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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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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배우.
전후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 중 한 명이며,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1904년 5월 13일, 구마모토현 타마나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신(淳心)의 직업은 정토진종 본원사파 내조사의 주지승이었다. '치슈'라는 이름은 주지인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다. 아들을 절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렇게 지었다. 1911년에는 타마미즈 진조오 소학교에 입학했고, 소학교 졸업후에는 구마모토현립 타마나중학교(현 타마나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다녔다. #
타마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토요대학의 인도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승려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다. 이윽고 1925년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배우연구소 제1기 연구생에 합격해 입소했다. 후일 류 치슈는 인터뷰에서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후계자 이외라면 어떤 직업이든 좋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연구소 입소 후에는 쇼치쿠 영화의 "큰방 배우(大部屋俳優)[2] "라고 불리며 엑스트라 역이나 단역으로 10년 이상의 긴 무명 생활을 보냈다.[3]
1928년에는 무성영화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 '젊은이의 꿈(若人の夢)'과 '잃어버린 아내(女房紛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잃어버린 아내'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으며, 오즈 감독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아 단역으로 자주 캐스팅됐다. 1929년에는 '학생 로망스 젊은 날(学生ロマンス 若き日)'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를 거쳐 1930년 '낙제는 했지만(落第はしたけれど)'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갔다. 그리고 1936년에 개봉한 '대학은 좋은 곳(大学よいとこ)'에 출연해 처음으로 주연급 역할을 맡았고, 같은 해에 개봉한 오즈의 첫 유성 영화 '외아들(一人息子)[4] '에서 오쿠보 선생님 역을 맡았다. 이 작품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명에서 벗어나 유명 배우가 됐고, 오즈 사단의 필수적인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참고로 당시 류 치슈는 32세였는데, 할아버지 역을 맡았다.
류 치슈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5] 는 '아버지가 있었다(父ありき, 1942)'이다. 이 작품 이후 모든 오즈 야스지로 연출작의 주연이나 조연으로 출연해 오즈의 페르소나적 존재가 됐으며,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얼굴'이라고 불렸다. 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은 단역 시절 출연까지 포함하면 1927년 '참회의 칼날(懺悔の刃)', 1937년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淑女は何を忘れたか)'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오즈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6] '만춘(1949)', '무네카타 자매들(宗方姉妹,1950)', '초여름(麦秋, 1951)', '동경이야기(1953)', '동경의 황혼(東京暮色, 1957)', '피안화(彼岸花, 1958)', '안녕하세요(1959)', '가을햇살(1960)', '꽁치의 맛(1962)' 같은 오즈의 걸작들에 출연해 일본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쇼와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됐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서 선량하고 인자한 소시민적인 아버지를 자주 연기했다. 대부분의 오즈의 작품에서 담담하고 평온한 인물들을 연기했으며, 온갖 세상만사를 받아들이고 달관한 자애로운 아버지를 매우 잘 표현했다. 이러한 류 치슈의 연기는 오즈의 작품 세계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오즈는 류 치슈에게 너무 감정을 담거나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고, 여러 번 같은 대사를 반복하게 했다고 한다. 류 치슈는 후일 인터뷰에서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되는 것 같지만, 왜 그것이 선택되었는지는 끝까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 류 치슈는 긴 경력동안 '일본의 아버지상'을 일관되게 연기해 왔다. 그를 상징하는 아버지 캐릭터는 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경이야기'의 주인공 히라야마 슈키치가 대표적이다. 또 소박하고 인자한 아버지 캐릭터로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전후 쇼와 시대 일본 아버지의 상징이자 국민 아버지의 반열에 올랐다.[7]
신기하게도 대감독님들이 종종 나를 출연시켜주셨다. 시미즈 히로시, 시마즈 야스지로, 요시무라 코자부로, 기노시타 케이스케, 시부야 미노루, 오바 히데오, 이나가키 히로시, 치바 야스키, 오카모토 키하치, 오즈 야스지로, 야마다 요지… 이 거장들이 그것도 반복적으로 나를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영화의 좋고 나쁨은 결국 책(각본)과 감독으로 결정된다. 뛰어난 감독은 나쁜 책을 잡지 않고 자신이 쓰는 사람들이다. 그런 감독들의 작품에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축복받았다.
