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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인판타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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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포르투갈의 공주
2.2. 결혼
2.3. 아스투리아스 공비
2.4. 스페인의 왕비
3. 가족관계
3.1. 조상




1. 개요[편집]


스페인 페르난도 6세의 왕비이자, 주앙 5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의 장녀이며, 주제 1세의 누나.


2. 생애[편집]



2.1. 포르투갈의 공주[편집]


1711년 12월 4일주앙 5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주앙 5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와 결혼해서 3년간 자녀가 없었기에 바르바라의 아버지인 주앙 5세는 하느님께 자녀가 태어난다면 수도원을 짓겠다고 기도를 했다. 마침내 그녀가 태어났으며, 그녀의 풀네임은 마리아 마달레나 바르바라 사비에르 레오노르 테레자 안토니아 주제파(Maria Madalena Bárbara Xavier Leonor Teresa Antónia Josefa)로 지어졌는데, 그녀의 이름은 바르바라는 바르바라가 태어난 날짜 12월 4일축일에 해당한 성녀 바르바라에서 이름을 따왔다. 바르바라는 포르투갈의 바르바라 또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바르바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르바라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녀는 위대한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유일한 제자였다고 한다.


2.2. 결혼[편집]


1725년, 어느 정도 혼기가 찬 바르바라는 혼담을 물색하기 시작하는데 프랑스 루이 15세의 왕비 후보에 있었지만 무산되었고[1]

1729년, 17세가 된 바르바라는 2살 연하인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와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남동생 주제도 페르난도의 이복여동생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결혼해 겹사돈이 되었다.[2]


2.3. 아스투리아스 공비[편집]


아스투리아스 공비가된 바르바라는 마드리드에 지내게 되었는데, 바르바라의 음악 교사였던 스카를라티는 바르바라를 따라 마드리드로 가서 그녀를 위해 수백 개의 하프시코드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때 아스투리아스 공, 공비였던 페르난도와 바르바라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외교적인 악화와 함께 야당의 표적이 되었다. 1733년부터 1737년까지 부부는 가택 연금을 당했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페르난도의 계모이자 펠리페 5세의 왕비인 이사벨 왕비의 첩자들이 감시했다. 이로 인해 바바라는 페르난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바르바라 왕세자비는 천연두에 걸려 당시 사람들에게 아름답지 않다고 했으나 워낙 똑똑했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게 능통했고, 음악에 대한 열정에 가지고 있어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로 인해 훗날 페르난도가 스페인 국왕에 즉위했을때 프랑스 대사는 좋은 인상을 가진 바르바라를 이렇게 평했다.

"펠리페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난도 6세보다는 엘리자베트[3]

를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바르바라이다."

바르바라에 대한 한 프랑스 대사의 평가. --



2.4. 스페인의 왕비[편집]


1746년 펠리페 5세의 사망으로 인해 남편 페르난도 6세가 스페인 국왕이 됨으로 바르바라는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바르바라 왕비는 페르난도 6세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을 줬고, 당시 야당인 스페인 당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페르난도 6세가 이사벨 왕대비의 정치적 야심을 꺾어놓아 궁정에서 추방하게 했으며, 이사벨 왕대비를 따르던 세력을 숙청하게 했다.

페르난도 6세의 치세동안 바르바라 왕비는 궁정에 많은 축제를 열었지만 이사벨 왕비와 달리 과도한 정치적 개입을 싫어했지만 아예 정치적으로 영향은 없는 것이 아니라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외교 관계를 힘을 써 스페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바르바라는 그녀를 존경하는 각료들이 왕에게 전달되기 전에 그녀에게 모든 국정 문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페르난도 6세 사이에는 1733년 아스투리아스 공비 시절에 아들 하나를 사산한 이후에는 자녀는 없었지만 금슬은 좋았다고 한다. 바르바라는 생애 대부분 천식을 앓고 살았고, 말년에 과체중으로 고생했다. 1758년 아랑페에스 궁전에서 향년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로 인해 남편 페르난도 6세는 매우 상심해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된 1759년에 페르난도 마저도 바르바라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1] 무산된 이유는 바르바라의 나이가 어린 나이였으며, 신체적,정신적 건강의 우려가 있었기에 무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루이 15세의 왕비는 폴란드 왕국의 국왕의 딸이었던 마리아 레슈친스카가 되었다.[2] 바르바르의 올케 겸 시누이인마리아나 빅토리아루이 15세와 약혼했으나 무산되어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며, 그때 기억한 마리아나는 자신의 딸들이 프랑스 왕실에 시집을 보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3] 펠리페 5세의 왕비였던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프랑스어식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