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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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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드러머.
2. 위상[편집]
Peace and Love
평화와 사랑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인 비틀즈의 드러머이며,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드러머 중 한 명이다. 그는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 14위에 선정됐고, uDiscoverMusic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12위에 선정, 롤링 스톤 독자 선정 위대한 드러머 투표에서는 5위에 선정, 모던 드러머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9위에 선정, Drumeo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7위에 선정, Watchmojo 선정 최고의 록 드러머 10인에서는 9위에 선정, 드럼 매거진 선정 역사상 가장 중요한 드러머 50인에도 선정됐다.
비틀즈 내에서 비중은 제일 낮았기에,[3] 팬들 사이에서는 종종 애정어린 놀림거리가 된다.
1965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함께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아서 이름 뒤에 'MBE'가 붙게 됐고, 2013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의 1등급에 해당되는 코망되르(Commandeur)를 수훈했다#. 2018년에는 음악에 대한 공로로 신년서훈명단에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이름 앞에 'Sir'가 붙게 되었다. 이로써 비틀즈의 생존 멤버 모두가 기사가 되었다. 링고 스타는 1999년 모던 드러머 명예의 전당(Modern Drummer Hall of Fame)에 헌액되었고, 2015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음악적 우수상 부문(Award for Musical Excellence)에 개인 자격으로 헌액됐다.[4] 또한 링고 스타는 2002년 타악기 예술 협회 명예의 전당(PAS Hall of Fame)에도 헌액됐다.[5]
3. 생애[편집]
3.1. 비틀즈 이전[편집]
링고 스타는 1940년 7월 7일,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링고 스타의 어머니 엘시 글리브와 아버지 리처드 스타키는 1936년에 결혼했다. 그들은 리버풀 빵가게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였다. 링고의 부모님은 결혼한 뒤 아버지의 가족들과 함께 딩글(Dingle)에서 살았다. 딩글은 리버풀에서 스코틀랜드 로드(Scotland Road) 다음으로 거친 곳으로 알려진 도심지로, 항구와도 가까운 곳이다. 이후 그와 밴드를 함께 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 살던, 그나마 약간 공기가 좋은 편인 교외지역보다 훨씬 건강에 나쁜 환경이었다. 링고는 당시를 회상하며 "딩글에는 공동주택이 아주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자 같은 집에 살면서 그곳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딩글 출신이라고 하면, 다른 곳에 사는 리버풀 사람들은 저 사람은 분명 불량배일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링고가 태어나기 직전 그의 부모님은 집을 마련했다. 공동 주택은 아니었지만 매드린 스트리트(Madryn Street)에 있는 지저분한 주택가의 테라스 달린 2층집이었다. 1940년 링고의 부모님이 이 집을 살 당시에 집세는 약 14실링 10펜스였다.
링고의 집안은 리버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이다. 링고는 인터뷰에서 "친가 쪽이나 외가 쪽이나 평범한 노동자 계급 가정이었다. 하지만 아마 증조할머니 때는 꽤 잘살았던 것 같다. 증조할머니는 크롬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외할머니는 아주 가난했다. 아이가 열네 명이었다고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링고는 1940년 7월 7일 새벽, 매드린 스트리트 9번지의 집에서 자정을 막 넘긴 시각에 태어났다. 예정일을 일주일 지나서 였는데 집게로 억지로 꺼내 보니 체중이 10파운드(4.5kg)였다고 한다.[6] 태어나서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고 하다. 링고의 어머니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마치 이전에 세상에 나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링고의 어머니는 26살, 아버지는 28살이었다. 그들은 첫 아이이자 외동아들이 된 아기의 이름을 리처드라고 지었다. 첫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시 노동자 계급의 전통이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리치(Richie)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링고가 뜨고 나서도 그의 가족들은 링고를 리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링고가 태어났을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하며 침대에 누워서 지내던 중에 전쟁을 알리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리버풀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링고가 살던 딩글에는 대피소도 없었고 가족들은 층계 아래 지하 석탄 창고로 뛰어갔다고 한다. 깜짝 놀란 링고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허둥지둥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거꾸로 든 채 어깨에 둘러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한다. 들어가서 바로 세워주니 링고는 바로 잠이 들어 공습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와 이웃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링고가 막 세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링고는 세 번밖에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존 레논의 부모님의 이혼과 달리 링고의 부모님의 이혼은 극적이거나 요란한 일은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맡게 되었고, 결국 편모가정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건강이 안 좋아서,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전이되는가 하면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꽤 오래 입원하는 동안 기타를 배웠고 간단한 드럼 연주도 배웠다고 한다. 13세가 될 무렵 어머니 엘지 스타키는 해리 그레이브스라는 런던 출신 남자와 결혼했고, 해리는 링고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빅 밴드 음악을 좋아했던 해리가 어린 링고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링고 스타가 살던 딩글 지역은 험한 노동자 동네였기 때문에 범죄도 빈번했고 분위기도 살벌했다고 한다. 링고 스타는 이 시기에 테디 보이 패션을 하고 다녔는데, 이유는 단 한가지, "얕보였다간 큰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리버풀의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을 위해 살벌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링고는 철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객선의 웨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다만 여객선 웨이터 일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배에서 일을 하다가 해군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서였다.[7] 여튼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직장에서 알게된 친구와 함께 스키플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해리 그레이브스는 1957년 크리스마스에 링고에게 중고 드럼세트를 선물하게 되고, 이후 링고의 음악 취향은 미국의 로큰롤로 바뀌게 된다. 이때는 아직 로큰롤이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이었다.
