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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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의미 확장과 이에 대한 지적
4. 비판
5. 재평가
6. 여담


1. 개요[편집]


신파극()이란, 근현대 동양(특히 일본)에서 서양연극을 기반으로 만든 연극을 가리키던 말이다. 즉, 일본의 기존 연극 문화인 가부키를 '구극(舊劇)', '구파(舊派)'이라 하고 서양 연극을 '신파'라고 했던 것이다. 1888년 즈음에 시작되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하였다.


2. 역사[편집]


신파극이 처음 나타나던 초기에는 계몽적, 선전적,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성격을 많이 띄었기에 감정적으로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과장된 연출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점차 정치색은 퇴색하고 나중엔 서민들의 현실과 애환을 그리며 이러한 치정이나 사랑을 다루는 평범한 내용이 다수가 되었다.[1]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산 신파극을 상영하거나 일부 직접 국산으로 자체 제작을 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국산 작품으로는 번안극 이수일과 심순애가 있다. 하지만 당시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신파극은 과거의 선전적, 정치적 색채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 했는데, 예컨대 극 내에서 변사가 개입하여 "아아, ~하지 아니한가!"와 같이 특정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과장스럽게 선동하는 연출장치가 존재했고,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주제의식을 아예 직설적으로 외치는 방식의 전개 방식이 남아있었다.

정치적인 내용이 아닌 순수창작물로서 인기를 얻었던 국산 신파극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임선규 작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작품이 있다. 임선규는 문예봉의 남편이다. 1936년 초연하여 훗날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생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의 주제가가 유명하다. 이 공연에서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가 심영이다. 내용은 가정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기생 일을 하던 홍도가 운 좋게 부잣집 아들과 결혼하지만 끝내 남편에게 버림받고, 결국 남편의 약혼녀를 살인까지 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신파극은 가정의 간통이나 로맨스, 사랑을 다루는 데 치중했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왜색이라는 여론에게 밀려 한국 신파극은 완전 소멸했다. 이미 1950년대 당시 몇몇 극소수의 연극을 빼고는 신파극이란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영화드라마가 본격적인 대중문화 장르로 발전한 까닭도 신파극 장르가 쇠퇴한 원인 중 하나다. 일찍이 1920년대부터 신파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낡은 연극방식이라고 지적한 사례가 충분히 보인다. 관련 기사


3. 의미 확장과 이에 대한 지적[편집]


이후 일본이고 한국이고 신파라는 장르는 소멸했지만 의미가 넓어져 신파라는 용어는 살아남았다. 대개 '감정 과잉,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핑계로 삼아 논리와 개연성을 무시하는 억지 전개 방식,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연출 방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즉, 오늘날 "영화가 너무 신파극이었다" 등등의 표현은 이런 의미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신파 장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의 비판 및 재평가 문단 역시 역사적 신파 장르가 몰락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당연히 넓은 의미, '감성팔이 위주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내용의 통속성과 관객 대중의 정서에 대한 자극'이 신파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 가지고 신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초기 한국영화 작품 중에는 표현과 내용 모든 면에서 일본의 신파극이나 신파 영화에 근접한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유사한 특성이 있다 하여 기타의 많은 영화를 신파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켜 다루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여러 정황을 살필 때 한국영화 역사에서 사용되는 신파라는 말은 일반인들의 언급과 학술적 용어 사이의 엄정한 구별이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2013), 《초기 한국영화와 전통의 문제》, 커뮤니케이션북스, 94쪽.

