벼운 소화불량과 울렁거림으로 끝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심한 여성들은 극심한 구토와 탈수를 겪으며, 전근대에는 입덧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40] 다이애나의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 역시 입덧이 매우 심했던 걸로 유명한데, 캐서린의 경우는 세상이 바뀌기고 했고, 다이애나라는 선례가 있는데다가, 남편 윌리엄의 적극적 도움도 있어 입원도 하고 공무도 빠지는 등 훨씬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41] 다이애나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는 편이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것이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또한 왕실에서 애초에 다이애나를 쉽게 놔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이애나가 찰스와 합의 하에 이혼하는 등의 방법도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맞불륜이 다이애나가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비판하는 측에서는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사실에 대해 문제 삼거나, 다이애나의 맞불륜 상대 중에 유부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남편의 불륜으로 아내인 자신이 피해자의 심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러 죄 없는 그의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42] 이후 찰스 왕세자와의 별다른 접촉이나 충돌은 없었다. 1997년 3월 윌리엄 왕자 관련 행사로 서로 마주친 적은 있긴 했지만 찰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찰스 왕세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43] 다만 다이애나가 진짜로 이혼을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2세가 이혼을 지시하기 전까지는 다이애나가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술하듯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다이애나의 BBC 인터뷰 역시 다이애나가 원해서 성사된 인터뷰가 아니라, 기자의 사기와 협박으로 이루어진 인터뷰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44] 당시에는 무명 언론인이었으나,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마이클 잭슨과 인터뷰를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후 부적절한 발언으로 징계를 받는 등 물의도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잭슨의 전 매니저는 2003년 바시어의 인터뷰가 6년 뒤 잭슨의 사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보조 수단이던 약물이 그날 이후엔 필수품이 됐다는 것이다. 바시어는 2017년 BBC로 돌아와 종교 담당 에디터로 있다가 이 인터뷰 비화 관련 보고서가 BBC에 제출되기 몇 시간 전에 건강문제를 이유로 퇴사했다고 한다.[45] 2018년 기준 가치로 따져도 260억에 달하는 돈. 27년 전이니 그 가치는 배 이상이다.[46] 해당 인터뷰는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92년에 촬영된 것이다.[47] 물론 왕세자의 아들인 왕자들이라 팀을 이룰 정도로 많은 유모들이 있었다. 다만 다이애나 본인이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시절 때문에 유모들이 자신보다 아이들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시집 와 외롭게 지내다 어린나이에 낳은 윌리엄 왕자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서 아기였던 윌리엄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욱 좋아해 그 유모를 해고하고 새로운 유모를 들였을 정도였다.[48]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49] 이혼하기 전에는 이 깃발을 썼으나 이혼 후에는 이 깃발을 쓴다. 관에도 덮어진 깃발이 바로 이것.[50] 알파예드는 이집트 출신으로, 런던 해로스 백화점과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풀럼 FC를 운영하는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이다. 그와 다이애나가 연인 사이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최근 집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아닌 파키스탄 출신의 하스낫 칸이 연인이었다고 한다.[51] 1997년 기준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 돈이다.[52] 사고 당시에는 시속 180km가 넘는 과속을 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이는 사고 충돌로 계기판이 고장난 것이었고 경찰 조사 결과 터널의 제한 속도인 50km/h의 약 2배에 달하는 110km/h 정도로 달렸던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표되었다.[53] 부검 결과, 면허취소 수준의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54]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다이애나가 의식을 잃기 직전에 "Oh my God."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55] 사고 현장을 우연히 지나다 다이애나에게 최초로 응급 처치를 했던 프랑스 의사 프레데릭 마일레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다이애나에게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서 다이애나가 괜찮을 줄 알았다고 했다. 참고로 인터넷에 떠도는 다이애나 사고 장면으로 알려진 사진은 가짜이다.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뉴스 오브 더 월드 등 현장에 있던 파파라치들로부터 사진을 받은 매체들은 사고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삭제해 내보내지 않았다. 