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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디마지오

덤프버전 :

조 디마지오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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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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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

포지션
외야수
득표수
1,054,423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36
1937
1938
1939
1941
1947
1949
1950
1951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DiMaggio%20Joe%20Plaque%20281_NB_0.png
조 디마지오
헌액 연도
1955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8.84% (4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지미 폭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조 고든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루 보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9년 ~ 194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지미 폭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루 게릭
(뉴욕 양키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번 스티븐스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 등번호 9번
안트 조젠스
(1932~1935)

조 디마지오
(1936)


마이릴 호아그
(1937~1938)
뉴욕 양키스 등번호 5번
프랭키 크로세티
(1936)

조 디마지오
(1937~1942)


닉 에튼
(1943~1945)
닉 에튼
(1943~1945)

조 디마지오
(1946~1951)


영구결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5번
알 다크
(1966~1967)

조 디마지오
(1968~1970)


돈 민처
(1970~1971)



파일:DiMaggio Joe 7570.90_H&A_NBL.jpg

뉴욕 양키스 No. 5
조셉 폴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Joe" DiMaggio

출생
1914년 11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마르티네즈
사망
1999년 3월 8일 (향년 84세)
플로리다 주 할리우드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갈릴레오 고등학교
가족
빈스 디마지오
동생 돔 디마지오
배우자
마릴린 먼로 (1954~1955)
신체
188cm / 89kg
포지션
중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3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NYY)
소속팀
뉴욕 양키스 (1936~1942, 1946~1951)[1]
지도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타격코치 (1968~1970)
기록
56경기 연속 안타

1. 개요
2. 뉴욕 양키스 입단 이전
3. 양키스의 새로운 황제
4. 56경기 연속 안타
5. 입대, 그리고 은퇴
6. 은퇴 후
7. 연도별 기록
8. 평가
9.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10. 여담
11.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양키스는 지지않아."

"그렇지만 저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신경 쓰여요."

"얘야, 양키스를 믿으렴. 양키스에는 그 위대한 조 디마지오 선수가 있잖니."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中

미국의 전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루 게릭을 잇는 뉴욕 양키스의 원 클럽 맨 프랜차이즈 스타이다.[2] 13시즌밖에 뛰지 않아 누적 성적이 낮지만, 준수한 비율 스탯과 더불어서 뛰어난 전성기를 누린 선수이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으며 리그 최고 타율 2번, 최다 홈런 2번, 최다 타점 2번과 함께 리그 MVP 3회, 전 시즌 올스타전 출장, 월드 시리즈 우승 9회를 기록했다. 별명은 양키스의 범선이라는 뜻인 '양키 클리퍼(The Yankee Clipper)'.[3]

통산 성적은 13시즌 동안 타율 0.325, 출루율 0.398, 장타율 0.579, OPS 0.977, 순장타율 0.254, BB/K 2.14, wRC+ 152, 2214안타, 361홈런, 1537타점.


2. 뉴욕 양키스 입단 이전[편집]


1914년, 샌프란시스코 근방의 이탈리아계 어부의 아들로 어촌에서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난 디마지오는 평범한 어부가 되기를 꿈꿨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된다. 생선 썩은 냄새와 배 청소를 어찌나 싫어했는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피하려고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5형제 모두가 대를 이어 어부가 되길 바랬던 아버지는 그를 "게으름뱅이"에다가 "아무 쓸모짝에 없는 놈"이라고 욕했다.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신문배달, 창고일, 오렌지 농장일 등을 하느라 고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했다.[4]

1932년, 형인 빈스 디마지오가 뛰던 샌프란시스코 실즈에서 마지막 3경기를 남기고 유격수에 공백이 생기게 되자 조 디마지오는 형의 추천을 받아 실즈에서 뛰게 되었고 3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실즈와 계약을 하게 된다. 1933년에는 마이너리그 2위에 해당하는 6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 수많은 팀의 영입 대상이 되었으나 다음해, 디마지오는 택시에서 내리다가 무릎에 금이 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한 팀을 제외하고 다른 팀들은 디마지오 영입에서 철수하는데, 그 한 팀이 바로 뉴욕 양키스였다. 양키스는 실즈에서 원래 가격의 1/3인 25000달러만 지불하여 디마지오를 영입한다.

