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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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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수소폭탄 실험의 성공을 알리는 중국의 프로파간다 방송.

1. 개요
2. 진행
2.1. 중국의 핵개발
2.2. 중국의 ICBM 개발
3. 현재 중국의 핵무장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양탄일성(两弹一星)은 '두 개의 폭탄과 하나의 인공위성(Two bombs, One Satellite)'이라는 뜻의 한문 표어로, 1960년대 중국에서 진행했던 핵무기 및 장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 계획을 가리킨다. 어휘 '양탄(两弹)'은 원자폭탄수소폭탄을, '일성(一星)'은 인공위성(동방홍)을 지칭하는데,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기 위한 발사체 기술은 곧 ICBM 기술과 직결되기 때문에 '핵무기의 투발 수단'으로서 함께 묶여 진행된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중소결렬 이후 기존의 적이였던 미국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모셨던 소련과의 사이도 악화되자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과 유도탄을 개발하여 안보를 담보하려고 했으며, 1960년대 부터 70년대까지 차례대로 원자폭탄, 수소폭탄, ICBM을 개발하게 된다. 중국은 양탄일성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을 의식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독자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렇게 강화된 국력 덕에 국제 무대에서 중요한 외교 플레이어가 된 중국이 대만을 축출하고 UN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얻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양탄일성의 핵심 인력은 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유학파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매카시즘 열풍이 불 때 중공의 간첩으로 몰려 박해를 받고 귀국했는데, 공산주의를 때려잡자던 매카시즘이 중국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인재들을 양성해준 셈이다.


2. 진행[편집]



2.1. 중국의 핵개발[편집]


중국의 핵개발은 1955년 첸쉐썬 박사와 함께 매카시즘 분위기의 미국에서 코로 콜라를 마시던 100여명의 과학자들[1]이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첸쉐썬 박사는 상하이교통대학 출신으로 MIT에서 석사를, Caltech에서 수학과 항공 공학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MIT 교수를 거쳐 캘텍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참여하였는데, 1950년 매카시즘 시기에 중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5년간 감금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에서 잡힌 미군 포로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돌아왔다.

처음에 중국은 소련에게 기술을 이전받아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거액을 챙기고도 중국에 기술을 이전해주는 척만 하고 핵심 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2] 거기에 중소결렬로 그나마 있었던 소련 기술진들도 1959년 중국에서 철수하여 중국은 자체 기술진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중국은 해상으로부터 미국에 의해 봉쇄되었고, 소련과 사이가 틀어져서 북쪽으로도 안보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인도와도 사이가 매우 나빠져서 남북 양쪽에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중국의 첫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미국 유학파인 덩자셴(邓稼先, 1924-1986)박사였다. 1941년 중일전쟁 당시 쿤밍으로 도피한 여러 대학이 연합해 만든 서남연합대학에 입학해 1945년 졸업했다. 1946년 미국 유학을 떠나 1950년 미국 퍼듀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핵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친한 고향 친구이자 유학 동기인 양전닝(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미국에 남는 것을 선택했지만, 덩자셴은 귀국을 선택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지 1주일 만에 중국행 선편을 타고, 1950년 10월 바로 귀국하여 중국과학원에서 핵물리학을 연구했다. 소련과의 결별로 1959년 독자 핵무기 개발이 결정되자 이론 팀을 맡아 여러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실행하여 핵무기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덩자센은 직접 핵실험을 참관하기도 했는데, 이때 여러번 방사선에 노출되어 비교적 젊은 나이인 1986년 암이 발병해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양탄일성에 참가한 대부분의 다른 과학자들이 모두 90대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몸이 갈려 나간 것이다.

중소결렬 후 1959년 미사일 독자개발을 시작하여 소련의 R-2의 복제부터 시작했고, 이후 자체 기술을 축적하여 유명한 둥펑(DF) 시리즈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다. 한편 핵무기는 1962년부터 개발을 추진했고, 2년만인 1964년 10월 16일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뤄부포 지역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596 프로젝트(원자폭탄)를 성공했다. 그리고 3년뒤 1967년 6월 17일에는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TNT 3.3메가톤 위력의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핵처리 시설의 폭격을 검토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미국과 소련이 합동으로 중국의 핵시설을 외과수술식으로 정밀하게 폭격하자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케네디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에 베트남 방면에서 중국의 전면적인 개입을 부를 수 있는데다가, 오히려 중국이 다시 소련에 접근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했다 10년이 지나서 브레즈네프가 닉슨에게 역으로 미국과 소련이 합동으로 중국을 혼내주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그때는 닉슨이 거절해버렸다.

