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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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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파일:오스만 술탄 모든 사진.jpg
[2]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오스만 제국 황제들에 대해 다루는 문서다.
2. 설명[편집]
'황제'로 불리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 황제'를 자칭했는데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다.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현대 튀르키예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트: 무함마드(مُحَمَّد), 압뒬하미트: 압둘하미드(عَبْدُ الْحَمِيد)[3] , 쉴레이만: 술라이만(سُلَيْمَان)에 대응한다. 현대 튀르키예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지만 튀르키예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음상으로는 끝에 d가 오든 t가 오든 둘 다 무성음 t발음으로 나므로 의미가 없다.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오스만어에 기반한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며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도 유용한데 같은 압뒬하미트도 세속주의자 학자들은 Abdülhamit, 이슬람 성향의 학자들은 Abdülhamid, 오스만 복고주의자나 친아랍주의자들은 아예 아랍식 철자로 Abd-ül Hamid로 쓰기 때문에 철자만으로 해당 저자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3. 목록[편집]
4. 가계도 및 갤러리[편집]
파일:오스만 술탄 가계도1.png
파일:오스만 술탄 가계도2.gif
5. 기록[편집]
- 최장 재위: 쉴레이만 1세가 1등(46년), 메흐메트 4세가 2등(39년), 오르한이 3등(36년), 압뒬하미트 2세가 4등(33년), 메흐메트 2세가 5등(32년)이다.
- 최단재위: 무라트 5세가 1등(93일), 무스타파 1세가 2등(1년 96일)이다.
- 최고령 즉위는 35대 메흐메트 5세(65세)이고 뒤이어 말대 메흐메트 6세(57세), 25대 오스만 3세(55세), 27대 압뒬하미트 1세(49세)가 따른다. 최연소 즉위는 19대 메흐메트 4세(6세). 2위는 무라트 4세(11세). 메흐메트 2세는 3위(12세)이다. 4위는 아흐메트 1세로 13세, 5위는 오스만 2세로 14세다.
- 가장 오래 산 국왕은 2대 오르한(81세)이고 2위는 압뒬하미트 2세(76세), 3위는 35대 메흐메트 5세(73세) 순이며, 가장 단명한 국왕은 16대 오스만 2세(18세), 14대 아흐메트 1세(27세), 17대 무라트 4세(28세) 순이다.
- 가장 아들이 많았던 황제는 무라트 3세로 총 25남을 두었고 가장 딸이 많았던 국왕은 또 12대 무라트 3세로 30녀를 두었다. 정실과 후궁을 모두 합쳐서 자녀 수가 제일 많았던 국왕은 역시 12대 무라트 3세로 총 25남 30녀를 두었다. 반면 자식이 아예 없던 국왕으로는 무스타파 1세, 쉴레이만 2세, 마흐무트 1세, 오스만 3세, 셀림 3세가 있다.
6. 취미[편집]
파일:오스만 술탄 취미.jpg
6.1. 기타 취미[편집]
메흐메트 1세: 끈 만들기
메흐메트 2세: 지도 만들기, 원예
셀림 1세: 보석 세공
쉴레이만 1세: 보석세공
메흐메트 3세: 숟가락 만들기
아흐메트 1세: 숟가락 만들기
오스만 2세: 말안장 만들기
메흐메트 4세: 문신
아흐메트 3세: 그림 그리기
마흐무트 1세: 도장 파기
오스만 3세: 목공예
무스타파 3세: 동전 만들기
셀림 3세: 그림 그리기
마흐무트 2세: 건선
압뒬아지즈: 미술
압뒬하미트 2세: 목공예, 도자기 공예
6.2. 시인[편집]
무라트 2세
메흐메트 2세
바예지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무라트 3세
메흐메트 3세
아흐메트 1세
오스만 2세
무라트 4세
메흐메트 4세
무스타파 2세
아흐메트 3세
마흐무트 1세
무스타파 3세
셀림 3세
마흐무트 2세
메흐메트 5세
18명
6.3. 작곡가[편집]
바예지트 2세
무라트 3세
무라트 4세
마흐무트 1세
셀림 3세
압뒬아지즈
무라트 5세
메흐메트 6세
8명
6.4. 서예가[편집]
바예지트 2세
무라트 3세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아흐메트 3세
무스타파 3세
압뒬하미트 1세
마흐무트 2세
압뒬메지트 1세
압뒬아지즈
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6세
12명
6.5. 운동[편집]
메흐메트 1세: 씨름 선수
메흐메트 4세: 사냥꾼
압뒬아지즈: 레슬링 선수
7. 여담[편집]
8. 매장지[편집]
부르사: 오스만 1세에서 무라트 2세까지
이스탄불: 메흐메트 2세에서 메흐메트 5세까지.
다마스쿠스: 메흐메트 6세
[1] 술탄과 파디샤와 관련된 호칭으로 오스만 제국 황제(Osmanlı İmparatorluğu Padişahları/Sultan of Ottoman Empire), Sultân-ı Âzam(술타느 아잠), Sultân-es Selâtin(술타네스 셀라틴), Hüdâvendigâr(휘다벤디갸르), Hakan(하칸), Kağan(카안), İslam Halifesi(이슬람 칼리프), Kayser-i Rum(카이세리 룸), Kendi unvanı(나만의 호칭)이 있다.[2] 읽는 방법: 아래부터 읽고 2번째 칸부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왔다갔다를 해야 한다. 무스타파 4세(여섯칸 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압뒬하미트 2세(여섯 칸 맨 외쪽으로) 간다음 위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완전히 다 본 것이다.[3] 문자적으로는 '압드 알하미드'지만 구어체상에서는 축약된 형태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4]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룸셀주크와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 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베이국을 세웠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5]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이다. 결국 넷째인 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6] 1차 재위[7] 1차 재위[8] 2차 재위[9] 2차 재위[10] 괄호 안의 부분에서 '엄격제' 에 해당하는 부분은 'Yavuz'인데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는 듯하다. 튀르키예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11] 1차 재위[12] 2차 재위[13] 오스만 제국 붕괴 후 튀르키예 공화국 정부는 오스만 가문(Osmanoğlu)을 튀르키예에서 추방하여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케말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이 사망한 36년 뒤인 1974년에 해제되었으나 실제 오스만 구 황가의 튀르키예 귀국은 2004년에 와서야 이뤄졌다.[14] 11월 1일에 파디샤에서 폐위당했지만 칼리파는 17일이 지나서야 튀르키예 의회가 사촌인 압뒬메지트를 후임자로 선출했다.[15]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참고)[16] 2004년에야 튀르키예 국적을 회복했다. 간혹 최후의 오스만이라고 일컬어진다. 계승자들이 제국 붕괴 이후 태어났기 때문이다.[17] 쉴레이만 2세와 오스만 3세의 영묘에 그모자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