1959년 그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가 되었고 이때 즈음해서 '링고 스타'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1960년경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는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로 성장했고 함부르크 공연에서 토니 셰리던과 비틀즈를 처음 만나게 된다. 평소 자신들과 마찰이 잦았던 피트 베스트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비틀즈 멤버들은[8] 나이도 많고 성격도 좋은 링고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고 토니 셰리던도 링고에게 더 나은 밴드에서 활동하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링고가 비틀즈에 합류하기까지는 꽤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는 그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였고, 비틀즈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보다 한참 낮은 페이를 받는 풋내기들이었다. 게다가 링고 스타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의 스테이지 수입으로 (비록 악기 운반때문에 장만한 싸구려 자동차이긴 해도) 이미 차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먹고 살 수준이었고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나이도 많았다.[9] 그러나 결국 링고는 비틀즈의 제안을 수락하여 피트 베스트의 자리를 대신해 영입되었다. 그리고 녹음을 하러 와서도 이미 조지 마틴이 낙점해두고 있던 전문 세션 드러머인 앤디 화이트가 Love Me Do 세션 당시 링고 대신 드럼을 치는 등 자리를 위협받았다. 정식 합류 이후에도 공연 때 돌까지 맞는 등[10] 초기 멤버로 인정받기까지는 험한 길을 걸었지만 비틀즈 역사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3.2. 비틀즈 시절[편집]
비틀즈가 마침내 피트 베스트를 해고하고 1962년에 링고 스타를 영입했을 때, 그는 첫 공연에서 밴드의 이름이 아닌 킥 드럼에 그의 이름이 적힌 키트를 만들었다. 그것은 곧 바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링고 스타가 리버풀에서 가장 빠르게 떠오르는 록 밴드 비틀즈에서 자신이 얼마 못갈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비틀즈 멤버들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그를 필요로 했다. 조지 해리슨은 1962년 8월 18일, 링고 스타의 영입에 대해 열광했다.
조지는 이 당시를 "그 순간부터, 비틀즈는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저명한 비틀즈의 전기 작가인 마크 르위슨은 "그는 비틀즈가 항상 원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피트 베스트가 할 수 없는 모든것을 했어요. 그는 착실했고, 모든 스타일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노래에 추가적인 요소를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르위슨은 "그는 그렇게 많은 드러머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음악가들이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지만 조명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비틀즈는 이 모든 다른 스타일에서 215개의 트랙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트랙이 나쁜 드럼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답은 0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의 음악 활동은 드럼 연주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나, 데뷔 초기의 비틀즈는 아이돌이었고 그중에서도 귀엽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링고 스타가 소녀팬들이 가장 많았다. 즉 갓 데뷔했던 시기에는 링고 스타가 최고 인기 멤버였다. 비틀즈가 주연한 영화 Help!를 비롯해 비틀즈 주연의 여러영화에서 링고 스타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12] 그러나 왠지 동명의 곡 연주 때는 우산받이가 되었다.
비틀즈가 아이돌적인 색채를 벗어난 중기 이후에는 몇 번 보컬을 맡았는데,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음색이다. I Wanna Be Your Man, What Goes On,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Yellow Submarine, Good Night 등에서 대신 보컬을 맡았으며, 특히 'Yellow Submarine'은 아이들에게까지 반응이 무척 좋아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13]
비틀즈 후기에는 2곡을 작곡했다. 더 비틀즈의 Don't Pass Me By와 애비 로드의 Octopus's Garden인데 3,4분의 컨트리풍 곡으로 편하게 듣기 좋다. 이 때 조지 해리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3.3. 비틀즈 이후[편집]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 활동 초기의 "돈 벌면 미용실을 하나 차리고 싶다"는 발언과는 달리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며, 직접 작곡한 'It Don't Come Easy', 'Back off Boogaloo'[14] 등의 곡이 호평을 받았으며 'photograph''는 빌보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링고 스타의 작곡 실력이 절정에 달했을 시절의 앨범은 1973년작 "Ringo"로, 모든 비틀즈 멤버들이 참여해준 앨범이기도 하다. 링고의 인맥이 빛을 발한 또다른 앨범은 1974년작인 "Goodnight Vienna".
