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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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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8대 대통령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
Gerald Rudolph Ford Jr.


파일:1200px-Gerald_Ford_crop.jpg

출생
1913년 7월 14일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
사망
2006년 12월 26일 (향년 93세)
캘리포니아 주 랜초미라지
묘소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 켄트카운티 제럴드 포드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재임기간
제40대 부통령
1973년 12월 6일 ~ 1974년 8월 9일
제38대 대통령
1974년 8월 9일 ~ 1977년 1월 20일
서명
파일:제럴드 포드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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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레슬리 린치 킹 시니어
어머니 도로시 에이어 가드너 포드
배우자
베티 포드
자녀
마이클 포드, 존 포드, 스티븐 포드, 수잔 포드
학력
그랜드 래피즈 사우스 고등학교 (졸업)
미시간 대학교 (경제학 / B.A.)
미시간 대학교 법학대학원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 (LL.B.)[1]
병역
미합중국 해군 소령 전역[2]
종교
성공회
신체
183cm[3], O형
정당

의원 선수
13 (하원)
의원 대수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1. 개요
2. 약력
3. 생애
4. 선거 이력
5. 한국과의 관계
6. 여담





제38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대통령 임기는 불과 2년 165일(896일)로 20세기 이후 미국 대통령 가운데 임기 도중 서거나 사임을 하지 않은 대통령 중에서는 가장 짧게 재임했던 대통령이다.[1]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본래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제40대 미국 부통령을 재직하고 있었다. 닉슨의 러닝메이트이자 전임 부통령인 스피로 애그뉴가 닉슨과 함께 72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여러 부정부패 혐의로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닉슨마저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그의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된다. 즉 미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다.

아울러 사망 당시에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었지만, 이후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과 41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94세 생일을 넘기면서 따라 3번째로 장수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2]


2. 약력[편집]


  • 1949. 미시간 주 연방 하원의원[3] (1949 ~ 1973)
  • 1965. 미국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1965 ~ 1973)
  • 1973.12. 제40대 미국 부통령
  • 1974.8. 제38대 미국 대통령
  • 1998.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수훈
  • 1999.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3. 생애[편집]


원래 이름은 레슬리 린치 킹 주니어(Leslie Lynch King Jr). 네브래스카오마하[4]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신혼 초부터 부인에게 폭력을 일삼아온 아버지가 갓 태어난 아들까지 위협하면서 부친을 피해 어머니가 생후 16일 된 포드를 데리고 가출, 이혼했다. 어머니는 나중에 제럴드 루돌프 포드(Gerald R. Ford)와 재혼했고,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서 성장했다. 그의 의붓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포드에게 주면서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가 되었다.[5] 계부와 이부동생들(토머스, 리처드, 제임스)과의 사이도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15살에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얘기해주기 전까지는 의붓아버지가 친아버지인줄 알았다고. 그가 친아버지와 처음으로 만난 건 17살 때였고, 당연하지만 자주 교류하지도 않았다. 같은 이유로 친아버지가 재혼해서 그에게는 이복동생이 되는 1남 2녀를 두었다는 걸 1960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게다가 친아버지는 양육비도 지급하기를 거부해서 친할아버지가 1930년까지 대신 지급해줬다.


젊은 시절에는 잘 나가던 미식축구 선수였다. 1931년에 미시간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미식축구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포지션은 센터. 하지만 프로 미식축구팀의 스카웃 제안은 거절했다. 모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지[6], 차후 대통령에 오른 뒤에 전통적으로 대통령 전용 행진곡으로 쓰이는 Hail to the Chief [7] 대신 모교의 응원가(Hail to the victors)를 자주 썼다고.[8]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고 최종 계급은 소령으로 전역했다.[9]

3.1. 정계 활동[편집]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미시간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13선을 하며 공화당의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원래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였던[10][11] 그는 닉슨의 부통령인 스피로 애그뉴 당시 부통령이 뇌물수수문제로 사임하면서 닉슨의 지명으로 부통령이 되었고[12], 그 후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대통령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다.[13][14] 또한 아래에도 설명되겠지만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기록만 있는 인물이다.[15]

