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샤일로 전투

덤프버전 :

샤일로 전투
Battle of Shiloh

시기
1862년 4월 6일 ~ 4월 7일
장소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861-1863).svg미합중국(북부)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3-1865).svg미연합국(남부)
지휘관
율리시스 그랜트
돈 카를로스 부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알버트 시드니 존스턴
P. G. T. 보우리가드
병력
66,812명
44,699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1. 개요[편집]


남북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중요 전투이다.

1862년 4월 북군 지휘관 율리시스 그랜트는 철도도시 코린트를 노리고 테네시주의 남쪽 하단에 위치한 샤일로에 도하한다. 그런데 이를 포착한 남군이 북군을 도하지점에서 그대로 강물속으로 밀어넣어버릴 계획으로 오히려 먼저 선공에 나서면서 벌어진 전투다. 율리시스 그랜트가 연방에서 본격적으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피츠버그 랜딩 전투(Battle of Pittsburgh Landing)라고도 한다.



2. 배경[편집]


북군 사령관 할렉은 부하 율리시스 S. 그랜트가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을 점령한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오하이오와 캔자스까지 포함하는 서부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그랜트의 전공 덕분에 북군은 테네시의 주도인 내슈빌을 점령했는데, 이는 북군이 최초로 장악한 남부연합의 주도였다. 이후 할렉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서 교통의 거점들을 장악하여 남군의 물류망을 끊어버릴 계획을 세우고 이를 그랜트의 테네시 군에 명령한다. 그랜트는 이에 따라서 남쪽의 철도와 강의 배들이 드나드는 코린트를 목표로 테네시 남쪽의 샤일로에 도하하고, 야영지를 설치한다. 또한, 테네시군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진 북군 오하이오군의 돈 카를로스 뷰얼 또한 할렉의 명령에 따라 내슈빌에서 남하하여 그랜트에게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남군 지휘관들은 시간이 갈수록 북군이 샤일로에서 병력을 증강해서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따라서 북군이 준비가 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코린트를 나와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3. 전개[편집]


맙소사, 우리는 공격받고 있어! (“My God, we are attacked!”)

윌리엄 테쿰세 셔먼

남부군은 야밤에 코린트를 나와서 움직이는데, 시작부터 비 때문에 길이 진창으로 변하면서 처음에 계획한 공격시간(해가 뜰 5시 무렵)을 맞추는데 실패한다. 이미 해가 떠서 군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남부 지휘관들은 기습의 요소를 날려버렸다 생각하고 군대를 돌릴 것을 사령관 존스턴에게 건의한다. 하지만 존스턴은 계속 공격을 할 것을 고집하고 남군은 북군의 도하지점, 피츠버그랜딩을 향한다.

한편 샤일로 교회에서 야영하는 보병사단을 맡고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아침7시에 숲에서 나타난 남군의 산병을 마딱트린다. 앞에 나가있던 북군 산병들이 대규모의 남군의 움직임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하지만, 적이 코린트에서 기어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셔먼은 이것이 본격적인 남군의 공격이란 것을 깨닫는데 지체한다. 하지만 곧 남군이 대포까지 숲에서 끌고나오자 상황은 명백해진다. 이 기습으로 북군은 큰 혼란에 빠진다. 특히 전투 경험이 없는 연대들에서 상당수 병사들이 배가있는 북군의 도하지점까지 도망가버리면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오전동안에는 군 전체가 하천과 숲을 따라서 일직선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일단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하지만 재앙적인 사건이 그날 오후에 발생한다. 남군은 북군의 좌익의 측면이 습지대를 제외하고는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과감하게 습지대에다가 여단들을 밀어넣는다. 여기에 놀라서 북군의 좌익은 멀찌감치 후방으로 후퇴한다. 한편 북군의 우익의 셔먼과 맥클렌 사단 또한 같은 방식(우익 오른편이 습지였다)으로 측면이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멀찍감치 후방의 언덕으로 후퇴를 결정한다. 문제는 북군의 중앙에 있던 윌리엄 월레스와 프렌티스의 사단이 양익이 후퇴했다는 사실을 한참동안 모르고 있다가 남군이 양쪽에서 밀고들어오면서 포위를 당해버렸다는 것이다.

고립된 월레스는 결사항전을 하지만, 남군이 포위망을 완성시키고 대포까지 끌고와서 공격을하자 피해를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월레스가 갇혔던 지역은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드는 소리가 마치 말벌소리 같다고 해서 말벌집(Hornet's Nest)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끝내 지휘관 월레스는 전사하고 그의 사단은 여기서 항복한다. 하지만 남군도 어이없는 손실을 겪는데 지휘관 존스턴이 다리에 총탄을 맞아 전사한 것이었다. 특히 월레스의 사단을 "이걸로 놈들은 체크메이트다"(That makes checkmate on them)라며 몰아붙이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휘권을 잡은 남군의 보우리가드는 북군이 증원군도 없고, 이만한 손실을 입었으니 당연히 물러날 것이라 여기고 리치몬드에 승보를 전신으로 보낸다. 다음날은 "뒷 정리(Mop up)", 전과확대만 남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그랜트는 패주한 북군을 도하지점 야영지에서 재편성하면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다.

