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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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한국전쟁
문화어: 조국해방전쟁
六二五戰爭 | Korean War


파일:600px-Korean_War_Montage_2.png

전쟁 당시 사진

파일:국토교통부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625전쟁 지도.png

전개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3)
기간
1950년 6월 25일 4시 20분경 ~ 1953년 7월 27일 22시 (사실상)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20분경 ~ 현재 (명목상)[1]
(1953년 7월 27일 22시 이후 25813일간 정전 상태)
장소
한반도 본토 및 연안과 부속도서 일부[2]
원인
냉전, 김일성조선로동당한반도 적화통일 야욕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UN기.svg 유엔군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군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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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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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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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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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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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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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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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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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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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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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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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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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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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7] (비공식)
의료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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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 및 기타 지원국[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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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나마 국기.svg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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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의사 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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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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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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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1,000,000+명[1]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1,789,000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56,000명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자치령 26,791명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21,212명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7,164명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3,794명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4,992명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3,421명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5,100명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6,326명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7,420명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3,498명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5,322명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웨덴 1,124명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627명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본기] 연합군 점령하 일본 60명[2]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623명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 630명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128명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118명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룩셈부르크 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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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2,970,000명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260,000+명[1]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26,000명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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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1951년 1월 4일 1.4 후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월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4일 10.4 남북공동선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선언
2018년 9월 19일 9월 평양공동선언

영향
미, 소 주도의 냉전 체제 가속화
한반도 분단의 고착과 남북 독립국가 체제 강화
군사분계선(휴전선) 형성[13]
이산가족 발생
한국의 징병제 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피해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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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137,899명 사망
450,742명 부상
24,495명 실종
8,343명 포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33,686명 사망
92,134명 부상
3,737 실종
4,439명 포로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1,078명 사망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78명 포로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966명 사망
1,155명 부상
163명 실종
244명 포로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자치령:
516명 사망
1,212명 부상
1명 실종
33명 포로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340명 사망
1,216명 부상
43명 실종
28명 포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262명 사망
1,008명 부상
7명 실종
12명 포로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192명 사망
543명 부상
3명 포로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213명 사망
448명 부상
28명 실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120명 사망
645명 부상
3명 실종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에티오피아 제국:
122명 사망
536명 부상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99명 사망
336명 부상
4명 실종
1명 포로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본기] 연합군 점령하 일본:
1명 사망[1]
1명 실종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36명 사망
8명 포로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23명 사망
79명 부상
1명 실종/포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3명 사망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룩셈부르크:
2명 사망
13명 부상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3명 사망
23명 부상

• 민간인 납북, 월북
• 대한민국 공업 기반의 절반 소실, 30억 달러 또는 국부의 1/4 손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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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215,000–406,000명 사망
303,000명 부상
120,000 실종/포로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중국측 자료
197,653명 사망
383,500명 부상
450,000 이송
25,621 실종
21,374 포로
14,190 망명

미국측 추산
400,000+명 사망
486,000명 부상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299명 사망
335 항공기 손실

• 군인, 민간인 최소 250만여 명 사망[1]
• 민간인 월남
• 북한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 공업의 70% 소실


1. 개요
2. 명칭
3. 전개
4. 전쟁범죄
4.1.2. 미국
4.1.3. 캐나다
4.2. 공산주의 진영
5. 기타
5.1. 관련 예언들
6. 관련 자료
6.1. 학계
6.2. 군사적 자료
6.3. 다큐멘터리
8. 관련 사건
9. 어록
10. 외부 링크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6·25 전쟁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14] 발발한 전쟁이다.