3. 양키스의 새로운 황제[편집]


이후,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를 불식시키며 디마지오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936년,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디마지오를 향해 언론은 베이브 루스, 타이 콥 등의 뛰어난 타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였고 엄청난 부담 속에서도 디마지오는 시범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고[5] 첫 시즌에 타율 0.323, 29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루 게릭과 함께 새로운 강타선을 결성한다.

다음해에는 타율 0.346, 46홈런, 167타점을 기록하며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디마지오가 기록한 46홈런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2005년에 48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양키스의 오른손 타자가 기록한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이 당시, 양키스의 홈 구장이었던 양키 스타디움은 양키스의 간판 타자 베이브 루스를 위해 철저히 왼손 타자 친화로 꾸며져 있었고, 반대로 오른손 타자들에게는 홈런을 때려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에 더 돋보이는 기록이다.

디마지오는 이후에도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며 루스의 뒤를 잇는 새로운 간판 스타로 입지를 굳혔고, 1939년에는 타율 0.381, 30홈런, 126타점으로 최고 타율과 리그 MVP를 차지했으며 1940년에는 타율 0.352로 또다시 최고 타율을 기록한다.

4. 56경기 연속 안타[편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디마지오에게 가진 인식은 돈 밝히는 놈이었는데, 이는 디마지오가 구단과 연봉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1년, 디마지오는 이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전미의 최고 스타이자 국민적 기쁨으로 활약한다.

1941년 5월 1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디마지오는 기나긴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 과정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라 상대 내야수의 얼굴을 맞고 생긴 행운의 불규칙 안타로 기록을 이어나간 적도 있으며 마지막 타석에서 극적인 안타를 기록하는가 하면, 상대 투수가 승부를 피해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난 공을 어거지로 때린 적도 있었고 다른 팀[6]에서 뛰던 동생 돔 디마지오가 다이빙 캐치로 타구를 잡아내 기록이 중단될 뻔한 적도 있는가 하면[7] 기록원이 실책과 안타의 갈림길 중에서 안타를 선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45번째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기존 기록인 44경기 연속 안타를 뛰어넘었던 6월 29일, 워싱턴 세네터스전에서는 누군가가 디마지오의 방망이를 훔쳐간 적도 있었다. 결국 디마지오는 동료의 방망이를 빌려 신기록을 세웠고 경기가 끝난 후, 장내 방송까지 동원한 후에야 간신히 자신의 방망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7월 16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까지 디마지오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갔고 7월 17일, 인디언스전에서는 상대 내야진의 호수비에 의해 3타수 무안타로 물러나면서 기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후, 7월 18일부터 8월 2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전까지 또다시 16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갔다.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디마지오가 7월 17일에 안타를 기록했다면 도합 73경기 연속 안타라는 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8] 위와 같은 기록으로 디마지오는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시즌 4할이 된 타율 0.406의 테드 윌리엄스를 이기고 두 번째 리그 MVP를 차지한다.

이 시기 디마지오의 인기를 상징하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인들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던 인사가 바로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쳤습니까?"였다.

5. 입대, 그리고 은퇴[편집]


1942년 시즌을 보내고 디마지오는 미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전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방망이를 들고 부대에 위문을 하러 다닌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1946년부터 디마지오는 다시 팀에 복귀한다. 복귀 첫 해, 3년 만에 서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데뷔 시즌 이후 처음으로 3할을 기록하는 데 실패했으나, 다음해에 타율 0.315, 20홈런, 97타점을 기록하며 3번째 리그 MVP를 수상한다. 이때는 테드 윌리엄스의 기록이 디마지오보다 좋았으나 기자들이 자신들과 관계가 훨씬 원만했던 디마지오의 손을 들어줬다.[9][10] 1948년에는 타율 0.320, 39홈런, 155타점을 기록하며 2번째로 최다 홈런과 최다 타점을 기록한다.

