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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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1970
Ram
Paul and Linda McCartney
1971
Wild Life
Wings
1971
[[Red Rose Speedway|{{{#000,#fff Red Rose Speedway
]]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Band on the Run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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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and Mars
Wings
1975
Wings at the Speed of Sound
Wings
1976
London Town
Wings
1978
Back to the Egg
Wings
1979
McCartney II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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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g of War
1982
Pipes of Peace
1983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
1984
Press to Play
1986
Снова в ССС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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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in the Dirt
1989
Off the Ground
1993
Flaming Pie
1997
Run Devil Run
1999
Driving Rai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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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2005
Memory Almost Full
2007
Kisses on the Bottom
2012
New
2013
Egypt Statio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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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III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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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 Albums ]


폴 매카트니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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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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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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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9년
후보자격 연도
1993년
후보선정 연도
1999년








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Most-Successful Songwriter of All Time.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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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등재 날짜
출처
폴 매카트니
2009년
#
























파일:OCH 리본.gif
Member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폴 매카트니 경
Sir Paul McCartney

파일:McCartney III.jpg }}}||
본명
제임스 폴 매카트니 경
Sir James Paul McCartney
출생
1942년 6월 18일 (81세)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1]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사업가, 배우,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 동화작가
소속
쿼리멘 (1957 - 1960)
비틀즈 (1960 - 1970)
윙스 (1971 - 1981)
무소속 (1981 - )
문장
파일:폴 매카트니 문장.png
ECCE COR MEUM
서명
파일:폴 매카트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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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0cm, 75kg, B형
부모
짐 매카트니 (1902 - 1976)
메리 매카트니 (1909 - 1956)
형제자매
남동생 마이클 매카트니
배우자
린다 매카트니 (1969 - 1998, 사별)
헤더 밀스 (2002 - 2008, 이혼)
낸시 쉬벨 (2011 - )
자녀
슬하 1남 4녀
장녀 헤더 루이즈 매카트니 (1962 - )[1]
차녀 메리 애나 매카트니 (1969 - )
삼녀 스텔라 니나 매카트니 (1971 - )
장남 제임스 루이 매카트니 (1977 - )
사녀 베아트리스 밀리 매카트니 (2003 - )
기타 혈족
친조부 조지프 매카트니 (1866 - 1942)
친조모 플로렌스 매카트니 (1874 - 1944)
외조부 오언 모힌 (1880 - 1975)
외조모 메리 모힌 (1877 - 1919)
친증조부 제임스 매카트니 (? - ?)
친증조모 엘리자베스 매카트니 (1844 - ?)
외증조부 폴 클레그 (1817 - 1877)
외증조모 제인 클레그 (1837 - ?)[2]
거주지
영국 잉글랜드 이스트서식스 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3]
작위
Knight Bachelor (기사)[4]
학력
스톡튼 우드 로드 예비학교 (졸업)[5]
조지프 윌리엄스 초등학교 (졸업)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 (졸업)[6]
예일대학교 (음악 / 명예 박사)
혈통
아일랜드계 영국인
레이블
파일:캐피톨 레코즈 로고.svg
장르
, , 포크, 로큰롤, 일렉트로닉, 클래식[7]
악기
기타, 보컬, 베이스 기타, 건반 악기, 드럼[8]
활동 기간
1959년 – 현재
재산
$11억~[9] ~ $12억 8천만[10]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1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경력
3.1. 비틀즈 (1957 ~ 1970)[2]
3.1.1. 결성에서 정상까지
3.1.2. 불화와 분열
3.1.3. 비틀즈의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3.2.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 현재)[3]
3.2.1. 70년대
3.2.2. 80년대
3.2.3. 90년대
3.2.4. 21세기
4. 음악적 성향
4.1.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
4.2. 보컬리스트
5. 여담
5.1. 가족
5.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5.3. 외모
5.4. 종교관
5.6. 성격
5.7. 기타
5.8. 콜라보레이션
6. 타 음악가와의 관계
6.2. 타 비틀즈 멤버
6.3. 기타 음악가
8. 솔로 디스코그래피
8.2. 싱글
8.2.2. 빌보드 핫 100 2위
8.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8.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9. 어록
10. 참고 문서



1. 개요[편집]


나는 매카트니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는 내가 경외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밥 딜런[4]


영국싱어송라이터.


2. 상세[편집]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즈베이시스트이자 리드 보컬 겸 작곡가이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한 명이며, 절친[5]이자 라이벌 존 레논과의 작곡 파트너십으로도 유명하다.

1979년 기네스 북은 폴 매카트니를 세계 최고 골드 디스크 기록을 60개 보유한 이유로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음악가’로 발표했으며[6], 2009년 기네스북은 다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송라이터’로 그를 발표했다.[7]. 또한 영국 차트에서 유일하게 솔로[8], 듀엣[9], 트리오[10], 콰르텟[11], 퀸텟[12], 그리고 자선 밴드[13]의 모임으로 1위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또 빌보드 핫 100에서 솔로 경력과 비틀즈 경력의 빌보드 1위를 다 합치면 총 32개의 1위를 배출해냈다.[14] 또 2015년 롤링 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에 폴 매카트니를 2위로 꼽았다.[15]

비틀즈 멤버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솔로 활동 커리어 역시 비틀즈 시절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았다. 사실 1970년대에 그와 비슷한 앨범 판매고를 올린 밴드/아티스트는 엘튼 존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비틀즈 해체 후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앨범을 발매하여 빌보드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등 노익장임을 과시하고 있다. 최근(2020년)에 발매한 McCartney III 앨범 역시 빌보드 2위까지 올랐다.

1965년에는 비틀즈의 멤버로서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1997년 3월 11일에는 단독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16] 1992년에 폴라음악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성했다.[17] 2012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되었다.[18] 2017년에는 영국 1.5등급 훈장에 해당하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훈장을 받았다.


3. 경력[편집]



3.1. 비틀즈 (1957 ~ 1970)[19][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1. 결성에서 정상까지[편집]



파일:external/28.media.tumblr.com/tumblr_lfyggrbuyS1qc6yloo1_500.jpg


파일:Capture+_2018-03-26-20-05-43-1.png

비틀즈 초중기[20]의 폴 매카트니
Hey Jude 생방송에서의 모습

1942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댄스 밴드의 리더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선물한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만 윗입술에 경련이 생기자 이 트럼펫을 어쿠스틱 기타와 바꿨는데 이 기타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 매리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후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존 레논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부터 존 레논과 함께 쿼리멘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58년 조지 해리슨의 가입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프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구성된다. 이후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 로 바꾸고 스튜어트 서프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현재 알려진 비틀즈의 기본 체제가 확립된다.

초기에는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체제라는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로큰롤에 기반을 둔 이 둘의 음악은 서로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존 레논이 개인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다면 폴 매카트니는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한 편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에는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파일:Paul-McCartney-during-rehearsals.jpg

1967년, All You Need Is Love 방송 직전의 모습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바로 둘 사이의 대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Yellow Submarine' 이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8번째 음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 에 수록된, 'A Day in the Life' 는 이 둘의 곡을 합친 곡이었으며 당시 존 레논의 재혼으로 혼란을 겪었을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 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21] '페퍼 상사' 와 'Magical Mystery Tour' 는 폴 매카트니의 주도 아래 제작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후기에도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고 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그렇지만 무조건 폴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후부터 비틀즈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노 요코와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 폴은 와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실제로 폴이 했던 행동이 다소 오해를 살 만한 부분도 일부 있었고. 결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소통의 문제.


3.1.2. 불화와 분열[편집]



파일:bb35ca2d011c8b87e104cf31911aafca.jpg

1968년의 폴 매카트니

파일:paul_in_letitbe.jpg

1969년 Get Back(Let It Be) 세션의 폴 매카트니. 비틀즈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수염을 기른적이 거의 없는데 유독 Let It Be 세션 때에는 사진처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것을 볼 수 있다.

'The Beatles' 를 발표할 무렵 비틀즈 멤버들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은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인한 폴 매카트니와의 대립으로 비틀즈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녹음 스튜디오에 데려오면서 시작된 개인적인 대립은 비틀즈 해체 이후까지 계속된다. 게다가 폴 매카트니는 완벽한 녹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음악을 녹음할 때 30~40번씩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런 일에서도 멤버들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뭉치자는 취지 아래 계획된 'Abbey Road' 와 'Let It Be' 에서도 멤버들과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70년도에 폴 매카트니가 견디다 못해 McCartney 앨범 발표를 앞두고 비틀즈 활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 해체는 누구 하나의 잘못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러 사안이 얽혀 돌아간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1967년 밴드의 정신적 지주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이후 비틀즈는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리더인 존 레논은 그룹에서 흥미를 잃고 점점 멀어졌으며[22] 나머지 멤버들은 지쳐있었는데 이에 폴 매카트니는 본인 나름대로는 밴드의 분열을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시하며 주도하는 등) 노력한 것이었다. 폴이라도 나서서 주도하지 않았으면 아마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지 1년만에 해체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이것이 밴드를 자신의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독선으로 느껴졌고 상호 불신과 감정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틀즈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존 레논이 1968년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를 공표한 이후부터는 그 이전까지 멤버들 사이에서 암묵의 룰이었던 '비틀즈 멤버들과 고용된 세션맨들을 제외하곤 외부인의 스튜디오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스튜디오에 꼭 오노 요코를 끼고 등장하거나 심지어는 약속 날짜에 스튜디오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요코는 조지 해리슨이 먹으려고 놔둔 과자를 허락도 없이 먹거나 침대 매트를 가져와서 누워있으면서, 사사건건 끼어들며 "아티스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녹음하고 있는 음악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되었다."라며 음악적인 부분에 도가 지나친 훈계를 하고 멤버들이 연주 중인 앰프를 깔고 앉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존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특히 조지와 폴) 오노 요코를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후에 폴 역시 아내 린다 매카트니를 스튜디오에 데려오고[23]조지는 존과 요코 앞에서 존이 존경하던 밥 딜런까지 얼마나 요코를 안 좋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존은 이때 요코를 변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Let It Be'를 녹음할 때는 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들이 애플 레코드의 매니저로 추대한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게 된다. 당시 폴은 장인이자 법률가인 리 이스트먼에게 애플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고 존과 요코는 당시 판권업자들에게 있던 저작권을 원가수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음악계의 로빈 훗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앨런 클라인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는데다. 자신의 장인을 추천한 폴에 대해 조지와 링고는 폴이 비틀즈를 제멋대로 하려는걸 넘어서 이제는 자신의 처가까지 비틀즈에 끌어들인다며 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에 앨런 클라인의 연속된 월권행위와 돈에 집착하는 행위들로 인해 앨런의 본성을 알게 된 존 레논은 Walls and Bridges 앨범에서 그를 비판하는 곡 'Steel and Glass'를 쓰기도 했다.[24] 당시 앨런 클라인은 폴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폴의 곡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넘겼고 필 스펙터는 폴이 예전의 화기애애한 시절로 돌아가자며 단순한 밴드 사운드로 작곡한 원곡을 자신의 장기인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사용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서 곡의 사운드 자체가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들은 폴은 분노하여 앨범의 발매를 계속 반대하다가[25] 밴드 탈퇴 선언 직전인 1970년, 타이틀을 'Get Back'에서 'Let It Be'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앨범 발매를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사운드를 수록한 'Let It Be... Naked' 앨범을 내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에 대한 앙금과 불신이 있었지만,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1970년 12월 31일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멤버들과 애플을 상대로 물적 분할 소송을 진행하면서부터였다. 앞서 말한대로 폴 매카트니는 앨런 클라인의 월권 행위에 진절머리를 느꼈고, 계약이 애플에 묶여있는 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판단해 이 소송을 진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71년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때였다. 일례로 1971년 존과 폴이 각각 발표한 솔로 앨범들은 서로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Ram' 에서 짝짓기하는 딱정벌레 사진을 집어넣었는데 존 레논은 이를 자신과 오노 요코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하였다. 또한 해당 앨범의 첫 곡 'Too Many People' 의 가사에는 존 레논에 대한 비꼬기가 담겨 있다. 존 레논도 이에 맞받아쳤다. 자신의 앨범 'Imagine' 의 부클렛 내부에는 폴이 'Ram' 에서 양의 뿔을 당기는 포즈를 따라하며 돼지의 귀를 당기는 사진을 넣었고 폴 매카트니를 디스한 곡 'How Do You Sleep?'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폴과 존의 대립은 적어도 1972년까지 계속되었고 존 이상으로 폴에 대해 앙금이 남아있던 조지 해리슨은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에게 "3인조 밴드야"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때가 조지와 폴의 사이가 매우 틀어져있던 때로 폴 매카트니를 비틀즈 멤버로 인정 안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존과 폴, 조지와 폴은 오히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사이가 완화되고, 오히려 1980년 경 조지의 자서전 문제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파일:lennon&mccartney_1974.jpg

