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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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원문]
[4]
영국의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 음악가.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정확한 출생지는 호적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채플린 자신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로는 사우스 런던의 빈민촌인 월워스(Walworth)라고 한다. 할머니가 롬(Rom)족, 흔히 말하는 집시라서 채플린에게도 집시의 피가 흐르는데, 채플린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후에 채플린이 쓰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채플린은 1889년 남부 런던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웨스트 미들랜즈 지방의 집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 편지에는 '당신(찰리 채플린)은 버밍엄에서 가까운 스메스위크의 블랙 패치(Black Patch) 지역 집시 퀸에 속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라는 글이 담겼다. 채플린이 태어난 1880년대에 그곳은 버밍엄 변두리 산업지대 집시족 마을이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채플린은 집시의 피가 흐르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집시인 셈이다.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인 '찰스 채플린(Charles Chaplin Sr., 1863년 3월 18일~1901년 5월 9일)'은 런던 뮤직홀에서 약간 이름난 가수였고, 어머니 '해너 채플린(Hannah Chaplin, 1865년 8월 11일~1928년 8월 28일)'[5] 은 이런저런 연극에서 하녀나 잡역 등 단역을 도맡아하는 직급 낮은 배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뮤직홀 배우들의 고질병인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남편이 미국에 순회공연간 사이 조지 윌러라는 다른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부부관계가 나빠져 별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후 루이스라는 여자와 재혼하였다. 아버지는 법정으로부터 자식을 양육하라는 책임을 졌음에도 전처랑 형인 시드니와 찰리에게 파운드화 지폐는 고사하고 동전 한 푼조차 주지 않았고, 어머니인 해너가 정신병원에서 나와 찰리 & 시드니와 재회한 후에서야 약간씩 돈을 보내줬다고 한다. 또한 찰리는 아버지가 죽기 몇 주 전에 술집에서 아버지와 만났는데 아버지가 (아마도 술김에) 일평생 유일하게 아들을 껴안고 키스했다고 회고했다. 찰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뮤직홀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공연 중 술을 마셔야 했는데, 이게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 것. 그래서 찰리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버지 찰스를 아버지라는 자각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악평했을 정도였다.
한편 어머니 해너는 이혼 이후 목이 상해, 몇 번씩 극단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연극 일을 포기하고 재봉사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채플린은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채플린의 자서전에서 말하길,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극단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상한 목으로 노래하다 삑사리가 나서 욕을 먹었고 그런 어머니를 대신하여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채플린은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낸 연기를 하여[6] 주점의 군인들한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채플린은 이런 연기를 한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7]
어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여 1895년부터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나머지 정신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정신질환은 심각하여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렸고, 찰리는 형과 함께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다가 계모의 학대를 못이겨 다시 나오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12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일화가 자신의 자서전에 적혀져 있다.
참고로 해너는 일찍 죽은 남편 찰스와 달리 아들 찰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에[9] 그녀의 장례식은 할리우드에서 치러졌고, 채플린 어머니의 묘소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한 호숫가에 있다.어머니께서 편찮으셨기에 우울한 하루였다. 어머니께선 찬송가를 부르며 날뛰시던 시기를 막 지나서 방에 격리되신 상태였다. 이에 대해 사전에 간호사가 우리에게 경고했다. 시드니(찰리의 형)는 어머니를 뵈러 갔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기다렸다. 형은 침울해져서 돌아오더니, 어머니가 얼음처럼 차디찬 샤워로 충격 요법을 받으셔서 얼굴이 새파랬다고 말했다.[8]
그래서 우린 어머니를 사립 시설로 모셔오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있었으니까.It was a depressing day, for she was not well. She had just got over an obstreperous phase of singing hymns, and had been confined to a padded room. The nurse had warned us of this beforehand. Sydney saw her, but I had not the courage, so I waited. He came back upset, and said that she had been given shock treatment of icy cold showers and that her face was quite blue. That made us decide to put her into a private institution - we could afford it now.
그러던 중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가 1898년에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에이트 랭커셔 래즈(Eight Lancashire Lads)라는 아동 극단에 찰리가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가 1901년에 강제로 그를 퇴단시킨 것이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찰리보다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연극 '셜록 홈즈'에서 꼬마 급사 '빌리'를 연기하는 채플린, 1903년~1906년경)[10]
어머니가 정신질환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1903년에는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무려 3개국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셜록 홈즈'의 원작자(정확히는 아서 코난 도일과 공동집필)이자 연극에서 최초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인 '윌리엄 질렛'(William Gillette)[11] 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채플린 본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1906년 시드니는 당대 거물급 희극단 중 하나였던 프레드 카노(Fred Karno)의 희극단에 입단했고 찰리도 2년 뒤인 1908년에 같은 극단에 들어갔다. 처음에 카노는 찰리를 '너무 소심해 보여서 연기를 못 할 것 같은 청년'이라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찰리는 카노 극단에서 주정뱅이나 건달 등 뒷골목 인물들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면서 단시간에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1910년에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찰리는 영국보다는 미국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12] , 1912년에 두 번째로 미국 공연을 갔을 때 맥 세닛(Mack Sennett)이 속한 키스턴 영화사의 전속 계약 제의를 받고[13] 희극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이때 찰리는 세넷이 자신의 연기를 안 좋게 본 것 같아서 "난 안 될 거야 아마"라며 가기를 주저했는데, 계약을 맺은지 3일째 되는 날에 "왜 안 오느냐!"라며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와서 당장 갔다는 루머가 있다.
2.2. 키스턴~뮤추얼 시기[편집]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 1914년작)"에서. 왼쪽이 채플린. 아직 그 '방랑자' 컨셉이 등장하기 전 영화다.