다만 2004년 미국 방송국 CBS에서 다이애나 사망 사고와 관련된 다큐를 방영할 때 당시 찍힌 사진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56] 이 때문에 다이애나의 사망이 교통사고로 인한 게 아니라 암살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심박이 거의 멎은 다이애나를 보다 전문적인 설비가 있는 큰 병원으로 안정적으로 이송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57] 어머니 프랜시스는 36세에 사망한 딸과는 달리 2004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58] 다이애나가 태어나기 9년 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9] 피셔가 소송을 제기한 게 무색하게도 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디는 다이애나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피셔는 결국 소송을 취하했다.[60] 이런 프랑스 의료 체계는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에서도 잘 나온다.[61] 이 영상은 역사상 최초의 리액션 비디오라고 부르기도 한다(1997년에는 해당 용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영상을 찍고 있는 인물은 친구들과 우노 카드게임을 하는 중 새로 산 캠코더가 잘 되는지 테스트중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해 TV를 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62]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 맞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 1위인 왕세자가 왕세자비와 이혼한 사실도 흔한 상황이 아닌데다, 이혼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왕실은 전례 없는 상황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여러가지로 예법상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가령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이애나의 운구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예법에 어긋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민 정서상, 여왕이 그런 부분에서까지 예법을 지켰다면 오늘날 영국에 왕실은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63] 게다가 여왕은 당시 살아있던 어머니인 '퀸 마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주문받았던 데다 그녀의 이혼녀 증오의 역사는 유명한데, 반면 그녀의 딸 마거릿 공주와 외손자 찰스 3세앤 공주는 예외라는 것에서 내로남불 소리를 들었다. 여왕 본인도 인기가 많던 며느리를 견제했고 찰스를 말리기는 커녕 카밀라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중재를 요청했던 다이애나를 겉으로만 들어주는 척 했고 사실상 방관했었다. 이 때문에 더욱 더 어쩔 줄 몰랐을 듯. 이런 상황에서 다이애나를 감싸준 사람이 바로 시아버지 필립 공이었다.[64]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을 때 시신과 장례 수습을 가장 앞장서서 주관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생전에 불화가 가장 심했던 전 남편 찰스였다.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여왕을 비롯한 왕실 일원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평소처럼 교회로 나가는 일정을 수행한 반면에 찰스만 왕실 일원들 가운데 직접 다이애나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던 프랑스 파리로 곧장 날아가 시신 수습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심지어 이 과정에서 여왕과 찰스 모자가 서로 의견이 갈렸던 탓에 언쟁까지 벌어졌지만 어찌되었든 찰스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관철되기는 했다. 다만 윌리엄해리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이 둘은 데리고 가지 않는 것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정작 어린 해리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확인하러 아버지와 같이 파리에 가고 싶어했다고. 찰스는 다이애나의 언니들과 함께 파리로 가서 시신을 확인하고 런던으로 운구하는데 진두지휘했으며, 비록 이혼했지만 한때 자신의 아내이자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하고 싶었는지 기존의 관례를 깨고 왕실 문양이 새겨진 깃발로 관을 덮은 채 파리 병원에서 시신을 운구하도록 지시하였다.[65]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더 퀸>이다.[66]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동안 크리스마스 정기 메시지를 제외하고 대국민 연설을 진행한 것은 총 5번으로 1991년 걸프전,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사망,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2012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2020년 코로나 팬데믹때 진행했다.[67] 시간이 지나며 불만이 사그라든 것도 있지만, 영국 왕실도 자신들의 씀씀이를 대폭 줄이는 등 지지율 회복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물론 태생 잘 태어나서 세금 먹는다는 논란은 끊이질 않지만, 찰스 3세의 불륜녀인 카밀라 파커볼스도 반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책잡히지 않으려고 정말 처신에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도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마녀'라고 불리며 찰스와 함께 왕실에서 제일 인기가 없다. 심지어 찰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었다.