1974년 3월 29일 로스 엔젤레스. 5년 만에 한 사진에 담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26]

위와 같은 예화들 때문에 존과 폴의 불화가 존 레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틀즈 해체와 물적 분할을 둘러싼 법정 소송이 1973년 무렵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화해의 무드가 조성된다. 사실 폴에 대한 나머지 멤버들의 반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와 애플사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증폭된 부분이 큰데, 폴은 자신의 장인어른인 리 이스트먼을 후임 매니저로, 나머지 셋은 앨런 클라인을 후임 매니저로 밀면서 대립하였다. 그러나 앨런 클라인의 기만 행위들이 밝혀지면서 ‘폴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폴에 대한 멤버들의 반감이 상당히 누그러들게 되었다.[27] 이 과정에서 폴 vs 나머지 세 멤버 + 앨런 클라인이었던 법적 공방이 비틀즈 멤버들 vs 앨런 클라인으로 구도가 바뀌게 된다. 1974년 3월에는 로스 엔젤레스에 머물며 해리 닐슨의 앨범을 프로듀싱 중이었던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가 아내 린다 매카트니,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함께 깜짝 방문한다. 이 당시 링고 스타도 함께 있었고, 존과 폴은 스튜디오에서 즉흥 연주를 함께할 정도로 사이가 회복된다.



1974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해리 닐슨,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Stand By Me'를 함께 연주한 음원.
<A Toot and a Snore in '74>라는 이름의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허물없이 지낸 건 아니었다. 1975년 이후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션을 돌보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던 존 레논은 20대 시절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는 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도 "지금은 20대도 아니고 비틀즈 시절도 아니야"라는 존의 말에 상처받아 나중에 자신의 말에 후회한 존이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등 티격태격 하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달리 교류도 꽤 있었으며, 존이 죽기 전에는 사이가 많이 회복됐었다. 폴은 존 레논이 살고있는 다코타 아파트에 자주 놀러갔으며 어느날은 함께 술을 마시며 TV에 나오는 SNL 방송을 보면서 출연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물론 둘이 술에 많이 취한 상태라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됐지만.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가 McCartney II 앨범을 발표할 때 'Coming Up'을 듣고 좋은 싱글이라고 칭찬했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존 레논이 5년의 공백기를 깨고 Double Fantasy를 발표했을 때 응원차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는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완성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존 레논의 홈 레코딩 노래들이 수록된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았는데, 한 테이프에는 (폴,조지,링고가) 작업을 마치고 발표[28]한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테이프에는 "Now and then" (원제:I Don't Want to Lose You)와 "Grow Old With Me"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테이프의 겉면엔 "for Paul" 이라고 급하게 휘갈겨 쓴 존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존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으며[29] 폴은 존이 죽었을 때 추모곡 'Here Today' 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대중들은 "역시 폴과 존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말한다.


3.1.3. 비틀즈의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편집]


투어 활동을 재개한 1990년대 이래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멤버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비틀즈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비틀즈 관련 활동 및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비틀즈 음악에 관한 판권 분쟁이 매듭된 이후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조지 해리슨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미발표 음원 ‘Free as a Bird’를 작업하고 비틀즈의 전기 다큐멘터리인 ‘비틀즈 앤솔로지’에 참여한다. 앤솔로지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2000년 비틀즈의 영국 및 미국 차트 1위 싱글을 모은 1이 예상치 못한 대박 흥행을 거두자, 윙스의 활동을 정리하는 다큐와 음반 Wingspan을 2002년에 선보이는 한편, 2003년에는 본래 의도의 사운드로 비틀즈의곡들을 복원하기 위해 'Let It Be... Naked' 를 발매하기도 했다.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을 못마땅해한 폴의 원래 의도대로 곡을 다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노래들을 다시 믹싱했다. 수록곡과 곡 순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Carnival of Light' 를 발매하려 하고 있으나 조지 해리슨의 부인 올리비아 해리슨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고 있다. 'Carnival of Light' 는 14분 가량의 곡이라고 하며 현재 비틀즈 곡 중 가장 긴 곡인 'Revolution 9'(8분 가량) 보다도 2배 가까이 긴 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생전에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을 무척 싫어했다는 이유로 이 곡의 발매를 반대하고 있다.

존 레논이 죽은 이후에는 존 레논의 유족과 화해했고 오노 요코를 초청한 자리에서 존 레논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존이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매카트니의 이름으로 된 곡을 매카트니-레논으로 바꾸다가 논란이 펼쳐졌지만 과잉보된 것으로 폴 매카트니가 바꾸려고 한 것은 오직 'Yesterday' 한 곡 뿐이었다. 'Yesterday' 는 완전히 폴 혼자서 만든 곡이기에 딱히 문제될 게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이 크게 왜곡되어 모든 곡들을 바꾸려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Hey Jude' 마저도 존 레논이 작곡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치욕까지 경험을 해야 했다. 이리저리 팔려나간 비틀즈 노래들의 판권을 되찾기 위해 요코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막대한 저작권료로 인해 실패했지만.

비틀즈의 노래를 새로 리믹스해 재탄생시킨 앨범 'LOVE'로 다시금 전 비틀즈 멤버로서 그래미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린 현지 시각 7월 28일 0시 50분 경에 피날레 무대에 등장하여 'The End' 와 'Hey Jude' 를 열창하였다.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니 어찌 보면 마땅한 일[30]. 개막식에 참석한 관중들이 함께 후렴구인 "나나나 나나나나~" 를 외치는 떼창 장면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3.2.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 현재)[31][편집]



3.2.1. 7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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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경 윙스 북미 투어 당시의 폴 매카트니[32]
폴은 비틀즈 해체 보도 일주일 후인 1970년 4월 17일, 가족을 주제로 녹음한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폴은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모두 혼자서 다루었다.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는 그저 하모니와 백보컬만 할 정도로 앨범의 기획부터 녹음, 믹싱까지 모두 폴 혼자서 해낸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비틀즈 해체를 폴이 발표하고 뒤이어 바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점에서 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하여 비틀즈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33]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인 1971년, 폴은 아내 린다를 비롯한 몇몇 세션맨들과 작업한 'Ram' 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1, 2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했다. 하지만 앨범 뒷면에 있던 딱정벌레의 짝짓기 사진 때문에 존 레논과 한바탕 디스전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How Do You Sleep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뒤 폴은 자신과 린다 매카트니,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을 주축으로 윙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윙스의 자세한 역사는 역시 해당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윙스의 명의로 발표된 첫 앨범 Wild Life는 믹싱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 하려는 의도로 발표되었다. 실제로 몇 번의 테이크만 사용하여 만들어 수수한 느낌이 든다. 다만 차트 성적이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특히 '윙스'라는 이름의 낮은 인지도 탓이라고 생각한 폴은 윙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Paul McCartney & Wing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Paul McCartney & Wings로 이름을 바꾼 윙스는 1973년 'Band on the Run'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차트에서도 폴의 솔로 앨범 중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를 하기도 했다. Band on the Run으로 윙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폴 매카트니는 1975년 발매된 Venus and Mars부터 다시 밴드의 이름을 Wings로 되돌린다. Venus and MarsWings at the Speed of Sound의 연이은 대성공을 거둔 윙스는 Wings over Europe, Wings over America 투어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이 시기 윙스는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빅 밴드 재즈 및 디스코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팝 음악을 주력으로 하였다. 1976년 히트한 "Silly Love Songs"와 "Let 'Em In"가 그 대표적인 예.

1977년 11월 발매한 싱글 "Mull of Kintyre"는 영국 사상 최초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며 1977년 크리스마스 차트 1위, 1977년 최다 판매 싱글은 물론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기록을 모두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34] 윙스는 1979년의 투어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80년 1월, 윙스의 일본 공연을 위한 입국 수속 중 폴 매카트니가 반입한 대마초 때문에 일본 공연이 취소되며 윙스의 활동은 중단된다.


3.2.2. 80년대[편집]


1980년 5월에는 자신의 이름으로만 발매한 두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1970년 발매된 McCartney처럼 폴 본인이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하였다. 이 앨범은 기존의 록이나 재즈풍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일렉트로닉 테크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영국과 미국에서 1위와 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8일, 폴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발생한다. 존 레논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존 레논의 죽음으로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신변의 위협을 받은 폴 매카트니는 차후 투어 활동을 주저하게 된다. 결국 밴드 활동에서 관심이 멀어진 폴 매카트니와의 협업에 지칠대로 지친 데니 레인이 밴드 활동에 환멸감을 느끼고 1981년 4월 27일 밴드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윙스는 해체되고 만다. 데니 레인이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Tug of War는 결국 폴 매카트니 솔로 명의로 발표된다.

