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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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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169명(2019년 자가응답 통계 기준)
1990년 인구조사 때는 84만 2천여명에 달했던 적도 있었다.

1. 개요
2. 이민사
2.1.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의 이민
2.2. 러시아 리투아니아인들의 이민
2.3. 전간기와 냉전 시대
2.4. 소련 해체 이후
3. 종교
4. 인물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리투아니아 혈통의 미국인을 말한다. 종교는 주로 가톨릭을 믿으며, 폴란드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시카고 및 그 근교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카고는 20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가톨릭교도들이 미국으로 처음 이민왔을 때 정착하는 장소로 유명한 도시였다.

이 외에도 미국 유대인 중 조상이 리투아니아 출신인 경우가 적지 않다. 리투아니아인 중 유대인이나 립카 타타르 무슬림들은 시카고보다는 뉴욕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2. 이민사[편집]


기록상 미국에 이민한 최초의 리투아니아인은 1659년 내과의사 알렉산더 쿠르티우스가 오늘날의 뉴욕에 해당하는 뉴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2.1.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의 이민[편집]


19세기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퇴역 장교들의 연금 부족, 1808년 농노 해방, 1840년대 기근과 빈곤 문제, 인구 폭증 등등의 문제로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렇게 미국으로 이민한 프로이센 국민 중에는 독일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폴란드인, 실레시아인, 리투아니아인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프로이센의 리투아니아인들은 근세 루터교회로 개종한 이래 리투아니아인 민족 정체성보다는 독일인 정체성이 더 강했고 이들은 자신들을 독일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2. 러시아 리투아니아인들의 이민[편집]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795년 폴란드 분할로 멸망하고 러시아 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가톨릭을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박해하였고 동시에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유대인들을 관용했던 것과 다르게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서 유대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러시아 제국이 농노 해방을 선언한 19세기 중순 이후 발트 3국 전역에서는 이민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기간 리투아니아인들과 리투아니아 유대인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자국 내 정교회루터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는 이민 비자를 잘 발급해주지 않았지만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들은 불온 세력으로 보고 이민 비자를 잘 내주는 편이었고, 이러한 연유로 적지않은 폴란드인 인구와 리투아니아인 인구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60년부터 19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인구가 450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9%가 리투아니아인인 것으로 추정된다.[1]

비교하자면 리투아니아 북부 라트비아의 경우 미국 이민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고, 이러한 연유로 라트비아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 유럽 각지에서 이민이 활발했던 기간에 주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등으로 이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폴란드 민족주의와 분리된 형태의 리투아니아 민족주의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을 때라,[2] 1899년 이전에는 미국으로 온 리투아니아인 이민자들이 리투아니아인으로 등록되지 못하고 폴란드인, 독일인 혹은 러시아인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당시 리투아니아인들 중에서는 오긴스키, 사피에하, 라지비우 처럼 폴란드식 성을 쓰는 사람도 많았고, 리투아니아식 이름은 이를테면 비타우타스는 비토프트 같은 식으로 어설프게 등재되는 경우가 많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빌뉴스 시민들이 폴란드인에 완전 동화되다시피한 영향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같은 사례에서 보듯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은 서로 완전히 뚜렷히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2.3. 전간기와 냉전 시대[편집]


1918년 리투아니아 1공화국의 독립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인을 독립된 민족으로 등재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미국에서 유럽인 이민을 받고 싶어도 유럽에서 잘 오지 않는 것과 다르게 당시에는 미국 이민을 희망하는 유럽인들이 무척 많았고 결국 미국에서는 1921년부터는 리투아니아인 이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반유대주의가 사회 전반에 남아있었고 리투아니아 출신 이민자들 중에는 유대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와스프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별로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 다만 소련의 리투아니아 점거 이후부터 반공 성향의 리투아니아 난민들은 비교적 덜 엄격한 조건으로 미국 정착이 허용되었다.

2.4. 소련 해체 이후[편집]


소련이 해체되고 리투아니아가 다시 독립한 오늘날에는 리투아니아가 EU 회원국이 되면서 고소득 직장을 원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이 미국 대신 EU 내 다른 부유한 국가로 이주하거나 근로하게 되면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수가 격감하였다. 굳이 EU 회원국이 아니더라도 노르웨이가 부유한 산유국이 되면서 멀리 미국으로 이민가는 대신 모국과 가까운 노르웨이에 직장을 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며 리투아니아인들의 새로운 유입이 감소하면서 미국 내 리투아니아계 미국인들의 인구도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3. 종교[편집]


미국 유대인들 중 조상이 리투아니아 출신인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미국 유대인에서 찾기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에서 찾지 않는다. 근대 러시아 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들은 대개 현지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이민한 경우이고, 고향 지역의 비유대인 민족주의에 호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참고로 미국의 인구 조사는 자가응답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스스로를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은 대개 가톨릭 신도들이다.

미국에 최초로 유입된 무슬림들 중 최초로 모스크를 건설한 사람들이 바로 폴란드와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출신 립카 타타르인이었다고 한다.[3]


4. 인물[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참고로 당시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인구 중 적어도 68%는 유대인 아니면 폴란드계 러시아인 가톨릭교도였던 시절이었다.[2] 폴란드 애국시에 "(나의 조국) 리투아니아여" 라는 구절이 나온다던지...[3] 출처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저[4] 부계 쪽으로 립카 타타르 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