교전이 이어진 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사실상 3년 1개월(1,129일)간이며, 현재까지 명목상으로는 73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하는데[15] 때문에 6·25 전쟁은 전후 냉전의 시작을 대표하는 사건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6·25 전쟁에서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걸고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연속된 한국의 암흑기를 연 사건인 이 전쟁은 오늘날까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와 상호간 대치 상태는 정전 70년이 지난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6·25 전쟁의 평화협정(종전 및 강화 조약)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으며, 남북통일이 아직도 안됐기 때문에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법적으로 볼 때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러한데,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2. 명칭[편집]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방송공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16] 6·25전쟁, 한국전쟁 외에는 6·25사변, 6·25동란, 한국동란 등이 있는데 요즘에는 잘 쓰이지는 않는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전승절)이라고 포장하여 매년 열병식 등의 행사를 주최하여 기념하고있다.[17] 당시 북한에서는 남측을 미국의 괴뢰정권, 미국의 하수인들이 지배하는 악의소굴, 미군정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침략당한 영토라는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남쪽에 잔존하는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국의 남반부를 해방시키자는 의미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다닌다. 좀 덜 공격적인 표현으로는 '한국전쟁'에 해당하는 '조선전쟁'이 있으며, 북한에서도 다소 낮은 빈도로 '6.25전쟁'이라고도 쓴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The Forgotten War라고도 한다.[18] Korean War라는 이름은 제1세계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표현은 보통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이지만,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战争)이라고도 한다. 이는 왜적에 대항해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6·25를 의미하는 항미원조와 대상만 다르다.[19] 중국 측이 6·25전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전쟁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에는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 칭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조선동란(朝鮮動乱) 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아직도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20]이라는 용어를 쓴다.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전(韓戰)이라고 부른다. 대만에서는 베트남 전쟁도 월전(越戰)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대만에서도 지명으로서는 조선(朝鮮)이 더 익숙하다. 대만의 아버지 장제스카이로 회담 때 카이로 선언문에 "조선의 독립"이라는 어휘를 반드시 넣으라고 요구하며, 이를 반대하던 윈스턴 처칠[21]과 갈등을 빚은 적도 있을만큼, "조선"이라는 표현을 좋아하고 존중했다. UN상임이사국 시절에도 UN회의에서 한반도를 조선이라 칭한 적이 많다. 국부인 총통이 조선이라는 호칭을 좋아하니 대만 국민들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결국 처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실제 카이로 선언문 원본(중국어 버전)에 "決定在相當時期使朝鮮自由與獨立"[22]이라고 명백하게 "조선" 및 "독립"이라고 적어놨다.[23] 민간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 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 간행물 "한국전란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행정 관서에서는 주로 '6·25'로 표기했다. 197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년 3월 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6·25 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6·25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25전쟁이란 말은 한국, 드물게 북한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 한국인(한국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나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한편 국제적으로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말해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6·25'라는 명칭을 통해 우리가 얻을 교훈은 북한의 '적화 야욕'을 경계하고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자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이런 단세포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주장을 남겼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6·25라는 용어는 사건 발생일을 기준 삼아 단일의제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냉전시대 절대적 사유체계로서의 6·25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명섭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09년에 『한국정치외교사논총』에 발표한 논문에서, The Korean War를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과 '한국'이 가지는 역사적, 개념적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기계적인 번역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통일이후 '조선'이나 '한국'을 대신할 새로운 국호가 등장하거나 혹은 한국이라는 국호가 계속 사용될 것을 가정한다면, 그 때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명명이 적당하다고 볼 수 있느냐고 문제제기 하였다. 또한 7월전쟁, 8월전쟁, 겨울전쟁 등과 같은 다른 나라의 전쟁명명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사건발발 날짜를 기준으로 명명하는 것은 오히려 자국 민중의 경험이 온축되어 있는 동시에 가장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한국전쟁'은 '남한전쟁', '한국이 일으킨 전쟁' 같이 전쟁 발발 주체가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2

참여정부에서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바 있는 서동만 상지대학교 교수 역시도 “한국전쟁은 분명히 잘못된 명칭이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대한민국의 약칭이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를 무대로 남북이 모두 당사자인 이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쟁의 무대, 전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반도 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만, “더 적합한 명칭을 찾을 때까지 잠정적인 것으로서 일부 연구자들이 제안한대로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 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 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 전쟁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24] 국방부 지정 공식 용어가 과거에는 한국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 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한국전쟁'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25]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6·25 전쟁만 있는 게 아닌데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고, 6·25가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5·18 민주화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등도 바꿔야 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근거해 명칭을 부여한 예가 존재하므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용어는 해당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즉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날짜 또한 그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6·25 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 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26][27][28] 후에 6·25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쯤, 'war'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미국의 내전[29]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져 있는 데다, 남북으로 갈라진 (적이 있는) 곳이 한국과 미국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30] 쓰이지 않는다.