그러나 1949년, 발꿈치 통증으로 인해 디마지오는 전반기를 쉬어야 했고 이 당시,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팀의 간판 스타였던 디마지오와 윌리엄스를 맞트레이드하려 하였으나 레드삭스에서 양키스의 주전 포수 요기 베라까지 요구하여 이 트레이드는 결렬된다.

그리고 1950년, 타율 0.301, 32홈런, 122타점으로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으나 1951년에는 타율 0.263, 12홈런, 71타점으로 부진했고, 결국 그는 양키스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은퇴한다. 이후 양키스 중견수의 계보는 미키 맨틀로 이어진다. 참고로 디마지오의 말년에 우익수로 맨틀이 들어오면서 디마지오는 자신이 밀려날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미키 맨틀 문서 참조.

6. 은퇴 후[편집]


은퇴 후, 디마지오는 철저한 은둔 생활을 한다.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으로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274일 만에 이혼을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디마지오와 먼로는 친구로서 지냈고, 세월이 흘러 디마지오는 먼로와의 재결합을 원했다. 먼로 역시 디마지오와의 재결합에 응하였는데 재결합 3일 전 돌연사한다. 디마지오는 먼로의 죽음이 케네디 가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케네디 가문에게 등을 돌린다. 그리고 권력자의 성추문을 혐오했는데, 늘그막에 빌 클린턴이 성추문을 일으키자 격렬하게 비난했다.

먼로가 죽은 뒤에 디마지오는 먼로의 장례를 주관했으며 평생 혼자 살았다. 그 후에도 디마지오는 먼로의 무덤에 1주일에 3번 찾아가 장미꽃을 놓았으며 늘그막에 몸이 아파서 무덤으로 가지 못할 때도 남에게 부탁하면서 꽃을 놓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이 찾아올 때도 두렵지 않다면서 마릴린을 만날 텐데 뭐 걱정이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왔다. 결국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도 "이제야 마릴린의 곁으로 갈 수 있겠군"이었다.

하지만, 정작 조 디마지오 본인도 결혼 생활 동안에 먼로를 수없이 때렸고 야구배트를 써서 폭행을 했던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는 놈이라 저렇게 말을 할 자격은 없다. 아마도 저승에서도 먼로는 디마지오를 외면하면서 지낼지도 모른다. 어찌나 먼로가 맞았던지, 늘 흉터와 멍을 감추기 위해서 짙은 화장을 했을 정도다. 특히나 이는 먼로가 보이스 코치인 쉐퍼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더더욱 심해진다. 그렇다고 먼로의 불륜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다른건 몰라도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 이외의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적은 없기 때문인 사람이다.

조 디마지오 자신은 가정폭력이 나름대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해 뉘우치진 않았다.[11] 물론, 조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폭력을 동원한 이유가 오로지 낭만(...) 실현 때문일 리는 없고, 가부장적인 이탈리아계 가정의 영향을 받아 근본적으로 조신한 아내를 바란 디마지오와 외향적이고 자유로운 배우의 삶을 추구한 먼로의 생각이 충돌하면서 가정폭력으로 표출된 것이 크다. 특히 나중에 먼로가 보란 듯이 바람을 피우면서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게 된 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또한 디마지오는 은퇴한 선수였지만 여전히 먼로는 스타덤에 있는 등, 자신의 활동과 비교가 되자 열등감으로 인해서 먼로의 배우 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디마지오의 가정폭력이 먼로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라고 보는 측면도 있다.

