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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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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恂
(? ~ 311)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고대 중국삼국시대, 서진의 인물이며 촉한황제 유선의 6남.


2. 행적[편집]


정사 후주전에서 유선의 아들들이 허봉 제도로 준 들의 봉작을 나열할 때 잠깐 나오며, 259년 여름 6월 유심, 유거 등과 함께 왕에 봉해질 때 신흥왕이 되었다.[1]

263년 촉한이 멸망하자 일가와 함께 조위로 옮겨져 지냈다.

유선이 차남 유요(劉瑤)를 놔두고 6남인 유순(劉恂)을 후계자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촉한의 구신 문립이 이를 지적했으나 유선 사후 안락공은 유순이 물려받게 되었다.[2] 유순은 도의를 잃은 행동을 자주 하였으므로 상용 태수 왕숭, 부릉태수 장인(張寅)과 더불어 진간, 문립과 함께 염려하는 말을 했다.

311년 유요, 유종, 유찬, 유거 등과 함께 영가의 난으로 유요[3], 왕미 등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고 한다.

유영의 손자인 유현만 살아남은 것으로 볼 때 자손이 없었거나 모두 몰살당하여 후손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 유순이 허봉으로 받은 신흥은 병주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써 당연하지만 유순이 받은 지역은 허봉 제도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촉나라의 영토나 유순이 지배한 곳이 아닌 촉한이 한나라, 즉 후한중흥대의명분으로 유순을 봉한 통치권역상의 영지다.[2] 촉한 후주 유선의 태자 유선강유의 촉한부흥운동과 성도공방전에서 성도대도살로 살해되었다.[3] 흉노 전조 황족 출신으로 유순의 형 유요와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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