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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프(게임 회사)

덤프버전 :

1. 개요
2. 이노 켄지에 대해
2.1. 회사 설립 전
2.1.1. 게임 업계에 들어가고, 또 떠나고
2.2. 워프를 세우다
2.2.1. 명작을 만들다
2.3. 에너미 제로 사건
2.4. 그 이후
3. 개발한 게임


1. 개요[편집]


파일:WARP_logo.png
당사 사이트(아카이브)[1]
일본 게임계의 풍운아로 불리던 이노 켄지(1970-2013)[2]가 설립한 회사. 위치는 D2 발매 기준으로(1999) 도쿄도 미나토구 기타아오야마 2-12-28 아오야마 빌딩 4층에 있었다.

2. 이노 켄지에 대해[편집]


그의 일생에 대해 정리한 포스트

2.1. 회사 설립 전[편집]


파일:Kenji_Eno.jpg
이노 켄지는 1970년 5월 도쿄도 출생으로, 어릴 적부터 PC를 접하게 되어 소학교(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사는 불행했다. 소학교 2학년 때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실종된 이후[3] 한부모 가정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검정고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고교중퇴 학력으로 끝난 그는 무위도식하던 중 동네 아주머니들의 험담[4]으로 자가반성을 한[5] 그는 무작정 잡지를 찾아보고 돈을 많이 주는 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엔 사람이 모자라던 시기였던지라 금세 직장을 찾을 수 있었다. 첫 시작은 (그의 기억에 따르면) 'C'로 시작하는 복사기 회사였다. 그러나 출근 당일 아침, 그는 직장 상사와 다투고 바로 그 시간(!)부로 퇴사를 해버렸다. 그러다가 오후(!)에 다시 직장을 잡는데 성공해 텔레마케팅 회사에 들어왔지만 직장 직원들이 그를 제외하고 전부 여성이었던지라 어찌저찌 물품 하나를 파는데는 성공했지만 부담감을 느낀 그는 그날부로 또 퇴직하게 되었다.

2.1.1. 게임 업계에 들어가고, 또 떠나고[편집]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인터링크'라는 영세 게임업체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수왕기 패미컴 판의 사운드 크리에이터, SD 히어로 총결전 쓰러뜨려라! 악의 군단의 슈퍼바이저, 음악가, 울트라맨 클럽 2:돌아온 울트라맨 클럽의 플래너를 맡았지만 남의 지시를 받고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기질은 그가 또다시 퇴사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그리고 그는, 본인이 직접 회사를 만들어 원하는 것을 개발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직접 유한회사 EIM을 차려 독립한다.
그러나 여전히 녹록지 않았던 게 현실이다. 그는 HAL 연구소반프레스토의 하청 개발을 맡아 일감은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그는 1992년 회사를 해산시킨다. 이미 디자인 강사까지 하며 투잡을 뛰었던 정신적으로 벼랑에 몰린 그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게임업계를 떠나 자동차 컨설턴트와 같은 일을 맡게 된다.

2.2. 워프를 세우다[편집]


1994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를 관람한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친구들 4명과 함께 회사 "워프"를 설립한다.
첫 설립일부터 비범한 행각을 벌였는데, 엄숙한 설립식이나 회사 사무실 정리가 아닌 책상을 모조리 치워놓은 다음 친구들과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레이스를 펼쳤다.

"워프는 회사가 아닙니다, 록밴드이자 창작 집단이죠. 저희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 이노 켄지의 발언

그의 발언을 통해 유추하듯,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던 분위기의 직장이었다.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순수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만으로 무장했고, 그리고 개발자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플랫폼 3DO로 게임을 내기로 결정했고, 1994년 8월부터 꾸준히 평이 좋은 게임을 내놨다.

2.2.1. 명작을 만들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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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D의 식탁에 관한 일화로, 유통사에는 식인과 폭력 장면을 검열한 버전을, CD 공장에는 무삭제 버전을 보냈다고 한다. 게임은 무랴 60만 장이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3DO는 이 무렵 빠르게 시장이 몰락하고 있었고, 그는 이 작품를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내기로 한다.

2.3. 에너미 제로 사건[편집]


파일:D의 식탁.jpg
D의 식탁 새턴판 북미 버전

1995년 7월 새턴판을 발매하고, 12월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발매하려는 도중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이노는 소니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세가빠가 되었다.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블로그에 써 놓았다. 원인은 '주문 대로 제대로 생산해 주지 않은 것(소니의 게임 출하 규제 정책)'이 결정적이었다고.