다시 솔로로 돌아온 폴은 1982년작 'Tug of War'를 통해 또 한번 찬사를 받는다.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앨범으로, 비틀즈 시절의 멜로디 감각이 제대로 나타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폴의 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폴의 솔로 시절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앨범 쯤은 'Band on the Run' 과 함께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곡이 두 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Ebony and Ivory다.

이듬 해 발표된 1983년작 'Pipes of Peace'에서 영국 4위 미국 15위라는 다소 아쉬운 흥행을 달성한 이후[35] 폴은 영화 제작에 오랜만에 도전하여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을 발표하지만, 싱글 ‘No More Lonely Nights’만 성공하고 올드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이처럼 중년 뮤지션이 된 폴 매카트니는 톱스타의 자리에서 밀려나 1980년대에 급격하게 뒤바뀐 대중음악 장르에 적응하는데 꽤나 애먹는다.[36]

1985년에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에 참가하였다. 전 비틀즈 멤버가 꼭 포함되어야 한다는 기획에 응답하여 Let It Be를 불렀는데 기술적 문제로 인해 첫 2분간 마이크에 소리가 안들어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1986년에 발매한 Press to Play는 흥행하지 못한 앨범으로 손꼽히며, 폴 매카트니도 꽤 충격을 받고 다음 작품인 Flowers in the Dirt에 상당한 공을 들이게 된다. 그 덕분인지 이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37]


3.2.3. 90년대[편집]


1989년 엘비스 코스텔로와 함께한 Flowers in the Dirt 앨범이 준수한 성적을 거둔 이후, 폴 매카트니는 10년 만에 투어를 재개하게 된다. 1989년 7월 26일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1990년 7월 29일 미국 시카고 공연까지 총 103회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The Paul McCartney World Tour" 이후로 폴 매카트니는 1993년 Off the Ground를 발매한 이후 "The New World Tour"를 진행한다.[38]

1991년에는 로열 리버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Liverpool Oratorio라는 클래식 앨범을, 1992년 무렵에는 킬링 조크의 베이시스트인 유스와 함께 파이어멘(the Firemen)이라는 명의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발매하는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4년부터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Anthology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서 앨범 발매는 물론 투어도 중단한다. 그러다가 1997년, 비틀즈 시절의 느낌과 폴 매카트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 곡들로 채워진 Flaming Pi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 미국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차트 성적도 영국과 미국에서 2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1998년 4월 17일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20여년을 함께 했던 아내이자 음악적 파트너였던 린다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꼈던 폴은 모든 투어를 취소했다. 린다의 사망 1년 후 1999년 4월 10일 로열 앨버트 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추모 공연이 열렸다.


3.2.4. 21세기[편집]


폴 매카트니의 투어는 2001년 Driving Rain이 발매되면서 다시 진행된다. "Driving World Tour", "Back in the World Tour" 등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라이브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2005년에는 음악적으로 꽤나 좋은 평가를 받은 폴 매카트니 표 발라드 앨범인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가 발매되며, 2007년에는 반대로 강렬한 록 사운드 위주의 Memory Almost Full이 발매된다. 2010년 3월부터 2011년 6월까지 Up and Coming Tour라는 이름의 세계 투어를 진행했다. 2013년에는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에 현재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결합한 New 앨범을 발매하며 호평을 받았다.

2019년 12월 20일 폴 매카트니가 2005년에 집필했던 아동 소설인 하이 인더 클라우즈(High in the Cloud)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다. 당초 2015년 개봉을 목표로 2013년 제작이 결정되었으나 몇년이 지난 후에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셈이다. 넷플릭스고몽에서 제작을 담당하고 폴 매카트니 본인 또한 프로듀서와 영화 음악으로 참여한다고 밝혔다.

또 2019년 커리어 첫 뮤지컬 음악을 작곡한다는 기사가 떴다.# 고전 명작인 영화 '멋진 인생'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이다. 공동 제작자로는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된 '빌리 엘리어트'와 엘튼 존의 생애를 그린 영화 '로켓맨'의 각본을 맡았던 리 홀, 런던의 공연중심지인 웨스트엔드의 유명 제작자 빌 켄라이트와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2020년 공개 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에 영향으로 연기 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안에 새 정규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또한 언급했다. 2018년 6월 폴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의 모든 사진들이 삭제되고 새 앨범을 암시하는 게시물들을 올렸고, 6월 20일 새 싱글 I Don't Know/Come on to Me가 공개되었다. 8월 15일 또 다른 싱글 Fuh You가 공개되었다. 9월 7일 신보 Egypt Station을 발매했다. 발매 이후 빌보드 200 1위에 올랐는데, 이는 Tug of War이후 36년 만의 1위이며 폴 매카트니 커리어 사상 최초의 1위 데뷔 앨범이다.

2020년에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글래스톤베리를 비롯한 투어가 전부 취소되고 오랜 기간 칩거할 수밖에 없었다. 예정되었던 투어가 전부 취소되자 폴 매카트니는 예정에 없던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020년 12월 자신의 3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인 McCartney III를 발매했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1989년 Flowers in the Dirt 이후 31년 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는 2위에 올랐다.

2022년 4월 28일부터 북미 투어인 Got Back 투어를 개시했다. 2022년 초반에 개봉한 피터 잭슨의 다큐멘터리 비틀즈: 겟 백을 의식한 네이밍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다큐멘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969년 1월 30일 옥상 공연에서 존 레논이 I've Got a Feeling의 자기 파트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위법이 사용된 곡의 마지막 부분은 과거의 존과 현재의 폴이 듀엣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어 팬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2022년 6월에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여했다.


4. 음악적 성향[편집]


앞에서 언급했듯 존 레논에 비해 대중성이 강한 곡을 썼으며 한국 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한 비틀즈의 곡도 대부분 폴 매카트니의 곡인 편이다.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법을 새롭게 연마해 나간 반면,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때부터 완성된 자신만의 작법 스타일을 해체 이후에도 유지한 편이다. 폴 매카트니가 사기캐 작곡가로 불리는 이유는 그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음악적 실험과 혁신 또한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점에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보컬 윈 버틀러가 말하길, 자신이 작곡하다가 막힐 때면 폴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다. 바빠서 대충 답장할 만도 한데 폴은 단 한 통의 메일도 빼놓지 않고 그때마다 그냥 연습용으로 작사 작곡을 끝마쳐서 완성한 곡을 뚝딱 내놓으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록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페퍼 상사'를 구상하고 컨셉을 주도한 것 역시 폴 매카트니이며 대중적인 곡들만이 아닌 실험적인 곡들또한 많이 만들었다. 오히려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만으로 보면 그는 존 레논보다도 더 다채로운 면모를 자랑한다. 그가 작곡한 'Helter Skelter' 가 헤비메탈의 시초가 된 것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유행에 맞추어 1970년대에는 디스코를 시도하고, 1980년에 뉴 웨이브 테크노 음악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39] 음악적 스펙트럼은 다른 멤버들 못지 않게 광범위한 편이다. 클래식 음반도 5여장 냈으며 Fireman이란 가명으로 일렉트로니카 음반 또한 3장 냈다. 물론 일반 앨범들에 비해서는 잘 안알려져 있기도 하고 평가 또한 해당 장르 평론가 사이에서는 범작 내지 평작 정도 평가를 받지만. 어쨌거나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에 비해 음악적 시도나 실험정신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40]

존 레논 역시 그가 대중적으로 만든 곡들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존의 행동은 폴의 재능을 존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결국엔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어 츤데레적 성향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을 들으며 감탄에 잠기다가도 'Ob-La-Di, Ob-La-Da' 를 들으며 "이게 노래니?"하고 비웃는 츤데레(?) 레논을 상상해보자.[41]

최근에는 오히려 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그의 음악적 능력과 그 진가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사실 비틀즈 전성기 시절 평가는 폴>=존이었다가 레논 사후 존>=폴이 된 것이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폴=존이 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서로 다른 음악적 색채와 스타일, 그리고 음악관을 지녔을 뿐.

폴 매카트니는 솔로 시절에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써냈다. 윙스 시절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인 'Live and Let Die'[42], 'Band on the Run', 'Jet', 'Silly Love Song' 등의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70년대에 엘튼 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한 게 솔로 시절의 폴 매카트니이다.[43] 또한 솔로 전향 이후에도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Ebony & Ivory' 를 히트시켰으며 마이클 잭슨과 듀엣으로 부른 'Say Say Say', 'The Girl is Mine' 도 유명하다.

비틀즈 시절 벌어들인 돈보다 윙스 시절에 벌어들인 돈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일단 솔로 폴 매카트니의 정점은 윙스 시절에 만든 'Band on the Run' 앨범이라는 게 중론. 'Jet', 'Band on the Run' 등 솔로 폴 매카트니의 최고 히트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폴 매카트니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이후의 음반들도 폴 매카트니의 천재적 멜로디 실력이 잘 드러나있다. 'Tug of War'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 앨범 중 정수로 꼽히는 명작.


4.1.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편집]


프린스, 존 폴 존스, 브라이언 존스와 더불어 20세기를 상징하는 천재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중 한명이다. 베이스 부문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지만, 여러 악기를 다루며 이들을 적재적소에 완벽히 배치하는 작곡으로도 유명하다. 전문적으로 다루는 악기 수만 25개이며, 그 외에 다룰 줄 아는 악기를 세면 50~60개는 가볍게 넘기는 수준으로 많은 악기들을 다룬다. 이미 비틀즈 시절때부터 그는 10개 이상의 악기를 다뤄 비틀즈의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솔로 활동 기간에는 밴드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악기들을 배워서 혼자서 악기를 녹음하고 앨범을 제작했다.

일단 그는 베이시스트이지만, 기타, 드럼, 보컬, 피아노, 색소폰 실력도 상당히 출중하다. 그렇다고 베이시스트로서의 업적이 모자란 것도 아니어서, 폴 매카트니는 롤링 스톤 선정 50대 베이시스트에서 9위에 랭크되어있다. 테크닉이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베이시스트는 아니지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 처럼 기본기가 탄탄하며 멜로디 라인을 매우 잘 짜기로 유명하다. 특히 폴 매카트니의 훌륭한 베이스 라인이 잘 드러난 것으로 유명한 곡은 비틀즈Rain, Come Together, Hey Bulldog, Paperback Writer 등이 있다. 보컬의 경우에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가수의 11위에 선정되어있다. 기타 실력도 대단한데, 너바나의 재결성 공연[44]에서 커트 코베인을 대신하여 기타를 맡았을 정도다.[45] 피아노 실력도 상당하다. Hey Jude와 같은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폴 매카트니의 곡들을 들어보자.

