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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듀폰

덤프버전 :

헨리 듀폰
Henry du Pont


본명
헨리 듀폰
출생
1812년 8월 8일
윌밍턴 , 델라웨어
사망
1889년 8월 8일 (향년 77세)
윌밍턴 , 델라웨어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가족
엘유티에리 이레네이 듀폰(아버지)
헨리 알제논 듀폰 (아들)
알프레드 듀폰(형)
라몽트 듀폰(조카)
존 E. 듀폰(증손자)

학력
American Classical and Military Academy (졸업)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졸업)
종교
성공회
직업
군인, 기업가, 정치인
소속
듀폰 가문
서명
파일:사인_의_헨리_듀_폰_(1812–1889).png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의 창립자인 엘유티에리 이레네이 듀폰의 차남이자 듀폰의 3대 회장. 아버지가 총기화약 회사로 세운 듀폰을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화학회사로 만든 사람으로 평가된다.


2. 생애[편집]


듀폰 일가 출신 듀폰 회장들중에서 최초로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미군에 복무하면서 아버지와 형인 알프레드 듀폰을 도와 듀폰이 총기 화약을 미군에 납품하는 것을 도운다. 군, 정계 인맥은 제대한 이후에도 헨리가 듀폰의 사세확장에 유용하게 써먹는다. 또한 크림반도 전쟁이 일어나자, 헨리 듀폰은 조카[1]인 라몽트 듀폰[2]의 값싼 화약제조법으로 만든 화약을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번다.

미국 남북전쟁에는 미군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대로 복귀하여, 델라웨어의 연방탈퇴를 막고 델라웨어가 북군(미연방군)을 위해 지원병을 모으는 것을 돕는다. 극렬 노예해방론자는 아니었으나[3], 매우 열렬한 링컨의 지지자였다.[4] 전쟁후에도 평생 공화당을 지지했으며, 델라웨어의 중요 공화당 인사로써 활약한다. 이 댓가로 미연방정부는 듀폰의 적대적 인수합병 및 캘리포니아로 진출같은 사세확장에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며 듀폰이 지금의 국제적 화약기업이 되는 것을 돕게 된다.


3. 여담[편집]


  • 아들인 헨리 알제논 듀폰과 영어 표기가 비슷해 혼동하는 일이 잦다.



[1] 형 알프레드 듀폰의 아들[2] 종래에 화약은 질산 칼륨은 이용했는데, 문제는 질산 칼륨 광석인 초석을 중국, 칠레, 인도등 몇몇 나라에서만 대량 채굴이 가능했기에 화약의 가격을 올리는 주범이 되었다. 이에 라몽트 듀폰은 질산 칼륨이 아니라 질산 나트륨으로 화약을 제조하는 법을 개발하게 된다. 또한 라몽트는 미국에서 다이너마이트의 군사적 가치를 최초로 눈치챈 사람들중 하나다.[3] 델라웨어에서는 노예제가 합법이었다.[4] 물론 미연방군에 화약을 대량으로 납품 하기 위한 계산적인 지지였다는 썰도 있다. 다만 이 사람은 전쟁 전에도 민주당이 아니라 휘그당이었다. 또한 남부연맹에 화약을 파는 것을 거부한 일화를 생각하면 적어도 '미국연방공화국'에 대한 지지는 진심이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