핵실험성공을 알리는 인민일보의 호외호.
파일:external/img.hexun.com/121023715.jpg

핵실험 직후, 세계 최초로 핵폭발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의전투를 했다. 참가부대가 전원 피폭당해 즉사했다는 도시전설이 있긴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나중에 여기에 참여한 사람 중 상당수가 암에 걸려서 고통속에 죽었겠지만...이때 사용된 핵폭탄의 폭발력은 22킬로톤으로 팻 맨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훈련은 방사능의 폐해가 알려지기 전인 핵만능주의에 미친 시대에 미국과 소련도 자주 벌이던 짓거리다.

영국이 핵실험을 성공하고 나서 5년만에 수폭실험을 성공했고 프랑스는 첫 핵실험 이후 8년이 지나서야 수폭실험을 성공했던 걸 감안하면, 중국이 얼마나 인밀레를 울렸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중국은 미국-소련과 같은 양대 강국에 덤으로 인도까지 모두 적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기살기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중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핵실험이 성공한 직후 김일성이 방중했는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회견하던 도중 "핵개발에 도대체 얼마 들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국가기밀이라 답변에 머뭇거리자 마오쩌둥이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혈맹인데 비밀이 어딨나. 약 40억 달러 들었다네."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40억 달러면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임엔 틀림없다.[3]

파일:external/i0.sinaimg.cn/U2883P112T3D245434F1819DT20081014175532.jpg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참관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로 성공을 보고하는 부총참모장 장아이핑 상장. 아이러니하게도 장아이핑 상장은 문화대혁명4인방 집권기 때 첸쉐썬 박사에게 까였다.


2.2. 중국의 ICBM 개발[편집]


중국의 ICBM개발은 위의 첸쉐썬 박사의 귀국과 함께 소련과 유도탄 라이센스 협정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소련은 이미 대륙간 탄도탄급인 R-7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은 당시 소련의 외교방침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지만, 전략무기인 R-7을 제공하지는 않고, V2의 단순복제형인 R-1과 이의 사정거리만을 늘린 R-2를 제안했다. 미사일을 포함한 전투기, 구축함, 잠수함에 대한 광범위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자 소련은 총 1400여명의 기술진을 파견하였고, 이들 중 미사일 전문가는 100여명이었다.

중국은 소련의 설계국을 모방한 여러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첸쉐썬 박사는 탄도 미사일만을 담당하는 제5연구원의 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기반기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술흡수가 매우 미진하였다. 기초적인 기계제작 기술마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장장이들이 무기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소련 측은 계약과는 무관한 용접기술이나 공작기계 취급법까지 전수해야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 서기장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의 세계혁명론을 수정,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반대했고, 이렇게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점점 나빠짐에 따라서 소련의 기술 전수는 무성의해지고, 특히 핵심 기술에 관련된 문서는 절대로 중국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가 흔들리던 중국과 소련은 1960년 완전히 결렬되었고, 중국에서 기술개발을 돕던 소련 기술진은 모두 소련으로 돌아갔다. 중국측에 남겨진 것은 첸쉐썬 박사를 비롯해 국공내전 이전에 미국-유럽에서 공부한 석박사급 인재 100여명, 소련에서 수입한 R-2 시제품 및 소련인들이 귀환하면서 미처 파기하지 못한 문건들, 그리고 소련에서 공부를 마쳤거나 혹은 재학중 송환된 젊은 인재들이었다.한편 이 소련에서 유학중 소환된 귀국자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여 몰살당하는 사고도 있었고, 중국측은 이를 소련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첸쉐썬 박사는 한편으로는 미사일 기술 인재들을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의 기술고문단이 지도하던 복제작업을 독자적으로 감독했다. 첸쉐썬팀은 1960년 11월 내몽골에 위치한 주취안 우주기지에서 R-2 복제형인 둥펑(DF)-1의 발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하지만 약 1000km의 사정거리만을 갖는 DF-1은 전술적인 가치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좀 더 늘어난 사정거리를 보유한 미사일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카피할만한 원본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수히 중국 기술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하고 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단순 복제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몇년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DF-2는 일본을 사정거리로 두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으나 계속 실패했다. 첸쉐썬 박사는 몇년간 베이징 자택에도 돌아오지 않고 주취안에 상주하면서 미사일 개발을 감독할 정도였다. 5년간의 실패 끝에 DF-2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한 개량형 DF-2A는 1965년 발사에 성공했으며, 여기에 막 개발된 중국의 핵폭탄을 탑재하여 발사하는 실험도 성공하였다. 이 실험 성공으로 첸쉐썬 박사는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첸 박사가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은 이미 구식이기 때문에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첸을 중국으로 추방한 미국 관계자들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벌어진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의 여러 연구기관은 타격을 입었고, 제5연구원도 홍위병 직원들이 난동을 벌여서 원장이었던 첸쉐썬이 2주간 물러나고 홍위병이 접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개입하여 홍위병의 접수는 진압되고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여러 차질을 빚기는 했지만, 중국정부는 안보를 위해서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홍위병의 습격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 과학자들에게 보디가드를 붙여주었을 정도였다.