이노 켄지의 자서전인 '게임'에 따르면, 이노 켄지는 D의 식탁에서 나온 수익을 전부 에너미 제로(エネミー・ゼロ)라는 게임을 개발하는데 투자하려고 했다. 그래도 새턴판 D의 식탁은 예상 발주를 했다가 시장에 대량의 중고가 풀려버렸던 것을 감안하여 재고는 자사에서 회수하겠다는 조건으로 초회 출하량을 10만장, 적어도 8만장은 만들어주길 원했지만 소니에서는 4만장 출하를 고집했다. 발매 당일 이노는 아키바를 직접 돌며 상황을 확인했는데 초기 물량이 전부 팔려 소비자들이 구매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굉장히 분개했다. 심지어 자신이 조사해 본 결과 실제 출하량은 2만 8천에 불과했다고 하니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 손실. 소니는 D의 식탁이 신작이 아니라는 점이나 재주문시 1주일만에 납품 가능한 자신들의 빠른 재생산 시스템을 과신해서 그랬겠지만 모든 엔터테인먼트 상품은 초동 판매량이 전부라는 것은 상식이었고 아무리 소니가 되사준다고 한들 그렇게 적은 생산량은 제작자 입장에선 피눈물나는 행위였던 것.

세가 새턴으로 낸 D의 식탁 초판 출하분 20만장 중 절반이 하루만에 완매된 것을 생각하면 소니의 게임 출하 규제 정책[6]에 의해 플레이스테이션으로는 10분 1밖에 팔지 못했기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선 커다란 타격이었다. 심지어는 사업 철수 중이던 3DO 게임기에서도 60만장을 팔아치운 D의 식탁이었다. 후속작인 에너미 제로 제작 자금이 빠듯하여 다소 히스테릭했던 이노가 소니 직원에게 '갈겨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러도 소니 쪽의 대답은 '그렇게 하시던지.' 결국 추후 소니가 이노의 성화에 못 이겨 추가 생산해 20만장을 팔긴 했다. 이노의 성화보다는 초기 출하량이 너무 적어서 다수 소비자들이 사지 못했다고 게임 잡지들이 소니가 이노를 무시해서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저격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한 소니에서 20만장을 출하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것. 소비자들의 분노 문제도 있지만 게임제작사들과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도 있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하면서 닌텐도의 서드파티에 참여하는 게임제작사들에게 좋은 대우를 약속하면서 그들을 빼왔기에 당시에 도의적인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워낙에 닌텐도가 서드파티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사의 이익만 추구하는 행보에 닌텐도를 비판하면서 소니가 별 문제가 없었는데 정작 서드파티들을 확보하고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하자 소니가 책임을 회피하면서 게임 출하 규제를 풀지 않으려 했다. 이노의 에너미 제로 사건은 이 시기에 터져나왔는데 이노가 소니에 의해 D의 식탁의 초기 출하 제한으로 손해를 보고 세가로 이적을 발표하면서 다른 소니의 서드파티 게임제작사들이 이노에게 동조하면서 소니를 비판했고 소니의 행태는 계약 위반이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소비자들의 분노는 직접적인 위기가 아니겠으나 법적으로 소송까지 갈 수 있는 게임제작사들과의 트러블은 소니가 피해야만 했는데, 이 시기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2의 개발도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드파티들이 이탈하면 플레이스테이션 2는 개발도 되기 전에 망하는 꼴이라서 소니는 여론의 비판과 게임제작사들과의 법적인 분쟁을 피하기 위해 뒤늦게나마 이노의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단지 초기 출하량 문제만은 아니었다. D의 식탁 출시를 앞두고 세가와 소니를 만났을 때, 이노 프로듀서가 분명 게임 출시를 세가와 소니에게 부탁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가의 이지마지리 쇼이치로 부사장은 게임의 얘기를 하기 전에 이노의 건강부터 걱정했다. 실제로 이노는 당시 열이 나 몹시 아프던 상황이었다. 반면에 소니는 부사장급도 아닌 실무 담당자가 나와 저런 갑질을 하는 반응이었으니 인간적인 부분마저 다르게 다가왔음은 자명하다. 이후에도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에너미 제로를 제작하던 중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7]의 기획서를 들고 소니를 찾았지만 거기에서 듣게 된 말은 "이런 것도 게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였다. 이게 팔리기나 하겠냐며 소니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고 반대의사를 표한 것이지만 그 태도가 제작자인 이노를 폄하하며 비아냥거리는 상당히 무례한 것이었다. 혹시나 하고 같은 기획서를 들고 세가를 찾았을 때도 이노의 건강을 염려하며 발매를 부탁한다는 당시 세가의 부사장이었던 이리마지리 쇼이치로의 반응에 감동을 받아 당장 에너미 제로의 플레이스테이션 개발을 중단하고 결국 그 이후의 게임은 세가의 게임기로만 발매했다. 이노 켄지 본인의 회상에 따르면 분명 자신이 '소니에서 물먹어서 새턴으로 자신이 제작한 시각 장애인용 게임인 바람의 리그렛을 낼 수 있게 해 주십사' 부탁을 하러 간 자리였는데 이리마지리 부사장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그 뒤로도 드림캐스트의 이름을 지어주거나, 세가 랠리 2의 음악을 담당하는 등 세가와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D의 식탁 발매를 둘러싼 소니와 이노 켄지의 알력 다툼은, 사상 유래없는 대반란으로 불거지게 된다. 1996년 3월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엑스포에서 이노는 에너미 제로의 데모 영상을 시연한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는데, 이노 프로듀서가 프레젠테이션의 다음 장을 넘기자 플레이스테이션 로고가 변형되더니 세가 새턴의 로고로 바뀌었고, 갑자기 세가의 부사장인 이지마지리 쇼이치로의 인사말이 나오더니, 다음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에너미 제로! 세가 새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위한 행사에서 세가 새턴으로의 이적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후 세가와 정식으로 발표를 하는데 거기서는 에너미 제로의 음악을 맡기도 한 Michael Nyman의 Drowning by numbers 라는 음악을 깔았다.