그 외에도 리코더, 색소폰, 만돌린, 신디사이저, 하모니카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악기를 다룰줄 안다. 그가 밴드를 같이 대리고 다니는 이유는 단지 손이 모자란것 때문이다. McCartney III에서는 7번 트랙을 제외하고 모든 악기를 그가 혼자서 다 녹음했다. 7번 트랙에서 드럼과 일렉 기타 세션을 부른 것은, 단지 동일 악기가 2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룰 줄 아는 악기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물론 여기 있는게 다가 아니고, 실제로 다룰줄 아는 악기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 외에 생전 처음 들어볼법한 서양, 중동, 동양의 전통 악기들도 대부분 잘 다룬다. 폴 매카트니를 무릎꿇게 만든 악기는 몇 안되는데 그중 하나가 백파이프로, 이 때문에 그는 곡 녹음 당시 세션을 불러야하는 굴욕(?)을 겪었다.[47]


4.2. 보컬리스트[편집]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 11위, NME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 8위에 오르는 등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도 빼어나다. 비틀즈 시절 98곡에서 리드보컬을 맡았으며 존 레논과 더불어 비틀즈의 리드보컬로 뽑힌다. 존이 상당히 개성넘치고 존재감 있는 보컬이라면 폴은 기술적으로 훌륭하고 정석적인 보컬이었다. 비틀즈 이후 윙즈 시절엔 뛰어난 라이브 무대를 펼치며 전세계를 투어하였다.

성종은 테너 이며 음역대가 매우 넓어서 A1(-1옥타브 라)의 저음부터 B5(3옥타브 시)의 높은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소화가 가능했으며 최고 옥타브는 무려 C7(5옥타브 도)까지 낼 수 있었다. 음역대가 매우 넓고 고음도 잘 냈기에 비틀즈에서 높은 고음은 대부분 폴의 몫이였다. A Hard Day'S Night를 녹음할 당시 존 레논이 자신이 단독 리드보컬을 맡겠다고 고집했으나 고음이 올라가지 않아 폴과 함께 리드보컬을 맡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의 음색은 기본적으로 Yesterday, Michelle, For No One, Let It Be 등에서 들을 수 있는 담백한 미성이지만 곡의 스타일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I Will 등에서는 굉장히 곱고 여린 음색을 보여주고, Helter SkelterOh! Darling같은 곡에서는 매우 허스키하고 마초적인 강렬한 하드록 스러운 보컬을 구사한다. Blackbird 등의 잔잔한 포크송도, 심지어 All Together Now와 같은 동요까지 음역대뿐만 아니라 소화할 수 있는 음악의 종류도 폭이 넓다.


5. 여담[편집]



5.1. 가족[편집]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48]는 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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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하이틴 스타 제인 애셔와 함께

비틀즈 시절 폴은 영국의 하이틴 스타이자 여배우인 제인 애셔와 동거 관계였다. 화이트 앨범 이전에 쓴 폴의 러브송은 본래 제인 애셔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1964년 둘은 제인 애셔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한창 비틀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시절부터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였던 제인이[50] 비틀즈와 폴의 인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기도 했다.[51] 참고로 제인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듣자 폴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여긴다고 받아들여서 자신도 같은 연극에 출연중이던 동료 남배우와 맞바람을 피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도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자 폴과 제인은 시골에 별장을 구입해서 재결합하고 1967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이 벌테니 결혼 후에는 배우일을 은퇴하고 가정에 충실해달라는 폴의 부탁을 자신의 일에 무척 자부심이 컸고 폴의 상태도 대마초와 LSD에 중독되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제인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끝이났다. 이후 폴은 제인이 여행을 다녀온 틈을 타서 그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슈와츠와 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제인이 목격하여 1968년 7월 20일에 제인 애셔가 공식적으로 약혼을 파기한다. 제인 애셔는 훗날의 인터뷰에서 "나는 늘 존과 폴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질투했었다. 게다가 당시 비틀즈의 멤버들이 LSD 트립 체험 등 최신 트랜드를 접할때 나는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 그 후론 핑크 플로이드The Wall 커버 작업으로 유명한 영국의 만화가 겸 디자이너인 제럴드 스카프와 결혼하여 몇 십년간 이혼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인 애셔에게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묻는건 실례라고 한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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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는 1969년 3월 12일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1967년 영국에 왔고 비틀즈와 알게되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당시 린다는 6살된 딸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딸 '헤더 루이즈'를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헤더는 지질학자인 친아버지 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폴 역시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며 도공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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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습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53]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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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린다는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1998년 4월 17일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2014년 11월 6일부터 2015년 4월 26일까지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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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진작가이자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 디자이너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게 아버지가 성공했다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출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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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2년 헤더 밀즈[55]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는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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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56]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5.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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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1975년부터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함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이때 사람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양고기를 먹는 동안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길로 폴과 린다는 채식주의에서 나아가 동물애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57].

현재는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58]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폴 매카트니가 심슨 가족본인 목소리로 출현한 데에도 이런 채식주의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폴 매카트니는 출연 조건으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를 계속 유지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해당 에피소드 또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의 고충을 느끼는 내용으로 방영되었다. 이 설정은 절대 변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리사 심슨은 채식주의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것을 선언했고[59],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채식주의 식품 사업을 런칭했으며 그들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동물의 모피나 가죽으로 제품을 일절 만들지 않고 있다. 2013년부터는 비건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였으나, 2018년의 인터뷰에서 치즈는 즐겨 먹는 편이고, 비건이 아닌 ‘락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5.3. 외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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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활동 시절 사진들.

A pretty face may last a year or two

네 예쁜 얼굴은 고작해야 일이년쯤 갈거야

존 레논의 폴 매카트니 디스곡 'How Do You Sleep?' 中 [60]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선이 날렵한 곱상한 외모로 10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61] 그리고 키도 비틀즈 4인방 중 제일 컸다.(180cm)[62]

또한 링고만큼은 아니였지만 얼굴도 상당히 작았고 큰 키와 긴 다리 길이 덕분에 리즈 시절에는 모델 뺨치는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페퍼상사부터 화이트 앨범 사이에 장발과 수염으로 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멤버들과 달리 수염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가 적은 편이다. Let It BeMcCartney 작업 당시에는 턱수염을 수북하게 길렀지만 그마저도 특유의 쳐진 눈[63] 때문에 인상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40대가 넘어서도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노년에 들어선 현재까지도 젊은 시절의 외모가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지금은 80에 가까워지는 나이로 인하여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 이젠 백발에 얼굴에 잔주름도 많이 생겼다.[64]


5.4. 종교관[편집]


폴 : 우리중 누구도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반종교주의자들처럼 보일 것 입니다.

: 만약 당신이 스스로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밝힌다면 모두가 당신을 반종교주의자로 취급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저희들은 무신론자보다는 불가지론자에 가깝습니다.

기자 : 그룹으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으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존 : 당연히 그룹으로서요.

폴 : 우리는 우리 모두가 거의 종교관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불가지론자들입니다.

196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中


공공연히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던 존 레논만큼은 아니어도 무신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비틀즈로 활동했던 시절 스스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고 밝힌 만큼,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어렸을때에는 가톨릭을 믿은 어머니와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지만, 이후 성인이 되면서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2012년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인물이며, 스스로 선(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이상의 종교적 신념은 없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무신론자임을 드러냈다.

다만 그와 레논이 작곡한 비틀즈 곡들중엔 가끔씩 개신교나 가톨릭 성향이 짙은 가사들이 은근 포함되어 있다.


5.5. 사망 음모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 매카트니 사망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6. 성격[편집]


자기 중심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이 강해서 후배 뮤지션들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곤 해 현대에 들어서는 욕을 좀 먹는 존 레논과 다르게 논란이나 구설수가 잘 없는 편이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믹 재거키스 리처즈가 난봉꾼으로 유명하고, 데이비드 보위는 정치적으로 파시즘 옹호 논란이 있었으며 에릭 클랩튼처럼 여성 편력 문제가 심했던 것[65]을 보면 자기 처신을 상당히 잘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밴드를 했던 존 레논이나 조지 해리슨[66], 심지어는 그 사람 좋은 링고 스타[67]도 논란이 조금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모로 대단한 일.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폴 매카트니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 전속 사진사 김명중(MJKim)이 열정이 떨어져 사진을 대충 찍는 것을 폴이 알아차렸음에도 다시 잘해보자며 한 번 더 기회를 줬다는 미담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탄 적이 있다.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시절 줄리안을 위로해주기 위해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그만을 위한 곡인 Hey Jude를 써준 것은 비틀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녹음 세션이 다소 우울하게 진행된 The Beatles 세션 때에도 폴 매카트니와 조지 마틴 둘이 있을때만큼은 스튜디오 내부가 화기애애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다. 또 비 지스배리 깁이 평생을 같이 한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이후 실의에 빠졌을때 많은 도움을 줘 일상을 되찾게 도와줬다는 미담도 있다.

후대 밴드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라며 그의 커리어를 응원해준 적이 있다.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을 비틀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외에도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등 후대 뮤지션들을 좋아하는 밴드로 꼽으면서 장르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격려를 해준다고 한다. 보통 선대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빼앗은 후대 뮤지션들을 싫어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닌 셈.[68] 오히려 까마득한 후배인 카니예 웨스트리아나, 테일러 스위프트 등과도 친밀하게 지낸다. 앞의 두 사람과는 'FourFiveSeconds'라는 곡을 통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비틀즈 팬들 중에서는 음악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존 레논을 좋아하더라도 인간적인 면모[69] 때문에 폴 매카트니를 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다만 모든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1970년대에는 대마초를 무진장 피워대서 일본 입국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70] 하지만 이 역시 2012년에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술한 제인 애셔와 교제하던 시절 보여준 꼴마초적인 태도와 이로 인한 각종 트러블들에 대해서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나마 대놓고 아내 신시아 레논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존 레논과는 달리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이후 린다 매카트니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줬기에 까이는 빈도 수는 적은 편. 애초에 연애사야 불륜이나 폭력 등 도의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범주 외의 부분은 사생활의 영역이기도 하고...

5.7. 기타[편집]


  • 현재의 리이슈 (Reissue)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신의 앨범의 음질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폴이 그걸 직접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한 게 그 시초라 한다.