그가 재임하던 시절 한 일들의 대부분은 전임자 닉슨이 한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미국 경제는 베트남전에 의해 상당히 망가져 어려운 시기였다. 게다가 아직 국민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은 상태에서 닉슨을 사면시켜 줘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말았고, 이를 반증하듯 그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개헌저지선도 못 얻는 대참패를 하였고,[16] 제럴드 포드는 국정운영에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닉슨 수사에만 국가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가 집중되면서 경제 및 전후 수습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닉슨의 사면은 여전히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재평가 받았으며[17], 대통령의 대형 스캔들과 하야로 벌어진 국가 대혼란 상황에서 튀지 않는 우직한 성격의 조용한 행보가 이후 정국이 빠르게 안정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정통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포드는 1975년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의 멸망이 유력해진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의회에 요청해서 남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에서는 어느 집 개가 짖나 이런 반응이었고 결국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은 패망하고 만다. 거기에 키프로스 전쟁까지 말아먹으면서 지지도가 급락해 정권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일 쇼크 영향으로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빠졌고 개인적으로 이렇다 할 카리스마가 없이 평범한 정치인 스타일의 대통령인 포드의 지지도는 계속 악화되었다.

또한 당시 파산위기에 처해있던 뉴욕시에 구제금융을 거부할 의사를 밝혔는데, 뉴욕 데일리 신문에서 이 연설을 다룬 기사제목을 "포드가 도시에게 : 뒤져라(Ford to City:Drop Dead)"라고 써서 계속 민주당에게 공격받는 레퍼토리가 된다.[18]

파일:gettyimages-515114418.jpg

그래도 재선 도전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도전자 로널드 레이건을 간신히 꺾었지만, 결국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약 2년 남짓의 짧은 임기로 대통령직을 물러나게 되었다.[19] 한편, 대선 결과에 승복할 당시 포드 본인은 선거운동 기간에 무리했던 탓에 목이 쉬어 버렸고, 그래서 그의 아내인 베티 포드가 대신 패배 인정 연설문을 읽었다.[20]

파일:external/www.xibitz.com/gerald-r-ford-presidential-museum-exterior-grand-rapids-michigan-1.jpg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의 포드 박물관[21]

잘 알려지진 않은 이야기지만, 1980년 대선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포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고, 실제로 협의 과정까지 갔었던 적이 있었다. 제럴드 포드가 초선으로 대통령 임기를 끝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합의 과정에서 부통령의 권력분담에 대한 양측의 합의 부분에서 의견차를 보이다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나름 전직 대통령으로써의 체면이 있었던 포드는 부통령으로써 상당한 실권을 지니길 바랬고, 이 점이 레이건과의 합의를 결렬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22] 그리고 잘 알려져있다시피 부통령 후보직은 조지 H. W. 부시에게 돌아갔다.[23]

퇴임 후 자선활동 등을 하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2006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기일은 해리 S. 트루먼과 같은 12월 26일). 2004년 사망한 레이건 대통령도 93세로 사망했지만 개월수까지 치면 포드 대통령이 1개월 정도 더 오래 살았다.[24]

전임자들과 후임자들이 너무 개성이 강한 인물들인 데다 이렇다 할 업적도 없었기 때문인지 존재감이 극히 적은 대통령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대한 평가로는 "마음은 착하지만 머리는 나빴던 대통령." 등이 있다. 포드에 대해 평가한 유명한 말로 린든 존슨의 "방귀 뀌는 것과 껌 씹는 것을 동시에 할 줄 모르는 유일한 양반"[25]이 있다.