[68]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이 살고 있으며 일반인도 예약을 하면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7월에서 8월까지만 개장한다.[69] Cwm Rhondda로도 알려져 있는 웨일스 민요가 원본이다.[70] 웨일스의 조지 공자, 웨일스의 샬럿 공녀, 웨일스의 루이 공자[71] 서식스의 아치 공자, 서식스의 릴리벳 공녀[72] Director Wiz told NME.COM that the lead actress in the video is playing the role of “a contemporary Princess Margaret ? a sister of William and Harry maybe”.[73]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 영화 <더 퀸>은 개봉 첫 주에 250만 파운드를 넘게 벌었다.[74] 이 배역으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골든 글로브 드라마 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75] 그나마 찰스 왕세자의 이모인 마거릿 공주만이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결혼생활 때문에 다이애나의 결혼이 비극으로 전개될 것임을 눈치채고 경고하지만, 왕대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누이인 앤 공주는 다이애나의 인기를 시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다이애나의 탓을 하며 역정을 내는 것은 덤. 웃긴 점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남편 조지 6세가 어마어마한 애처가여서 두 사람 다 서로 죽고 못 살았을 정도였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딱히 불행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필립 공의 염문설 때문에 마음고생은 했어도 아들처럼 결혼생활 내내 그런것도 아닌데다, 필립 공 쪽에서 대놓고 외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가 전혀 아니였기 때문에 두 모녀가 다이애나를 질책할 입장이 전혀 아니였다.[76]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두 사람의 커플 팔찌를 결혼 3일 전에 주문해서 다이애나의 속을 박박 긁고 결혼 후에도 수시로 카밀라가 사는 곳을 방문한다. 거기에 자기 자신이 6주간 해외 순방을 할 때는 단 한번도 연락을 안 하면서, 정작 호주 순방 중에는 다이애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불만을 불륜녀인 카밀라에게 열심히 알린다. 그래도 이 순방 중에 다이애나와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사이가 잠시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호주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누리고, 호주인들이 찰스에 대해서는 "그분도 좋아요. 다이애나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럴 이유가 있겠죠."라고 말하여 주인공이어야 할 자신이 부속으로 취급받는 것에 열폭해 다시 냉랭해진다.[77] 원래 찰스 왕세자의 유모였던 메이벨 엔더슨을 고용하려 했으나 그녀의 존재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다이애나는 "그분은 나이가 너무 많다"며 거절했고, 시이모 마거릿 공주가 다이애나의 뜻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써서 데려온 인물이다. 참고로 메이벨 엔더슨은 필립 공 사망 후 엘리자베스 2세의 말년에 궁에서 자주 저녁 식사를 함께 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왕실과 가깝게 왕래하고 있다.[78] 왕세자비가 되기 전에도 유치원 보모를 자처했을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자신의 아이를 낳았으니 윌리엄이 얼마나 예뻤을지는.. 더군다나 결혼 1년만에 대를 이을 왕세손을 출산함으로써 다이애나의 입지가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후계자로서도 소중한 아이였을 거다.[79] 일어나자마자 엉금엉금 기어가 유모의 침대로 파고들었을 정도라고 한다.[80] 어린 나이에 임신한 다이애나를 안쓰럽게 여긴 시이모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직접 골라 추천해준 인물이다.[81] 윌리엄이 성인이 된 후로도 서로 다시 만남을 가진 적은 없다.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를 왕자의 유모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무례한 처사였다.[82] 이 곡에서 Diana는 그루피를 지칭하며, 이름이 다이애나인 왕세자비에게 결례를 끼칠 가능성을 고려하여 당시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된 곡이었다.[83] 다만 서울공항에 착륙하는 16초 지점에서 꽃다발을 주는 남자아이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했으며 주한영국대사관에서의 일정을 다룬 53초 지점 역시 환영 나온 여자아이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나서 밝은 미소로 손을 꼭 잡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6.25 전쟁 영국군 참전기념비 방문 일정을 다룬 1분 21초부터 봤을 때 역시 환영 나온 아이들을 보며 모처럼 미소를 짓는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아이들을 각별히 좋아하는지라, 찰스 왕세자와의 불편한 일정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84] 북한은 심지어 대만을 넘어 동아시아의 유명한 가수였던 등려군의 추모 우표까지 만들었다.[85] 당시에는 황태자였다.[86] 나루히토 천황은 키가 작다. 배우자인 마사코 황후보다도 작다.[87] 찰스 3세도 키가 178cm이다.[88] 게다가 샬럿이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할머니인 다이애나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다. 또한 윌리엄 왕세자의 세 자녀 중 샬럿이 가장 다이애나를 닮았다.[89] 첫째인 조지 왕자가 먼저 이렇게 부르기 시작해, 나머지 동생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