1970년대 초중반, 커리어 정점을 찍고서 링고스타는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애플 레코드와의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다른 레이블과 계약하게 된다. 이후 1980년까지 싱글들은 그럭저럭 팔리긴 하지만, 차트 상위권은 아닌 정도의 성과를 냈다. 1981년작 Stop and Smell the Roses도 조지 해리슨과 폴 매카트니의 도움으로 음악적 완성도가 꽤나 갖춰진 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상업적 실패들을 연이어 맛보게 된다. 야심작으로 준비한 Stop and Smell the Roses의 성과도 부진했으며, 특히 Old Wave 앨범 즈음에는 링고의 활동 본거지인 영국과 미국에서 음반 발매를 거부당하며 완전히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중간에 영화 활동을 해보기도 했지만 잘 풀리지는 않은 듯. 한동안의 실패로 인해 링고 스타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링고는 왕년의 로큰롤스타들[15] 을 영입해 슈퍼밴드 형식의 '올스타 밴드(All-Starr Band)'를 결성하게 되고 투어를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올스타 밴드 멤버들와 함께 제작하여 9년만에 발표한 앨범 Time Takes Time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링고 스타는 음악적 자신감까지 회복하게 되고, 투어를 중심으로 2-3년 마다 올스타 멤버와 함께 제작한 앨범을 발매하는 식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80살이 넘은 현재에도 앨범과 투어를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20년 12월에는 유명 아티스트들을 모아 'Here's To The Nights'라는 노래를 냈다. 폴 매카트니도 참여했다.
4. 드러머로서의 링고 스타[편집]
'세계 최고의 드러머'를 정의합니다. 테크닉적으로 능숙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감성으로 노래에 앉아 있는 사람일까요? 링고는 감성의 왕(king of feel)이었어요.[16]
― 데이브 그롤
링고 이전에, 드럼 스타들은 그들의 독주 능력과 기교로 측정되었습니다. 링고의 인기는 대중들이 드러머들을 보는 방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드러머가 작곡에 동등하게 참여한다고 보기 시작했어요. 링고의 훌륭한 자질 중 하나는 비틀즈의 노래를 위해 독특하고 스타일리시한 드럼 파트를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음악 없이도 링고의 드럼 파트를 들으면서도 그 곡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파트는 노래에 너무도 독특하죠.
그는 또한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 아니었던 최초의 드럼 스타였습니다. 링고는 60년대 영국 록 드러머 중 최초로 오늘날 록 드러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스티브 스미스[17]
(저니의 드러머)#
링고 스타의 지속적인 음악적 영향
링고 스타가 록의 가장 위대한 드러머 중 한 명인 이유[18]
이견이 없는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라고 평가받는 존 본햄이 데뷔하기도 훨씬 전부터 록 드럼의 기본을 정리한 시초 격 인물이다. 링고가 '드러머들의 드러머'라고 불리며 드러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이유다. 레드 제플린의 존 본햄도 록 드럼의 교과서로 불리기에 링고 스타가 묻히는 감도 있지만, 존 본햄보다 링고 스타가 한참 선배이며, 존 본햄이 활동할 당시엔 이미 많은 밴드의 드러머들이 링고 스타가 정리한 기본에 자신의 스타일을 가미해 연주하던 때였다. 즉, 링고 스타가 록 드럼의 기초를 정립했고 진저 베이커와 존 본햄과 같은 후배 드러머들이 그 위에 독창적 스타일을 가미하며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19] 링고 스타는 기존의 재즈 드럼이나 R&B 드럼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록 드럼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한다. 기본 비트에 충실하고 절제된 필인으로 곡 자체의 흐름을 잘 타는, 소위 말하는 밸런스가 잘 정리되어있는 드러머라는 평가를 받으며, 비틀즈 시절에는 다른 멤버들이 작곡한 명곡에다가 자연스러운 드러밍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곡의 완성도를 한 층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Back in the U.S.S.R. 녹음 당시 폴이 드럼을 쳤을 때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폴이 링고보다 롤주법 테크닉에 더 나은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Back in the U.S.S.R.의 드럼 트랙만 분리한 음원을 들어보면 폴이 다재다능한 연주 실력을 지니긴 했어도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 콜린스는 "링고는 대단히 과소평가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0]# 조지 마틴은 "그는 테크니션 드럼 연주자가 아닙니다. 그는 꾸준한 비트를 가진 훌륭한 견고한 록 드러머이고, 그는 그의 드럼에서 올바른 소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조지 마틴은 "그는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 그는 항상 우리가 노래에 알맞은 템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모든 비틀즈의 노래를 훨씬 쉽게 녹음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송 드러머(Song Drummer)입니다. 앉아서 노래를 듣고 그 노래에 맞춰 연주하는 남자죠.#
그는 우리 모두가 스튜디오에서처럼 연기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어요.