이노 켄지가 아무리 깡다구가 좋아도 역시 남의 집 잔칫날에 가서 거대한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에(바로 다음날 SCE의 마케터 사에키 마사시를 만나야 했는데 괴로웠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로 다시는 소니의 게임기에 게임을 내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 이후 이노 켄지는 소니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보복이라고 해서 조폭을 기용해 두들겨패거나 살해를 당하는 것이 아닌 게임 제작자로서 제작을 못하게 막을 것이라는 것을 우려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니는 이노 켄지에게 별다른 행동을 가하진 않았는데, 당시 소니의 임원들은 그 사건 이후 이노 켄지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나 마루야마 시게오 당시 SCE의 이사회 의장이 이노 켄지를 내버려두라면서 보호했기 때문이었다.#[8] 또한 당시 소니 실무진 중에서는 '저런 패기있는 젊은이가 있어야 한다' 라는 마음으로 마루야마 시게오 의장의 결정에 동조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하며, 이노를 대놓고 무시해서 이노가 떠나게 만든 원인인 담당자는 그 책임을 지고 해고당했다고 하니 소니 내부에서도 이노가 떠난 원인은 소니의 갑질때문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고 한다. 정확히 이 담당자가 바로 해고당한 것은 아니고 이노가 새턴으로 출시한 '바람의 리그렛'이 32만장이나 팔며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이 담당자가 한 행동이야 소니가 이노가 아닌 다른 제작자들에게도 하는 갑질이었지만 바람의 리그렛이라는 좋은 게임을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담당자의 직권으로 출시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담당자의 무례한 태도로 이노가 세가로 이적하고 바람이 리그렛도 출시를 못해서 소니에게 손실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담당자가 부당해고라고 소송을 재기했지만 그마저도 패소당했다고 하니 결국 자업자득, 사필귀정이었다.[9]

이 사건 이후 한참 지난 1997년 6월이 되어서야 소니는 초회 생산 물량의 결정권을 게임 회사에 넘겨주지만 그게 이 사건 덕분에라고 하기엔 좀 미묘한 것이 플레이스테이션 출범 당시부터 자사 유통이 가능한 기존 대기업 게임 회사들은 소니가 판매 유통권을 갖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니도 그 권리를 돌려준다면서 즉시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는 등 뒷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니가 초회 생산 물량의 결정권을 게임 회사에 넘겨주게된 원인은 플레이스테이션 2 개발을 두고 여러 게임기 개발사에서 게임 회사들과 접촉하며 서드 파티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게임 회사들이 이노의 사례로 자신들도 같은 꼴을 당한다는 인식으로 굳이 소니가 아닌 닌텐도나 세가 등과도 접촉하고 있었기에 소니에서도 위기 의식을 느껴 넘겨주게 되었다고 한다. 이노가 벌인 에너미 제로 사건 덕분에 게임 회사들이 초회 생산 물량의 결정권을 받았다고 100% 공언할 수는 없더라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기에 이노는 소니와는 거리를 뒀지만 세가나 닌텐도 등과는 잡음이 없었고 특히 세가와는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다. 또 초회 생산 물량의 결정권을 온전히 넘겨받은 다른 게임 회사들과도 사이가 좋아서 소니의 서드 파티에 참여한 게임 회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4. 그 이후[편집]