  • 또 자신의 파트인 베이스를 비롯하여[71] 기타, 피아노 등 많은 악기들을 잘 다룬다. 그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 는 전곡이 폴의 독주로 채워져있으며 해체 이후에도 그런 시도를 종종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마틴은 롤 주법 테크닉에 한해 드럼 연주가 링고 스타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롤 주법은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Back in the U.S.S.R.에서 폴의 드럼 트랙만 추출한 음원을 들은 팬들의 반응은 "그래도 드럼은 링고 스타다."로 요약된다.[72]

  • 특이하게도 '폴'이 중간이름임에도 '제임스'가 아닌 '폴'로 불린다. 집안에서도 태어나서부터 폴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정확히 잘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동생 피터 마이클도 중간이름 마이클로 부르는 걸 봤을 때 아일랜드계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폴 매카트니 본인이 추측하였다.

  •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한다[73]. 나이 들어서 교향시를 쓰고 클래식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악보를 배웠다고 한다.[74] 그래서 젊은 시절 폴 매카트니가 메모지나 종이에 쓴 노래 원고들을 보면 가사를 쭉 적고 위에 코드를 표기하거나 가사 따로, 코드 따로 적어놓았다. 현재도 클래식 곡이 아닌 일반 팝곡을 쓸 때는 악보에는 잘 쓰지 않는다. 사실 프로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들도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75] 특히 무단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악보를 자기만 알아보게 쓰기도 한다.예시

  • 젊은 시절 엄청난 골초였다. 사실 비틀즈 멤버들 다 그랬으나 담배 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을 좋아했는지 비틀즈 멤버들 중에 가장 대마초를 많이 했다고 한다. 대마초는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했는지, 윙스 시절 일본 공연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다가 아이들 옷가방 아래에서 대량의 대마초가 발견되어 일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이때 린다와 폴이 빡쳐서 칭키 아이즈를 시전했지만, 이 둘은 그저 추방당한 것에 순수히 빡쳤던 것이고 인종차별을 하려던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에 대해서 반성했다. 다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LSD는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손자, 손녀, 그리고 늦둥이 막내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모조리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연이 쉽지는 않았던 것인지 2022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이가 든 현재는 목소리가 매우 중후해졌다.

  • 어렸을 때 공부를 상당히 잘 했다고 한다. 90명의 수험생 중 3명만이 통과한 일레븐 플러스 시험[76]을 통과해 당시 리버풀에서 명문 그래머 스쿨로 통하던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후에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은 물론 교우관계도 좋아서 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 왼손잡이이다. 굳이 왼손잡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이야 왼손잡이도 양손, 오른손잡이 같이 정상에 속하지만 약 20년 전에는 왼손잡이는 장애인과 동급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 풍조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도 과거에는 자식이 왼손잡이면 기겁을 하면서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시키던 풍조가 있었으니...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 게다가 1950년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베이스 기타 또한 위아래가 대칭이라 개조를 해도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Yesterday 잘 보면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어서 픽가드가 위로 올라간 것이 보인다. 나중에는 # 왼손잡이용 기타를 구입해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폴 매카트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초기의 베이스 기타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 한국에는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태원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음악 장르에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즉흥적으로 지어서 내뱉은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버린 것.


  • 세계에서 가장 라이브 공연이 경험이 많은 음악가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곡들을 부른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20곡 내외를 부르는 데 반해 폴 매카트니는 공연 한 번에 앵콜 두 번을 포함해 쉬지 않고[77] 35곡 정도를 부른다! 거기다가 내한 때는 곡들 사이 텀에 악기를 교체할 때, 기타 끝 쪽을 잡고 한 손으로 올리는 묘기를 하는 등 건장함을 자랑한다.

  • 인터뷰를 할 때 'you know'를 자주 쓰는 말버릇이 있다.#

  • 줄리안 레논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재혼을 하며 아내인 신시아와 이혼하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줄리안을 홀대했기 때문. 이에 폴은 줄리안과 휴가를 보내거나 악기를 가르쳐주는 등 아버지 존 레논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앞서 언급했듯 줄리안을 위해 Hey Jude를 작곡하기도 했다.

  • 비 지스배리 깁이 형제들을 모두 잃고 슬퍼할 때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 시트콤 프렌즈 시즌4 마지막 편의 결혼식 장면에서 로스 겔러의 시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 제의를 받았었으나 바빠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폴은 시트콤 30 Rock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 2012 런던 올림픽에 개막식에서 피아노를 치며 경기장의 모든 참가국 선수들 관중, tv를 통해 시청하고 있는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비틀즈의 명곡 Hey Jude를 열창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 2016년 2월 15일 래퍼 타이가가 개최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파티장에 참석하려다가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나는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주최측에서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을 원한다'면서 쫓았다고. 이에 폴 매카트니는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느냐, 히트곡을 더 내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영상 황당해하는 Beck과 푸파이터스의 표정이 백미. 폴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경험이었을 듯하다. 타이가 본인도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내가 그를 막을 이유가 어디 있나. 그가 온 줄을 몰랐었다.'라고 트위터로 해명했다. 사실 폴 매카트니도 약간의 실수를 하기는 했다. 본래 다른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장소를 착각해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장소에 오게 된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담당자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당신이 폴 매카트니라 해도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 오실 수 없습니다.'라며 원칙대로 대응했다면 모를까, 저건 분명한 모욕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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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2000년대부터의 공연 영상에 꼭 얼굴을 비추는 멤버들로 오른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Rusty Anderson(흑발)과 Brian Ray(금발), 드럼을 담당하는 Abe Laboriel Jr.(스킨 헤드+수염), 키보드를 담당하는 Paul 'Wix' Wichens(가장 왼쪽의 탈모인).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Brian Ray는 폴이 피아노를 연주할땐 베이스를, 폴이 베이스를 잡으면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Hey Jude 인트로때는 템버린을 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드러머 Abe는 위 사진도 그렇고 영상을 보면 엄청난 고도비만이다. 뒷목의 살이 접힌 게 보일 정도. 때문에 드럼을 치는 게 매우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 70대 후반이지만 여전히 공연을 뛸 정도로 노익장이다. 2018년 즈음까지는 70대 중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발함과 외모를 보여주고 있다. 2018년 새 앨범 발매로 카풀 카라오케 등 tv쇼에 자주 나왔는데, 이 즈음 7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들어 2년만에 머리도 많이 하얗게 세고 상당히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 나이에도 다이빙을 하는 등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 상당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특유의 재치와 장난기는 여전하다. 또한 meme이나 기타 챌린지에도 종종 참여하는 등 20대 청년들의 SNS 문화를 상당히 잘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존 레논과 다르게 정치 성향을 스스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매카트니와 사이가 안좋았던 시절 매카트니를 '보수주의자'로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두고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를 발표했다는 것을 보면 보수라고 볼만한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진보 성향에 가깝다고 분류된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지 W. 부시를 비판하고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더군다나 신보 앨범에서 '정신나간 대장'(Mad Captain)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관련 인터뷰에서 폴은 트럼프를 '미국의 추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트럼프는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있는 증오심을 부추겼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 전속 사진작가가 한국인이다. 2008년부터 전속 사진가로 일한 김명중 작가[78]로, 본래 스파이스 걸스의 투어 포토그래피였다가 폴 매카트니를 소개받아 리버풀 사이드 콘서트에서 첫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한 두번의 촬영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한 두 번이 수십 회로, 수십 회가 수백 회로 결국 2021년 아직까지 12년 동안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 AC/DC도 아주 좋아하는듯하다.

  • 사적으로는 친절하고 사교적이지만 음악에 관련해서는 결코 양보를 못하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라 팬들에게는 '녹음실의 독재자'라는 별명도 얻었다.[79] 비틀즈 초창기 때부터 폴 매카트니는 거의 리더 수준으로 활약했는데, 이게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강해져[80] 나중에는 조지 마틴조차 폴에게 대들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고 한다. Penny Lane의 녹음 과정에서 조지 마틴의 관악기 연주가 마음에 안들었던 폴이 자꾸 리테이크를 요청하자, 조지 마틴 경이 지쳐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했더니 폴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연주하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있다. 또 The Beatles 세션 때에는 Ob-La-Di, Ob-La-Da를 다른 멤버들이 전부 싫어하는 곡이었음에도 독재적으로 밀어붙여 수십 테이프를 바꿔가며 연주하게 했고, 보다 못해 빡친 존 레논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몇 시간 뒤에 마리화나를 잔뜩 피운 채 들어와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두들기며 "이게 니 잘난 곡의 첫 멜로디다"라고 했다고 하며, [81] 녹음이 거의 다 끝나가던 차에 폴 매카트니가 가사 실수를 하여[82] 녹음을 다시 하자고 하자 지칠대로 지친 멤버들이 폴을 뜯어 말려 결국 가사를 틀리게 부른 버전 그대로 앨범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비틀즈 후반기에는 멤버들의 악기 연주에도 훈수를 많이 둬서 이에 불만을 가진 링고 스타조지 해리슨이 불만을 갖고 밴드를 일시 탈퇴하는 일들도 벌어진다. Yesterday 녹음 때에도 현악 연주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온갖 독설을 퍼붓고[83], 녹음실에서뿐만 아니라 영화 Help! 촬영장에서도 편곡 작업을 하겠답시고 시도때도 없이 피아노에 앉아 Yesterday를 연주해대자 보다 못한 리차드 레스터 감독이 "그 X같은 노래 한 번만 더 연주하면 피아노를 치워버리겠다"고 엄포한 것 등도 꽤 유명한 일화.

  • 존 레논을 만나기 전에는 리버풀의 이층 버스에서 존 레논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한다. 폴은 그때마다 존의 큰 덩치가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84] 폴 매카트니가 말하길 "근처에서 유명한 양아치에 나이도 나보다 많아서 수틀리면 날 때릴것 같아서 멀리했다"라고.[85]

  •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라고 격려해준 일화가 있다. 참고로 에드 시런은 폴의 광팬이다.

  • 함부르크 시절, 돈이 부족해서 존 레논과 함께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고 한다. 보통 폴이 지나가던 행인을 꼬드겨서 뒷골목으로 데리고 오면, 존 레논이 냅다 행인을 패서 돈을 빼앗는 식이었다고(...)

  • 1967년 3월 21일,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2번 녹음실에서 Lovely Rita를 녹음하던 도중 한 무명 사이키델릭 록밴드가 자신들을 보러왔다고 하자, 기분이 별로 안좋았음에도 그들의 사이키델릭한 시도가 독특하고 창의적이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줬다고 한다.