그러나 고액의 봉급에 끌려서 들어간 키스턴의 촬영과 연출 방식은 대단히 원시적이고 조잡했다. 너무 웃기는 것에만 집착해 줄거리가 미칠듯이 허접한 건 예삿일이었고, 심지어 어떤 행사에 가서 몇 가지 웃긴 동작을 한 걸로 영화를 하나 만드는 등의 작업까지 했다.
당시 키스턴 사의 최대 인기 배우는 포드 스털링(Ford Sterling)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기껏해야 와당탕 넘어지거나 파이 몇 번 맞는 게 전부였다. 그에 비해 채플린은 24살치곤 너무 어려 보여서 계약이 파기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몸개그 전문인 키스턴 영화사는 웃기게 생기든지 해야 인기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14년에 헨리 레만(Henry Lehrman)[14] 이 감독한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라는 영화에 콧수염+외알 안경+중절모+프록코트라는 고전적인 사기꾼 분장을 하고 공식 데뷔하긴 했지만 정작 채플린 본인은 이 영화를 무진장 싫어했다. 그나마 비평가 중 한 사람이 '1급 코미디언'이라고 언급해 주긴 했다. 그러자 채플린은 제대로 웃겨보기 위해 그 유명한 떠돌이(The tramp)란 캐릭터를 만드는 신의 한 수를 둔다.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 1914년작)"[15] 에서.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 분장을 하고 찍은 두 번째 영화로, 대외적으로는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 기믹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캐릭터는 통 크고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짧고 꽉 끼는 웃도리, 대나무 지팡이, 너무 작은 모자, 칫솔 모양 콧수염[16] 이라는 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졌는데,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던 채플린이 전부 자기 주변 및 동료들에게서 빌린 도구들로 완성한 것이다. 바지는 스승이었던 뚱보 희극배우 로스코 아버클에게서 빌려 입었고, 초기에는 골판지를 이용했다가, 후에 가발을 다듬어 콧수염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의 도구들 중 채플린 자신의 것은 대나무 지팡이 밖에 없었으며, 대나무 우산살을 이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떠돌이는 채플린만의 전매 특허로 수십년간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채플린은 이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참고로 사실 이 전설의 떠돌이 기믹은 원래 키스턴의 최고 스타이자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1893 ~ 1930)[17] 와 함께 한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Mabel's Strange Predicament)'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기믹이지만, 대형 영화를 개봉하기 직전 조그마한 소품을 제작하여 간을 보는 키스턴 사의 관례로 인해,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이 개봉되기 이틀 전, 실제 자동차 경주장에서 단 하루 동안 촬영한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라는, 정말 경주장에서 민폐만 끼치는 7분 남짓한 작품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이처럼 키스턴의 감독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쪽대본보다 심할 정도로 대충대충 영화를 제작했고 채플린은 이런 제작 방식에 계속 불만을 표하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채플린의 11번째 영화인 '메이블의 운전(Mabel at the Wheel, 1914년작)'에서는 영화의 감독도 맡고 있던 메이블 노먼드와 싸우는 바람에[18] 계약이 해지될 뻔하기도 했다.
맥 세닛은 어떻게든 채플린을 억눌러두려고 했지만, 영화 상영업자들이 채플린의 작품을 계속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채플린으로부터 영화가 망했을 시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500달러를 받은 뒤에야 채플린에게 직접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1914)이다.
이후 채플린은 거의 일주일에 한 작품 꼴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점차 영화를 감독하는 노하우를 터득해 갔다. 한편 채플린은 1914년 11월 개봉한 키스턴 최초의 장편 코미디 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19] 이 영화도 초대박을 치면서 채플린은 키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채플린은 훗날 이 시기가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재밌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키스턴의 하드코어한 스케줄에 지친 채플린은 결국 1915년, 키스턴에서 독립했으며 이후 에세네이, 뮤추얼 등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영화사들을 차례로 전전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간의 여유가 생긴 채플린은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20] , 자신이 만족할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발휘하였고 당시 코미디 영화의 관객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21] 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부잣집 신사, 콧대높은 여성, 차별적인 경찰관 등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먹혀 들어가서 1910년대 중반, 채플린은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 자신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을 흉내내는 대회[22] 등이 수시로 열릴 정도로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된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으로 베끼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기도 했다.
결국 채플린은 법률 고문으로 형 시드니를 고용하였고 그는 동생을 도와서 복잡한 계약이나 법률 문제 해결에 관여했다. 이후 채플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해럴드 로이드도 영화 인생 초반에 외톨이 루크(Lonesome Luke)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출연했는데, 채플린 측에서 자신의 떠돌이 캐릭터를 카피한 것이라며 소송을 거는 바람에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해럴드 로이드를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안경잡이(Glasses) 캐릭터였다.
2.3. 퍼스트 내셔널~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편집]
1917년 뮤추얼 영화사와 우호적으로 계약을 끝낸 채플린은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로 이적했는데, 이때부터는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자기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스튜디오까지 지어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23] 또한 퍼스트 네셔널 시절부터 그는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특수 효과 등을 동원해서 더 짜임새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어깨총(Shoulder Arms)'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현시창 참호전을 소재로 쓰기도 했다.[24] 다만 채플린 본인은 군인들의 참담한 실상을 자세히 묘사하지 못했다며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 채플린은 첫 번째 부인인 밀드러드 해리스가 아이를 유산하자 밀드러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녀와 늘상 다투는 등 불안정한 사생활 때문에 슬럼프에 빠져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범작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 무렵 찍은 <양지 바른 쪽(Sunnyside)>(1919) 촬영장에 헬렌 켈러가 방문하기도 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창립 모습. 좌측부터 현대 영화 문법의 기틀을 닦은 영화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 감독, 무성 영화 시절 톱스타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 aka 'Little Mary'),[25] 채플린(앉아 있는 사람), 채플린의 절친이자 초대 영화판 조로를 연기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이다.[26] 뒤의 두 사람은 이를 증빙하는 변호사들.