시대적인 이유를 들어서 디마지오를 로맨티스트로 미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리 지금보다 폭력이 훨씬 일상이었던 시대상을 감안해도 그가 휘두른 가정폭력이 너무 심했다. 친아들 디마지오 주니어마저도 자신이 목격했던 가정폭력에 대해 증언하면서 아버지를 비난하고, 양어머니였던 마릴린 먼로를 동정했다. 먼로가 10개월을 못 버티고 "그가 나를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면서 법원에다 이혼장을 내밀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조 디마지오가 저지른 가정폭력은 그 당시에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물론, 마릴린 먼로가 불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가정폭력도 큰 책임이 있으므로 그저 변명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이혼소송을 했다면 비난은 고스란히 마릴린 먼로가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대상으로는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아내에게 평생동안 친절하게 대하면서 헌신하고 평생을 같이한 폴 뉴먼이나 루 게릭같은 사람도 있었다. 루 게릭이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쌍욕을 하면서 손절하거나 평생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조 디마지오는 1998년 10월 플로리다 주의 한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았고[12] 5개월 뒤 1999년 3월 8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 주 콜마의 한 추모공원에 묻히게 되었다.

참고로 조 디마지오 주니어는 평생 동안을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불과 5개월 뒤인 1999년 8월에 사망했다. 야구선수로서는 최고였지만, 동시에 가족들을 비롯한 남편감이자 아버지로서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영 좋지 못한 가정사와 달리 1960년대 말 마릴린 먼로와 이혼하고 이미 그녀가 죽은지도 몇 년이 지나고, 이미 은퇴한지는 한참 지난 선수[13]임에도 불구하고 급작스레 유명해졌는데, 그 이유는 1967년 흥행 1위 영화인 '졸업'의 메인 주제가인 사이먼 앤 가펑클의 'Mrs. Robinson'에서 조 디마지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 이 노래는 당시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영화 특성상[14]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고, 이 노래도 젊은 층에게 매우 큰 인기를 끌어 결국 당대 젊은이들이 알 리가 없었던 조 디마지오가 급작스레 젊은층에게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디마지오 사후인 1999년 4월 25일에 뉴욕 양키스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개최한 디마지오 데이 행사에 폴 사이먼이 초청되어 'Mrs. Robinson'을 부르기도 했다. 영상

7.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조 디마지오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36
NYY
138
668
206
44
15
29
132
125
4
24
49
.323
.352
.576
.928
5.2
4.8
1937
151
692
215
35
15
46
151
167
3
64
37
.346
.412
.673
1.085
9.1
8.4
1938
145
660
194
32
13
32
129
140
6
59
21
.324
.386
.581
.967
5.9
5.7
1939
120
524
176
32
6
30
108
126
3
52
20
.381
.448
.671
1.119
8.5
8.3
1940
132
572
179
29
9
31
93
133
1
61
30
.352
.426
.626
1.051
7.5
7.1
1941
139
622
193
43
11
30
122
125
4
76
13
.357
.440
.643
1.083
9.8
9.3
1942
154
680
186
29
13
21
123
114
4
68
36
.305
.376
.498
.875
6.5
6.4
1943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복무)
1944
1945
1946
NYY
132
567
146
20
8
25
81
95
1
59
24
.290
.367
.511
.878
5.2
5.2
1947
141
601
168
31
10
20
97
97
3
64
32
.315
.391
.522
.913
4.9
4.7
1948
153
669
190
26
11
39
110
155
1
67
30
.320
.396
.598
.994
7.3
6.9
1949
76
329
94
14
6
14
58
67
0
55
18
.346
.459
.596
1.055
4.7
4.3
1950
139
606
158
33
10
32
114
122
0
80
33
.301
.394
.585
.979
5.6
5.2
1951
116
482
109
22
4
12
72
71
0
61
36
.263
.365
.422
.787
2.8
2.9
MLB 통산
(13시즌)
1736
7672
2214
389
131
361
1390
1537
30
790
369
.325
.398
.579
.977
83.1
79.1

8. 평가[편집]


1930년대 말~4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통산 타율 .325에 통산 출루율이 4할에 육박하며, 통산 OPS는 .977이다. 다만 뛰어난 비율스탯에 비해 박수칠 때 은퇴해서 그런지 누적스탯이 다른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 레전드인 루스, 게릭, 맨틀보다 많이 못해서 현재는 그냥 인기만 많았던, 테드 윌리엄스보다 한참 더 못한 선수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 1940년대 당시 디마지오는 테드 윌리엄스가 없었으면 충분히 리그의 지배자로 여겨질 만한 성적을 냈다.[15] 이로 인하여 샌디 코팩스와 더불어 짧은 커리어동안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여 시대의 아이콘이 된 전설적인 선수로 평가받는다.

