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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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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틴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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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틴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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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이름
조지 마틴
GEORGE MARTIN

헌액 부문
아멧 어터건 상[1] (Ahmet Ertegun Award)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1999년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1]
조지 마틴
Sir George Martin

파일:George-Martin.jpg }}}||
본명
조지 마틴
George Martin[2]
출생
1926년 1월 3일
잉글랜드 런던 이즐링턴 하이버리
사망
2016년 3월 8일 (향년 90세)
잉글랜드 윌트셔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직업
프로듀서, 편곡가, 작곡가, 지휘자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3]
문장
파일:220px-George_Martin_Shield.png[4]
Amore Solum Opus Est[5]
서명
파일:조지 마틴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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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8cm
부모
아버지 헨리 마틴
어머니 마가렛 브래디 마틴
배우자
쉬나 치솜(1948년 결혼 / 1965년 이혼)
주디 록하트 스미스(1966년 결혼)
자녀
슬하 2남 2녀
루시, 알렉시스, 아들자일스, 아들그레고리
학력
길드홀 음악 연극 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음악 / 명예 박사[1])
장르
, , 클래식
레이블
파일:A86C0CDE-FE98-4359-B762-375E600DDE6C.jpg
활동 기간
1950년 – 2006년
악기
건반 악기[2], 오보에
재산
1억 달러 (한화 1,170억원)
종교
가톨릭
묘소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올 세인트 처치 야드(All Saints Churchyard)


1. 개요
2. 생애
2.1. 비틀즈 이전
2.2. 비틀즈
2.3. 비틀즈 이후
3. 디스코그래피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He Was Number One. The Top.

그는 넘버 원이요, 최정상이었다.

퀸시 존스#


제5의 비틀즈 멤버의 타이틀을 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조지였다. 그가 비틀즈에게 우리의 첫 음반 계약을 준 날부터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관대하고 지적이고 음악적인 사람이었다.

폴 매카트니, 2016년[6]

#


영국의 음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지휘자로 대중음악의 위대한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지 마틴은 비틀즈Let It Be를 제외한 모든 음반에 대한 프로듀싱을 단독으로 담당했으며[7], 비틀즈에게는 단순한 프로듀서를 넘어서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Yesterday를 비롯한 대다수의 비틀즈 명곡들이 그의 훌륭한 프로듀싱과 편곡 과정으로 태어날 수 있었으며, 폴 매카트니존 레논도 조지 마틴의 프로듀싱 기술에서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폴 매카트니는 조지 마틴의 사후, 그가 없었다면 비틀즈의 명곡도 없었을 것이라며 조지 마틴을 극찬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제 5의 비틀즈 멤버"라고 불러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실제로 필 스펙터가 프로듀싱한 Let It Be와,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Abbey Road를 들어본다면 조지 마틴이 이전 비틀즈 앨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 수 있다.[9]


2. 생애[편집]



2.1. 비틀즈 이전[편집]


조지 마틴은 정규적 수업은 받지 못했지만, 피아노를 배우며 자랐다. 청소년 시절에는 "포 튠-텔러스"(Fore Tune Tellers)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었으며, 영화의 OST 제작을 꿈으로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영국 해군으로 복무한 이후, 마틴은 길드홀 음악-연극 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졸업 후, 그는 BBC클래식 음악 부서에서 일했으며, 1950년 EMI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EMI의 산하 기업이자 당시 클래식 음악 및 극 음악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던 팔로폰레코드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틴은 후에 팔로폰 레코드의 대표가 되었으며, 녹음 세션과 아티스트등을 관할하는 스태프 프로듀서도 겸임하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인기를 끌자 마틴은 팔로폰에서 활동할 록 가수를 물색하였다. 그는 몇 명의 음악가[10]를 찾아 음반을 내었지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없었다.