첸쉐썬 박사는 DF-2를 개량한 동방홍 로켓을 개발, 동방홍 위성을 띄워서 중국이 스페이스 클럽에 세계 5번째로 가입하게 하는 대업적을 이뤘다. 사실 동방홍 위성은 프로파간다용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모스크바워싱턴 D.C.를 때릴 수 있는 DF-5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첸쉐썬 박사는 4인방을 지지하고, (4인방이 싫어하던) 덩샤오핑 주석 인맥인 제2포병 사령관 장아이핑을 디스하다가 1970년대 후반 4인방이 몰락하자 제5 연구원에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 때쯤 되면 중국은 첸쉐썬 박사급의 인재들이 여러 명[4]인데다가, 첸쉐썬 박사가 이미 수백여명의 인재들을 길러냈기 때문에, 미사일 개발에 차질을 빚지는 않았으며, 1980년 주취안에서 발사한 ICBM이 태평양 공해에 착지하는 실험을 완료하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ICBM 클럽에 가입했다. 이 ICBM은 DF-5라는 이름으로 1981년 실전 배치된다.


3. 현재 중국의 핵무장[편집]


2010년 중국이 공식적으로 보유했다고 천명한 핵탄두 수는 240기이다. 냉전 이후 핵 군축을 하고도 여전히 수천기를 보유 중인 미국과 러시아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이다. 다만 중국의 국방비와 마찬가지로 실제 중국의 핵무기 수량은 공개된 자료보다 많을 수 있다.

워싱턴 D.C., 뉴욕, 모스크바 등 사실상 전세계를 타격 가능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2000년대 초반까지 20여기 정도였다가 현재는 150여기까지 늘었으며, DF-41 등 신형 ICBM 개발도 계속 진행 중이다. 한편 중국의 대부분 핵미사일은 사정거리 5000km 내의 중거리 탄도탄인데, 전략핵이든 전술핵이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기지들은 모두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한 적 있었던 세계 최대의 지하 핵무기 제조공장을 5차 북핵 이후에 다시 공개했다.#

중국은 핵보유국 중에 유일하게 "적국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허나 적국이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천명한 적이 있다.("인불범아 아불범인 인약범아 아필범인") 중국의 핵개발은 사실 재래식 무기를 확충할 재원이 없을 때 최소한의 핵개발로 필요한 전쟁억지력을 보유하자는 이유로 실행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고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되며 패권국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최근 국방백서에서는 그 조항을 빼버리는 등 이 조항을 포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관련 기사


4. 기타[편집]


  • 중국의 핵, ICBM 개발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밀레'의 결과물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나, 실제 동원된 연인원은 맨해튼 계획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다. 프로젝트 초기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1957년까지 자원 지원과 기술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연구의 기초가 탄탄하게 마련되었고,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미국과 소련이 개발과 관련된 계산, 기술 시뮬레이션을 모두 수작업으로 했어야 했던 데 반해, 중국은 1959년부터 컴퓨터[5]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과 정확성에서 훨씬 큰 메리트를 지닐 수 있었다.