3. 전개[편집]



The attack upon Korea makes it plain beyond all doubt that communism has passed beyond the use of subversion to conquer independent nations and will now use armed invasion and war. It has defied the orders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issued to preserv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 know that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ill consider carefully the consequences of this latest aggression in Korea in defiance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return to the rule of force in international affairs would have far-reaching effect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uphold the rule of law.

대한민국에 대한 이러한 공격(북한의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수단을 넘어 이제는 무장침략과 전쟁을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지키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또한 무시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UN에 소속된 모든 국가들이 유엔헌장을 무시한 채 한국에 대한 침략의 결과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라 봅니다. 국제관계에서 힘에의한 통치로의 복귀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킬 것입니다.

해리 S. 트루먼. 1950년 6월 27일 연설문 #


",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새끼들을 막아야 하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해리 S. 트루먼.


6.25 전쟁은 중소 양국의 흉도와 사주밑에 북괴의 기습침략으로 발발된 민족공통의 참화이며 수난이었다.

6.25 전쟁사1:북괴의 남침과 서전기, 국방부, 1977년, p.17 #


이 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남북한간의 민족전쟁의 성격과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의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으며, 비록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되었지만 남침 이후 20개국의 전투부대가 참전함으로써 양대 진영간의 국제전적인 성격을 띤 전쟁이었습니다.

6.25 전쟁사 1권, p.5 #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을 위시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무력을 동원한 적화통일 기도이다.

미국은 유엔에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고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 및 정부수립을 감독하며,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인하여 지상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고, 1948년 4월 8일 미국 국무부하지 중장에게 동년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도록 한국측과 제반 협정을 체결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정부 수립을 앞두고 미 국무부는 1948년 말의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하고 한국의 경비대를 무장하고 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은 예정대로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즉,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 선포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일어난 일이다. 미군이 남한에 재진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김일성과 소련의 판단 하에 1950년 6월 25일 개전을 시작하였다.

일각에선 6.25 전쟁에 대해서 해주진공설을 기반으로 남한의 북침설과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이 있으나, 이러한 유도설은 오래전에 이미 논파되었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갑자기 이런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당시 국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김일성 및 공산권의 야욕에 의한 기습남침으로만 규정되어 있었다가 19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조사 중에 여러 서적들이 국내로 들어왔는데, 이 중 브루스 커밍스의 6.25 전쟁의 기원 등에 남침유도설 등이 서술되어 당시 NLPDR 등의 운동권에 의해 적극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남침유도설은 수많은 반박자료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 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 기원설에 국제적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31]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32]

소련은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만주의 북한 비행학교에서 소련 전문가들이 조종사 양성에 참여했였으며, 북한의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담당했다.6.25 전쟁사. p.544 심지어 일부 파일럿들을 중공군으로 위장시켜 투입까지 하였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모른 척 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 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 명예가 실추됐다. 한편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뿐만이 아니었다. 세간에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에 의하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될까봐 노심초사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3.1. 전쟁 발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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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의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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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군의 참전과 역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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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쟁의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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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전쟁에 대한 인식[편집]





3.6. 관련 기록[편집]





3.7.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편집]





4. 전쟁범죄[편집]



4.1. 자본주의 진영[편집]





4.1.1. 대한민국[편집]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 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


한국 정부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등), 형무소 재소자 학살(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등), 부역 혐의 학살(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등)등의 범주로 나뉜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경우 대한민국 국군 및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삼팔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한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경우 민주화 이전 독재 정권 시절부터 암암리에 인지도가 있던 유일한 학살 사건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학살 사건의 존재는 4.19 혁명 이후 5.16 군사정변 이전 피학살자유족회가 활동하던 단 1년의 기간을 제외하면 민주화 이전까지는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아울러 학살 외의 전쟁범죄로는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다.