3.2. 제럴드 포드 행정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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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럴드 포드 행정부#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4. 선거 이력[편집]


대통령인데도 대통령 선거에서만 낙선한 독특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4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미시간 5구


74,191 (60.51%)
당선 (1위)
초선
195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72,829 (66.74%)
재선
195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9,807 (66.26%)
3선
195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1,702 (63.26%)
4선
195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20,349 (67.14%)
5선
195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8,156 (63.64%)
6선
196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31,461 (66.84%)
7선
196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10,043 (67.04%)
8선
196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1,810 (61.22%)
9선
196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7,914 (68.39%)
10선
196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5,085 (62.75%)
11선
197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8,208 (61.36%)
12선
197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18,027 (61.08%)
13선[26][27]
1976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39,148,634 (48.02%, 240명)
낙선 (2위)



5. 한국과의 관계[편집]


박정희와 대담하는 제럴드 포드. 왼쪽은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

1974년 대통령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 2차례에 걸쳐 회담을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재확인하고 '한국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교환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시 중학생으로 제럴드 포드의 방한에 성조기를 들고 공항 앞 환영 행사에 동원되었는데[28], 48년 후인 2022년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이야기하며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자 바이든이 "그때는 내가 젊었지"라는 대답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 당시 바이든은 32살로, 델라웨어 출신 초선 연방상원의원이었다.


6. 여담[편집]


  •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는 않은 발언이지만 1976년 대선 토론회에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는 존재하지 않으며 내 행정부 치하에서 그런 지배는 결코 없을 것(There is no Soviet domination of Eastern Europe and there never will be under a Ford administration.)이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동유럽 소련 위성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자주 국가임을 미국 대통령의 입으로 주장해버린것이다. 1976년 대선에서 꽤나 아슬아슬하게 패배했기 때문에 이 발언은 대통령 선거 토론회 역사상 최악의 망언 중 하나로 반드시 언급된다.[29]

  • 자신도 그렇게 튀는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센스있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포드(Ford)이지, 링컨(Lincoln)이 아니오."
이것은 그 위대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비교한 것도 있지만, 이름들이 이름들인 만큼 자동차를 비유해서 중의적으로 말한 것이다. 포드는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대중차 브랜드이고, 링컨은 포드 회사 계열의 고급차 브랜드. 한국차로 비유하자면 자기는 현대차나 기아차지, 제네시스가 아니라는 셈으로, 자신은 위대한 대통령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경제학 서적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는 "경제는 에드셀처럼 굴러갔다"며 비꼬듯이 인용했다.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기록을 세웠다. 1960년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일본에 가려 했으나, 안보투쟁으로 인해 당시 미국령이던 오키나와만 방문한 후, 한국을 방문[30]했었기 때문이다.

  • 해군니미츠급 항공모함 후속 함급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제럴드 R. 포드급으로 명명되면서 약간 다른 형태로 인지도가 올라가게 됐다. 구글에 제럴드 포드를 검색하면 포드의 사진보다 항공모함의 사진이 더 많이 나온다.

  • 당대 미국에서 여론이 나빠서, 1975년 3월에는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9위에 올랐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포드 바로 위인 8위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자행하던 발타자르 포르스터(Balthazar Vorster, 1915~1983)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차지했고, 10위가 바로 박정희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포드가 이렇게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외교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지도력이 결여되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31]

  • 말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본인은 의원으로서 하원의장이 꿈이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수뇌부 역할을 동시에 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내가 의회에 있을 때는 대통령을 보고 저런 독재자들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의회를 보고 저런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

  • 미식축구 선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대통령으로써의 체면을 구긴 적이 많은데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미끄러지거나 넘어진 적이 많았고 이 장면이 자주 언론에 노출되어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오스트리아 방문 도중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서 내리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져 버린 사건. 이 당시 백악관 사진가 데이비드 케널리가 동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이 넘어지자 케널리는 이렇게 말했다.
"착지하셔서 정말 반갑습니다.(So nice you could drop in)[32]"

  • 위의 미끄러지는 장면과 함께 대중에게 제럴드 포드하면 가장 많이 회자되는 클립이다.
" 전 제럴드 포드이고 당신은 아닙니다.(I'm Gerald Ford and you're not.) 링크 "

  • 코미디언 체비 체이스가 이런 잘 미끄러지는 면모를 주요 개그 소재로 삼아 SNL에서 그를 패러디한 배역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1976년 4월 17일 방송에서 둘이 함께 SNL에 나온 적이 있는데 해당 회차 스케치에서 체비 체이스가 그의 주특기를 선보이자 포드 자신이 반대로 체이스의 연기를 따라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33]

