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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조선)/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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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은 우리나라 최초의 회곽묘로 한국 묘제사 및 고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조의 능제 형식은 이후 민간으로 퍼지면서 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등 다양한 한국의 부장 문화재가 땅 밑에서 썩지 않고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회곽묘인 만큼 세조 또한 수많은 국보급 왕실 부장품 및 서적과 함께 땅 밑에서 온전히 미라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을 타고 다녔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낙마도 굉장히 많이 한 왕이라고 한다.[1] 웃긴 건 낙마할 때마다 바로 벌떡 일어나 아픔을 참고 멀쩡한 척 말을 집어탔다. 사실 낙마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잘못해서 목이 부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크게 안 다쳐도 삐거나 멍들 각오는 해야 하는 터라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건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효령대군충녕대군의 스승이었던 이수 같은 경우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즉, 당시 낙마는 현대의 자동차 교통사고와 같은 큰 사고였다. 이외에도 날조, 과장된 측면이 있긴 한데 자기과시의 사례가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

이번 길에 세조가 그 용맹을 보이려고 일부러 노둔한 말을 타고는 노루를 쫓다가 그 말이 수십번을 넘어졌으나 문득 말에서 빠져나와 우뚝 서곤 하였다.

날씨가 차고 비가 온 뒤에 큰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모두 저고리 세 겹에 가죽옷을 껴입고 귀를 가리고 짐승의 털로 만든 두툼한 요를 뒤집어쓰고서도 오히려 추워서 떨었는데 세조만이 홀로 한 겹의 옷을 입고 팔뚝을 걷고 있어도 손이 불덩이처럼 따뜻하므로 보는 자들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여겼다.

세종이 또 평강에서 강무할 때, 세조가 화살 16발로 16마리의 사슴을 죽였는데, 화살 깃의 피가 바람에 뿌리어 옷이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인 이원기, 김감 등이 이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다시 태조를 뵙는 것 같습니다." 하였고, 세종문종도 항상 이를 칭찬하였다.

- 《세조실록》 총서(總序)[2]