1919년. 채플린은 기존 거대 영화사들의 대병합에 대항하기 위해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등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라는 신흥 영화사를 창립하였고 1921년에는 밀드러드와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아역배우 재키 쿠건을 공동 주연[27] 으로 발탁, 희극과 비극을 섞은 참신한 구성의 영화 '키드'를 발표하며 성공적으로 재기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에 개봉된 '순례자'는 개신교의 맹목적인 전도 행위를 풍자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1923년 본인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희극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파리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본격적으로 둥지를 틀었다. 파리의 여인은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지만, 코미디 스타가 아닌 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이라는 포지션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객들로부터 흑역사 취급당하면서 그때까지의 채플린 영화 중 최악의 흥행 성적을 냈다. 후에 다시 발성 영화로 재개봉했으나 역시 흥행하지 못했다.
결국, 코미디언으로 복귀한 채플린은 작정한 듯이 영화 작업에 몰입하며 《황금광 시대》(1925), 《서커스》(1928),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의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경력상으로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부터 채플린 개인에게 있어서는 멘탈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큰 사건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채플린을 덮쳤다.
우선 1926년 1월 11일 크랭크인을 한 《서커스》는 한 달 동안 촬영한 분량이 현상실의 실수로 흠집이 생겨서 전부 폐기한 뒤 재촬영을 해야했고[28] 같은 해, 9월에는 스튜디오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 촬영이 한 달간 전면 중단되었다.[29] 1926년 12월에는 채플린의 두 번째 부인 리터 그레이가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걸어서 막대한 위자료를 요구하는 동시에 재판장에서 채플린이 자신에게 세 명이 함께 성관계를 갖자는 등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성적 요구를 강요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이미지가 추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인 1927년에는 갑자기 미국 정부가 100만 달러 이상의 탈세 혐의로 채플린을 기소했다. 게다가 서커스가 개봉되기 직전인 1927년 10월, 《재즈 싱어》가 개봉되면서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시대가 개막되었다.[30]
1928년 1월 개봉한 《서커스》의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영화계의 판도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것을 보고 무성영화 시대의 다소 과장됐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감수성 있는 몸짓 연기를 몹시 사랑했던 채플린은 "영화는 끝났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영화계 은퇴 선언을 한다. 실제로 이 당시에도 유성영화가 등장하자 유성영화에 꼭 들어가야 할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서 반강제로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배우들이 정말 많았다.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여주인공 조지아 헤일, '위대한 무표정'이라는 별칭의 전설적인 무성 영화 배우 버스터 키튼, 안경을 쓴 도시청년 캐릭터로 유명한 해럴드 로이드 등이 대표적이다.[31]
하지만 1931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자신의 다음 영화 《시티 라이트》를 무성영화로 만들어 개봉하면서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초반부의 조각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으로 처리함으로서 당시의 조악한 녹음 기술을 조롱하였다. 《시티 라이트》의 첫 시사회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까지 참석했고 찰리 채플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이미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채플린은 1936년 개봉한 《모던 타임즈》에서부터 조금씩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32] 동시에 기계화/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풍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채플린의 모습은 나치로 인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와 결부되어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아데노이드 힝켈'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 이발사라는 1인 2역으로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를 1940년에 완전 발성영화로 선보이는데 영화의 마지막의 연설 장면으로 인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 정부로부터 찍히게 된다.
또한,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미국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는 연설회'에서 채플린이 후두염에 걸린 소련 대사 대신 연설을 하여 "동무(Comrade) 여러분!"이라는 말과 함께 소련을 도와주자는 발언을 하자 미국인들 또한 채플린을 '국민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도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딱히 관심도 없고 적대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새로운 떡밥으로 등장함에 따라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빨갱이 사냥 열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당대 미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자유주의를 위협한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부하들을 시켜 불법적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캐서 그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국장까지 채플린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33]
FBI는 영국의 MI5에 채플린의 과거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하는가 하면,[34] 조앤 배리라는 여자와 접촉하여 채플린이 자신을 강간해 임신했다며 소송드립[35] 을 펼치게 하는 등 사방팔방으로 압박을 가했다.