  • 2년의 짧은 재임 와중에서도 2번의 암살위기를 겪었다. 그것도 둘 다 여성의 손에 죽을 뻔 했다. 첫 번째 범인 리넷 프롬은 살인마이자 사이비 교주인 찰스 맨슨의 추종자였고, 두 번째 세라 무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고. 세라 무어로부터 그를 구한 것은 올리버 시플(Oliver Sipple)이라는 시민이었는데 후에 동성애자라고 아웃팅당했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언론사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면서 파산하고, 후에 정신분열에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가족에게도 외면당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고, 그 시신은 2주 후에 발견되었다. 이에 간략한 서신으로 감사를 표한 것이 다였던 포드 대통령의 처신이 잠시 도마에 올랐다. 이 일화는 2016년 8월 28일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다.


  •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은 그의 아내인 베티 포드(1918년~2011년)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Betty_Ford%2C_official_White_House_photo_color%2C_1974.jpg
무용을 전공했으며, 첫 남편과는 자식 없이 이혼했다. 즉 그 다음해(1948년) 결혼한 포드는 두 번째 남편. 포드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혼녀와의 결혼이라는 딱지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부통령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베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유방암 투병 사실을 공개해 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 그러나 암 투병 사실 공개 이후 남편의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는 지적에 충격을 받아 백악관을 나온 후 약물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자신의 알코올 중독 사실을 공개하면서 치료를 받아 중독에서 빠져나왔고, 급기야는 1982년 캘리포니아 랜초 미라지에 알코올/약물 중독 재활치료를 위한 '베티 포드 센터'를 세웠다(미국 최고의 재활센터 중 하나로, 이 공로로 1991년 미국 최고 훈장인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 2011년 베티 포드 센터 근교의 아이젠하워 진료실에서 사망해 남편 옆에 묻혔다.

  • 현재 미국 대통령 중 마지막으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인물이다. 후임인 지미 카터부터는 대통령의 유고가 없어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 사례가 없다.[34]

  • 심슨 가족조지 H. W. 부시와 함께 출연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서민적이고 평범한 이미지 덕분인지, 부시가 심슨 부자의 등쌀에 못 이겨 쫓기듯 마을을 떠나버린 자리에 이사를 와서는 즉시 호머와 친구가 된다. 호머를 보자마자 "Do you like football?" "Do you like nacho?" 두 마디를 하고 호머가 그렇다고 하자 갑자기 절친이 되어 호머와 어깨동무를 하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또 넘어진다. 호머랑 같이 D'oh를 외친다 호머의 성우인 댄 카스텔라네타가 성대모사했다.

  • 21세기, 더 나아가 제3천년기를 본 최초의 대통령이다. 이후 20세기 대통령들 중에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도 21세기를 보고 세상를 떠났다.[35]

  • 영화 바이스에선 빌 캠프가 역을 맡았다. 아들 부시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 중에선 나름 비중이 있는 편[36]이지만 어째 나오는 장면이 하나같이 굴욕적이다.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뒤 럼즈펠드와 체니에게 휘둘리는데 체니의 화술에 홀딱 빠져 키신저를 해고하고 럼즈펠드와 체니를 중용하는 등 멍청하게 묘사된다. 마지막 출연도 대선에서 카터에게 패배한 뒤 침울해하는 것이다.