  • 북한의 핵개발 및 ICBM 개발은 사실 중국의 양탄일성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중국이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를 개발하여 재래식 전력을 줄여서 남는 예산을 경제 발전에 쏟아 경제 부흥을 이룬 과정을 북한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분석이다.

  • 1960년대 중국(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부름)이 핵개발을 하자, 한국은 이 소식을 듣고 정부가 규탄대회를 개최하는 등 중공에 대한 시위를 벌었다.# 1964년 10월 26일에 열린 25회 정기국회에 출석한 국방장관 김성은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미국이 1945년에 일본에 투하하기 전에 네바다 사막에서 실험했던 원시적인 하나의 핵무기를 실험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큰 탑을 갖다가 세워 놓고 가장 낙진이 많고 또 이 낙진으로 인해서 방사선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더러운 소위 말하는 더티에스트 밤 이 자체를 실험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원폭이라고 하는 것이 무기로서 이것이 이용되어서 우리 한국 국군에 당장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마는 중공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로서 국제정치나 또는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동남아세아 특히 한국과 같은 이런 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능히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읍니다. 즉 중공의 핵실험 성공은 아세아,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다수국에 대한 중공의 위신을 더욱 높여 줄 뿐만 아니라 대소관계, 대미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강화할 것임으로 우리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중공이 핵을 보유하였다 하더라도 충분한 핵을 아직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이것을 무기로서 사용하기에는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봅니다.


근데 여기에 대해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군 출신인 강문봉 의원이 더티 밤이 무슨 얘긴지 모르고 이렇게 반박했다.

그 핵무기가 국방부 장관이 말씀하시기를 더티에스트 밤 이렇게 했어요. 아주 가장 더러운 그런 오염성이 많은 폭탄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더러우면 어떻고 깨끗하면 뭘 합니까?


당시 중정 소속으로 김성은 장관을 보좌하기 위해 출석했던, 미래의 통일부 장관 강인덕은 이 얘기를 듣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 중국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대만에서는 충격을 받고 구상만 해두고 있었던 핵개발을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진행하지만 1988년에 핵개발이 폭로되면서 계획이 전면 중단되었다. 신주 계획 참조.


5. 관련 문서[편집]



[1]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국민정부 시절 유학 보내준 중화민국 국비장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들은 모두 미국 정부의 사찰대상이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국민당이 지배하는 대만 대신 공산당이 지배하는 대륙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들 중 최고의 커리어였던 MIT-Caltech 교수인 첸쉐썬 박사의 경우는 아예 장인이 장개석의 고문으로서 국민당에서 활동했던 사람이었는데도 빨갱이 소리를 듣고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고, 이 원한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2] 더구나 소련은 중국에 핵무기 기술을 전수해 주는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곡물과 육류 같은 식량들을 가져갔는데, 그런 사정 때문에 중국은 대약진운동 당시에 국민들한테 나눠줄 식량이 모자라 기근이 발생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약진 운동이라는 장렬한 자폭으로 식량 생산량은 감소했는데, 관료들은 통계를 조작해 아사자가 발생하는 현실을 대풍작이 든 거짓으로 바꿔놓았고, 윗선에서는 '풍작이라고? 그럼 남는 김에 수출하면 되겠군!'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 결과가 자국에서 천만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식량을 수출하는 사태.[3] 단순계산을 해봐도 2020년 환율로 4~5.5조 원으로, 중국의 빈곤한 처지를 생각하면 이의 몇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문화대혁명으로 한창 삽질을 하던 중이긴 하지만 1960년 기준으로 중국의 GDP는 겨우 500억달러 정도였다...[4] 중국 우주개발 4걸이라고 불리는 투서우어 박사, 런신민 박사, 황웨이루 박사, 량서우반 박사는 모두 중화민국 시절 미국에 유학한 인재들이며 첸쉐썬 박사 보다 5세 정도 어린 인물들이었다.[5] 아이러니하게도 이 컴퓨터는 중국의 핵개발을 저지시키기 위한 소련이 호의를 보이고자 제공한 것이었다. 핵개발을 완수한 당시 중국 당국은 각종 선전매체에서 '강대국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을 성공했다'면서 배경화면에 소련에서 제공한 컴퓨터를 비추며 소련을 조롱했고, 이후 소련 역시 각종 국제 관계에서 중국에 적대적인 행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