학살을 저지르는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케이스는 있다. 영국군이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그 외에도 각지에서 민간인 차원의 좌우 갈등이 극에 달하여 학살이 빈번했다. 전라도는 좌우대립이 극심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실 양반들이 6.25 전쟁으로 망했다는 옛날의 믿음[33]과 달리 전라도 양반들조차 물론 피해를 크게 입은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고도 멀쩡한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 때문에 공격자나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34]에 대해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지난 세기에는 독재 정권이라서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유와 반공이 국시였던 점으로 인해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은폐되었지만, 민주화 이후 이러한 부분이 재조명되고 일부는 국가의 공식적 사과 및 보상이 이뤄졌다.


4.1.2. 미국[편집]


한반도 전역에서의 미군의 전술, 전략 폭격은 큰 민간인 사상자와 영향을 남겼다. 예를 들면 서울 일대 폭격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4,280명의 서울 시민이 사망했는데 이는 서울시 사망자의 24.8%다. 이는 서대문구, 중구, 용산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은 용산과 종로, 중구 정도만 서울이었고 나머지는 다 경기도였기 때문에 서울 전체를 폭격한 것. 민간인에 대한 폭격 문제는 최근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비밀 유지 기한이 풀리면서 당시 폭격기나 전투기 조종사가 쓴 비행 일지가 드러나며 밝혀졌다.

미군은 국군, 북한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그렇게 남은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 밖에 세균전을 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미국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 인용된 기사를 포함하여, 2010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발견된 미국 측 문서를 통해, 적어도 미군의 세균전 테스트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된 상태다.

최근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로 미국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진실위는 왜 미국 희생사건에 인색했나. '대한민국'이 완전히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걸 목숨 걸고 막아준 그 고마운 미군에 대해, 절대로 고의로거나 실수로라도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눴을 리 없는 그 미군에 대해 당신들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조사관들이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 내외에서 '좌익 반미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사기간이 만료돼도 40~50%밖에 해결 못한다, 자신도 9명의 상임위원 중에 한 명에 불과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는 “보수정권으로 바뀌니 변명으로 일관하고 기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려 진실규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부산·대구·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됐다고 유족회는 덧붙였다.

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전원 사퇴하라"#


4.1.3. 캐나다[편집]


6.25 전쟁 당시 캐나다군 또한 양민을 대상으로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 아래의 기사는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교 존 프라이스 교수가 밝혀낸 자료다.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


4.2. 공산주의 진영[편집]


※ 공산군과 좌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문서 참조.


4.2.1. 북한[편집]


소위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각 점령지역의 주민을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입구등으로 소집해 모아놓고 자신들이 체포하거나 납치한 인물들을 형식적 재판 이후[35]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이때 처형당한 인물들은 기업인,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군경 및 공무원 가족 등 북한과 좌익세력에 의해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함흥시 학살 사건 등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적 절차조차도 없이 자행한 학살들도 빈번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에 의해 개신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6.25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36]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 중에뿐만 아니라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37][38]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그 외에 한국군, 유엔군 포로에 대한 처우가 매우 처참했다. 전방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2~4주씩 걸어서 가깝게는 평안북도 멀리는 중국 만주지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때 부상을 입은 포로의 경우 들것 수송이 금지되어 걷지 못하면 길에 버려져 죽거나 사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포로들에 대한 배급 역시 열악하여 말린 채소 소량 혹은 부패한 생선 따위가 배급되었고, 이마저도 이송시에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정전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적대계층으로 차별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0년대 북한 지도부에게는 최소 60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책임과 1970년대 중반 이래 최소 10만 이상이 수용된 정치범 수용소나 강제노동 수용소의 인권 유린 및 일부 공개 처형 등은 비판을 피할 수 없고, 6.25 전쟁 당시 김일성조차도 한국과 협력했다고 의심받은 자들을 겨냥한 정치적 보복이 과도했다고 비난했지만, 북한이 자신의 적을 그렇게 많이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고 역설했다. 예를 들면 해방 이후 토지개혁 과정의 잔인성은 소련이나 중국, 북베트남보다 훨씬 덜했고, 지도부는 지주들이 남쪽으로 피신하게 내버려두거나 농지를 경작하기를 원하는 경우 고향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북한이 한국의 공무원, 경찰, 우익 청년단체 지도자 그리고 미국에 고용되었던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보고는 전쟁 초기부터 있었지만, 초기의 처형은 대개 감옥에서 풀려난 좌익들의 한 풀이에서 비롯됐으며, 처형된 이들 대부분은 과거 북한에서 달아난 식민지 경찰, 서북청년단에 가입한 북한 지주의 아들, 한국 지주와 자본가의 아들, 식민지 정부에서 비교적 높은 직책에 있었던 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부 학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다.[39]