2012년에 비밀해제된 MI5 자료에 의하면, FBI의 채플린 파일(Charlie's FBI file)은 무려 1,900페이지에 달했고, 그를 공산주의자와 연관시킨답시고 그의 본명이 이즈리얼 손스타인[36] 이라거나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태어났다거나 사회주의자 계열의 유대계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는 의심까지 했다.[37]
조앤 배리와의 소송을 끝낸 채플린은 오슨 웰스가 프랑스의 연쇄 살인범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범행을 소재로 집필한 각본을 사들여서 당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 《살인광시대》(1946)[38] 를 완성하고 개봉했다. 그러나 주인공 베르두가 돈 많은 여성들과 결혼, 살해하여 재산을 빼앗는다는 내용을 문제삼아서 영화 검열 위원회와 가톨릭 풍기 위원회 등은 물론, 조앤 배리 사건과 영화를 연관시킨 관객들마저 채플린을 비난했고 채플린의 인기는 급락하게 된다. 또한 부자들의 모순을 비웃는다는 점을 부유층에 대한 혐오, 즉 공산주의 옹호로 해석하여 매카시즘의 사냥감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이 때문에 반미활동조사위원회[39] 에서 채플린에게 소환장을 보냈지만, 채플린은 소환에 불응하는 대신 '나는 특정 이념보다는 자유를 더 중시한다'라는 편지로 대답했고 반미활동조사위원회도 수긍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채플린이 일종의 회고 영화인 《라임라이트》(1952)를 완성한 뒤 휴식 차 가족들과 고향인 영국을 방문하려고 미국을 떠나자, 연방정부는 여객선이 아직 영국에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재입국 허가를 무효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채플린 역시 미련없이 유럽으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40]
2.4. 활동 후기[편집]
라임라이트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크게 흥행했고, 채플린은 스위스에 머무르며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식으로 생활했다. 영국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인 《뉴욕의 왕》(1957)에서 채플린은 로큰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방종과 퇴폐를 비판하였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하는 소년을 통해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등 대놓고 미국까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처럼 자신이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 받는 시스템이 아니다보니 특유의 개그 센스도 위축되었고 미국을 너무 편협하게 묘사하였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마지막 영화이자 유일한 컬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을 제작 및 감독했다. 그러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은 말런 브랜도와 소피아 로렌이라는 주연에 유니버설 픽쳐스라는 거대 영화사의 제작이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구식 로맨틱 코미디 취급을 받으며 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메소드 연기로 각광 받았던 브랜도의 경우 채플린이 시범을 보이고 배우가 그것을 따라하도록 하는 구식 연기 지도 방식을 매우 못마땅해하여 촬영 후반에 가서는 제작자였던 제롬 엡스타인이 채플린과 브랜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까지 맡아서 겨우겨우 영화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채플린을 크게 존경했던 소피아 로렌은 자서전에서 브랜도가 촬영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끝없이 먹어가며 생각없이 살을 불렸고 촬영과정에서 채플린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2.5. 사망[편집]
1970년대 들어서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채플린은 신작을 만드는 대신 그동안 감독했던 영화들에 음악과 색을 입혀서 재개봉하는 현재의 리마스터링과 같은 작업을 하였다. 이때 채플린은 그동안의 영화계에 공헌한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다.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하여 약 20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자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명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때 감격에 겨운 채플린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채플린은 말년에 뇌졸중을 앓게 되면서 더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 했고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채플린은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의 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숙환으로 타계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88세였다.[41] 사후 생전 그의 소원에 따라 성공회식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유해는 자택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는 영화 같지만 아찔한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장례 후 약 두 달 뒤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가 무덤을 도굴하고는 채플린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되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어설픈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42] , 채플린의 유해는 주네브 호숫가에 있던 한 농부의 옥수수 밭에서 발견되었다.[43] 이후 같은 묘지에 재매장되었는데, 이번에는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방공호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트가 씌워졌다.
3. 작품[편집]
아래 작품들 중 재개봉 기록이 있는 것들은 채플린이 개봉 후 영상을 일부 재편집하고 자신이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영화음악 연주곡)을 덧붙여 개정한 것이다.
National Film Registry에 등재된 작품은 @표시를 첨부하되, 괄호로 해당된 연도를 적어 표기한다.
3.1. 키스턴 시절 작품들[편집]
3.2. 에사네이 시절 작품들[편집]
3.3. 뮤추얼 시절 작품들[편집]
3.4. 퍼스트 내셔널 시절 작품들[편집]
아래 작품들 중 '개의 일생'과 '어깨총', '순례자' 세 편은 1958년에 채플린 자신의 재편집과 해설, 음악을 곁들여 '채플린 레뷰(Chaplin Revue)'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었다.
3.5.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절 작품들[편집]
3.6. 영국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들[편집]
81.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 1957 아티카-아치웨이 필름 컴퍼니) - 혁명으로 인해 쫒겨난 왕으로 등장하는데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고역을 당한다는 작품.[47] 채플린 본인이 이런 식으로 미국에서 고역을 당했다.
82.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유니버설 픽쳐스) - 마지막으로 완성한 영화. '파리의 여인'에서처럼 채플린은 연기자로서는 단역으로만 등장한다. 여객선 승무원임에도 배멀미를 하는 노인이라는 기믹. 1963년 이후 작품이라 개정 저작권법에 명시된 공표 후 70년을 적용받기 때문에 유일하게 한국에서 저작재산권이 만료되지 않은 작품이다. 2038년에 만료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의 장편 모두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단편 7편이 2015년 엣나인필름을 통해 극장 개봉된다고 한다.
4. 평가[편집]
스크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믹 예술가이자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웃음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거의 어느 정도의 세계적인 인지 능력을 발명했고, 영화 산업을 예술로 바꾸는 것을 도왔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정의한 예술의 천재이자 세계 문화에서 우뚝 솟은 인물이다.
채플린에게는 모든 칭찬이 무색하다. 그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니까. 채플린은 수없이 오용된 ‘인간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영화인이다.
그는 영화를 인간 정신의 위대한 표현으로 격상시켰고, 영화를 예술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에 빛을 주었다.
거의 틀림없이 영화에 가장 중요한 예술가, 확실히 가장 뛰어난 연기자 그리고 아마도 여전히 영화의 가장 보편적인 아이콘이다.
앤드류 새리스 #
완고하고 의심스러우며 자기중심적인데다 불쾌하지만 매력적인 천재성을 지닌 문제아.
5. 인맥[편집]
원체 각광받던 영화 스타였던 만큼, 주변인들도 대단한 인물들이 많았다. 《시티라이트》의 개봉 때도 초청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를 비롯해 스튜디오에 찾아와 촬영을 참관하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 수상[48] , 세계 여행 중 만난 마하트마 간디, 유럽 여행과 정주 시절 사귄 장폴 사르트르와 파블로 피카소 등 몇 사람만 언급해도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 총리도 제네바에 회담하러 왔을 때 한 차례 만났다고.
한편 채플린이 아돌프 히틀러를 희화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개봉되지 못했지만, 정작 히틀러는 포르투갈을 통해 밀반입된 《위대한 독재자》를 관저에서 두 번이나 보았다고 전해진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히틀러가 "위대한 독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고 싶다고 적었으나,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에 히틀러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를 만나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49]
'인츠 사건'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도 채플린과 막역한 관계였고, 영화인들로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버스터 키튼이나 막스 랭데르[50] 등과도 교우 관계를 가졌다.
