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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환

덤프버전 :

주재환
周在煥


출생
1940년 12월 23일 (83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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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본관
초계 주씨
직업
미술가
학력
재동국민학교 (졸업)
휘문중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 중퇴[1])
가족
아버지 주씨(周氏)[2]
아들 주호민, 주호영[3]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 링크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미술가.

2. 생애[편집]


1940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41년 1월 1일로 등록됐는데 주재환의 아버지 주씨가 나이 세기 쉽게 등록했다고 한다.

1960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집안이 가난해서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한 학기만에 중퇴했다.[4] 이후 민속학자인 선배의 조수로 일하다가 출판사에서 일했다. 삼성출판사에서 근무할 때, 박경리 작가의 토지 원고를 받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지의 기자가 되어 미술인과 교류했고 미술의 복고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소통을 위주로 한 미술을 만들자는 취지로 모인 ‘현실과 발언’ 회원으로 참여했다. 초기에는 많은 작가가 모였는데, 당시 전두환쿠데타사회 분위기가 경직되면서 십 여명의 작가만 남았다고 한다. 1986년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오마주하여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를 통해 권력을 쥐고 있던 군사정권권위주의적 위계질서, 그리고 끝없이 유지되는 사회 계층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만인의 평등을 표현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 하에서 각종 검열과 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자 “힘을 다 합쳐서 정의구현 사회에 미술이 기여하자”는 뜻으로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5]를 지냈다. 본인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1987년 당시 민미협 관련으로 필화사건이 있었다.[6]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를 위해서 ‘반고문전’이라는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가두시위를 하면 대표인 자신의 이름이 자주 나왔기에 정부탄압으로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 분신자살자가 많아지자 분신으로 사망한 사람의 날짜와 백골단이 분신사망자의 장례식에서도 진압을 하는 사진으로 상반된 것을 통해 노동자의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는 ‘원왕생’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1995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라는 이승만 우상화적 전시회를 개최하자 이에 반발해 4.19 혁명 35주년 기념 전시인 ‘껍데기는 가라’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2001년에 제10회 민족예술인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이미아직’이라는 연극에서 미술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21년 5월 18일부터 8월 1일까지 아들인 주호민 작가와 함께 ‘호민과 재환’ 작품전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했다.

정치 이슈에 꾸준히 의견을 내고 있다.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당시 2014년 통진당 강제해산 반대 원탁회의, 2017년 사드 배치 강행 중단 촉구 비상시국회의, 2018년 이석기 석방 촉구 시국선언문 등에 이름을 올렸다.

3. 여담[편집]


  • 작품을 만들 때 플라스틱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재료를 많이 이용한다.

  • 주호민 작가에 따르면 2019년폐암 수술을 했는데, 당시 아들에게 매우 유쾌하게 “담배를 65년 피우고 이제야 (암이) 생겼다고 선방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외모를 보면 알 수 있듯 아들 주호민과 매우 닮았다. 아들보다는 훨씬 풍성하다.

4. 참고 링크[편집]





[1] 1960년에 입학한지 한 학기만에 중퇴했다고 한다.[2] ? ~ ?. 주재환의 부친이자 주호민의 조부로, 아들 주재환의 나이를 편히 세기 위해 1년 늦춰 출생신고를 했다.[3]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과는 동명이인이다.[4] 이시절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되어 중퇴한 사람들이 많다. 이명박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한학기만 다니고 자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후에 누가 도와줘서 졸업을 했다.[5] 초대 회장은 손장섭 작가인데 이 분은 나중에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주재환 작가와 함께 2대 공동대표를 지낸 사람은 신학철 작가인데 신학철 작가는 당시 석 달 정도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6] 1987년 민족미술협의회 회원이었던 전정호·이상호 두 작가가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도록, 복원품)를 그렸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이적표현물 제작·반포)로 구속되어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그림은 낫을 든 농민 등 북한의 민중과 한국의 민중이 미국의 성조기를 훼손하는 반미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작품인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은 이 작품을 두고 "진달래꽃이 만발한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성조기를 찢고 불태우는 모습을 민중 봉기에 의한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을 묘사했다"고 주장했고, 민미협은 격하게 반발했다.북한에서 흔한 선전 포스터의 클리셰가 미국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다. 북한은 미제의 훼방으로 조국통일(적화통일)의 꿈이 무너졌다면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하다. 김정은도 연설에서 낙동강까지 진격했었는데 미국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던 원한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반대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을 막은 중국에 대해서는 '혈맹'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적화통일'을 막은 미국에 대해서 격하게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유통일'을 막은 중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