류 치슈 (배우가 될까 - 내 이력서) #
긴 커리어동안 300편이 넘는 영화와 9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한 엄청난 다작 배우였다. 세계적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로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야마다 요지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레귤러 캐릭터 '고젠사마'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기네스북에도 공인 기록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쇼와 시대의 일본을 대표하는 장수 인기 시리즈인데, 류 치슈는 전 46편 중 45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이 시리즈에서 주지승으로 등장했는데, 상냥한 할아버지상을 매우 잘 연기해 '국민 할아버지'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8] 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에는 세 편 출연했다. 1990년에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꿈'에 노인 역으로 출연했으며,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 '붉은 수염(赤ひげ, 1965)'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岡本喜八) 감독의 작품에도 종종 출연했으며, '일본의 가장 긴날(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1967),' '육탄(肉弾, 1968)' 같은 중후한 역사 영화에도 출연했다.
쇼와 시대의 거장 중 한 명인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작품에도 상당히 많이 출연했다. 주연 작품은 많이 없지만 조연으로서는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류 치슈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오즈 감독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인상을 주지만, 편수로 따지면 기노시타 작품이 사실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기노시타의 대표작인 '24개의 눈동자(1954)'에도 출연했다.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기노시타 감독의 특징이기도 한 서정적인 작풍으로 선량한 서민으로 묘사되는 연기를 하기도 했다. 또 서구권 감독들의 작품에도 종종 출연했는데, 폴 슈레이더 감독의 최고작이자 걸작으로 평가받는 '미시마 - 그의 인생(1985)'과 빔 벤더스 감독의 '이 세상 끝까지(1991)'에 조연으로 출연했다.[9]
1960년대부터는 TV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했다. NHK 연속 TV 소설 '타마유라(たまゆら, 1965)'[10] 에 주연을 맡아 처음으로 TV 출연을 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83년에는 스페셜 드라마 '파도의 쟁반'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당시 나이가 79세였다. 이 작품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문화청 예술제 대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83세에 드라마 '오늘 아침의 가을'의 주연을 맡아 역대 최고령 주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드라마 각본가인 무코다 쿠니코(向田邦子), 쿠라모토 준(倉本聰)[11] , 야마다 타이치(山田太一)는 류 치슈를 높게 평가해서, 자신들의 작품에 자주 캐스팅했다.
말년까지 평생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가, 1993년 3월 16일, 오후 2시 13분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연예계를 은퇴했던 하라 세츠코가 류 치슈의 장례식을 극비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유작은 1992년 개봉한 '남자는 괴로워 토지로의 청춘(男はつらいよ 寅次郎の青春)'이다.
3. 출연 작품[편집]
평생 3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다작 배우였기 때문에, 밑에 있는 작품들은 그의 모든 출연 작품이 아닌 일부분이다. 류 치슈가 출연한 모든 영화들은 이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겠지만 당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감독들의 작품에 상당히 많이 출연했다.
3.1. 영화[편집]
3.2. 드라마[편집]
4. 수상[편집]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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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영원한 파트너로 유명하지만 그의 둘도 없는 절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체격도 비슷하고[25] 얼굴도 상당히 닮았다. 두 사람의 생년월일은 5개월 정도의 차이밖에 안나지만, 류 치슈는 오즈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깍듯이 대했다.# 둘은 형제처럼 지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하며, 종종 여행을 같이 다녔다고 한다. 연기에 대해서는 "그저 오즈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남달리 숫기가 없었던 류 치슈의 성격을 잘 아는 스탭들은 그가 리허설할 차례가 되면 오즈와 그만 남기고 모두 자리를 피했다. 오즈는 류 치슈가 쉼없이 리허설 하는것을 허락해주었으며 원하는 방식으로 연기해낼 때까지 참을성 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후일 인터뷰에서 "침착 그 자체의 류씨는 항상 오즈 감독의 실전에서 떨었다. 나는 그 류씨를 보고 깜짝 놀랐고, 결국은 그 떨림이 나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새삼스럽게도 오즈 선생님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1991년 류 치슈는 '오즈 야스지로 선생님의 추억'이라는 수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류 치슈 "영화가 완성된 후 함께 여행을 가거나 (그가 무척 좋아했던) 사케를 마실 때, 그는 나의 진짜 아버지인 것 같았다." #
류 치슈 "촬영 전에 전원이 모여서, 대사 연습을 하는 거예요. 각본에 높낮이를 써서 음표처럼 외우는 거죠.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OK가 되지 않으니까, 이제 필사적으로 외웠죠(웃음). (중략) (오즈가) 배우를 도구로만 본 것은 아니군요. 설명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 대사나 움직임이 무엇 때문에 있는지, 이쪽은 모릅니다(웃음).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즈구미(오즈 사단)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가 말이죠, "선생님, 여기는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물으면, "기분 없음"이라고 말하셨죠(웃음)" #
"오즈 영화에서는 '생각하는 머리'가 아니라 '이해하는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연출을 가급적 이해하고 그대로 연기하는 것이 작품에 기여하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표현은 방해가 됩니다." #
-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의 구도를 굉장히 중요시 했다. 대표적인 일화로 1947년 '셋방살이의 기록' 촬영 당시, 오즈는 머리가 움직이면서 구도가 무너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머리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 연기하도록 류 치슈에게 지시했다. 그래서 류 치슈가 오즈에게 "그러면 좀 부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라고 항의하자, 오즈는 "네 연기보다 영화의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쏘아붙엿다고 한다.