한편 신파를 이렇게 넓은 의미로 쓰는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첫번째는 유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파'라는 것은 '구파', 즉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되어 서양 극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극 = 서양 극이 되고 초기 근대 일본의 일본 극 vs 서양 극이 대립되던 시대가 지나간 지금은[2] '신'이라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더구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가부키를 애초에 향유하던 지역이 아니므로[3] 역시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던 시기에조차도 무엇이 '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신파'라는 말을 받아들인 셈이다. 모든 단어를 어원대로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단어 구조로부터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후술하듯이 의미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역사적 신파가 감정 과잉이 자주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감정 과잉인 작품이 신파극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감정과잉의 연출 방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며 이어온 정서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생겨난 것은 물론, 슬픈 장면을 통한 정화는 극 예술의 시작점에서부터 '카타르시스', '페이소스' 등의 단어로 이미 오래 전부터 서양에서도 극의 중요한 요소로서 중시하였던 만큼 인류 보편적인 연출 방식이다. 역사적 장르 표현과 혼동을 빚기보다는 대중들 사이에서 신파라는 말이 알려지기 전부터 널리 써왔던 한국식 표현인 감성팔이억지 감동이란 표현을 쓰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과잉'이라는 것은 그 기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장르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위에서 말했듯이 창작물에서 감정을 일절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고 '많이 표현됐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이다. 같은 작품이어도 사회적으로 감정을 활발히 표현하고 있다면 과잉이라고 느껴지지 않겠지만 감정을 절제하는 분위기라면 평범한 감정의 작품이어도 과잉으로 느껴질 것이다. 즉, 아래의 비판은 '작품 향유자들이 생각하는 작품 내 감정의 역할에 비하여 창작물의 감정이 너무 과하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신파극을 별 거부감 없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인으로서는 그것이 과잉이 되어버렸지만 외국인들의 문화로서는 그것이 과잉이 아닐 뿐이다. 이를 뭉뚱그려 '한국인은 신파를 싫어하는데 외국인은 좋아하더라' 식으로 말하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개중에는 '신파'라는 용어를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으로, 주로 비판적 의미로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 가령 "미국 영화는 (한국 사람이 보기에) 가족애 정서가 너무 과도하긴 하지만 신파는 아니다"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상업성이나 작품성에 영향을 주는 요소인지 명료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 용어는 타당성을 얻기 어렵다. 즉, "한국식 감정 과잉 A는 작품성이나 상업성을 저해하는 요소이지만 미국식 감정 과잉 B는 A와 이런저런 차이가 있어 그렇지 않다" 식으로 분석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용법이 타당성을 갖출 수 있다. 이 역시 '신파'라는 용어가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4. 비판[편집]






신파에 관한 모든 것들.
신파는 왜 비판받아야 하는가

평론가도 신파에 눈물을 흘릴까?
과거에 신파극이 존재했던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신파극은 2가지 요소에서 지적을 받았다.
  • 주제가 지나치게 통속적이며 비극적인 주제만 내세워 슬픔을 강요하고 억지 전개를 반복한다.
  • 극의 형식 요소에서 직설적인 요소만을 강조하여 예술성이 떨어진다.

현대에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이르러서 1번째 요소는 다소 극복하였음에도 2번째 요소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연극 표현기법으로 인해 자주 지적받는 편이다. 이를 아래 두 영화로 비교하여 알아볼 수 있다.

주제는 국가 정책을 따라 무고하게 희생당한 북파공작요원의 비극을 뼈대로 하고 있다. 주제만 놓고 보면 옛 신파극에서 애용하던 주제를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표현(연출)방식을 보면 작위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 인물들이 마치 관객을 노려보듯이 정면 샷으로 하나같이 웅변을 하고 있으며, 급박한 대치와 총격 장면에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죽는다.
  • 실미도 요원이 유한양행 앞에서 대치할 때 굳이 요원들 주려고 사두었던 사탕봉지를 떨어뜨리는 장면을 배치할 뿐만 아니라 감정이 고조될 때 구태여 슬로우모션을 강조하여 어떻게든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내도록 너무 눈에 보이게 배치를 한다.
이는 과거 신파극에서 변사가 "아아, ~~지 아니한가!"라고 관객들에게 직접 선동하는 것이나, 극중 배우가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냐!'라고 외치는 것과 유사하다.
관객들은 영화에서 의도하는 바가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서 '촌스럽다', '낡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4]

