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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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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툴라 전투는 태풍 작전과 모스크바 공방전의 일부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이며 중부 집단군이 최초로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전투 중 하나이다. 툴라 점령과 모스크바 남쪽으로의 진격 중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으며 2기갑군의 패배로 모스크바 남쪽에서 독일군의 공세는 끝났다.
2. 1941년 10월의 중부 전선[편집]
2.1. 소련군[편집]
소련군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라스푸티차가 독일군의 보급과 진격을 방해하고 곧 다가올 겨울이 동계 준비를 안한 독일군에게 엄청난 위기고 뭐고 간에 소련은 국가가 사라질 기로에 있는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병력, 기갑, 포병 모두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며 군대의 질은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항공기가 조금 더 많기는 했지만 소련 공군이 독일 공군에게 상대가 안 되었으므로 의미가 없었다.
독일군이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키예프 방면으로 2기갑집단과 2군을 이동시키면서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독일군은 그 사이에 최전방까지 철도과 보급 라인을 정비했고 4기갑집단을 북부 집단군에서 중부 집단군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태풍 작전이 시작되면서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을 거치면서 소련군의 전방 방어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무너졌다. 그나마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면서 독일군이 보급에 애를 먹기 시작하자 진격이 조금씩 느려졌고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코프의 지휘 아래 소련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칼리닌 전선군은 9군을 견제하면서 칼리닌에서 3기갑집단을 막아야했고 서부 전선군 우익은 모자이스크에서 4기갑집단을 막아야했다. 서부 전선군 좌익은 칼루가 근방에서 4군을 간신히 막고 있었고 예비 전선군이 괴멸 당하면서 브랸스크 전선군이 2기갑군을 막고 있었다. 2군은 휘하 군단을 2기갑군과 교체하면서 2기갑군과 자리를 바꿨고 태풍 작전에서는 남서 전선군을 상대로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었다.
2.2. 독일군[편집]
태풍 작전의 1단계로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을 통해 소련군의 전방 방어선을 무너트린 독일 중부 집단군은 이제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북쪽부터 3기갑집단은 칼리닌으로, 4기갑집단은 모자이스크로, 2기갑군은 툴라로 향했으며 크게 보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남북에서 협공해서 포위하는 양익 포위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방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히틀러와 할더를 비롯한 최고 사령부는 여전히 낙관적이었고 모스크바 점령이 아닌 소련군의 포위를 통한 소련군 섬멸이 목표라고 못을 박았으나 라스푸티차로 인해 진격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면서 보크와 구데리안을 비롯해 야전 사령부는 더이상의 대규모 작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북부 집단군의 16군이 중부 집단군의 좌익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9군이 알아서 측면을 보호하면서 진격해야 했기에 중부 집단군의 공세 전면은 계속 늘어만 갔고 그 와중에 히틀러는 2군을 남쪽의 쿠르스크 방면으로 돌리면서 중부 집단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나마 2군이 다시 돌아온 뒤에도 라스푸티차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장애물이었다. 10월 말에 2단계 공세가 시작된 후에도 보크는 히틀러와 할더의 방침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11월 첫 주에 오르샤에서 할더의 주최 하에 육군 최고사령부의 참모들과 중부 집단군 및 휘하 야전군들의 참모장교들이 모두 모인 회의에서 야전 참모 장교들은 하나같이 더 이상의 대규모 작전은 불가능하며 겨울에 방어를 하기 위한 방어라인을 구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히틀러에 동조하던 할더는 전선의 심각성을 파악했고 히틀러가 원하던 볼로그다-고리키-스탈린그라드-마이코프 라인 대신에 중부 집단군 참모장이던 그리펜베르크 소장과 함께 모스크바 점령을 1941년의 마지막 목표로 정하는데 동의했다.[6] 그동안 육군 최고 사령부는 보급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진격 자체가 힘들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이었다. 문제는 모스크바 점령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근방은 겨울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3. 전투 서열[편집]
3.1. 소련군[7][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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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10][편집]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페도르 폰 보크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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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3군단 ( 사령관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보병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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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4차량화군단[1] ( 사령관 : 레오 가이어 폰 슈페벤부르크 기갑대장 )
- 제3기갑사단
- 제4기갑사단
- 제17기갑사단
- 차량화보병연대 "그로스도이칠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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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항공함대 ( 사령관 :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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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항공군단[2] ( 사령관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항공대장 )
- 제2대공포군단 ( 사령관 : 오토 데슬로흐 중장 )
- 제1전투기여단
- 제7대공포여단
- 제2항공관구
4. 1차 공세[편집]
5. 2차 공세[편집]
6. 소련군의 반격[편집]
7. 결과[편집]
[1] 툴라 방어 작전[2] 툴라 전투[3] 10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는 독일군의 공세, 6일부터 16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4] 11월 1일 기준이며 작성된 야전군은 순서대로 북쪽부터 남쪽 순서, 전투에 연관된 야전군은 3군, 49군, 50군[5] 11월 4일 기준[6] 애초에 히틀러와 달리 할더는 모스크바 점령을 원하고 있었다.[7] 11월 1일 기준이며 작성된 야전군은 순서대로 북쪽부터 남쪽 순서, 전투에 연관된 야전군은 3군, 49군, 50군[8] 11월에 제10군 증원[9] 11월 10일에 해산된 후 휘하 부대들은 남서 전선군에 이관, 12월에 제61군 증원[10] 11월 4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