- 좌우명은 "춘풍여재(春風如在)"이다. 또 "남자는 말하지 마라. 울지 마라. 흰 이빨은 일생 동안 세 번정도 보여주면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 그래서 커리어 내내 우는 연기는 거부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태생의 남자가 우는 일은 거의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즈 야스지로가 딱 한 번 류 치슈에게 만춘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게 울부짖는 연기를 주문했는데, 이때만큼은 류 치슈도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오즈의 연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 애처가로 유명했다. 매번 '나는 마누라의 말을 듣고 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년에 반려자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심적 스트레스가 발생하기도 했다. 2개월 후 류 치슈는 암이 발병했고, 의사가 권하는 수술도 '나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이윽고 그대로 조용히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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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1년 작품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에 조연(학교 교장선생님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당시 이 영화는 일본 후지필름사에서 개발한 첫 컬러필름으로 촬영한 영화였기에 당대의 배우들을 화면에서 거히 처음으로 컬러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일본 대중들이 흑백 영화에서 보아왔던 익숙했던 배우들의 모습이 컬러로 비춰질 때의 충격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류 치슈의 컬러 영상이 관객들이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는데 흑백화면에서 류 치슈가 보여왔던 일본의 전형적인 아버지상 이미지와 컬러 화면에서의 모습이 무척이나 다른 생경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 제작과정에서도 알려졌듯이 후지필름의 컬러 필름의 성능이 그닥 좋지 못했으며 당시 일본 영화제작업체들은 컬러 필름 촬영에 노하우가 전혀 없어서 화면에 배우들이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감을 전혀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흑백영화 촬영에 사용된 의상,영화배경,헤어,메이크업이 컬러 필름 영화에서는 모두 달라야 했으며 특히나 당시 후지필름의 컬러필름 성능저하로 메이크업에서 이를 만회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제작사인 쇼치쿠는 결국 해외 업체에게서 로열티를 지불하고 기술이전을 받아야 했다. 당시 메이크업 색조화장 테스트에서 가장 큰 낭패를 본게 류 치슈였다고 하는데 테스트 촬영때 모든 색조로 메이크업을 해보아도 류 치슈만 화면에서 발색이 이상하게 나와서 스태프들의 애간장을 태웠다고. 그 현장에서도 촬영 관계자들과 기노시타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자신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것에 미안해하며 수십차례의 메이크업 분장작업에서도 귀찮은 티를 내지않고 주변 스태프들에게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촬영에 임해 당시 관계자들에게 "연기뿐만 아니라 인품에도 격이 다른 배우"라는 평가로 존경받았다.
- 쇼치쿠 전속배우였으나 후일 쇼치쿠를 사직하고 프리로 일한 배우이다. 그러나 주연 비중이 아닌 배우였음으로 쇼치쿠가 아닌 타사 영화사 출연시에도 불이익은 그다지 없었으며 업계에서도 적이 없었기에 따르고 존경하는 후배들도 일본 영화계에 많은 편이다. 후배 영화인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고. 재능있는 영화 후배인들이 당시에 일본 영화계의 병폐였던 5사 협정(五社協定)[26] 때문에 피해라도 입은 사례가 있으면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사석에서 5사 협정의 불합리함에 대해 유독 격정적으로 비판을 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한다. 평소 온화한 성품에 그런 강직한 비판을 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 전후 오즈 야스지로가 연출한 모든 작품의 촬영 감독을 맡은 아츠타 유하루(厚田雄春)는 류 치슈에 대해 "스태프에게는 조명 담당이 없기 때문에, 로케이션에서 큰 레프를 메는 것은 항상 조수입니다. 그럴 때 도와준 것이 류 치슈씨입니다. 오즈구미(오즈 사단)의 촬영이라고 하면 수당 생각 없이 따라와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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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강하게 구마모토 사투리(구마모토벤)를 고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주연 제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투리는 류 치슈를 상징하는 소박하고 겸허한 캐릭터를 나타내는 일부가 됐다. 실제로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오즈 영화의 등장하는 아버지 캐릭터가 자신 그 자체였다고한다. #
- 친한 배우로는 히모리 신이치(日守新一), 카와무라 레이키치(河村黎吉)가 있다. 연 1회 페이스로 3명이서 하코네의 여관에 묵었다.