5.8. 콜라보레이션[편집]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여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역대 최고의 스타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86]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더 킬러스를 꼽았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녜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6. 타 음악가와의 관계[편집]


대중음악계의 마당발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음악가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다.[87] 이정도로 음악계에 관련 인물이 많은 인물은 데이비드 보위 정도 밖에 안된다. 그는 로버트 플랜트 같은 메탈 아티스트부터 에드 시런과 같은 현대 팝 가수는 물론이고 카녜 웨스트 같은 힙합 가수들과도 친하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매우 밝고 사교적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음악가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6.1. 존 레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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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존 레논, 오른쪽이 폴 매카트니.[88]
폴과 존은 서로 만나기 이전에는 그냥 이층버스에서 조금 자주보던 사이였을 뿐이었지만, 1957년 둘이 음악적인 관계로 만나게 된 이후, 폴 매카트니의 사교적인 성격으로 둘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생일 선물로 폴이 존에게 큼지막한 햄버거를 선물해주기도 하고, 존 레논이 받은 용돈으로 둘이 프랑스 파리로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등, 10대 시절 둘의 관계는 매우 친한 친구 관계였다. 이후 조지 해리슨이 폴의 소개로 영입되고, 1962년 링고 스타가 밴드에 들어오면서 비틀즈가 데뷔한 이후에도 둘은 같이 노래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당시 인터뷰를 보고 있으면 인터뷰 도중에서 존이 폴에게 장난을 치고, 폴과 존이 서로를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로 꼽는 등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런 폴과 존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페퍼 상사 세션 이후, 정확하게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후였다. 엡스타인의 사후 폴이 밴드를 주도하기 시작했고, 음악적인 취향을 일방적으로 존 레논에게 강요하면서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1968년에는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눈이 맞았고, 요코를 상의 없이 스튜디오에 들이면서 폴도 존에게 서운한 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또 둘의 음악적인 성향이 점차 분화되어가고 있었던것 역시 둘의 관계 악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둘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전형적인 로큰롤을 추구하였지만, 라비 샹카르, 밥 딜런 등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면서 둘의 음악적인 성향이 깊어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자의식이 확립되며 음악적 취향도 달라지게 되었다. 폴 매카트니는 신나고 경쾌한 주류 음악들을 썼지만, 반대로 존 레논은 무겁고 사회 비판적인 색채가 짙은 비주류 곡들을 썼다. 결국 Revolver 세션 이후, 본격적으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곡을 따로 써서 명의만 레논-매카트니로 발표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페퍼 상사 음반에서는 폴 매카트니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존이 자신의 곡을 단 세곡밖에 수록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후 폴과 음악적인 성향에서 지속적인 갈등을 겪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이가 전과 달라진 것이다.

화이트 앨범 세션부터, 이들의 사이는 더욱 악화된다. 폴이 무단으로 존이 참여하고 싶었던 곡을 존이 없는 사이 후딱 녹음해버리는 일을 일으키면서 존의 분노를 일으킨 사건도 있었다. 존 역시 폴 매카트니가 만든 곡을 할머니나 들을 똥음악이라고 마구 비난하면서 폴도 존에게 지쳐갔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서로 마주보며 장난도 치고 진지하게 곡 작업도 같이 하는 등 소원해졌던 관계가 다시 개선될 여지를 보였다. 비틀즈: 겟 백 다큐멘터리만 보더라도 이 둘의 관계가 언론의 호들갑만큼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부터, 이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어 보일 정도로 틀어졌다. 매니저 고용 문제로 폴과 존은 다투는 일이 늘었고, 설상가상 폴이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하며 이전에 비해 무척이나 악화된다. 폴은 솔로앨범 Ram에서 존을 직간접적으로 디스했고, 배신감을 느낀 존은 How Do You Sleep?이라는 곡으로 폴을 향해 직설적인 비난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앨범에 수록된 Jealous Guy에서 존은 내면에 솔직한 미안함을 고백한다. 폴은 존이 화해를 위한 손길을 뻗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이 둘의 다툼은 칼로 물 베기였던 것인지, 금세 화해 무드가 조성된다. 폴 매카트니가 Dear Friend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1972년경부터는 다시 화해했다고 한다. 또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도 내심 서로의 음악을 들으면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존 레논의 유작인 Double Fantasy는 폴 매카트니의 상업적인 성공에 존이 자극받아 만든 앨범이었다. 1974년부터는 둘은 서로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자주 서로의 집에 놀러가는 등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말년에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친분을 상당히 회복했지만, 존 레논이 1980년 암살되면서 폴과 존의 짧고도 긴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폴은 멍하게 있다가, 뉴스에서 존 레논의 암살 소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는 비로소 존 레논의 죽음을 실감하여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고 한다.

폴은 1982년, 존 레논을 추모하는 추모곡 Here Today를 작곡했고, 지금까지도 라이브 공연에서 주요한 레퍼토리로 쓰고 있다.

존과 폴의 관계가 친밀하면서도 츤데레같아 보였던 것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한 논문 및 저서가 상당수 존재한다. 흥미로운 가설은 존 레논이 어릴적 부모님을 잃으면서[89] 부성애나 모성애가 없이 자라나 애정 결핍을 겪었는데, 이때 폴 매카트니를 아버지이자 연인으로 여기면서 마음을 상당히 의지했다는 것이다.[90] 폴 매카트니의 결혼식이 열리던 날 존은 폴 매카트니의 장례식(...)을 여는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 폴 매카트니에 대한 소유욕과 의지가 겹쳐지게 되니 폴의 모습에 실망도 하고, 또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그토록 친밀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설의 내용이다. 비록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나,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존과 폴의 관계가 가까웠던 것 역시 사실이다.


"Good night, Paul"
비틀즈: 겟 백


6.2. 타 비틀즈 멤버[편집]


파일:매카트니-해리슨.jpg
둘은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단 학교 친구 사이였고, 존 레논에게 조지 해리슨을 추천해준 것 역시 폴이었다. 폴과 조지는 음악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다. 조지 해리슨이 어려운 기타 리프를 틀리면 폴 매카트니가 짜증을 내면서 완벽하게 기타를 연주하곤 해 조지가 어릴적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그래도 비틀즈 초반기에는 존 레논조지 해리슨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와 폴은 비틀즈 초반기에는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틀즈 중반기 들어서 폴의 독재 체제가 강화되면서 폴과 조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무엇보다 발랄한 록, 팝 송을 선호했던 폴과 시타르를 이용한 진중한 곡을 쓰곤 했던 조지의 음악적인 성향이 너무 틀어진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조지가 대놓고 비틀즈를 3인조 밴드라고 할 정도로 조지와 폴의 관계는 돌이킬수 없이 나빠졌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경 존과 마찬가지로 조지와 폴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음악 활동을 같이 하는 등 예전과 같이 좋은 관계를 회복했다. 조지가 죽을때 폴이 LA에 산 집에서 요양하다가 죽었을 정도로 앤솔로지 세션 이후 조지와 폴의 관계는 좋아졌다.

링고와 폴 둘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인물인만큼, 둘 사이에서 특별한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비틀즈 후반기에 폴이 링고의 드럼 실력을 지적하자 링고가 화가나 3주간 밴드를 탈퇴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등 소소한 갈등이 없던건 아니다. 또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해체 직전에는 날이 곤두서있어서 링고에게 폭언을 퍼붓는 등 일시적으로 사이가 나빠지기는 했고, 이에 화가난 링고가 존 레논, 에릭 클랩튼 등이 이끌던 플라스틱 오노 밴드에 가입해 폴 매카트니를 비난하는 곡들을 쓰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조지 마틴에게 비틀즈에서 가장 먼저 탈퇴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링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폴과 특별한 갈등을 겪고있지 않던 링고는 중간에 폴을 향한 존의 악감정이 너무 지나치다면서 폴을 비난하는 곡을 쓰는 것을 중단했고, 이후로는 폴과 쭉 친구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 둘은 종종 만나서 서로한테 장난도 치고 콘서트도 여는 등 사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6.3. 기타 음악가[편집]