― 짐 켈트너 (드러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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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가 록 드럼의 가장 위대한 혁신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하며 그가 오늘날 록 드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믿습니다. 링고는 드러머들이 깨닫거나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링고는 오늘날 드러머들이 연주하고 있는 기본적인 록 비트를 만들었지만 아마 깨닫지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링고는 항상 드러머라기보다는 작곡가처럼 접근했습니다. 그는 항상 음악을 제공했습니다.
― 케니 아로노프[22]
(드러머), Modern Drummer,Oct. 1987#
링고 스타의 드러밍의 특징은 언제나 탄탄한 기본기였다. 항상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감성을 넣어 곡을 잘 채우는 드러머로 평가된다.[23] 링코 스타는 종종 무리하지 않고 적절한 양의 드럼을 노래에 추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프로 드러머들에게 긍정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그는 그가 연주하는 노래들에 대한 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하면 노래를 초과하지 않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즉각적으로 안다. 비틀즈의 첫 번째 단계에서, "She Loves You"와 같은 노래에서 링고의 드럼은 복잡하지 않지만 효과적이다. 이는 심지어 보컬과 악기에 지장을 주지 않고도 모션과 역동성을 더해준다. 사실 당시 록 뮤지션들 중에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고, 대중음악은 언제나 "많이 배우지 못한" 뮤지션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링고 스타는 그러한 시절에도 상당히 기본기를 잘 쌓은 드러머로서 정확한 박자감각을 잘 유지했다고 한다. 링고 본인도 자신의 박자 감각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작업할때 프로듀서였던 제프 린이 클릭 트랙을 사용하길 원했던 것에 링고는 "I am the fucking click!"[24] 라고 반발하며 부딪혔다고 한다.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라이브 연주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조건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열악한 음향 시스템[25] 때문에 밴드의 박자를 제대로 맞춰줄 수 없는 환경에서 링고는 자기 앞에서 기타,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의 엉덩이, 발, 머리 움직임을 보고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고 한다.
링고는 많은 방법으로 드럼을 바꾸었다. 그 중 하나는 독특한 머플링 기술의 사용이다. 그는 노래에 정말 맞는 소리를 얻기 위해 티타월에서 담배 봉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 사용하곤 했다. 그는 또한 재즈 스탠더드에 반대하여 그들의 키트를 줄인 최초의 드러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의 드럼 연주와 사운드는 굉장히 개성있다고 평가받는데 링고 스타 본인은 자신이 왼손잡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드럼 킷이 오른손잡이 연주자들한테 맞춰져 있는데 왼손잡이인 자신이 오른손잡이 세팅으로 어떻게든 연주 하려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개성있는 연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 예를 들어 "She Loves You"에서는 곡이 시작하자마자 터져나오는 링고의 개성있는 드럼 인트로를 들을 수 있으며, "In My Life"나 "Ticket to Ride", "Day Tripper"[26] 에서는 곡 전체에 깔려있는 링고의 독특한 드럼 어레인지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링고의 드럼 소리는 드럼 튜닝에 대한 링고의 비정통적인 접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많은 초기 로큰롤 드러머들은 여전히 재즈, 스윙, 비밥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같은 음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링고는 더 깊고 더 울려 퍼지는 음색을 원했다. 그는 탑헤드를 조이고 바텀헤드를 푸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는 또한 프론트 헤드를 제거하고 소리를 낮추기 위해 담요나 베개를 추가하면서 드럼의 음색을 바꿨다. 링고는 또한 톰 위에 놓인 얇은 티타올과 담배 한 갑 또는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하기도 했다. 마지막 손질로, 링고는 그의 톰톰에서 레소넌트 헤드를 제거하여 더 크고 평평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비틀즈의 유명한 옥상 콘서트 동안 이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링고는 또한 그의 하이햇을 정통적이지 않은 스윙으로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막대기를 수평 각도로 휘둘러 하이햇의 앞뒤로 힐끗 보았다. 그는 또한 끝이 아니라 막대기 가운데를 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기술의 장점은 그가 스윙의 각도와 그가 칠 끝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소리를 더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은 'I Saw Her Standing There'와 같은 히트곡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링고 스타는 항상 루딕(Ludwig) 드럼 세트를 사용했는데, 초기에는 잠시 프리미어 드럼 세트도 사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루딕을 선호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당시의 드러머들이 그러하듯, 초기에는 베이스 드럼의 구경이 20인치의 작은 것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커져서 22인치를 사용한다.[27] 링고 스타의 드럼세트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곳
링고의 풍부한 탐 소리와 섬세한 심벌 작업은 수천 명의 드러머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 Classic Rock Drummers, 2007년 출판#
링고 스타는 틀림없이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록 드러머이다. (중략) 비틀즈 시대의 몇 년 동안 그는 말 그대로 팝 드럼의 법칙을 썼는데, 레논-매카트니의 시대를 초월한 소재에 꾸준한 템포, 주머니 속 느낌, 그리고 후크(hook)가 있는 드럼을 채움으로써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스타일이 너무 초라하다고 불평하는 비평가들의 표적이 되어왔지만, 단순함은 그의 손에 있는 장점이었으며 모든 송라이터 드러머의 원형이 되었다.