13년동안의 짧은 선수 생활로 누적 성적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그의 통산 WAR는 무려 83.1이다.[16] 이 WAR 수치는 무려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엇비슷한 정도이다. 이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17] 게다가 데뷔하자마자 7번의 시즌 중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는 미친 임팩트를 보여주었으며, 13시즌 중 9시즌을 우승하였다.

베이브 루스의 은퇴 후, 루 게릭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베이브 루스와 비견될 만한 화려한 스타를 원했고, 디마지오는 그 공백을 훌륭히 메우며 양키스를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으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한다. 비록 뛴 기간은 13시즌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기간 동안 디마지오는 양키스의 중심 타선에서 루스와 게릭 못지 않은 활약을 했으며 팀을 9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유일하게 데뷔부터 은퇴하기까지 올스타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출장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디마지오의 기록 중 돋보이는 것은 극도로 적은 삼진수다. 361홈런을 기록하면서 당한 삼진은 불과 369개이며, 한 시즌 기록한 홈런보다 더 적은 삼진을 기록한 경우가 7시즌에 달하였고 40삼진 이상 당한 시즌은 한 번도 없다. 홈/삼비가 적은 선수로 테드 윌리엄스가 자주 언급되지만 진정한 끝판왕은 바로 이 사람.

사실 타격 성적 자체만 놓고 보면 동시대의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뒤쳐진다. 하지만 디마지오가 우승 반지 9개를 차지하는 동안 윌리엄스는 단 1차례 월드시리즈에 나가 세인트루이스에 패한 게 전부였다. 또한 기자들과 원수처럼 지냈던 윌리엄스와 달리 디마지오는 친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는 MVP 투표에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디마지오는 3차례 MVP를 따내며 2차례에 그친 윌리엄스에 앞설 수 있었다.

1941년에는 56경기 연속 안타의 임팩트 덕에 4할 타율을 기록한 윌리엄스를 눌렀으며, 심지어 1947년에는 트리플 크라운의 윌리엄스를 단 1점 차이로 제쳤다. 참고로 이해 디마지오의 fWAR은 4.9로 10.5을 기록한 윌리엄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근데 그때는 지구상에 WAR가 없었잖아[18] 한국에서는 홍성흔이 이런 식으로 골든글러브를 가져갑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테드 윌리엄스는 루스, 콥과 함께 역대 최고의 타자 3인방에 꼽히는 반면 디마지오는 이후 나온 에도 밀리는 추세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최고의 '스타'를 꼽으면 디마지오는 반드시 거론된다.

또한 디마지오의 시대에 골드글러브가 없어 무시되는 측면이 있는데 디마지오는 수비와 주루에서도 탁월한 선수였다. 외야수로서 가장 힘들다는 중견수 수비를 맡으면서도 수비 잘한다는 평을 들었고, 상기한 무릎부상으로 인해 도루를 자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베이스 러닝도 뛰어난 선수였다.

최고의 5툴 플레이어었던 윌리 메이스의 팀 감독이던 레오 듀로서가 '윌리 메이스 외에 유일하게 다 잘 할 수 있던 선수는 디마지오 뿐이었다.'라고 했을 정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메이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꼽힐 정도의 5툴 플레이어다. 그 정도 선수와 동급으로 대우받는다는건 그만큼 대단했다는 얘기다.