[1] 무조건적으로 가장 짧은 임기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의 31일이다. 반대로 포드는 전임자의 유고로 이어받은 대통령으로선 가장 짧은 임기를 보낸 셈이다(같은 조건이지만, 이후 재선한 대통령을 제외한 기준).[2] 참고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한국식으로 99세의 나이로 2023년 현재까지도 살아있으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중이다.[3] 무려 13선 의원이었다. 하원의원 임기는 각 선수마다 2년이니 총 26년을 하원에서만 보낸 셈이다.[4] 중부 평야 지방 출신인 대통령은 포드(미시건) 외에 해리 S. 트루먼(미주리)과 버락 오바마(일리노이)가 전부. 허버트 후버 대통령도 출생 자체는 아이오와에서 하였다. 오바마를 제외한 나머지 둘 사이의 하나의 공통점은 후임 승계 대통령이라는 것. 트루먼 前 대통령은 부통령이 된 지 3달도 안 돼서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승계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출신 중 자력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오바마가 유일하다. 초선 도전 당시 오바마가 역대급 카리스마와 인기를 누렸기에, 더군다나 흑인인 고로 흑인들이 95% 득표율로 강하게 밀어준데다 시카고라는 넘버3 전국구 대도시를 기반으로 했기에 중부 출신 핸디캡을 극복하고 압승한 것이다.[5] 서류상으로 완전히 개명한 건 1935년이다.[6]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이 학교 정책학 대학원의 이름은 Gerald R. 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이다.[7] 대한민국의 경우 대통령 행진곡이 군 관련 행사에서나 쓰이지만 미국에서 Hail to the Chief은 취임식은 물론이고 각종 공식 행사에서 대통령이 등장할 때 쓰인다.[8] 본인 장례식에서도 연주되었다.[9] 이 때 태풍에 휘말려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 포드는 윌리엄 홀시가 지휘하는 3함대에 소속했었는데, 이 3함대는 1944년 12월에 대형 태풍 '코브라'에 직격으로 당해서 8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포드 또한 큰 파도에 떠내려갈 뻔 했고, 타고 있는 배에 화재가 나서 이를 수습하는 등 큰 고생을 했다.[10] 포드 일생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하원의장이었다는 이야기가 계속 회자된다. 물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 정치사를 돌아보면 이 꿈은 대통령 당선보다 힘든 꿈이었다. 1955년부터 1994년까지 40년간이나 하원의장은 계속 민주당에서 배출되어왔으니 하원의장은 40년 가까이 민주당에서만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포드의 하원의장 꿈은 단순하거나 소박한 꿈이 아니고, 오히려 민주당 우위의 하원에서 수십년만에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어떻게 보면 대통령직보다도 아주 큰 꿈이었다.[11] 하원의장은 대통령 계승 서열 3위다. 포드는 소망하던 하원의장은 되지 못하고 대신 전격적으로 부통령 겸 상원의장에 지명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 재임기간에도 대통령 업무를 버거워 했다는 후문.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참모진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고,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다보니 여러모로 정통성 관련해서 얘기가 많이 나왔다. 당연히 야당은 물어뜯고, 정부도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확실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결국 무능력하다는 이미지가 찍히게 되어 재선에도 실패했지만 사람 자체는 매우 좋았던 사람이고 이렇다 할 실정을 저지르지도 않았다.[12] 정통성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일단 부통령 겸 상원의장 다음 권력서열인 하원의장은 민주당 소속이다보니, 공화당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던 하원 대표였던 그를 지명한 것이다.[13] 톰 클랜시 소설들의 주인공 잭 라이언이 대통령에 오르는 과정도 '부통령이 비리로 사임- 백악관 안보특보이던 라이언을 신임 부통령으로 임명- 대통령이 테러로 사망하여 대통령직 승계'로 포드의 경우를 오마주했다.[14] 그 이전에 17대 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탄핵되었더라면 당시 상원임시의장(당시 승계서열 2위)에 이어서 2번째가 된다. 왜냐면 이 분은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로 승계받았고 부통령을 따로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 대통령이든 부통령이든 일단 선거에 이겼으니 그 자리에 오른 것이므로 승리기록이 있는데 포드는 일생 유일한 대선에서 패했으므로 패배기록만 있다.[16] 이때 당선된 민주당 초선의원을 "워터게이트 아기들(Watergate Babies)"이라고 부른다. 여러모로 탄돌이와 비슷한 용례인데 실제로 이 초선 의원들도 탄돌이들처럼 당 지도부의 말을 듣지않고 자기 신념대로 정치를 해서 당 주류와 갈등을 빚는다.