특히 키튼의 경우 《라임라이트》 후반부에서 채플린과 함께 공연을 하는 피아니스트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밑에 쓸 '음악' 항목과 관련해서 음악과 관련된 친분 관계도 있었고,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등이 자서전에 언급되고 있다.
5.1. 여자 관계[편집]
채플린은 영화계에 남긴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여러 여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만났던 여성 대다수의 나이가 1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컸다.[51] 그래서 사생활의 문란함이나 상대 여성들의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때문에 에페보필리아를 연구하는 측면에서도 꽤 무게감을 갖는 인물이기도 하다.
채플린의 결혼 생활
채플린의 딸 중엔 그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70살이나 차이가 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남긴 것은 채플린 본인의 무분별한 성 생활도 문제였지만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 지지대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무 알레르기가 있어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52]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실, 워낙 찰리 채플린과 가까운 사이이다보니, 후술할 찰리 채플린이 두번째 결혼 상대였던 리터 그레이와 이혼할 때 일부 언론에서는 이혼 사유로 에드너 퍼바이언스와 찰리 채플린의 친밀했던 관계를 이유로 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를 은퇴한 후, 항공 조종사였던 존 P. 스콰이어와 결혼해서 7년만에 사별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향년 62세로 타계한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죽은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저의 모든 일이 시작될 때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라며, 그녀와의 좋은 기억을 술회하기도 했다.[58]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에 유방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폴라 네그리[66] , 루이즈 브룩스[67] 등을 포함해서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매리언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
6. 가족과 자녀들[편집]
아내들은 제외했다. 위의 여자 관계를 볼 것.
- 아버지 : 찰스 채플린 시니어(Charles Chaplin Sr., 1863년 ~ 1901년). 뮤직홀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으로 일했다. 1885년에 해너 힐과 결혼했다. 당시 해너에겐 시드니 존[68] 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1889년에 부부는 찰스 스펜서 채플린을 낳았는데 바로 찰리 채플린이다. 1891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찰리 채플린은 어머니가 키웠다. 그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았지만 자식을 더 두지는 않았고 1901년에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 어머니: 해너 채플린(결혼 전 이름은 Hannah Harriet Pedlingham Hil, 1865년 ~ 1928년). 1885년에 첫 아들 시드니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89년에는 찰리를 낳았으며 1891년에 찰스 채플린과 헤어진 뒤 뮤직홀 배우인 리오 드라이든을 만나 셋째 아들 조지 윌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을 낳았다. 1898년부터 정신병 증세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시드니와 찰리는 어머니의 전 남편이었던 찰스 채플린을 찾아가야 했다. 그 후 해너는 요양 등을 하다가 1921년에 찰리와 시드니가 캘리포니아로 모셨고 거기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이부형 : 시드니 채플린(Sydney John Chaplin, 1885년 ~ 1965년). 채플린과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으로 찰리와 함께 자랐다. 같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채플린의 매니저[69] 역할을 했다. 찰리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본인도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1959년 브로드웨이 연극 "Goodbye, Charlie"에서 로런 버콜의 상대역으로 나온 적이 있다. 시드니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을 두지 않았다.
- 이부동생 : 조지 윌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 1892년 ~ 1957년). 영국의 배우이다. 리오 드라이든과 해너 채플린의 아들로 시드니나 찰리와는 달리 리오가 키웠다. 1915년이 돼서야 찰리와 시드니가 자신의 형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두 이부형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1917년에 채플린의 애인이었던 에드너 퍼바이언스를 만났다. 에드너는 그를 채플린의 친척으로 생각했다고. 1918년에는 두 형들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났다. 1936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 장남 : 노먼 스펜서 채플린(Norman Spencer Chaplin, 1919년 ~ 1919년). 밀드러드 해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출생 후 3일만에 사망했다.
- 차남 :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plin Jr., 1925년 ~ 1968년). 찰리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아들. 리터 그레이에게서 낳은 아들로 사실상 장남이었다.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배우로도 활동했다. 1958년에 배우 수잔 매그너스와 결혼하여 1959년 딸 수전 머리 채플린(Susan Maree Chaplin)[70] 을 낳았으나 이혼했다. 1968년 폐색전증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미국 국적인지라 아버지와 달리 스위스에 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냈다.
- 삼남 : 시드니 얼 채플린(Sydney Earl Chaplin, 1926년 ~ 2009년). 형인 찰스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리터 그레이가 어머니이다. 삼촌인 시드니의 이름을 땄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활동했다. 《라임라이트》에서 클레어 블룸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군인이 바로 시드니이다.
아버지를 보고 있는 시드니. 소파에 앉은 군인이 시드니 채플린이다. 프랑스의 배우 노엘 아담과 결혼하여 아들 스테판 채플린(Stephan Chaplin)을 낳았고 손녀인 타마라 채플린(Tamara Chaplin)이 있다.
- 장녀 :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1944년~ )
- 사남 : 마이클 채플린(Michael John Chaplin, 1946년 ~ ). 마찬가지로 우나 오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960년대까지 아역배우로 활동했고 그 이후엔 배우로는 은퇴했다. 그 후엔 작가로 활동하는 듯. 딸인 카먼 채플린(Carmen Chaplin)[71] 과 덜로리스 채플린(Dolores Chaplin)[72] 은 영국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마이클은 채플린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다. 페이스북을 하기도 한다. 그의 페이지
왼쪽부터 덜로리스 채플린과 카먼 채플린. 마이클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인 패트리스 사이에 크리스천 채플린(Christian Chaplin)[73] , 팀 채플린(Tim Chaplin)[74] 을 낳았고, 둘째 아내인 퍼트리셔 비투어디에(Patricia Betaudier)[75] 사이에서는 캐슬린 채플린(Kathleen Chaplin)[76] 과 덜로리스, 카먼, 조지 채플린(George Chaplin), 트레이시 채플린(Tracy Chaplin)[77] 을 낳았다. 카먼과 덜로리스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 차녀 : 조저핀 채플린(Josephine Hannah Chaplin, 1949년 ~ ). 미국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1980년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인 모리스 로네(Maurice Ronet, 1927년 ~ 1983년)를 만나 아들 쥘리앵 로네(Julien Ronet, 1980년 ~ )를 낳았다. 그 외에도 첫 아들 찰리 시스토바리스(Charlie Sistovaris, 1971년 ~ )가 있는데, 그리스 모피상인 니콜라스 시스토바리우스(Nicholas Sistovaris)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막내 아들 아서 가딘(Arthur Gardin)이 있다.
