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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의 이자벨

덤프버전 :

잉글랜드 왕국 존 왕의 왕비
앙굴렘의 이자벨
Isabelle d'Angoulême


19세기 상상화[1]
이름
프랑스어
앙굴렘의 이자벨
(Isabelle d'Angoulême)
영어
앙굴렘의 이사벨라
(Isabella of Angoulême)
출생
1186년 또는 1188년
프랑스 왕국
사망
1246년 6월 4일 (향년 58세 또는 60세)
프랑스 왕국 퐁트브로 수도원
배우자
존 왕 (1200년 결혼 / 1216년 사망)
라 마르셰 백작 뤼지냥의 위그 10세 (1220년 결혼)
자녀
헨리 3세, 리처드, 조앤, 이사벨라, 엘레노어, 위그 11세, 에메르, 아그네스, 알리스, 기, 조프루아, 이자벨, 기욤, 마르그리트
아버지
앙굴렘 백작 에메르
어머니
쿠르트네의 알리스
문장
파일:앙굴렘 백작 문장.svg
1. 개요
2. 생애
2.1. 앙굴렘의 상속녀
2.2. 잉글랜드의 왕비
2.3. 라 마르셰 백작부인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 존 왕의 왕비. 잉글랜드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앙굴렘의 상속녀[편집]


앙굴렘 백작 에메르 테일페르와 알리스 드 쿠르트네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게 1186년에서 1192년 사이로 유추되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빼어난 미모를 물려받은 이자벨은 아버지로부터 앙굴렘의 비옥한 땅을 물려받게 될 상속녀였다. 그러나 남편없이는 상속을 받을 수 없기에 앙굴렘 가문과 대립하던 뤼지냥 가문의 위그 9세와 약혼했다. 어린 이자벨은 뤼지냥 가문으로 보내져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200년에 잉글랜드의 존 왕이 프랑스령에서의 봉신인 뤼지냥 가문을 방문하면서 이자벨의 운명은 달라졌다. 당시 아내와 이혼하고 신붓감을 찾던 존 왕은 이자벨을 보고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아름다운 이자벨에게 존 왕이 푹 빠졌다고 한다. 다만 아무리 이자벨이 엄청난 미인이었다고 하도 당시 33살이었던 존이 10살이 조금 넘었던 이자벨에게 반했을지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다. 이에 대해 형들이 있어 물려받을 영토가 적고 후계자가 없었던 존 왕이 영토와 후계자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이자벨을 탐낸 것이 아니냐는 좀 더 현실적인 분석 또한 나오고 있다. 아님 존 왕이 진짜로 그런 취향이었거나(...).


2.2. 잉글랜드의 왕비[편집]


앙굴렘 백작은 딸이 왕비가 된다는 말에 흔쾌히 존을 지지하고 이자벨을 뤼지냥 가문에서 빼돌렸다. 1200년 8월 24일 존 왕과 앙굴렘의 이자벨은 결혼식을 올렸다. 분노한 뤼지냥 가문은 프랑스 왕국필리프 2세에게 이 일을 제소했다.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 2세가 주군이고 존은 가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가능했다. 그러나 존은 소환을 거부했고, 이를 명분 삼아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아키텐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령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실정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자벨을 왕을 홀린 마녀라고 지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자벨은 왕의 어린 신부일 뿐, 아무 실권이 없는 꿰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였다. 1202년에 앙굴렘 여백작이 되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자벨의 재산은 존 왕이 관리했고, 이자벨은 궁중에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결혼하고 7년 뒤 첫 아이인 헨리 3세을 낳았다. 뒤이어 아들 한명과 세 명의 딸을 낳았다. 1216년 존 왕이 사망할 당시 이자벨은 서른이 조금 안된 나이였다. 이자벨은 어린 헨리 3세의 섭정 명단에 들지 못했기에 대비가 된 후에도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2.3. 라 마르셰 백작부인[편집]


1217년 이자벨은 장녀 조앤을 데리고 프랑스로 향했다. 자신의 전 약혼자인 위그 9세의 아들 라 마르셰 백작 뤼지냥의 위그 10세와 조앤이 약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20년 봄에 이자벨은 자신이 라 마르셰 백작과 결혼했다. 선왕의 비가 허락없이 재혼을 하자 잉글랜드에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이자벨과 라 마르셰 백작은 조앤을 볼모로 잉글랜드와 협상했고, 이자벨은 잉글랜드로부터 받는 연금을 지킬 수 있었다. 그후 라 마르셰 백작 부부는 20년간 프랑스 남서부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1240년대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대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이었다는 주장과 정치적인 이유였다는 분석이 있다. 1240년 루이 9세의 동생 알폰스가 푸아투의 영주가 되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라 마르셰 백작부부는 궁중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루이 9세의 모후이자 섭정인 카스티야의 블랑카가 이자벨을 마치 하인처럼 취급해 이자벨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소 근거가 부족한다. 한편 푸아투의 영주 알폰스가 위그 10세의 권한을 침범하자 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이유가 뭐든간에 잉글랜드까지 개입했음에도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루이 9세와 라 마르셰 백작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244년에 프랑스의 궁중 요리사 2명이 라 마르셰 백작부인 이자벨이 루이 9세와 알폰스의 식사에 독을 넣으라고 사주했다고 자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자벨은 즉시 성역인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1246년 6월 4일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1976년 영화 로빈과 마리안에서 빅토리아 아브릴이 연기했다.

2010년 영화 로빈 후드에서 팜므 파탈스러운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레아 세두.



[1] 실제로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