- 2015년 가와가나현에서 '류 치슈 사진회고전'이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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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를 존경한 빔 벤더스가 오즈에게 헌정한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에 인터뷰 출연을 했다. 이 작품에서 빔 벤더스가 배우로서의 류 치슈의 존재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주연 작품을 하루에 두 편 본 어느 날을 내레이션과 함께 "한 배우에게 그날만큼 존경심을 품은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 다큐에서 류 치슈는 오즈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류 지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류 치슈가 올바른 표기다.
- 류 치슈를 인터뷰 한 적이 있는 일본의 편집자 아라이 토시키는 "부드럽고 자연체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배우의 정수란'이라고 물어도 '호호호' 하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죠."라고 말했다. #
-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감독 스오 마사유키는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아 있는 배우로서 류 치슈를 꼽았다. 스오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나이가 들면 류 치슈 같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2023년 6월부터 7월까지 교토 문화 박물관 필름 시어터에서 '사후 30년 영화배우 류 치슈 특집'이 열려 그의 대표작들을 상영했다. #
6. 관련 문서[편집]
7. 외부 링크[편집]
[1] 1925년 7월 아버지가 사망해서 귀향해 잠깐 주지직을 잇기도 했으며, 다음 해 1월 형에게 주지 자리를 양보했다.[2] 무명 배우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3] 당시 대학생부터 연극청년, 경관, 형사, 권투선수, 영화 스카우트맨 등 여러가지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악역도 맡았다.[4] 후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표작 동경이야기(1957)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모와 자식"을 그리는 테마의 원점이 되는 작품.[5] 커리어 첫 주연작은 1937년 개봉한 우러러보니 존귀한(仰げば尊し)이다.[6] 류 치슈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다.[7] 오즈의 페르소나 중 한 명인 하라 세츠코는 착한 딸/며느리 이미지로 유명했다.[8] 그가 사망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인터뷰에서 이웃집 할아버지가 사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해준 시리즈다.[9] 이 두 감독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추종자로 유명하다.[10]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로 집필한 드라마다.[11] 대표작 북쪽 고향에서.[12] 첫 번째로 크레딧을 받은 영화[13] 첫 주연작[14] 미조구치 겐지가 한마디로 “천재”라고 부른 당대 일본 영화계의 거장 중 한 명이다.[15] 오즈 야스지로의 제자다.[16] 18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쇼와 시대 일본 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이 됐다.[17] 2부, 3부에도 출연했다.[18] 오즈 야스지로가 각본에 참여한 영화[19] 아들을 동반한 검객 시리즈로 유명하다.[20]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이다.[21] 오즈 야스지로 사후 기념 영화[22] 한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의 출연.[23] 오즈 야스지로를 경애하는 빔 벤더스가 오즈에게 헌정한 다큐멘터리 영화[A] A B C D E F G H I J K L 류 치슈 개인에게 수여한 상들이다.[24] 예술 문화의 발전에 엄청난 공적을 남긴 개인·단체에 대해 수여하는 공로상.[25] 오즈 야스지로 170cm, 류 치슈 171cm[26] 당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형 영화사들인 쇼치쿠,도호,신도호,다이에이,토에이가 1953년도에 맺은 협정이다. 말이 신사협정이지 이건 마피아 혹은 조직폭력조직이나 할법한 카르텔 협정이고 엄연히 시장교란,조작행위이다. 더군다나 이 협정이라는 게 5개 영화사 사장들이 모여서 각서같은 기록으로 남긴 것도 아닌 구두로 맺은 협정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에 TV가 도입되고 영화시장이 급속도로 쇠락해져가는 상황에 위의 5개 대형 영화사들도 배우들을 묶어두는 영화사 전속계약에 힘을 못쓰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사 전속제도에 기반한 스타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이후 5사 협정을 주도했던 다이에이 영화사가 1971년 부도처리되고 소멸하자 이 5사 합의 역시 같은해에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