- 삼녀 : 빅토리아 채플린(Victoria Chaplin, 1951년 ~ ). 초기에는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가 서커스에 들어갔다고 한다. 남편은 장 바티스트 티에레(Jean-Baptiste Thiérrée)이다. 티에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티에레(James Spencer Henry Edmond Marcel Thiérrée, 197년 ~ )도 서커스 연출자이다.
아들 제임스 티에레.
- 오남 : 유진 채플린(Eugene Anthony Chaplin, 1953년 ~ ). 스위스에서 레코딩 엔지니어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레코딩 엔지니어로 롤링스톤즈나 데이비드 보위, 퀸 등과 협업했다. 스위스의 국제 코메디 영화 페스티벌 기획자이기도 하다. 자식을 여럿 뒀는데 딸인 키어러 채플린(Kiera Chaplin, 1982년 ~ )은 영국의 배우이다.
- 사녀 : 제인 채플린(Jane Cecil Chaplin, 1957-). 멕시코의 영화 제작자인 일리야 살킨드(Ilya Juan Salkind Dominguez, 1947-)와 결혼하여 오슨 살킨드(Orson Salkind, 1986-)와 오세올라 살킨드(Osceola Salkind, 1994-)를 낳았다.
- 오녀 : 아네트 채플린(Annette Emily Chaplin 1959 ~).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육남 : 크리스토퍼 채플린(Christopher James Chaplin, 1962년 ~ ). 막내아들로 작곡가 겸 배우이다. 찰리 채플린의 둘째 아들의 맏딸인 수잔 마리 채플린(1959년생)보다 어린 1962년생으로, 첫 조카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 삼촌이다.
자녀들 사진을 모아놓은 곳
이렇게 찰리 채플린은 영화계에도 많은 후계자를 남겼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후계자를 남겼다.
7. 어록[편집]
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내려다보고만 있다면 절대 무지개를 찾지 못할 겁니다.
1928년작 "서커스"를 1969년에 다시 재상영할 때, 채플린이 작사/노래한 오프닝 곡인 "꼬마 아가씨를 높이 그네태우다(Swing High Little Girl)"[80]
미안합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으며 그건 제 할 일도 아닙니다.
전 누군가를 다스리거나 정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모든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유태인, 기독교인, 흑인, 백인이건 모든 인류가 그렇듯, 우리 모두가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남의 불행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행복한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고 풍요로운 대지는 모두를 위한 양식을 줍니다.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방법을 잃게 되었습니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키고 세계를 증오의 장벽으로 가로막았는가 하면 우리에게 불행과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우리 자신들은 그것에 갇혀버렸습니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는 우리에게 더한 갈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하고 냉소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은 너무 많이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거의 느끼는 게 없습니다.
기계보다는 인간성이 더욱 필요하고 지식보다는 친절과 관용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비참해지고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비행기와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연결시켰습니다. 이러한 발명의 진짜 의도는 인간의 선함에 전 지구적 형제애와 우리 모두의 화합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내 목소리가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퍼져나가 인간을 고문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제도에 희생된 수백만의 절망하고 있는 남녀노소에게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는 불행은 탐욕에서 인류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조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증오는 지나가고 독재자들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인류로부터 앗아간 힘은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한 자유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군인들이여, 그대들을 경멸하고 노예처럼 다루며, 당신들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삶까지 통제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을 짐승처럼 다루고 조련하여 전쟁터의 희생물로 만들고 있는 이 잔인무도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이런 비인간적인 자들에게 기계의 지성과 마음을 가진, 기계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그대들은 기계도 짐승도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당신들의 마음속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 숨쉬고 있습니다!
증오하지 마시오. 비인간적인 자들만이 증오를 합니다. 군인들이여, 노예제도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시오.
누가복음 17장에서, "주의 왕국은 인간들 사이에 있다" 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한 무리가 아닌 인간 전체에 바로 당신들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를 창조할 힘과 행복을 창조할 힘 말입니다.
사람은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그리고 멋진 모험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힘을 사용하여 화합을 이룩합시다.
모두에게는 일할 기회를, 젊은이에게 미래를, 노인들에게는 안정을 제공할 훌륭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극악무도한 자들도 이런 것들을 약속하며 권력을 키웠지만 그들의 약속은 실행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면서 민중을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제 그들이 했던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싸웁시다.
세계를 해방시키고 나라간의 경계를 없애며 탐욕과 증오와 배척을 버리도록 함께 투쟁합시다.
이성이 다스리는 세계, 과학의 발전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를 만들도록 함께 투쟁합시다.
군인들이여,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하나로 뭉칩시다!
1940년작 위대한 독재자. 영화 장면에서의 연설.
전쟁, 분쟁, 모조리 사업이다. "살인을 한 번 하면 악당이 되지만, 수백만번을 하면 영웅이 된다." 숫자가 정당화한다.