2.2. 비틀즈[편집]



1962년, 여러 음반사를 찾아다니며 계약을 시도하던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조지 마틴에게 비틀즈의 데모 테이프를 전해주었다. 마틴은 그 음악이 마음에 들어 했으며, 비틀즈 멤버들이 다른 것들을 연주해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틴은 비틀즈에게 오디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드러머 피트 베스트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오디션에 통과하게 되었다. 마틴은 피트 베스트의 드럼 실력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비틀즈 멤버들이 새로운 드러머를 구하자 피트 베스트를 추방하고, 링고 스타로 대신했다. 그런데 1962년 9월 11일 녹음한 앨범 버전의 "Love Me Do"는 앤디 화이트라는 전문 드러머로 연주를 했는데, 이는 당시 비틀즈가 링고 스타를 영입해놨음에도 조지 마틴의 의중으로 앤디 회이트를 섭외했기 때문.[11] 다만 싱글로 발매된 9월 4일 버전은 링고가 드럼을 쳤다.

비틀즈의 프로듀서가 된 조지 마틴은 천재 음악인이지만, 음악적으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은 존 레논폴 매카트니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한, 비틀즈의 곡들을 깔끔하게 손질하는 편곡, 악보를 볼 줄 모르는 비틀즈 멤버들을 위해 비틀즈 곡을 악보로 정리하여 타 밴드와의 라이브나 공연 때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비틀즈와의 이러한 활동은 프로듀서로써의 조지 마틴을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는 EMI를 떠나 동료 프로듀서들과 함께 "Associated Independent Recording"(AIR)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비틀즈가 해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1969년, 마틴은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비틀즈 멤버 간의 긴장감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틀즈와의 작업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녹음 엔지니어나 비틀즈 멤버 스스로 그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마틴은 비틀즈 멤버들이 "예전처럼" 그와 일할 것을 약속한 후, 그들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 "Abbey Road"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12]


2.3. 비틀즈 이후[편집]


가장 마틴과 가까운 비틀이었던 폴 매카트니1970년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에도 조지 마틴과 몇 번 더 작업을 했다. 존 레논은 가끔 "특이한" 생각들을 음반으로 완성하기 위해 조지 마틴을 찾았으나, 조지 마틴의 스타일을 항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대부분 스스로 음악을 프로듀싱했다. 조지 해리슨은 자신이 만든 곡이나 생각들이 앨범의 더 큰 흥행을 위해, 조지 마틴에 의해 거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3] 그래서 해리슨은 자신의 음반을 스스로 프로듀싱했으며, 심지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몇번 작업한 이후에는 스스로 녹음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마틴은 링고 스타의 드럼을 "아주 안정적인 비트다"라고 칭찬했으나, 비틀즈 해체 후에는 따로 활동하게 되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몇 년이 흐르고도 마틴은 비틀즈와, 그들이 만들었던 음악으로 작업했다. 그는 녹음된 것을 리믹스해서 재발매 혹은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출시했다. 몇 곡은 비틀즈의 원곡에 오케스트라를 입히기도 했으며, 비 지스와 피터 프램튼이 출연했던, 영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89년도에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비틀즈 외에도 마틴은 셜리 배시, 버나드 크리빈스, 아메리카, 케니 로저스, 더들리 무어, 리틀 리버 밴드 등과 작업했다. 그는 All You Need is Ears이라는 회고록에서 그의 인생과, 그가 프로듀서를 맡았던 유명 음악들의 제작 과정 등을 설명했다.

조지 마틴은 1999년에 은퇴했으며, 이와 동시에 자신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곡들을 모은 회고적 성격의 앨범 "In My Life"를 발매했다.

우리 시각으로 2016년 3월 8일에 링고 스타의 트위터를 통해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향년 90세.


3. 디스코그래피[편집]


아래 목록은 프로듀서로서 조지 마틴의 디스코그래피 중 중요한 음반만 추려 놓은 것이다.



4. 여담[편집]


  • 조지 마틴은 평범한 배경에서 자랐지만, 이후 고급 억양으로 말하는 법을 배웠고, 이는 비틀즈가 조지 마틴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이게 만들었다.[14]

  • 그의 아들 자일즈 마틴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틀즈 앨범 프로듀싱을 맡고 있다.[15]

  • 이미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지만, 마틴은 비틀즈와 더 잘 소통하기 위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비틀즈는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가로, 그들 모두는 피아노를 하나씩 사면서 그들의 피아노 연주를 향상시키기 시작했다. 마틴 스스로가 인정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조지가 가까스로 기타를 배우는 것보다 피아노를 더 잘 배웠다고 한다.