  •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세조를 직접 '폐하(陛下)'라 호칭하며 조공 서한을 보내는 등 당대 일본과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에 성종 시절에도 일본에서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준 것을 보면 세조 시절부터 형성된 우호적인 양국 관계가 세조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기록에 의하면 신하들과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를 검색하면 1,200여건이 나오는데 이 중에서 470여건이 세조 시절이다. 세조는 이 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악기도 연주하고 춤도 추고 신하를 일으켜 같이 하기도 하고 술게임도 했다고 하는데, 사실 세조는 술자리를 단순한 회식 자리로만 활용하지는 않아서 가령 술자리에서 맘에 드는 신하를 기분에 흥겨워 승진시키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아무래도 술자리다 보니 각종 소소한 사건사고가 벌어지곤 했다. 이예는 왕의 자리인 어탑에 올라가기[3]도 하고, 정창손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정인지가 세조에게 라고 부르거나 태상이라 부르기도 하는 등 별별 사건이 벌어졌다. 특히 정인지가 가장 많이, 크게 사고를 쳤지만 정작 정인지는 큰 처벌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양정은 술자리에서 세자에게 양위하라[4]는 말을 해 참수당하는 큰 사건[5]을 일으켰는데, 후술했듯이 그날의 상세한 사정을 보면 매우 한심하다.
  • 세조는 신하들을 많이도 갈아치웠다. 아버지인 세종이 웬만하면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힌 반면, 세조는 정반대로 자주 갈아치웠다. 그 중에서 전설급인 것은 최단명 정승으로 정승이던 신숙주권람이 술자리에 대해서 간언 좀 했다고 임명 5일만에 파직한 후 새 정승을 임명해놓고 그 둘이 사죄를 하자 4일만에 복직시킨 일이 있었다.
  • 세조의 훈민정음(한글) 창제설이 있을 정도로 창제 과정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조 치세에는 문과의 초장 시험에 훈민정음이 반영되었고, 1464년(세조 10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과정에 훈민정음을 과목으로 포함하자는 건의가 나왔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자전(사전)인 초학자회는 1458년(세조 4년) 세조의 명에 따라 만들어 졌다. 이후에도 학자들은 세조의 한글보급사업에 따라 잠서주해(蠶書註解, 1458), 언해잠서(諺解蠶書, 1459), 사서삼경언해(四書三經諺解), 손자주해(孫子註解, 1461) 등의 한글책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또한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 불교 문헌이 번역 간행하여 한글 서적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 술자리를 원체 좋아해서 신하들이 술버릇으로 인해 술자리에서 막나가는 행동을 해도 처벌하지 않았는데, 말년부터는 아예 군주인 본인에게 변태적인 주벽이 생겼다. 광대로 찍은 신하를 데려다놓고 술자리에서 바보짓을 시키거나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 중에 대놓고 사관들이 '이 놈은 풍수쟁이인데 꼬락서니가 우스워 주상께서 어릿광대(배우)로 길렀다'고까지 힐난조로 평가한 안효례와 같은 막장스러운 사례도 있다. 안효례는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며 바락바락 우기는 버릇이 있는 풍수학자였는데, 잡학에 관심이 많았고[6] 이런 바보스러운 성격을 유쾌하게 여긴 세조에게 예능 담당으로 발탁되었다.[8] 그의 라이벌은 일단 제대로 된 문관 출신인 최호원[9]인데, 이 둘의 기록은 1464년(세조 10년) 이전까지는 업무, 사고 등과 관련되어서 등장한다.[10]
  • 변방인 평안도에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하던 양정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에서 늘 그렇듯 세조가 안효례와 최호원을 불러서 싸움을 붙였는데, 둘이 노려보기만 하고 키배를 붙지 않자 세조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저것들을 하옥하라'라고 광태를 부렸고, 최전방 평안도에서 야인을 상대로 고생하며 불만을 쌓다 돌아와 이런 한심한 꼴을 보던 양정은 퇴폐적인 조정의 꼬라지에 순간적으로 밸이 뒤틀렸는지[11] 세조에게 '그만 왕 노릇 때려치고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폭탄발언[12]을 했고, 세조는 피꺼솟해서 "내가 권력에 어디 집착하는 사람인가? 당장 옥새를 가져와라"라면서 양위 소동을 벌였다. 결국 세조의 주벽은 양정이 참수[13]당하고 아들들이 관노가 되는 끔찍한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 버릇을 그만두지 않았다.
  • 하루는 안효례가 "나는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고 허세를 부리고 최호원이 거기에 지지 않으려고 뻗대자, 세조가 이 둘을 불러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후원을 가리키며 '장소를 정해 줄 테니 거기다가 표를 꽂고 와라'하고 명령했고, 그 장소에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쳐서 귀신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매복시켜 놓은 뒤 안효례를 일제히 습격하게 만들었다. 멋모르고 표를 들고 그 장소에 간 안효례는 귀신들에게 습격당해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쳐 왔고, 2번 타자인 최호원은 그 꼴을 보고 뭐가 있는지 알고 갔기 때문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 세조가 안효례 등 여러 신하를 불러놓고 성리설에 대한 내용을 논하게 했는데, 구종직이 선(禪)에 대한 내용을 강론하다가 도저히 우겨대는 안효례를 이길 수 없어 두 번 절을 하면서 "항복합니다"하자 세조가 구종직을 라이벌인 최호원으로 교체했는데, 최호원과 안효례가 너무나 격론을 벌인 나머지 최호원이 임금 면전인 것도 잊고 "너는 백정 손자놈이다"라고 소리치고, 안효례는 거기에 "내가 백정 손자면 넌 내 아들놈이다"라고 받아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기겁한 대사헌 양성지가 이것을 처벌하기를 주청했지만 세조가 "이것들을 부른 것은 심심풀이를 하자는 것이니 내버려두자"고 했고, 안효례가 계속 난리를 피우자 양성지는 이번엔 직접 안효례를 돌아보면서 꾸짖기까지 했다. 신하들은 오히려 양성지의 탄핵이 너무 약하다고 한탄했고, 신숙주는 최호원을 끌고 가서 "안효례는 애초에 저런 자이지만 너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경고했다.[14]
  • 영국리처드 3세가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는 이른바 영국판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국에서는 그가 영국판 세조(수양대군)라는 말이 있다.[15][16]