그가 생전이었을 때는 나이가 같기도 하고, 음악적인 성향 역시 비슷해 서로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지미 헨드릭스가 본격적으로 데뷔하기 이전 그의 떡잎을 알아보고 그가 미국 콘서트에 나가 인지도를 키울 수 있게 도와줬고, 지미에게 많은 조언을 해줘 지미 헨드릭스가 성공한 음악가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인지도를 키운 콘서트인 몬터레이 페스티벌 역시 폴 매카트니의 추천으로 지미가 공연장에 나간 것이었다. 만약 폴이 아니었다면, 지미 헨드릭스는 그저 그런 기타리스트로서 생을 마감하고 일렉트릭 기타 연주법이나 하드 록의 역사 역시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 보답으로 1967년 페퍼 상사 음반의 커버 버전을 헤비한 버전으로 커버해 폴 매카트니를 깜짝 놀라게한 적이 있다.
1960년대부터 롤링 스톤즈에게 곡을 써주던 친한 사이였고,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믹 재거가 시원하게 롤링 스톤즈는 비틀즈에게 비교 대상이 안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 1970년대에 비틀즈는 이 세상에 없었고 롤링 스톤즈만이 독주 체제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운 좋게 음악적인 성취도에서 비교가 된다는 것일 뿐이지 비틀즈 자체는 전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폴 매카트니 역시 롤링 스톤즈를 좋아하는 밴드로 꼽은 적이 있다. 키스 리처즈와 폴은 상당히 친한 사이로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한다.
캄푸치아 자선 콘서트 당시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가 만취 상태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공연을 망친 것 때문에 폴 매카트니의 분노를 불러온 적이 있다. 피트 타운젠드는 술을 마구 퍼마신 상태로 코드조차 다 틀린 채 곡을 연주했고 "캄푸치아에서 태어나지 않은게 다행 아니냐"라는 말까지 해 화가난 폴이 피트에게 "고마워요"라고 한 뒤, 피트 타운젠드를 멍청이라고 대놓고 욕한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화해했는지 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폴이 Let It Be를 부를때 피트가 백업 보컬을 맡기도 했다. 로저 달트리에게는 그의 솔로 앨범 'One Of The Boys' 수록곡 'Giddy'를 작곡해주기도 했는데, 서로 성격은 잘 안 맞았는지 선데이 미러 인터뷰에서 40년동안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폴을 잘 모르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 이 인터뷰에서 폴의 전 부인 헤더 밀스를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인물 중 가장 차가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
폴은 핑크 플로이드의 데뷔 초반기때부터 그들의 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도 모두 폴과 비틀즈의 팬이었다. 후일 로저 워터스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제작 도중 그에게 인터뷰를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던 질문에 폴 매카트니가 눈치 파악을 못하고 원래 성격대로 낙천적이고 웃기게 답변을 해 로저 워터스가 짜증이 나서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통째로 잘라버린채로 앨범을 발매해버렸다. 훗날 폴 매카트니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폴 매카트니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들어보고 자신의 인터뷰 태도가 부적절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듯 하다. 그밖에도 폴이 주최한 파티에서 폴과 로저가 부부 동반으로 찍힌 사진이 있다. # 그 외에 데이비드 길모어는 폴 매카트니와 협업을 여러번 했고[91]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다.
마이클 잭슨과 처음엔 선배와 후배 관계로 시작된 둘의 사이는 나이 차이를 초월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동작업자 관계로까지 발전되었으나, 매카트니가 되찾아오려고 벼르던 비틀즈의 음악 판권을 잭슨이 가져가는 바람에 둘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잭슨은 70년대 후반에 직접 매카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만날 기회를 갖기를 원했고 마이클을 직접 만난 후엔 매카트니도 마이클을 마음에 들어했다. 매카트니는 작곡[92]과 음악에 대한 많은 것들을 마이클에게 알려주었고, 마이클의 첫 성인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에 "Girlfriend"란 곡을 만들어서 선물까지 해준다. 또 명곡 "Say Say Say" 듀엣을 하여 빌보드 핫 100 6주 1위, Thriller 앨범의 "The Girl is mine"으로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려놓으며 같이 뮤직 비디오도 제작하는 등 한창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카트니는 마이클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매카트니보다 더 춤을 잘 추려고 하지 않는 등 상대방이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고...
이처럼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 잭슨이 비틀즈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폴 매카트니는 판권을 사들이는 것은 훗날 굉장한 재산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고[93], 그 음악들의 사용 허가 권한을 가지고 적절한 곳에서만 쓰이도록 관리하는 일의 보람 등에 대해 설명해 줬다.[94] 아직 대중음악 판권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았던 1960년대에 비틀즈 음악의 판권이 Northern Songs에 넘겨졌고 이것이 다시 ATV로 넘겨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의 음악 판권은 자기들이 되찾아 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카트니로부터 판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잭슨은 판권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우선 시험삼아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 판권을 일부 사게 되었다. 이후 비틀즈의 음악 판권이 있는 ATV가 매물로 나오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비틀즈 판권을 사려고 했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다.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1000만 달러씩 각자 부담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오노 요코는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구매를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잭슨이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인다.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꼭 되찾고 싶었던 매카트니는 이에 매우 실망하였고, 그것도 자기가 70년대 후반에 콜라보도 같이 했던 잭슨이 자기가 얘기해준 판권에 대한 조언에 따라 자기 음악의 판권을 사버렸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했다. 오노 요코는 비틀즈 판권을 얻지 못한 것에 자기도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이클 잭슨처럼 비틀즈의 음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실제로 잭슨은 이제 자기의 소유가 된 비틀즈의 음악 사용권을 상당히 아꼈고, 비틀즈의 음악을 원칙적으로는 다른 매체 삽입곡으로 쓸 수 없도록 하는 엄격한 판권 관리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틀즈의 노래는 온라인 서비스도 되지 않았고 영화에서조차 삽입곡으로 쓸 수 없었다. 즉 비틀즈 음악 판권을 거액을 들여서까지 산 게 단지 그걸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여기저기 마구 쓸 수 있도록 허가해줘서 막대한 사용권 수입을 얻었을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걸 보면, 단지 상업적 목적을 위한게 아니라 진정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판권 문제 때문에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잭슨 사망 후 폴 매카트니는 "그는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젊은이였다. 나는 그와 함께 했던 경험을 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있다." 라며 조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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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멤버들은 모두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고[95], 폴 역시 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하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극찬했다.[96] 동시에, 브라이언 메이 역시 좋은 기타 연주자이다, 라는 말도 했다.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비틀즈를 존경했으며, 폴 매카트니 또한 최초로 헤비메탈을 시도한 만큼 최초의 헤비 메탈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보컬인 로버트 플랜트와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라고 하며, 지미 페이지와는 과거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으며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비 지스는 활동 초창기부터 비틀즈의 노래 Please Please Me, Ticket To Ride 등을 커버하며 존경을 표하던 사이였고 인기 절정에 오른 70년대 후반에는 폴과 교우관계가 짙어졌다. 2003년 모리스 깁이 사망했을 때, 폴은 로빈 깁과 비 지스의 노래 Too Much Heaven을 듀엣을 녹음하기도 했고 배리 깁과는 SNL 출연 등을 통해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배리 깁은 동생을 모두 잃은 그를 폴이 위로해줬다고 밝혔다. 앤디 깁을 포함한 깁 4형제 역시 위의 레드 제플린처럼 공식 석상에서 함께한 사진들이 다수 남아있다.

1980년대 후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매니저의 권유로 코스텔로와 작곡 파트너십을 가졌다. 서섹스 주에 있는 매카트니의 개인 농장에서 세션이 이루어졌고 결과물은 각자의 솔로앨범에 수록되어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폴은 훗날 인터뷰에서 존과 같이 작곡했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말했을 정도로 좋은 기억에 남았다고.


7. 내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솔로 디스코그래피[편집]



8.1. 앨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 매카트니/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2. 싱글[편집]



8.2.1.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8.2.2. 빌보드 핫 100 2위[편집]




8.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편집]


  • Another Day (1971)
  • Hi, Hi, Hi (1972)
  • Helen Wheels (1973)
  • Jet (1974)
  • Junior's Farm (1974)
  • Let 'Em In (1976)
  • Maybe I'm Amazed (1977)[97]
  • Goodnight Tonight (1979)
  • Take It Away (1982)
  • No More Lonely Nights (1984)
  • Spies Like Us (1985)
  • FourFiveSeconds (2015)[98] [99]


8.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편집]


  • Venus and Mars/Rock Show (1975)
  • Getting Closer (1979)
  • All Day (2015)[100]

폴 매카트니의 솔로시절 히트곡들은 윙스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9. 어록[편집]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ke

당신이 받는 사랑은 당신이 주는 사랑의 양과 같아요


Nothing pleases me more than to go into a room and come out with a piece of music.

방에 들어가 곡 하나를 만들고 나오는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10. 참고 문서[편집]