파일:D2_COVER.jpg

이후 이노 켄지는 세가 새턴으로 에너미 제로(60만장 판매),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32만장)같은 명작을 만들었고[10], 드림캐스트에서는 D의 식탁 2[11]라는 후속작을 발매하였다. 원래 드림캐스트 런칭작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발매 연기를 하는 등 우여곡절끝 에 발매되었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14.5만 장이라는 다소 아쉬운 판매 실적을 거뒀다. 결국 워프는 D의 식탁 2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드림캐스트 버전 이전까지 다 합하면 당시 D의 식탁 2는 무려 10차례 가깝게 연기되고 뒤집어졌다. 본래 D의 식탁 2는 파나소닉 M2로 발매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초창기 공개된 D의 식탁 2[12]의 경우 전작의 사건 이후 태아 상태에서 중세 유럽의 드라큘라 백작의 흑마술로 시간이동을 하여, 백작의 아들로 성장한 로라의 아들이 주역인 이야기로 만들어질 것처럼 보였다. 허나 파나소닉 M2 발매가 취소됐고, 드림캐스트가 발표된 뒤에는 진행 중이던 모든 프로젝트가 원인 모를 이유로 모두 뒤집어졌다. 설정도 현대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게임 시스템도 크게 바뀌어 필드 탐색 중에 적과 조우하면 건슈팅 형태의 실시간 전투를 벌이는 복합 장르 형태의 게임이 되었으며, 주인공도 전작의 로라 해리스가 아닌 로라 패튼이라는 캐릭터가 되어 실질적으로 전작과는 연계점이 없는 별개의 인물이 되어 있다.

D2가 실패하면서 2000년 이노 켄지는 게임 업계를 잠시 은퇴했다가 2005년 아이팟 터치용 앱과 Wii용 게임을 개발하는 FYTO(From Yellow To Orange)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복귀했다. 그러나 2013년 2월 20일 향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인한 급성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개발한 게임[편집]


  • 돌격 기관(할복)메가다스!!(1994, 3DO)
  • 우주 생물 플루폰 군(1994, 3DO)
  • 오야지 헌터 마작(1995, 3DO)
  • D의 식탁(1995, 3DO,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 [13]
  • 트립' 디(1995, 3DO)
  • 쇼트 워프(1996, 3DO)
  • 에너미 제로(1996(1998),세가 새턴, Windows)
  •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1999), 세가 새턴, 드림캐스트)[14]
  • D의 식탁 2(1999, 드림캐스트)


[1] 글자가 깨져 있어 변환이 필요하다.[2] 2013년 2월 20일 고혈압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요절하였다.[3] 이노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가 외도를 한 것으로 암시되는 내용들이 있다. 말로는 실종으로 표기했으나 실은 도주하고 아버지에게 이혼통보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4] "어릴 때는 참 똑똑하고 좋은 아이였는데, 지금은 학교도 안 가고 저러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5] 험담을 한 동네 아주머니들의 어른으로서 결코 올바른 행동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험담했다는 이유로 칼부림이 나기도 하는데 이노 켄지는 그 말에 자신을 돌아보았다고 자서전에 언급했으니 오히려 이노 켄지의 행동이 성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이노 켄지 자신도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서 직업을 구하려는 찰나 아주머니들의 험담을 듣고 직업을 구하려는 계기 중 하나가 된 것이지 아주머니들의 험담때문에 이노 켄지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직업을 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뒤에서 남을 험담하는 행동은 비판받아야 할 행동이다.[6] 사실 소니의 게임 출하 규제 정책의 원조는 바로 닌텐도다. 닌텐도는 자사에게 훨씬 유리한 수익 구조를 구축하고 게임의 개발, 유통, 판매를 직, 간접적으로 간섭하는 등 서드파티들을 상대적으로 불합리하게 대우했고 게임의 초기 출하량도 닌텐도가 정했다. 이것이 어느정도 타개된 것은 소니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하면서 대항마가 생기면서 서드파티들이 이탈하여 소니 등으로 이적하게 된다.[7] 시각 장애인을 위한 게임이라는 참신한 개념이었다.[8] 마루야마 시게오의 인터뷰에 따르면 소니의 갑질때문에 이노가 떠난 것을 인지하여 소니와 함께하던 좋은 인재를 소니의 과실로 놓쳤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노 켄지와의 사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그를 보호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9] 이노에게 갑질하다 소니에서 잘린 직원은 패소에도 굴하지 않고 항소했으나 결국 3심에서도 패소당했다.[10] 상술했다시피 이 게임의 발매를 거부한 담당자는 짤렸다.[11] 북미 및 유럽판은 전작에 이어서 D2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12] 이때도 북미 및 유럽판은 D2라는 이름이었다.[13]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14] 시각 장애인을 위한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