― 드럼 매거진, 50 Most Important Drummers Of All Time
요약하자면, 링고 스타는 본인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록 음악계의 많은 영향력을 끼친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드러머이며, 그의 드럼 실력에 대해서는 거의 대다수가 찬사를 보낸다. 또한 그의 드럼 연주는 많은 드러머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를 드러머로서 이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굉장히 늘어나고 있다.[29]
5. 링고 스타에 대한 말들[편집]
믿을 수 있고 말도 안되는 드럼 연주가 영국의 기발함과 예리한 유머 감각을 만나다.
링고 스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의 고동치는 심장 그 이상이다. 그는 평생 음악가이며, 여러 세대에 걸친 드러머들의 롤 모델이자 진정한 그의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과소평가된다. (중략) 그는 아마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록 드러머일 것이다.#
링고는 항상 그의 드럼에서 독특한 소리를 얻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독특한 소리를 낸다. …링고는 독특한 드럼에서 더 큰 소리를 낸다. …링고의 드럼 음색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 링고의 탁월함의 이유 중 하나다. 또 하나는 비록 링고가 메트로놈의 정확성으로 박자를 맞추지는 못하지만 노래에 대한 그의 느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타이밍이 변동할 경우, 항상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타이밍을 조정하고 올바른 분위기를 트랙에 유지하고 견고한 기반을 제공한다.#
― 조지 마틴
링고는 우리를 만나기도 전에 리버풀에서 그 자신의 스타였다. 링고는 노래하고 공연한 프로 드러머였고 영국에서 최고 그룹 중 하나였지만 특히 리버풀에서 그랬다. 그래서 링고의 재능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났을 거야. 링고의 불꽃이 뭐든 간에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연기인지 드럼인지 노래인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뭔가 투사성이 있고 그는 개인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중략) 링고는 정말 좋은 드러머야(Ringo is a damn good drummer). 그는 항상 좋은 드러머였다. 그는 테크닉적으로 좋지는 않지만 링고의 드럼은 폴의 베이스 연주가 과소평가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과소평가 된 것 같다.
Ringo is Ringo, that's all there is to it. And he's every bloody bit as warm, unassuming, funny and kind as he seems. He was quite simply the heart of the Beatles.
링고는 링고야, 그게 전부야. 그리고 그는 보기만큼 따뜻하고, 겸손하고, 재미있고 친절하다. 그는 그야말로 비틀즈의 심장이었다.
Ringo’s just a lad. Everybody always loved him. And now that he’s all dried out, he’s just a lovable, interesting, intelligent bloke.
링고는 그냥 친구야. 모든 사람들은 항상 그를 사랑했다. 이제 그는 다 말라버렸으니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총명한 녀석일 뿐이지.
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드러머야. 정말로.
Ringo’s got the best back beat I’ve ever heard and he can play great 24-hours a day.
링고는 내가 들어본 것 중 최고의 백비트를 가졌고 그는 하루 24시간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드러머보다도, 링고 스타는 내 인생을 바꾸었다.
― 맥스 와인버그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스트릿 밴드의 드러머[30]
)[31]#
링고를 떠올리면 비틀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비틀즈를 떠올리면 완벽한 드럼 파트를 가진 완벽한 노래들이 기억난다. 두세 개의 마이크를 가지고 녹음된 BBC 생방송 테이프를 듣고 그가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 링고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드러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 짐 켈트너 (드러머)[32]
#
링고는 훌륭하다. 그는 위대하다. 사이먼 커크[33]
도 훌륭하고, 이안 페이스도 훌륭하다. 이 60년대의 영국 드러머들은 모두 대단하다. 그들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링고는 로큰롤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드러머다.
누가 링고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나는 그의 음악을 듣고 로큰롤을 시작했어[35] .
링고는 세계의 진정한 인간들 중 한 명이다. 네 명 중 계획이 없었던 한 명. 링고는 그저 음악에 빠져있었다.
그는 항상 실용적이고 힘찬 비트를 제공하는 드러머였다. 그는 이것을 바로 위트와 유명한 링고의 성격으로 해냈다. 그리고 그의 스파르타식 루드비히 키트는 리듬의 핵심을 경제적으로 끊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 래니 케이 (패티 스미스 그룹의 기타리스트)#
링고의 드럼은 음반에서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이다.