장애인이 등장하는 신파극에서는 슬픔이나 과장된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 장애 당사자를 시혜적으로 묘사해 이와 관련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감성팔이, 선즙필승 등의 표현들이 자주 쓰이는 데서 엿볼 수 있듯 별 이유 없이 감정적인, 특히 슬픈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크게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외국의 건조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5] '한국 작품은 유난히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거 없이 눈물을 유도하는 작품이 실패할 때면 '이제 신파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비평이 나오곤 한다. 2023년 더 문 역시 그러한 사례이다.해당 기사


5. 재평가[편집]


한국인 기준으로는 '감정과잉'이라고 느끼는 부분에서도 외국 기준으로는 '가족애' 등으로 비춰지면서 좋은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부산행에서 주인공이 좀비에게 물렸을 때 딸이 태어났을 즈음을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국내에서는 긴박한 좀비 추격 상황에서 갑자기 분위기를 해치는 대표적인 감성팔이 장면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해외에서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여겨 호평이 더 우세했으며 심지어는 "헐리우드보다 한국 영화계가 섬세한 감정표현 연출이 더 뛰어나다"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 더 그런 반응이 나오는데, 미국 특유의 가족애 정서와 한국식 감정과잉 연출이 잘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이 현상은 오징어 게임에서도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기사. 해외에서 한국식 신파에 대해 공감하는 코드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끈끈한 유대의식과 책임감'인데, 이것이 전통적인 가족상이 붕괴해가는 현 시대에서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주된 평이다.[6]

유튜버 김채호의 필름찢기는 자신은 신파를 싫어하지만 이런 신파 영화가 없어지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영화. 그 이유는 조부모부터 손주들까지 온가족이 영화관 나들이를 왔을 때는 모든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신파 영화를 볼 수밖에 없으며, 영화 시장에서 그런 신파 영화가 다 사라지면 결국 노인 세대를 극장에서 내쫓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국제시장보다 조커가 훌륭한 영화지만, 그렇다고 할머니를 모시고 극장에 갔는데 국제시장을 놔두고 조커를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6. 여담[편집]


  • '신파'라는 단어의 구성은 뉴웨이브와 정확히 동일하다. 단어가 만들어질 당시에 새로운 것이고 현대인으로서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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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사례로 엔카가 있다. 엔카도 처음엔 정치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부르던 노래였기 때문에 '연설하듯이 노래한다'는 뜻으로 연가(演歌, 엔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후 정치색은 퇴색하고 일반적인 일본 대중음악이 되었다.[2] 이는 비단 공연 문화뿐 아니라 대다수 서양 문물이 그렇다. 하물며 과자조차도 '양과자'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지만(염상섭의 '양과자갑' 등) 지금은 전통 과자를 한과라고 부르는 형편이다.[3] 여담으로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될 만한 실내 전통극은 없다. 그나마 판소리가 가까울 수 있는데 이 역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근세 조선에는 일본과 달리 실내 극장이 활발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조선 문화사와 일본 문화사의 큰 차이점으로 거론되는 점 중 하나이다.[4] 비슷한 사례로 일본 애니메이션일본 영화·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연출이 '오글거림'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이쪽의 경우에는 신파극의 영향도 만만치 않지만 그 이전에 가부키에서부터 과장된 감정과잉 연출이 시작된 바가 있다. 사실 근대 신파극 특유의 감정적으로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과장된 연출 자체도 일본의 재래 연극 문화인 가부키의 영향을 받았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도 하다.[5] 외국이라고는 해도 주로 미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CSI미국 드라마가 이러한 이미지가 강하다. "한국 드라마는 의사가 나와도 연애를 할 뿐이지만 미국 드라마에선 의사가 정말 수술을 한다" 식의 말이 이러한 인식을 나타낸다. (2012년 중앙일보 칼럼)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은 오히려 한국보다도 더 감정이 과잉된 작품을 생산하는 국가이기에 일본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 다만 후술하듯 미국 작품 중에서도 감정이 과잉된 작품은 꽤 있는 편이다.[6] 실제로 외화 중 월드워 Z에서 좀비물 마니아들에게 평가가 나빴던 대신 일반 관객으로부터의 평가는 매우 좋았는데, 이 영화 역시 가족애 정서가 드러나는 장면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