1955년, 디마지오는 88.8%의 투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첫 턴 입성이 아니었는데, 일단 디마지오는 평가에 비해 클래식 스탯이 많이 부족한 선수이며,[19][20] 결정적으로 디마지오 은퇴 당시만 해도 명예의 전당이 생긴지 20년이 안 되어서 아직 앞선 시대 전당감 선배들이 번호표를 뽑고 입성을 기다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69년에는 메이저리그 100주년을 맞아 '살아있는 최고의 메이저리거'로 선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극도로 꺼리며 자신의 연속 안타 기록을 넘어서는 선수가 나오기를 원했다. 이런 면에서는 4할 타자가 다시 나와서 자신에게 붙은 마지막 4할 타자라는 칭호가 떨어지길 간절히 바랐던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와 같다.

9.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조 디마지오
34
226
268
58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enter Field (14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조 디마지오
78.1
51.0
64.5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71.2
44.6
57.9

10. 여담[편집]


  • 허구연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용 참조.
  • 그의 형제 중 2명이 야구선수이다. (돔 디마지오, 빈스 디마지오) 그것도 잠깐 스쳐간 정도도 아니고 올스타에도 선발된 적 있던 꽤나 실력 있는 메이저리거였다.[21][22]포지션은 3명 모두 중견수. 재미있는 점은 동생인 돔 디마지오가 뛴 소속팀은 다름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즉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의 동료였다.
  • 메이저리그의 'Be the legend'라고 할 수 있는 'Beat the streak'는 그의 56경기 연속 안타를 기념하기 위해 안타를 기록한 선수를 56경기 연속 맞추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Be the legend' 역시 박종호 선수의 40경기 연속 안타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안타를 기록한 선수를 40경기 연속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반복되는 타고투저 시즌으로 인해 지금은 50경기로 기준이 상향된 상태다.

  • 심슨에서 야구선수 카드로 언급된다. 번즈가 심슨에게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아들에게 주라고 조 디마지오의 야구선수 카드를 준다. 이 카드를 크리스마스 선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코믹북 가이에게 팔려고 감정을 받는다. 감정 결과는 '유감이지만 선생님의 카드 가치는, 제가 가진 전부야 전부!' 라고 하면 계산대의 있는 돈을 털어서 준다.

  •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는 그의 이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 언급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우상이고[23], 그의 최신 타격 성적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어획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또한 이 소설 자체가 야구와도 꽤 연관이 있다.

11. 관련 문서[편집]