― 돈 워스[36]
(싱어송라이터)#
록 스테디 클럽의 베테랑에서 스튜디오의 혁신가로 드러머의 스타일적 발전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링고의 철저한 편곡 목록과 새로운 오리지널은 그의 다재다능함만이 그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 할 하울랜드 (모던 드러머 매거진 평론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무엇보다 드럼을 바꾼 앨범이었다. 그 앨범 이전에는, 로큰롤의 드럼 충전재는 거의 똑같았고, 이 음반에는 엄청난 양의 공기를 남길 공간 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음악적으로 가장 어필이 잘 되었고 드럼 소리도 많이 좋아졌다. 내가 지금 알아내야 할 것은 드럼이 그런 소리를 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 알 쿠퍼 (작곡가)#
Q) 링고는 실제로 "드러머로서" 달랐나요?
스티브 고먼[37]
) 매직 존슨이 "포인트가드로서" 달랐습니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축가로서" 달랐나요? 당연하죠. 사람들이 링고의 연주를 폄하하려고 하는 만큼, 어떤 드러머가 이 녹음들을 더 좋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아무도 제안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비틀즈에 더 딱 맞는 드러머가 없었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Q) 그의 연주가 "제법 단순했던건" "노래들과 관련"이 있나요?
스티브 ) "제법 단순하다"는 것은 "제법 완벽하다"는 뜻이고, "노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러한 로큰롤 걸작의 실행에 통합된 것"이라는 뜻이라면, 대답은 "예"입니다.
Q) 링고는 이후의 많은 록 드러머들보다 "직관성이 떨어졌나요"?
스티브) 절대 아닙니다. 록 역사상 가장 직관적인 드럼 연주자는 드뭅니다. 링고는 모든 곡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가장 시대를 초월한 드러머는 가장 간단한 사람들입니다.
― 퀘스트러브[38]
(더 루츠의 드러머)#
링고가 드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고무시켰다고 나에게 말해준 드러머의 수는 셀 수 없다. 링고 스타는 그가 악기의 테크니션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창의적인 조언, 시간의 감성, 비정통적인 충만함, 그리고 음악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비틀즈의 음악을 원래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비틀즈 네 명의 기여가 없었다면 비틀즈 음악은 그런 음악이 아니었을 것이다.
― 로빈 플란스 (타악기 예술협회 소속 저널리스트)#
링고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드러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이렇다 할 테크닉은 없지만 노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의 감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비틀즈의 음반에서 좋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프로덕션과 마이크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그가 튜닝한 방식 때문이었죠. 그는 엄청난 기본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의 앞에는 솔직한 태도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분명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팝 드럼을 연주했습니다. 그는 고음의 재즈 드러머들의 직책에서 소리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 피터 블레이크[39]
(미술가)#
링고에게 말했듯이, 저는 성공적인 로큰롤 밴드에 속해 있었어요. 그는 세상을 바꾼 밴드에 속해 있었죠. 그게 차이점이에요.
― 그렉 레이크 (킹 크림슨과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베이시스트)#
6. 여담[편집]
- 비틀즈 초기 시절에는 프로모 비디오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서서 연주가 불가능한 드러머 포지션의 링고는 병풍처럼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후기에 가서는 나머지 멤버들의 음악적 세계가 뚜렷해진 데 반해 링고는 자작곡이 2개 뿐이라 이따금씩 유머러스한 놀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특히 유튜브나 레딧 등지에서는 링고를 놀리는 게 일종의 밈으로까지 정착했다. Help!#나 I Feel Fine#또는 Paperback Writer# 공식 프로모 비디오의 댓글란을 확인하면 링고 놀리기의 향연을 볼 수 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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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언급도 안 됐다. 호머 심슨이 '됐어! 그래, 난 필요없는 존재야! 비틀즈로 치면 링고 스타 같은 존재라고!'라는 대사를 치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해당 에피소드를 봤는데 저 대사가 나오는 부분에서 호쾌하게 웃더니 '저런 소리 20년도 넘게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뭘'이라는 대인배스러운 성격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 500일의 썸머에서도 이 같은 발언이 나오는데 작중 조이 데이셔넬이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무도 안 좋아해서.
- 이러한 밈 때문에 지금 와서는 유머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1960년대 당시의 링고 스타는 비틀즈의 일원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뮤지션이다. 비틀즈의 인기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에서 소녀가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풀은 바로 링고 스타가 밟고 지나간 잔디이다.
- 어린 시절에는 건강이 너무 나빠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나마 심적으로 의존했던 일렉기타와 드럼이 링고의 정서에 큰 도움이 되었다.
- 비틀즈 해체 후 발표한 여러곡이 호평을 받았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코드는 3개 뿐이라며 조지 해리슨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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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링고는 조지를 용서하는 대인배적 성격을 보였고 전 부인인 모린 역시 이혼 후에 용서해주었다.[42] 관계도 모린이 48세의 다소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만했다고 한다.