"(패주한 병사들이) 본래 어느 여단이었는지는 상관없다. 사단을 재편성하라."

율리시스 그랜트


그리고 늦은 오후 기다리던 루 월레스의 사단이 도착한다. 이 증원 병력을 받아서 가까스로 그랜트는 해가질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남군의 공세를 좌절시킨다. 그리고 밤 사이에 북군 오하이오군의 돈 카를로스 뷰얼이 보낸 대규모의 증원병력이 더 도착한다. 훗날 남군의 유명한 기병대장이 되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는 아직 보병 연대를 맡고 있었는데, 이러한 증원을 목격하고 보우리가드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한밤 중에 비가 내려서 찾지 못했고, 결국 이는 전달되지 못한다.

셔먼 : "이런, 그랜트 우리 오늘 악마의 날을 겪었군. 그렇지 않은가?" (Well, Grant, we’ve had the devil’s own day, haven’t we?)

그랜트 : "그래, 그래도 내일은 갚아주자고." (“Yes, lick “em tomorrow, though,”)

방어가 성공적으로 끝난 4월 6일 밤의 대화


"내일 정각 10시 전에 우리는 개같이 박살나겠군."(We will be whipped like hell before ten o’clock tomorrow.)

4월 6일 밤에 북군의 증원군을 본 남군의 연대장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그랜트는 전투에 아직 참가하지 않아서 피곤하지 않은 병력을 위주로 4월 7일 모든 전선에서 반격에 나선다. 북군의 대공세에 깜짝 놀란 남군은 패퇴를 연속하며 바로 전날의 전투 진행을 거꾸로 감듯이 밀려나다가 결국 코린트로 퇴각하면서 북군이 승리한다.

4. 결과[편집]


사상자가 북군 13,047, 남군 10,699명 발생했다. 이는 그때까지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었으며, 제1차 불 런 전투 등 그때까지의 남북전쟁 주요 전투보다 훨씬 많은 인명피해였다. 특히 북군은 포로로 3,000에 가까운 뼈아픈 손실을 겪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전투에 임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결국 남군의 영웅[1] 보우리가드를 패퇴시키면서 일약에 남북군 통틀어서 이름을 떨친다. 이후 남군은 미시시피강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로 반격하지 못했고, 북군은 미시시피주의 철도 요충지 코린트를 점령하여 주요 교통망을 장악했다. 코린트는 이후 빅스버그 포위전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또한 뉴올리언스, 배턴루지, 멤피스 등 주요 거점들을 북군 해군이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는데, 특히 북쪽에서는 이 전투의 사상자에 기겁하면서 그랜트에게 '도살자'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를 기용하는 것에 큰 반대가 일어나서 한동안 그랜트는 위기에 빠진다. 그래도 링컨은 그를 내치기를 거부하는데, 전투에 소극적인 다른 북군 지휘관들과 비교하며 "그가 싸우기 때문(He fights)"이라 했다. 그랜트의 상관 헨리 할렉은 직위를 해제시키고, 참모로 한동안 내버려 두는데, 이 때 그랜트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위로나 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교과서적으로 전쟁을 하는 할렉으로서는 그랜트가 지나치게 창의적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할렉이 동부전선의 사령관으로 승진해 떠나면서 다시 그랜트에게 기회가 오고, 빅스버그 포위전의 지휘권을 잡는다. 한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첫날 안일하게 기습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랜트와 할렉이 그를 비호하면서 살아남는다. 셔먼은 손과 어깨 두 발의 총상을 입고 세 번 말을 갈아타며 용감히 싸우고 휘하 병사들을 독려한 것이 인정받았다. 또한 이 전투를 계기로 셔먼은 의욕을 얻었고 그가 북군의 가장 중요한 장군 중 하나로서 일어서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남군의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이 전사한 것은 남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샤일로 이후로 남부는 다시는 웃지 않았다. (The South never smiled again after Shiloh.)

조지 워싱턴 케이블 (당시 신문사)

그는 텍사스 독립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유타 전쟁 등에서 풍부한 지휘 경력을 가졌으며, 전쟁 발발 당시에 실전 지휘가 가능한 연령이었던 몇 안 되는 현역 장성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그는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남군 전체에서 서열 2위였다.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본인이 존스턴을 남군 최고의 장군으로 꼽기도 했다. 존스턴은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전사한 장교들 중 가장 계급이 높았다. 패전 후 남부에서 존스턴은 'Lost cause' 신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 제1차 불 런(매너서스) 전투에서 남군의 승리를 이끈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