  • 어린 조카와 동복동생들마저도 정치적 경쟁자로 보고 제거했던 패륜 행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의외로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히 효(孝)를 다하였는데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수양대군의 개인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세조는 부모로부터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데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17]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 5남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장남 계양군과 4남 익현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으며 세조는 즉위 이후에도 신빈 김씨의 아들들을 극진히 대해줬다.[18]

  • 대단한 애처가였는데 후궁도 둘뿐이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으며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뜯어 말리기도 했다.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 자식들에게도 나름대로 좋은 아버지였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차남인 예종은 아버지인 세조를 많이 닮아서인지 즉위 초창기부터 대신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의경세자의 빈인 소혜왕후 한씨를 기특하게 여기고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살아도 될 것을 허락하거나 며느리에게 효부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
























































[1] #.[2] 총서에도 자신의 왕권획득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엄청 자화자찬이 심하다.[3]세조실록》 2권, 세조 원년(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11월 20일 (신묘) 1번째기사. #.[4]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8일 (정미) 1번째기사. #.[5]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12일 (신해) 1번째기사. #.[6] 잡학 뿐 아니라 무예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무과에도 합격했다고 한다.[7]세조실록》 23권, 세조 7년(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1월 22일 (계해) 2번째기사. #.[8] 1461년(세조 7년)에 아버지의 삼년상 도중 상복을 멋대로 벗어버린 죄목으로 10악의 불효(不孝)를 범한 패륜아로 고발[7]당해 고신을 박탈당했다가 1464년(세조 10년)에 겨우 간신히 복귀했다. 법적, 사회적으로는 막나가는 인간이지만, 세조가 직접 지목해서 복귀시킬 만큼 아끼는 예능 담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자신의 업무인 풍수지리 관련 직무는 긴 기간 동안 매우 충실하게 수행했다.[9] 안효례는 49건 최호원은 25건인데 안효례는 세종 시기부터 기록이 등장한 반면 최호원은 세조 시기부터 등장하는 것을 보면 최호원은 한 세대 가까이 연하로 보인다. 기록으로 최호원이 안효례에게 '넌 백정 손자다'하고 패드립치자 안효례가 '오냐, 그렇다. 그럼 넌 내 아들이다'하고 받아친 적도 있다.[10] 최호원은 직무 관련 능력은 안효례에 못 미쳤는지, 몇 번인가 부적절한 보고나 조언을 올려 처벌된 적이 있다.[11] 사관은 양정이 훈구대신이면서 변방에 처박혀서 불만이 많았고, 한명회도 양정을 굳이 평안도에 둘 필요가 없다고 누차 간했는데, 대신할 사람이 없어 인사가 늦어졌고 양정이 이로 인해 더 화가 난 상태였다고 기록했다.[12]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8일 (정미) 1번째기사. #.[13]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12일 (신해) 1번째기사. #.[14] '신분에 맞게 처신하고 부끄러운 줄 알라'하고 경고하는 의미이며, 실록에도 비슷한 의미의 구절이 상당수 등장한다. 안효례는 상민 출신이지만, 최호원은 주위에서 같은 어릿광대 취급을 받더라도 일단은 유학을 공부해서 정식으로 임용된 문신이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잡학쟁이라도 상놈양반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책임은 전혀 다르다. 사관도 둘에 대해서 둘 다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안효례는 그래도 배운거 없는 집안 출신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최호원은 배운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다며 최호원을 더 깠다.[15] 기사.[16] 기사 2.[17] 신빈 김씨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18]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자신을 지지했다가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어도 인척이란 이유로 불문에 부치고 3남 밀성군이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중용하는 등 예우가 각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