- 모린과 이혼한 후 링고는 1981년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본드걸이었던 바버라 바크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링고가 마흔, 바버라가 서른 넷이었다. 바크도 링고와의 결혼이 두번째 결혼이며 1975년 이혼한 전남편 아우구스토 그레고리니가 있었고 둘 사이에는 1남 1녀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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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비틀즈의 정신이었으며,
폴은 비틀즈의 심장이었고,
링고는 비틀즈의 드러머(몸통)였다."[43]
(세계팝대사전 비틀즈 항목)
그러나 링고 스타가 없었으면 비틀즈는 전설을 완성하기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비틀즈가 10년이나 유지된 것은 링고 덕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44][45] 심지어 그룹 해체 후 따로따로 떨어졌을 때도 멤버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그들 사이의 다툼을 조정했다. ||
-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링고 스타는 2000년대 들어 2년 간격으로 꾸준히 정규 앨범을 내고있다. 그에 반해 폴 매카트니는 텀이 4~5년으로 꽤 길다. 하지만 이걸로 폴을 깔 수도 없는 게, 앨범 제작이라는 게 손쉬운 일은 당연히 아닐 뿐더러 폴은 중간에 '파이어맨(Fireman)'이란 이름으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내기도 했으며, 라이브 음반까지 따지면 링고보다 더 자주 음반을 냈다. 나이 많은 레전드 팝 스타들은 대부분 신보 안 내고 과거 곡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는게 보통이다. 링고 스타의 창작 활동이 특출나게 부지런한 편. 또한 링고 스타 신보에는 폴 매카트니가 피처링한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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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롤링 스톤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당신은 80세보다 수십 년 젊어 보여요. 재미있네요. 어렸을 때 그 수많은 병을 겪고도 말이예요."라고 말했는데 링고는 "저는 그것이 저에게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운동을 했죠!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아요. 운동을 시작했어요. 집 바로 옆에 체육관이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적어도 3일에서 6일 정도 그 체육관에 있어요.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걷잖아요. 제가 걷기 시작했을 때, 저는 몬테카를로에 살고 있었어요. 항구를 돌아다닌 후 다시 동네 식당에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에스프레소 더블을 마시곤 했죠. 저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여전히 더블 에스프레소를 즐깁니다. 그리고 저는 채식주의자예요. 매일 아침 브로콜리와 블루베리를 먹습니다. 저는 그저 저에게 좋다고 느끼는 일을 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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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이름 덕분에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팬들한테 억울하게 욕도 먹는다 갑충류 몬스터 랑고스타가 워낙 헌터들한테 짜증나는 몹인데다 발음부터 딱 글자 차이가 'ㅣ' 'ㅏ' 으로 워낙 비슷한 이름이라 그렇다.
- 아제로스에선 고블린으로 전생한 모양이다. 링고스타를 돕고 싶다면 '내 친구의 작은 도움'라는 퀘스트를 수행하자. 이 퀘스트의 원문은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 그의 장남 잭 스타키는 더 후 등의 밴드에서 객원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아시스의 객원 드러머로도 활동한 바 있다. 두 밴드 다 스타키에게 정식으로 가입하라고 제안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 실력도 뛰어난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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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 해체 이후 나머지 세 멤버들과 친분을 지속하며 멤버들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축 역시 링고 스타였다. 물론 비틀즈 해체 당시 링고 또한 폴과 불편한 일화가 있긴 했고,[47] 존 레논이 주도하던 예술가 모임에 참여하거나 조지의 앨범 및 콘서트 세션으로 참가하는 등 폴 보다는 존과 조지와 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솔로 앨범 Ringo 작업 당시 존, 폴, 조지 세 사람을 전부 참여시키는 등 비틀즈 전 멤버로서 가장 뛰어난 사회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생전에 나머지 세 멤버 모두와 작업물을 남긴 유일한 비틀즈 멤버 역시 링고 스타이다.#
- 2020년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최고의 드러머는 누구냐는 질문에 "저는 링고가 1위에요, 그는 다른 사람이에요. 2위는 본조[48] . 그리고 3위는 키스 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제가 정한 순위에요. 저는 그 세대 출신이기 때문에. 정말 좋은 드러머들이에요."라고 대답했다.#
- 6~70년대의 배우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기도 잘해서 감독 월터 셴슨은 링고를 "훌륭한 배우, 절대적인 자연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연작으로 가장 유명한 영화는 원시인이다. 다만, 영화의 평도 별로였고 흥행 결과는 미묘했다.