[17] 하지만 이후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어 네오콘의 부상과 반정부주의의 확산에 영향을 끼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이 훨씬 더 크다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18] 이것은 1976년 대선의 패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데, 당시 뉴욕주는 약 4.4% 차이로 카터에게 갔는데 뉴욕주에서 포드가 승리했다면 포드 281 vs 카터 266으로 포드가 이겼을 것이다.[19] 뉴욕, 텍사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대형주를 포함한 여러 주에서 작은 표차로 패했기 때문에 운이 조금만 좋았어도 재선이 가능했을 것이다.[20] 그나마 워터게이트 여파가 남아 공화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아직 컸던 상황에서 득표율 48%로 27개 주에서 선거인단 240명을 확보하면서 선전했다. 특히 레이건의 텃밭이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 1.8%라는 간발의 차로 승리를 거두었다.[21] 기념관 형태에 가깝다.[22] 게다가 나이도 문제가 되는데 레이건과 포드는 고작 2살밖에 차이가 안나고, 레이건과 포드 둘 다 당시 69세, 67세의 고령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23]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1980년대까지 부통령직이 별다른 권한은 많지 않던 실권직이라기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 지명은 대통령 후보의 의중이 컸기 때문이다.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가 매우 치열하게 맞붙었던 경선 상대인 린든 B.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결정했던 것이 그 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대통령이 맡는 업무가 엄청나게 과중해지면서 앨 고어, 딕 체니, 조 바이든 등의 실세 부통령이 오히려 흔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부통령의 위상 상승으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부통령 후보가 대통령 후보의 의중만으로 지명되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24] 사망 당시 최고령이였으나 이후 아버지 부시(94세 5개월)와 지미 카터(99세 ~ 현재 생존중)가 이 기록을 깼다.[25] 원문은 "Jerry Ford is so dumb he can't fart and chew gum at the same time." 쉽게 말해서 대놓고 포드를 조롱한 것이다. 이걸 약간 순화해서 프레스지에서 내놓은 표현이 "can't walk and chew gum at the same time". 관용어구로,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도 존슨의 여러 발언을 생각하면 꽤 얌전한 편이다.[26] 1973. 12. 6. 전임 스피로 애그뉴 사임으로 인해 부통령직 지명 및 인준[27] 1974. 8. 9. 전임 리처드 닉슨 사임으로 인한 대통령직 승계[28] 1960, 70, 80년대 군사정권 시기에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는 일반 시민들을 동원해 길 양옆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게 하고 서울 광장이나 여의도 광장 등에서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대한 환영 행사를 열었는데, 특히 1966년에는 당시 서울 인구의 3분의 2인 150만 명 이상이 환영 행사에 동원이 되었을 정도였다.[29] 사실 선거 초반에 30% 남짓의 득표율로 카터에게 크게 밀리던 포드는 본격적인 선거 경쟁에 돌입한 이후 경선 경쟁자였던 레이건의 지지에 힘입은 서부 보수표의 결집과 카터의 실언으로 역전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 발언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30] 아이젠하워는 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에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31] 참고로 이 조사에서 김일성은 7위였고, 3위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대통령, 2위는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 공화국 총통, 1위는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이었다.[32] 원래 제대로 번역하자면 "잠시 들러주셔서(Drop in이라는 단어가 '잠시 들르다'라는 뜻도 있음) 정말 반갑습니다"[33] 출처: <웃기는 리더가 성공한다>, 김진배, SNL 위키[34] 다만 현직 대통령인 조 바이든78세의 고령으로 당선된데다가 가끔 치매 전조 증상처럼 보이는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임기 중 사망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 경우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가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된다.[35] 참고로 20세기 대통령들 중에서 지미 카터빌 클린턴은 2023년 현재 생존 중이다.[36] 닉슨과 레이건은 뒷모습만 나오고 아빠 부시는 부통령 시절 아들때문에 고생하는 장면과 대통령이 된 뒤 체니를 국방장관으로 등용하는게 전부이지만 어째 포드는 비중이 꽤 되는편이다. 물론 배우의 출연이 아닌 자료화면이나 언급 등으로의 비중은 닉슨이나 레이건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