[1] 1943~1945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입대 때문에 빠져야 했다.[2] 보스턴 출신이었던 루스가 아닌, 양키스 팜에서부터 올라온 게릭으로부터 시작되는 원 클럽 맨 프랜차이즈 스타 계보는 이후 미키 맨틀, 돈 매팅리, 데릭 지터가 이으며, 향후 애런 저지가 이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3] 이 별명은 아폴로 12호 사령선의 명칭으로 쓰인다.[4] Nelson, Murry R. (2013). American Sports: A History of Icons, Idols, and Ideas (4 Volumes): A History of Icons, Idols, and Ideas. ABC-CLIO. p. 347. ISBN 9780313397530. Retrieved 21 March 2017.[5] 평생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꺼리던 디마지오가 유일하게 자화자찬하던 것이 바로 사첼 페이지를 상대로 4타수, 1안타를 기록한 것이다.[6] 그냥 다른 팀도 아니고 보스턴 레드삭스[7] 이때 나온 말이 디마지오가 엄마를 고소해야겠군이다. 본격 패드립[8] 대신 디마지오는 이날 볼넷 1개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 덕분에 당시로서는 연속출루 역대 1위이자 현재 역대 2위 기록인 74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웠다. 연속 출루 1위 기록은 1949년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가 기록한 82경기이며, 3위 기록 역시 윌리엄스의 73경기로 70경기 이상은 이 둘뿐이다. 윌리엄스는 1949년 MVP를 수상했지만 이 기록이 주목받지는 못했다.[9] 이 해는 기자들의 MVP 투표 중 가장 심각한 해이며, 테드가 무려 8관왕을 기록했음에도 못 탄것은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심했다. 그나마 1941년는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화젯거리라도 있었는데 쨉도 안되는 디마지오의 성적으로 탄 것은 말이 안된다. 1979년의 윌리 스타젤 MVP 수상 전까지 논란이 가장 많았던 해이다.[10] 해당 시즌 테드 윌리엄스의 ops는 1.133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한 디마지오와 무려 2할 차이가 났다.[11] 얻어맞는 먼로 입장에서도 개소리였지만 당시에는 "내가 어찌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아내가 조금 도발적으로 입고 다니면서 딴 남자랑 대화하고 있는 것에 눈을 마주치자 집에서 아내를 격렬하게 때리면서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아내를 강하게 끌어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근대적인 이야기가 아직 통하던 시대였다.[12] 사실 선수시절부터 엄청난 골초였다고 한다.[13] 지금으로 치면 1990년대에 전성기를 겪고 2000년대 초에 은퇴한 시대의 선수와 시대 상황이 비슷하다. 이 예시에 가장 잘 맞는 선수가 LG의 이상훈일 듯.[14] 1967년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영화 내용이 자유롭다. 무려 모녀덮밥이 묘사될 정도인데, 지금도 아름다운 유부녀를 호칭하는 관용어로 '로빈슨 부인' 이라고 부를 정도다.[15] 사실 테드 윌리엄스 말고 스탠 뮤지얼 역시 누적은 많이, 비율은 디마지오보다 근소한 우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물론 뮤지얼과 디마지오는 완전한 동세대가 아니다.[16] 참고로 WAR의 경우 같은 누적 성적도 더 짧은 기간동안 기록했을 때 높게 책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즉 디마지오는 13년동안 대단한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17] 테드 윌리엄스만큼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조 디마지오도 전성기인 28세~30세 시즌을 군 복무로 잃었다.[18] WAR이고 뭐고 다 떠나서 도루 제외 전관왕이었던 테디를 마일스톤 하나 없이 제낀건 사실 기레기들의 농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이런 식의 강탈이 디마지오의 책임은 아니고, 순전히 기레기들이 잘못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19] 물론 엄청난 임팩트로 인해 WAR이 80에 육박하며, 현대야구 관점에서 세이버상으로는 당연히 첫 턴이 가능한 선수이나 당시에는 저 정도는 첫턴이 힘들었고 애초에 세이버 자체도 아예 없었다. 마치 세이버상으로는 카디널스 1기 푸홀스가 그 즉시 은퇴해도 명전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거나, 마이크 트라웃이 지금 은퇴해도 명전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클래식 누적 스탯이 다소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클래식한 관점으로 봐도 디마지오는 커리어 13시즌 중 9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했기에 저평가의 여지 자체가 없다.[20] 굳이 따지자면, 디마지오에게는 루스나 게릭과는 달리 포스트시즌에도 강하다는 이미지는 없었다. 통산 포스트시즌 타율은 2할 7푼대로 명성에 못미치는 편. OPS도 0.760으로 팀에 마이너스까진 아니어도 디마지오의 이름값에 비하면 확실히 못한 편이긴 하다. 물론 그걸 감안해봐도 후대의 샌디 코팩스와 비교했을때 인기건 위상이건 임팩트건 부족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 그냥 시대 잘못 만나서 명전을 첫 턴에는 못 갔던거로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21] 아이러니하게도 MLB 퍼펙트이닝 14년~16년 버전에서 레전드 카드로 조가 아닌 돔의 카드만 나왔다(...) 참고로 돔 디마지오는 특폼은 없으나 그래도 쓸만은 했다. 현재 Live버전으로 개편되어 레전드 카드가 리뉴얼 된 이후에는 둘다 카드가 아직 출시가 되지 않았다.[22] 이후 컴프야의 메이저 버전인 MLB 9이닝스에서도 라이벌인 테드 윌리엄스가 레전드로, 동생인 돔 디마지오가 빈티지 카드군으로 출시되는 와중에 조 디마지오만 나오지 않았다.[23] 단순한 우상 정도가 아니라, 작중에서 노인은 그를 거의 신격화하는 수준의 팬심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