- 존 레논이 How Do You Sleep?으로 폴 매카트니를 신랄하게 디스할 때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 역시 링고이다. 다만 존과 폴이 1974년에 재회한 이벤트는 당시 존 레논의 정부였던 메이 팡의 기여가 조금 더 직접적이다. 1974년 당시 존은 요코와 별거하던 때였고 여자친구 메이 팡에게 친구 관계에 대한 조언을 듣고 폴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를 로스 엔젤레스의 스튜디오에 초대했다.[49] 폴은 화해를 받아들여 해리 닐슨의 앨범을 작업하고 있던 존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 있던 링고도 둘의 대화에 참여하며 둘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링고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존과 폴의 극적인 만남을 성사시킨 직접적인 공은 비서 메이 팡에게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과 폴이 만난 장면을 담은 유일한 사진을 찍은 장본인도 메이 팡이다.
-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실린 "Helter Skelter"가 끝나기 직전에 링고 스타의 외마디 절규를 들을 수 있다[50] . "I got blisters on my fingers! (손가락에 물집 났어)" 별로 어려운 연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매된 곡이 4분 내외 정도라 그렇지 실제 녹음은 30분 내외로 연속해서 세 태이크나 녹음되었다. 즉 한 곡을 논스톱으로 1시간 30분 가까이 연주한 것. 그러니 물집 나는 게 당연하다. 인터뷰를 들어보면 총 3시간 연속으로 드럼을 치고 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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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팬들이 보내는 팬레터에 사인 답장을 거의 다 해줬으나 2008년 10월 20일부터는 길거리 사인조차도 더 이상 안해주고 있다. 이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상을 올림으로서 알렸는데, 영상의 대략적인 내용이 "너무 바쁘니까 제발 그만 좀 보내달라. 이제부터 오는 팬레터는 죄다 쓰레기통에 버릴거다"라는 내용이라 비난을 좀 받았다. 영상 이 영상은 비틀즈 팬들에게 일종의 밈이 되어서, 링고를 놀릴때 밈으로 사용하고 있다. # #
- 2014년 방영된 파워퍼프걸의 15주년 기념 에피소드인 'Dance Pantsed'에 목소리 출연을 하였고 I Wish I Was a Powerpuff Girl이라는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불렀다.
- 빌보드 싱글 차트 Top10 안에 든 곡이 7곡 있다. 참고로 비틀즈는 4명 모두 해체 후 빌보드 Hot 100 1위에 한 번씩은 올라봤다.
- 커트 코베인은 "나는 존 레논을 숭배하고 싶었지만 링고 스타의 익명성을 갖고 싶었습니다. 나는 프론트맨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에 뒤에 있으면서, 동시에 로큰롤 스타가 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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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이적이 링고의 팬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외국인 한 명을 링고 스타로 분장시킨 다음 몰래카메라를 진행한 적이 있있었지만 보기좋게 실패했다. 우선 시나리오부터가 링고 스타같은 세계적인 거물급을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현실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내용인데다[53] 분장은 포털사이트 기사에 올라온 사진만 봐도 분장티가 팍팍 날 정도로 어설펐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적은 이미 가짜 링고스타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몰래카메라에 속고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덕에 잠시 링고 스타가 실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특유의 친화력으로 음악계의 마당발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올스타 밴드는 6~70년대의 거물급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존 본햄과 키스 문과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둘 중에 누가 다루기 까다롭냐는 질문에 둘다 어렵다고 답했다.# 롤링 스톤스의 드러머 찰리 와츠와도 친한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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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밈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한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자신이 모든 선거인단을 싹쓸이 하는 밈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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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교황청이 비틀즈의 예수 발언을 용서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자, 링고는 "성직자 성폭행 문제나 신경 써라.”라고 답변했다.
- 2020년 '평생 한곡만 들을 수 있다면, 뭘 듣겠냐'는 질문에 'Come Together'를 골랐다.#
- 2011년 리버풀의 도시 캠페인에 의해 링고의 어린시절 집이 철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캠페인의 비서 윌리엄 페일린은 이것은 비틀즈 유산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집은 철거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우리는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전체 지역사회를 참여시킬 것이며, 비틀즈 투어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 팬들의 불도저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 현재도 이곳은 비틀즈 팬들의 관광지가 되고 있다.#
- 2022년 10월 초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아 투어 일부 공연을 취소했다.# 이후 완치 판정을 받고 10월 11일 포틀랜드 공연부터 투어를 재개했다.# 그러나 10월 13일 재차 양성 판정을 받으며 남은 투어 일정을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7. 디스코그래피[편집]
7.1. 앨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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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싱글[편집]
7.2.1. 빌보드 1위[편집]
- Photograph (1973)
- You're Sixteen (1974)
7.2.2. 빌보드 3위~10위[편집]
- It Don't Come Easy (1971) - 4위
- Back Off Boogaloo (1972) - 9위
- Only You (1974) - 6위
- Oh My My (1974) - 5위
- No No Song / Snookeroo (1975) -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