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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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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陽裕
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사륜(士倫).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출신.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고아가 된 것도 모자라 형제들까지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일찍 자립해야만 하였다. 비록 양유의 재능을 알아보는 친족은 없었지만, 오직 숙부 양탐만은 어린 양유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기며

"이 아이는 비단 우리 가문만을 대표할 준걸 정도가 아니라 시대의 임금을 보좌할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구나."

라 말했다. 이후 장성한 양유는 유주자사 화연(和演)의 휘하로 들어가 주부에 임명되었다.

영안 원년(304년) 8월, 화연을 살해하고 유주를 장악한 영삭장군 왕준이 양유를 치중종사로 삼았으나, 왕준으로부터 꺼리낌을 받아 제대로 된 일을 받지 못했다.

건흥 2년(314년) 3월, 왕준을 사로잡고 계성(薊城)을 점령한 석륵이 왕준의 부하였던 산기상시 조숭(棗嵩)에게 물었다.

"유주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가?"

이에 조숭이 답했다.

"연국(燕國)의 유한(劉翰)은 덕과 소박함이 장자(長者)라 할 수 있고, 북평의 양유는 간사(幹事)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륵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대의 말이 그러하다면 왕공(王公: 왕준)은 어찌하여 그들을 쓰지 않았소?"

조숭이 다시 답했다.

"왕공은 그들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여 명공(明公)께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석륵은 양유를 불러 쓰고자 하였으나, 양유는 석륵을 꺼려 몰래 선비족 단부의 영역인 영지(令支)로 달아났다.

당시 진나라로부터 표기대장군, 요서공(遼西公)이라는 관작을 받았던 단부의 대인 단질육권은 양유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이에 양유는 친구인 성반(成泮)에게 말했다.

"중니는 필힐(佛肸)의 부름에 기뻐하며 스스로를 포과(匏瓜)라 칭하였고, 이윤 역시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으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랴'라 칭하였소. 성현(聖賢)의 부름을 귀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단질육권이 나를 부르지만 내 어찌 그를 따를 수 있을리오!"

성반이 답했다.

"지금 화하(華夏)가 분열하여 무너지고, 구주(九州)와 섬들이 널리 쪼개져버린 바, 통치가 미치는 지역은 오직 역수(易水) 뿐이오. 다시 기반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강물이 맑아지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소. 하나, 인간에게 허락된 수명은 매우 짧아, 과거의 사람들도 이를 한탄하지 않았는가. 마소유(馬少游)[1]

가 이르길 '죽을 때까지 군(郡)의 관리를 지낸 것만으로도 족하다'라 하였는데, 하물며 국상(國相)의 지위라면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경이 이윤과 공자를 따르려는 마음은 이해하나, 이번이 신이 내린 기회임을 명심하게나."

그러자 양유는 마음을 바꿔 단질육권에게 귀순하였고, 낭중령, 중군장군에 임명되어 상경의 지위를 역임하였다. 이후로 양유는 단료에 이르기까지 단부의 다섯 군주를 섬기며 대대로 중용받았다.

함강 3년(337년) 3월, 단료가 당시 요동에서 할거하던 모용부의 모용황과 불화하자, 양유가 간했다.

"신이 듣기로,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곧 나라의 보배라 하였습니다. 모용부와 우리 국가는 서로 사돈으로 맺어진 사이이고, 그 수장인 모용황은 영덕이 있는 군주입니다. 병사들을 한데 아울러 서로 원한만 쌓고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는 일이므로, 신은 이것이 결국 재앙이 들이닥치는 원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이전처럼 모용부와의 교류를 확대하여 국가에게는 태산과도 같은 안정을 도모하고, 백성들에게는 마음 놓고 휴식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지만 단료는 양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연군태수, 북평상으로 삼아 외지로 보냈다.

함강 4년(338년) 3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쳐들어오자, 양유는 수천 호의 백성들을 이끌고 연산(燕山)에 올라 저항하였다. 천왕 석호가 양유를 뒤로 한 채 다시 진군을 재개하려 하니, 후조의 여러 장수들이 양유가 배후를 습격할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석호가 그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양유는 한낱 유생으로, 그저 자신의 명성과 절개가 아까워서 항복하지 않을 따름이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양유를 무시하고 단부의 수도인 영지로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후 석호가 영지를 떨어뜨리자, 양유는 저항을 포기하고 무리와 함께 산에서 내려와 석호에게 투항하였다. 양유와 대면한 석호는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경은 이전에 노예마냥 도망쳐 숨었더니, 오늘은 고고한 선비처럼 나타났구려. 그대가 정녕 천명(天命)을 알았다면 어찌 그때 도망쳤을까!"

이에 양유가 답했다.

"신은 과거 왕준을 섬기면서 그를 바르게 하지 못해 단부로 도망쳤으나, 단부마저도 온전케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하늘에 그물을 높이 걸어두시면서 사해(四海)를 휩쓸어, 유주, 기주의 호족들도 마치 바람에 나부끼듯 폐하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신의 재능에 견줄만한 이는 세상에 많으니, 신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석호는 흡족해하며 양유를 북평태수로 삼았고, 얼마 뒤에 중앙의 부름을 받고 상서좌승이 되었다.

함강 4년(338년) 12월, 후조군에게 패해 밀운산(密雲山)에 숨어있던 단료가 후조와 전연으로 각각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천왕 석호는 정동장군 마추(麻秋)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단료를 영접해오게 하는 동시에, 옛 단료의 신하였던 양유를 마추의 사마로 배속시켜 종군하게 하였다. 하지만 더 빨리 움직였던 전연의 모용황이 친히 나아가 단료를 먼저 영접하였고, 단료는 모용황과 후조군을 습격하자 모의하였다. 모용황은 모용각에게 정예 기병 7,000기로 밀운산에 매복해있다가 후조군이 오면 기습케 하였고, 마추의 후조군은 모용각의 매복에 당해 삼장구(三藏口)에서 대패하여 죽은 자가 6~ 7할이었다. 마추는 말까지 잃은 채로 발로 걸어서 전장을 빠져나와 겨우 목숨을 구하였으나, 양유는 전연군의 포로가 되어 모용황에게 넘겨졌다. 모용황은 일찍이 양유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를 낭중령으로 삼았다가 당국(唐國)내사로 옮겼다.

함강 7년(341년) 정월, 모용황의 명령을 받아 용산(龍山) 서쪽에 성 축조를 감독하였고, 그곳에 종묘와 궁궐을 세운 뒤 성은 용성(龍城), 궁궐은 화룡궁(和龍宮)이라 명명하였다.

함강 7년(341년) 7월, 모용황이 동진으로부터 조서를 받아 대장군에 임명되자, 양유는 좌사마로 옮겨졌다.

함강 8년(342년) 10월, 양유 등이 용성을 마침내 완공시키니, 모용황은 수도를 극성에서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양유는 모용황을 종군하여 고구려, 우문부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고, 이때 그의 모략이 활약한 바가 많아 모용황은 그를 중히 여겼다.

양유가 모용황을 섬긴 날은 비록 다른 신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지만, 그 총애와 신임은 다른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의 성격 또한 겸손하여 늘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강직함과 자애로움을 두루 갖추었고, 생활도 소박하여 조정에서도 항상 베옷을 입고 근무하였다. 방랑하던 유민이 죽었을 때, 그 어린 자녀들을 거두어 대신 보살피기도 하니, 현명한 자이든 우매한 자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62세의 나이로 전연에서 세상을 떠났고, 모용황은 그의 죽음을 무척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1] 복파장군 마원의 사촌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