난 정치인이 아니요, 정치적 신념도 없습니다. 난 자유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한편 전 최고의 애국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애국주의가 파시즘으로 빠질 뿐이라는 것을 히틀러에게서 배운 바 있습니다. 전 혁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영화를 더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1952년 12월 23일, 가디언지에 실린 "채플린 씨의 답변(Mr. Chaplin's Defense)"에서 채플린이 자신의 재입국 허가가 무효화되었다는 선언을 듣고 저널리스트에게 한 답변.[82]
해파리[83] 에게도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란다. (중략) 문제는 네가 싸우지 않는다는 거야. 포기해 버렸지. 하지만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게 있단다. 그게 삶이야. 지구가 돌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 보렴. 네가 용기와 그것을 사용할 의지만 있다면, 같은 힘이 너에게 깃들일 거야.
1952년작 《라임라이트》테리(클레어 블룸 분)의 "무엇을 위해 싸우란 거죠?"란 질문에 칼베로(채플린)가 한 대답.
나에겐 딱 하나, 그것만이 남아 있는데 바로 '광대'이다. 덕분에 어느 정치인보다 더 높은 비행기를 타게 된다.
1960년 6월 17일, 런던의 "옵저버(The Observer)"지에서 인용된 말.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1977년 12월 28일, 가디언(The Guardian) 지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인용한 말.
과거? 지나고 나면 결국 전부 웃어서 넘길 수 있는 것들뿐이지!
거울은 내 가장 친한 친구다. 내가 눈물 흘릴 때 절대 웃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돈벌이를 위해 장사에 뛰어들었고, 내 예술은 거기서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 말에 환멸을 느껴도 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8. 수상 경력[편집]
-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특별상 (1929) : 《서커스》에서의 연기, 각본, 감독에 대하여
- 네덜란드 에라스뮈스상 (1965. 잉마르 베리만과 공동 수상)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1970)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3급. 1971)
- 칸 영화제 특별상 (1971. 모든 영화 작품)
-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특별상 (1972)
- 미국 링컨센터 영화협회 평생공로상 (1972)
-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명예상 (1972)
-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영화음악상 (1972. 라임라이트가 20년 만에 미국에 정식 개봉된 뒤 받음)
- 대영제국 훈장 2등급 (KBE. 1975. 2등급 이상의 훈장이기 때문에 동시에 '경(Sir)' 호칭도 부여받음) 등
9. 기타[편집]
- 뮤추얼 전속 시절, 요양 겸 휴가차 한 시골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찰리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를 하길래 신분을 감추고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1등을 하지 못했다.[84]
- 《위대한 독재자》를 찍기 전에 채플린은 나폴레옹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나폴레옹 코스프레 사진을 남기기도 했지만, 훨씬 파괴력이 강한 히틀러라는 소재 때문에 버로우
- 채플린과 히틀러는 정말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1889년생 동갑에, 생일은 채플린이 4일 일찍 태어났으며, 둘다 예술가를 지망했고,[85] 칫솔모처럼 짧게 다듬은 콧수염을 달고 분장한 채플린의 방랑자 캐릭터는 히틀러와 비슷하게 생겼다.[86] 이 때문에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열연한 독재자의 모습은 히틀러를 빼다 박았다.
이렇게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최후는 너무 완벽하게 대조된다. 히틀러는 한때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야심가였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자손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이름은 세계사에 악인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와 대비되게 채플린은 상술한 대로 수많은 자손들을 남겼고, 크리스마스에 정말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위대한 영화인 중 한 사람으로 전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다.
-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1938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심각한 소설 '리듬'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 시공사에서 출판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의 80번째 권《찰리 채플린,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라는 책 후반부에 번역본이 실려있다.
- 자서전을 보면 젊은 시절 싸움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싸움을 잘했었는지 신참이라지만 프로 복서랑 연습을 하는데 가지고 놀았다거나, 복싱 선수하고 여자 문제로 호텔방에서 싸웠는데 비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자서전 내용이라 완전히 믿는데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사이가 안 좋았던 MGM 영화사의 창립자 루이스 메이어와 찰리 채플린이 호텔 로비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채플린이 메이어의 주먹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 당시 기준에서 채플린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스탭들이 너무 꼼꼼하게 영화를 찍는다고 불평할 정도로 상당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영화를 찍는 편이었다고 한다. 채플린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버스터 키튼도 채플린은 영화를 만들 때 시계공처럼 정교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이다.
- 어린 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겪은 탓인지 돈 문제에 인색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한 주당 $10,000 이상[89] 을 벌어들이는 스타가 된 후에도 꼬박꼬박 주급을 저축했으며, 좀처럼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지인들과의 식사모임에서도 웬만해선 본인이 식대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같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한 영화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가 자금 문제로 채플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찰리 채플린이 얼마나 구두쇠였냐면 돈을 아낄려고 옷조차 잘 갈아입지 않아서 평상시 그의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고 향수를 뿌려서 이를 감췄다고 한다.[90] 단, '키드'의 꼬마 아이로 나온 배우 존 레슬리 "재키" 쿠건이 금전적 지원을 요청했을 때 채플린이 1천 달러라는 거금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 1932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암살당할 뻔 했다. 5월 14일 고베항에 도착했고, 다음날 도쿄에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초청을 받았는데, 덴뿌라를 먹고 스모 구경을 해야한다는 이유로 약속을 다음날로 미뤘다고 한다. 드디어 마중나온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91] 와 함께 스모 구경을 마치고 덴푸라를 먹으러 가는데... 바로 그날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당했다. 채플린이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쿠데타 주모자들이 애초부터 채플린을 총리와 함께 암살할 작정으로 방일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누카이는 물론이고 채플린도 끔살당할 뻔했다.# 운이 좋았던 것.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던 채플린은 당일 저녁 새우 덴뿌라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자주 덴뿌라를 먹으러 일본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 자서전에 따르면 범인들은 채플린이 미국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한 대로 채플린은 대부분의 영화 활동을 미국에서 했으나 엄연한 영국인이다. 이 일화는 2018년 3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심지어 2.26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도 채플린은 도쿄에 있었다고 한다.
