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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트 디트코

덤프버전 :

파일:Ewald Dytko.jpg
이름[1]
에발트 얀 디트코
(Ewald Jan Dytko)
생년월일
1914년 10월 18일
사망년월일
1993년 6월 13일 (향년 78세)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출신지
독일 제국 찰렌체
포지션
하프백
신체조건
169cm | 69kg
소속팀
동프 카토비체 (?-1939)
1. FC 카토비체 (1939-1942)
TuS 노이엔도르프 (1942-1943)
WMKS 카토비체 (1945)
바일돈 카토비체 (1945-1950)
국가대표
22경기 0골 (1935-1939)



1. 개요
2. 생애[2]



1. 개요[편집]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3][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2.1.1. 클럽[편집]



2.1.1.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디트코의 태어날 때 이름은 에발트 얀 디트코(Ewald Jan Dyttko)였다. 1922년 폴란드 시민권을 받은 디트코는 1923년에 성의 철자를 Dytko로 바꾸었고 십대 때 동프 카토비체(Dąb Katowice)의 선수가 되었다. 동프 카토비체는 주로 엑스트라클라사가 아닌 하부 리그 소속이었고 1936년에 드디어 엑스트라클라사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뇌물 스캔들로 인한 징계로 승점이 삭감되었고 이 여파로 팀이 강등되어서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디트코는 1939년에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 게라르트 보다시 등과의 술로 인한 계약 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2.1.1.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편집]

디트코는 폴란드군으로 폴란드 침공에 저항했다가 독일군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그는 석방되어 실레시아로 돌아갈 수 있었고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디트코는 독일 국적 취득 이후에 게오르크 요슈케(Georg Joschke)에 의해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 에르빈 니츠 등과 1. FC 카토비체에서 뛰게 되었다. 디트코의 카토비체 생활은 그가 코블렌츠로 징집되면서 끝났다. 그곳에서 디트코는 1938년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으로 뛰었던 요제프 가우헬의 도움으로 TuS 노이엔도르프에서 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에 디트코는 루프트바페의 의료 회사에 있다가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


2.1.1.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전쟁이 끝나고 디트코는 다시 카토비체로 돌아갔지만 폴란드 정치경찰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는 미군에 망명했지만 구금되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고 새 정권에 대한 충성 선언서에 서명한 후에야 풀려났다.

디트코는 잠시 경찰 클럽에 배치되었다 바일돈 카토비체(Baildon Katowice)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폴란드식으로 개명하는 법령으로 인해 이름을 에드바르트(Edward)로 개명해야 했다.


2.1.2. 국가대표[편집]


디트코는 최상위 리그에서 뛴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폴란드 대표팀에서 22경기를 뛰었다.

1936년 올림픽에서는 4경기를 모두 뛰면서 폴란드의 4위에 기여했고 1938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과의 역대급 명승부에 참가했지만 폴란드는 5대6으로 브라질에 아깝게 졌다.


2.2. 이후[편집]


선수 생활을 마친 디트코는 여러 클럽에서 코치 생활을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 했고 철강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1] 이 이름은 FIFA 월드컵 공식 보고서에 기재된 이름이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