[1]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2] 쿼리멘 시절 포함.[3]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4] 2007년 롤링 스톤지 인터뷰에서. 여담으로 폴 매카트니 역시 밥 딜런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5] 다만 1970년대 초에는 불화가 있었고 서로 디스하기도 했다. 물론 1970년대 중반 화해했다.[6] McWhirter, Norris (1980).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 London: Sterling Publishing. pp. 235, 250, 251.[7] Glenday, Craig (2009). Guinness World Records 2009. London: Bantam Books. p. 290.[8] Pipes of Peace. [9] "Ebony and Ivory" with Stevie Wonder. [10] Mull of Kintyre, Wings. [11] "She Loves You”, The Beatles. [12] "Get Back", The Beatles and Billy Preston. [13] Do They Know It's Christmas? Band Aid 2[14] McCartney has written, or co-written 32 number-one singles on the Billboard Hot 100: twenty with the Beatles; seven solo or with Wings; one as a co-writer of "A World Without Love", a number-one single for Peter and Gordon; one as a co-writer on Elton John's cover of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one as a co-writer on Stars on 45's "Medley"; one as a co-writer with Michael Jackson on "Say Say Say"; and one as writer on "Ebony and Ivory" performed with Stevie Wonder.[15] 1위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 3위는 비틀즈의 또다른 멤버인 존 레논.[16] 그래서 "폴 매카트니 경(Sir Paul McCartney)" 혹은 "폴 경(Sir Paul)"이라고도 불린다.[17] 존 레논은 기준이 충족되자마자 바로 헌액되었으나 매카트니는 후보 자격이 주어지고 7년 후에 헌액되었다.[18] 비틀즈 멤버 중 가장 늦게 헌정되었다.[19] 쿼리멘 시절 포함.[20] Please Please Me ~ Revolver[21] 이때부터 불화가 시작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기로 접어들며 존과 폴의 음악적 성향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조지는 소외되는 현상들이 발생하다보니 팀워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 후에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비즈니스적인 문제,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까지 겹치며 사단이 난 것이다.[22] 제일 먼저 비틀즈를 떠난 것도 존 레논이었다. 두 차례나 비틀즈 탈퇴를 멤버들에게 언급했다고... 지치다 못해 결국 비틀즈를 놓게 된 폴이 나중에 공식 발표만 했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 비틀즈는 해체됐던 상황.[23] 이 시기 사진가였던 린다가 촬영한 스튜디오 작업 사진이 남아있다.[24] 묘하게 'How Do You Sleep'과 분위기가 비슷한데, 존 레논은 잘 모르고 폴 매카트니를 깠던 본인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앨런 클라인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고 밝혔다.[25] 이때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 내가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라며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26] 물론 둘은 그 이전에도 사적으로 여러 차례 만난 바 있지만, 1969년 8월 이후 둘이 함께한 사진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5년 만의 일이었다.[27] 앨런 클라인은 롤링 스톤즈와의 협업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 혼란의 시기에 녹음된 롤링 스톤즈의 명반이 Exile on Main St.이다.[28] 이 작업을 할 때 셋의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다고 한다. 링고가 술회하기를 "우리는 존이 휴가를 갔거나 차를 마시러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운 채 우리에게 함께 작업할 테이프를 남겨두고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감정이 북받치는 작업을 해낼 수 없었다."라며 특별한 의식 없이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고자 했다고 한다.[29] 존이 폴을 디스하려고 요코와 함께 작곡한 'How Do You Sleep?'은 존이 나중에 아주 많이 후회한 곡이다.[30] 폐막식에서는 영상을 통해 존 레논이 등장한다.[31]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32] 투어 때 장발로 무대에 많이 섰다.[33] 이 비판을 더욱 뜨겁게 지핀 게 빌보드 차트였는데, Let It Be보다도 먼저 3주 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해버렸다.[34] 1960년대 최다 판매 싱글은 비틀즈의 "She Loves You"로 대략 130만 장이 팔렸다. 또한 "Mull of Kintyre"의 기록은 1984년 밴드 에이드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298만 장을 기록하며 깨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현재도 "Mull of Kintyre"는 영국 내에서 최다 판매 싱글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1위는 1997년 엘튼 존이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 / "Candle in the Wind 1997"로 기록한 477만 장이 최고.[35] Pipes of Peace는 Tug of War와 동시에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차트 성적이나 평단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아이러니.[36] 같은 비틀즈 멤버인 링고 스타는 연이은 상업적 실패로 음악 산업에서 거의 쫓겨나다 시피 해 알콜 중독에까지 빠지던 시기였다. 오히려 1987년 무렵에는 조지 해리슨Cloud Nine을 히트시키며 가장 상업적 성공을 크게 이룬 비틀즈 멤버가 된다.[37] 다만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는 21위라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38] 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Tripping the Live Fantastic"이며, 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Paul is Live" 앨범이다.[39] 'McCartneyII' 앨범 수록곡 'Temporary Secretary'.[40] 대표적으로 A Day in the Life의 중간 부분을 40인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연결시킨 것은 폴의 아이디어였다. 사이키델릭 록의 정수라 불리는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도 폴의 기여가 있었다. 존이 원래 구상하던 버전은 잔잔한 어쿠스틱 스타일의 곡.[41] 다만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존도 Ob-La-Di, Ob-La-Da를 꽤나 좋아했다고 한다.# 직접 피아노 반주 인트로를 만들어 주고, 편곡을 도운 것 역시 존 레논.[42] 건즈 앤 로지스가 커버 앨범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 곡이다. 이 곡은 007 매니아들에게 최고의 주제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43] 1970년대는 1980년대 중반 글램 메탈의 부흥기와 더불어서, 그야말로 록 음악의 최전성기나 다름 없던 시절이었다.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 데이비드 보위, 딥 퍼플, 블랙 사바스, 플리트우드 맥 그리고 1960년대의 더 후롤링 스톤스까지 그야말로 죽음의 조나 다름이 없었는데 이중에서 2위를 한 것이다. 만약 폴 매카트니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폴 매카트니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연속으로 가장 인기 있는 가수라는 초유의 기록을 썼을 것이다.[44]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이 무대에 올랐다. 2012년 샌디 자선 공연 당시의 일.[45] 정확히는 4현짜리 사각형 레조네이터 기타 비슷한 악기를 연주했다. 일렉트릭 기타는 너바나와 푸 파이터스의 팻 스미어가 담당.[46] 아일랜드의 전통 악기.[47] 코난 오브라이언과의 인터뷰에서 "원래 관악기 쪽에는 좀 취약합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긴 하다.[48]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49]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50] 심지어 비틀즈의 무명시절에는 제인 애셔가 오히려 비틀즈보다 인기가 높았다. 제인 애셔의 대표작으로는 알피, 딥 엔드가 있다. 폴과 제인이 첫 만남을 가진 계기도 1963년 4월 18일, 방영된 영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출연한 17살의 제인이 비틀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51] 참고로 존 레논도 비틀즈의 인기에 취해서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이들이 1965년 녹음한 Help!Rubber Soul 앨범에는 여자를 까는 가사가 많다.[52] 2004년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하자 제인 애셔는 "나에게는 이미 몇 십년을 해로한 남편이 있는데 뭔 소리냐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53] 다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게, 린다는 본래 사진작가였고,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옆에 있으니...[54]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55]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56] 어차피 본인도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라 굳이 돈 보고 남자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57]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농가의 소고기집 가보면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먹거나, 닭요리집 가면 창밖에 닭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58] 사실 록 음악가중에서는 채식주의자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전설적인 메탈 밴드인 블랙 사바스오지 오스본기저 버틀러가 있는데, 아무래도 폴 매카트니가 열성적으로 동물 애호 운동을 벌이고 가장 유명한 록 뮤지션이기도 한만큼 채식주의의 대표적인 인사로 여겨지게 된듯하다.[59]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60] 둘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시기에 주고 받았던 디스곡에서 아예 폴의 외모는 예쁜 얼굴이라고 못을 박았다. 못말린다 물론 존의 성격 상 비꼬는 것 일 수도 있고 이 구절을 폴 특유의 '듣기 좋은 멜로디'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도 있다만, 이외에도 존이 폴의 외모에 대해 언급한 몇가지 일화가 있다. 비틀즈 영화 촬영 중 해당 영화의 출연한 한 배우에 따르면, 하루는 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신들이 탄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자 존 레논이 '폴이 제일 이쁘니까 팬들한테 밀어(버리고 우린 가자).' 라고 말했다고 한다.(...)[61] 비틀즈 멤버들 모두 외모가 출중한 인물들이지만 각자의 이미지는 달랐고 이러한 요소 또한 비틀즈의 인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 나온 어록을 빌리자면, "은 놀랄 만큼 당돌했고, 폴은 놀랄 만큼 귀여웠고, 링고는 개구쟁이에 매력적이었고, 조지는 우리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였다."[62] 존 레논 179cm, 조지 해리슨 178cm, 링고 스타 170cm.[63] 실베스터 스탤론이 본인의 인스타에 닮았다고 밝히고 있다[64] 링고 스타는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엄청난 동안인 것을 보면 대조되기도 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폴 매카트니가 늙었다기보단 링고 스타가 전혀 80으로 안 보인다.[65] 에릭 클랩튼은 여성 편력 및 마약 중독 문제 외에도 1970년대 극우 파시즘에 경도되어 "더 하얀 영국을 위하여" 등의 헛소리를 하고, 2020년 들어서는 록다운을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곡을 쓰면서 꽤나 논란거리가 많은 편이다.[66] 삼중 불륜 문제야 너무나 유명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존 못지 않게 독설가 기질이 있었기에 논란이 될 발언을 꽤 했다. 가장 쓸모없는 상을 1965년에 받은 왕실 훈장이라고 대답한다거나, 후배 밴드인 오아시스에게도 독설을 퍼부었다가 리암 갤러거에게 폭풍디스를 당한다거나... 그나마 후자의 경우 리암에게 사과하긴 했다. 그 외에도 Anthology 3에 수록 예정이었던 존의 유작 'Now and Then'에 대해서도 폴에게 작업 도중에 "쓰레기(rubbish)"라며 녹음을 관두자고 얘기하는 등 생각보다 독설이 차고 넘친다.[67] 팬 레터에 답장해주기 귀찮다면서 팬 레터는 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버릴거라고 막말을 해 좀 욕을 먹은 적이 있다.[68]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 뮤지션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언급을 꺼렸다. 로버트 플랜트와의 만남을 단 10분만 잡아두고 별 얘기할 생각도 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다만 플랜트의 사교력에 홀려 무려 2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고...).[69] 사실 냉정하고 까칠한 성격은 폴이라고 말하는 주변인들이 많았다.[70] 이때 하술할 인종차별 논란이 있어 욕을 좀 먹기도 한다. 본인이야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71]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링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다.[72]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the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73] 이는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 커녕, 존 레논을 빼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 심지어 링고 스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일을 해서 최종 학력이 초졸일 정도다.[74] 다만 지금도 악보 보는게 익숙하지는 않아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대신 사용한다고 밝힌 적 있다.[75]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프레디 머큐리. 악보를 볼 줄 몰라서 특수한 기호로 써 놓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그걸로 악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에디 밴 헤일런, 지미 헨드릭스, 피트 타운젠드, 에릭 클랩튼도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다.[76] 영국에서 만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여담으로 록 밴드 더 후의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 또한 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77]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78] 폴 경이 김 작가를 부르는 애칭은 M.J.[79] 과장이 아니라 페퍼 상사 당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참여 비중을 보면 The Wall 시절의 핑크 플로이드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다(...).[80] 물론 여기에는 점차 밴드 활동에 싫증을 느낀 존과 조지의 행동도 한 몫 했다. 폴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밴드의 와해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더 강하게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멤버들의 사이를 더 갈라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81]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게 해당 곡의 첫 유명한 피아노 음이 되었다는 것. 다만 최근 폴이 위 설명과 다소 상반된 증언을 했는데, 곡을 녹음할 때 지각한 존을 빼고 나머지 멤버가 스튜디오에 모여서 곡의 도입부 코드 진행에 대해 논의 하고 있을 때 존이 '다들 뭐하고 있어?' 하며 들어왔고, 폴이 '오블라디..' 라고 하자 존은 '아 그거' 라고 하더니 피아노에 앉아서 도입부를 연주하자 멤버들은 '바로 그거야' 라며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아마 위 설명은 존이 싫어했다던 Ob-La-Di, Ob-La-Da의 초기 버전 녹음 당시의 에피소드인 듯 하다.[82] 'Molly stays at home and does her pretty face'라고 불러야 할 것을 'Desmond stays at home and does his pretty face'라고 불렀다.[83] 비브라토 음이 이상하다며 "그만, 그만! 물개가 꼬리에 살이 쪘다고 징징거리는 소리 같잖아!"라며 소리를 질렀다고.[84] 정작 키는 폴은 180cm, 존은 179cm으로, 둘이 비슷하다. 다만 비틀즈 초기 시절 사진에서도 볼 누 있듯이 젊은 시절의 존 레논은 상당히 굵직한 체격이었다.[85] 물론 존 레논은 비폭력주의자로 유명하지만 비폭력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고 한다. 물론 비폭력으로 전향하고 나서 과거를 반성했지만.[86]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판권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해 폴 매카트니와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87]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음악가도 폴 매카트니를 통해 한두다리만 건너면 다 연관되어있다. 가령, 정말 연관이 없어보일 것 같은 핑크 플로이드테일러 스위프트는 폴 매카트니의 지인으로 엮인 사이다.[88] 1968년, 화이트 앨범 시절 혹은 1969년 Abbey Road 세션 당시로 추정된다.[89]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만취 운전을 하던 경찰관의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했다.[90] 신시아 레논은 존이 그 누구도 폴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오노 요코는 폴이 여자였다면 상당히 위험한 경쟁자였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91] No More Lonely Nights의 기타연주는 바로 데이비드가 한것이다.[92] 이때 마이클에게 자신이 부를 노래는 직접 쓰는 작곡 능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기를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93] 그래서 폴 매카트니는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 뮤지션인 버디 홀리의 음악 판권을 통째로 사서 소유했다.[94]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보면 매카트니가 이걸 설명해 줬을 때 마이클이 "그럼 내가 당신의 음악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라고 했고 매카트니는 "녀석 농담은"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 되고 만다.[95]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언급이 잘 없지만, 11살 경 비틀즈 열풍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96] "프레디는 항상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어요. 그게 곧 그 그룹의 닻과 같은 역할을 했죠."[97] 라이브 버전. 원곡은 1970년 발매되었다.[98] 리한나, 칸예 웨스트와 함께 작업[99] 32년만에 10위 진입으로, 가장 긴 공백 기간을 가지고 10위에 진입한 기록이다![100] 칸예 웨스트의 싱글을 피처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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