  • 2016년, 폴 매카트니는 인터뷰에서 조지 마틴을 자신의 "두번째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 1970년대 중반, 존 레논과 사이가 서먹서먹한 적도 있었다. 조지 마틴은 197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에서 존 레논을 만났을 때 롤링 스톤에 실린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레논은 마틴에게 이례적으로 사과하고, 그의 헌신과 노고에 찬사를 보냈다.

  • 2006년 11월 14일, 그는 영국 음악에 대한 뛰어난 공헌과 영국 음악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 상은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고든 브라운이 수여했다.

  • 스튜디오에서의 긴 근무시간에 의해 청각이 손상되기도 했다. 조지 마틴은 런던의 청각장애인들의 자선사업인 Deafness Research UK의 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2006년 10월,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비틀즈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Love'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오노 요코, 그리고 고인이 된 조지 해리슨의 가족도 지지를 보냈다. 시사회는 2007년에 개최됐다.

  • 그는 프로듀서로서 비틀즈의 히트곡을 포함한 총 23개의 빌보드 1위를 만들어냈다. 이 기록은 프로듀서로서 역대 1위의 기록이다.#

  • 폴 매카트니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는 1996년 1월 리버풀 공연예술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조지 마틴은 이 연구소에 후원자이기도 했다. 조지 마틴의 이름을 딴 음향 스튜디오가 포함되어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1] 음악 산업과 대중 문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1988년에 3등급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았다.[2]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조지 헨리 마틴(George Henry Martin).[3] 음악 산업과 대중 문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4]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문장을 수여받았다. 이 문장은 조지 마틴, 녹음기, 딱정벌레, 그리고 애비 로드 스튜디오비틀즈의 앨범을 상징하는 그림을 포함하고 있다.[5] 라틴어All You Need Is Love라는 뜻이다.[6] 참고로 매카트니는 1997년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다섯번째 비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7] Let It Be는 필 스펙터, 글린 존스랑 같이 공동으로 표기되어 있다.[8] 비틀즈의 저명한 전기 작가인 케네스 워맥(Kenneth Womack)은 '조지 마틴은 비틀즈의 세번째 혹은 네번째 멤버다.'라고 평했다.[[https://www.forbes.com/sites/markbeech/2017/09/09/beatles-producer-george-martins-secrets-revealed-in-new-biography/?sh=2eeffafc36fd]|#][9] 필 스펙터는 멤버들의 동의조차 받지 않은채 강압적으로 Across the Universe 등 명곡들을 편곡하면서 "이 쓰레기들을 음악으로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어?."라는 막말까지 한 반면에, 조지 마틴은 비틀즈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친한 동네형처럼 다가가서 비틀즈 멤버들에게 편곡을 먼저 제안하고, 싫으면 원곡대로 가자는 식으로 유화적인 프로듀싱을 했다고 한다. 다만, 폴과 달리 존 레논조지 해리슨의 경우 폴에 대한 반발심리로 필 스펙터의 편곡을 마음에 들어하여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함께 활동했다. (다만, 존 레논의 경우 필 스펙터와의 협업이 불미스럽게 끝났다. 자세한 내용은 Rock 'n' Roll 문서 참고.)[10] 이중 무명 시절의 게리 글리터도 포함되어 있다.[11] 해체 이후 한참이 지났을 때에도, 조지 마틴은 이 일에 대해 링고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12] 발매일 기준으로 마지막 앨범은 Let It Be다. 하지만 녹음 및 믹싱 작업은 오히려 Let It Be 앨범이 먼저 Get Back이란 이름의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13] 후에 조지 마틴은 "나는 조지를 아꼈기에 더 엄하게 대했다"고 인정했다.[14] 안 그래도 비틀즈 멤버들은 항구도시 날라리(...) 출신이었던 만큼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막나가는 비틀즈 멤버들이 자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 가능하다.[15] 2006년 태양의 서커스 OST 앨범 Love부터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