- 콜드플레이의 7번째 정규 앨범인 A Head Full of Dreams에 수록된 동명곡 A Headfull of Dreams의 뮤직비디오 초반에 나오는 음성은 위대한 독재자에서 나온 찰리 채플린의 그 마지막 연설이다.
- 채플린의 이름을 딴 발리송 기술이 있다.
-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가라르지방의 포켓몬 마임꽁꽁의 모티브이다. 가라르지방은 영국을 모티브로 한 지방으로, 타입 중 하나인 얼음은 모던 타임즈의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에서 착안한 것이다.
- 해병문학의 등장인물인 야율 채플린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웃긴건 야율 채플린은 설정상 베트남 출신 외노자다.
9.1. 음악[편집]
배우 활동 초기에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노래 외에도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를 독학 혹은 몇 차례의 레슨 등으로 익혔다고 한다. 단, 바이올린과 첼로의 경우 왼손잡이였던 관계로 줄을 역순으로 감고 왼손으로 활을 켰다. 이외에도 몇몇 자선 음악회나 가수들의 녹음 때 지휘자로 등장하기도 했고, 《뉴욕의 왕》이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오리지널 스코어(영화음악 연주곡) 녹음을 위한 리허설이나 시연회에서도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자신의 영화에 음악을 직접 붙인 만큼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특히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스마일(Smile)'은 원래 그냥 스코어로 작곡된 음악이었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어 존 터너와 제프리 파슨스가 가사를 붙여 대중가요로 만들었다. 이 가요판은 냇 킹 콜 같은 재즈 음악인들부터 월드스타 마이클 잭슨, 클래식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까지 불렀고, 지금도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이외에도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이것이 나의 노래(This is My Song)'도 나름대로 히트한 주제가다. 노쇠해지면서 만년에 자신의 구작 무성영화들을 재편집해 내놓을 때도 스코어를 직접 작곡했는데, 임종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한 작업도 《파리의 여인》에 음악을 붙이는 것이었다.[92]
그러나 채플린의 영화음악 작업은 엄밀히 말하면 초보적인 작곡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스코어 작곡 작업의 기초는 채플린 자신이 어떤 곡조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로 연주해 보이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실제로 스코어를 관현악용으로 정서하기 위해서는 전문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가령 첫 영화음악인 시티 라이트의 경우 아서 존스턴이, 나머지 영화들의 스코어도 막스 테르(황금광시대), 에드워드 파월과 데이비드 랙신(모던 타임즈), 메러디스 윌슨(위대한 독재자), 루디 슈래거(살인광시대), 레이 래시(라임라이트), 보리스 사르벡(뉴욕의 왕), 램버트 윌리엄슨(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등의 영화음악 전문 편곡자들이 따라붙어 완성시켰다.
물론 채플린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지휘자용 총보를 보는 법이라든가 하는 전문 지식을 익혔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곡과 지휘, 영상과 음악의 싱크 작업 등을 혼자 할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이 작업 방식은 대개 전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익숙했던 편곡자들에게는 상당히 고역이었는데, 각각 모던 타임즈의 편곡과 지휘를 맡았던 에드워드 파월과 앨프리드 뉴먼이 이 때문에 채플린과 대판 싸우고 때려치면서 신출내기였던 데이비드 랙신이 대신 작업을 맡아 마무리지어야 했다. 하지만 랙신도 채플린이 언제고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받아적으라고 할 지 몰라 며칠 밤을 새우며 수면 부족 상태로 대기타고 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요새라면 채플린이 집에서 데모 녹음해서 전문 작곡자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작업했겠지만 당시 개인 녹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라 생겼던 해프닝.
어쨌던 OST에 들어간 음악 자체는 채플린 자신의 착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작곡자는 채플린으로 등록되어 있고, 채플린이 아직 생존 중이던 1972년에는 영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스탠리 블랙이 여러 영화의 OST에서 가려뽑은 곡들을 편곡해 녹음한 헌정 앨범을 데카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채플린 사후에도 OST의 히트 넘버들이 계속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고, 영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칼 데이비스와 티머시 브록은 채플린의 영화음악 악보를 복원해 영화 상영과 동시에 현장에서 생음악으로 연주하는 라이브 오케스트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9.2. 한국에서의 채플린[편집]
채플린은 정부 수립 후 대중에게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1920년대의 위대한 코미디언 정도로 인식되었고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처럼 그의 후반기는 말 그대로 삭제되어 알려져 있었다. 방송국에서 명절 특선 등으로 1910년대 그의 단편들[93] 을 TV에서 틀어주곤 했지만, 매카시즘적 시비가 있던 위대한 독재자 같은 작품은 개봉금지작으로 분류되어 대중에게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행되고 88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에서야 개봉금지작 영화들에 대한 제재가 풀려 그의 영화가 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됐다. 정진우가 운영하던 우진필름에서 채플린 영화를 여럿 개봉했는데 《모던 타임즈》는 1988년 7월 2일 개봉되어 서울 관객 26만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후 1991년~1992년에 걸쳐 우진비디오에서 채플린영화제라는 이름으로 그의 명작선 테이프 시리즈가 출시됐었으며, 모던 타임즈나 위대한 독재자[94] 는 비디오 대여 시장에서 몇 주간 순위권에 머무르기도 했다.
9.3. 정치/사회적 논쟁거리[편집]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정치적 성향이었다.《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개박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 총통 양반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95] 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96]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프라우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거기다 찰리 채플린은 인종차별을 반대하였기에 KKK단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도 위협을 받고 하였으며 당시 인종차별주의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찰리 채플린이 인종차별반대 나치 비판을 핑계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단정짓고 찰리 채플린을 감시 및 도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반미활동위원회'라는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타머스 인츠[97] 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츠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츠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98] 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츠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 채플린, 그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츠가 요트 위에서 허스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츠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채플린[99] 이나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 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인츠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라는 인츠의 사인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츠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그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가 금지가 모두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