4.2.2. 중국[편집]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들먹이며 중국 인민지원군은 범죄가 없는 깨끗한 군대였다고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공군에 비해 북한군이 더욱 악랄했기 때문에[40]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서 중공군이 그나마 좀 나았다는 식의 증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 중국 지휘관들이 아군도 자주 처벌[41]해서 나온 이야기에 가깝다.[42] 중국군도 식량을 배급하지 않고 행군을 시키거나, 낄낄 웃으며 포로들을 쏴 죽이거나, 채찍 등으로 구타, 부상당한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하는 전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유엔군 장병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6·25전쟁'으로 부르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북한('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의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중국의 6.25 전쟁 시각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중국군에게 잡힌 유엔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 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국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또 중국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 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터키인이 본 6·25전쟁' 지음: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중국군은 부상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국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1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국군 중 1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국군 1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장진호 전투 제3일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3겹, 4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 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되자 중국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5. 기타[편집]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윌리엄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 장교 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였다고 한다.

  •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황해도)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정전 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중단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매우 빡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43]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인민재판을 도입한 이는 다름 아닌 김일성 본인으로, 스탈린은 자제하길 바랬던 그 짓을 김일성은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 이 전쟁에서 양측이 한반도에서 사용한 탄약량은, 2차 대전기 유럽 전선 전체에 쏟아부은 것에 비견될 정도로 많다.[44]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하루에 수십만 발을 쓰기도 해서,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소비량 단위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 직전의 국지전 때 국군 포병대가 사용한 탄약량을 보고 '좀 아껴 효율적으로 쓰라'며 탄약 보급량을 줄이고 탄약고를 걸어 잠근 것이 미국 고문단이었다는 것. 근데 이건 고문단의 잘못이 아니라 초기 한국군이 대책 없이 탄약을 낭비한 게 문제였다고 보는 게 맞다. 미군이 1949년 6월에 5,100만 발의 각종 탄약을 제공했는데, 6개월 동안 3,000만 발 이상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옹진반도에서는 6일 동안 105mm 곡사포탄 5,572발, 각종 박격포탄 19,000여 발을 포함하여 100만 발 이상을 소모했고 전과는 북한군 69명 사살. 거의 북한군 한 명 죽이는 데 14,700여 발을 쓴 거다. 포탄만 따져도 1명당 350발을 넘기는 판이라 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한국군이 탄약을 너무 낭비하니 달라는 대로 주면 답이 안 나온다"는 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당시 1개 포병대대가 동원되었으니 15문의 야포가 투입된 셈이니 1문당 하루에 62발을 갈겨댄 셈인데, 미군 포병의 탄약 제한이 105mm 야포는 하루에 50발로 제한되어 있었고 저 양이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갈겨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탄약을 소모해서 전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45] 사실 미군도 6.25 때 세계대전 급 화력을 퍼부어서 돈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그렇게 갈겨서 올린 전과가 최대로 잡아도 (즉 모든 적 병력이 105mm 탄에 죽었다고 가정할 경우) 69명 사살하는 데 그쳤으니 제한을 걸어도 할 말이 없다.

  • 6·25 전쟁 중 미군의 흑백 인종 통합 운영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미 육군 부사관, 아이작 우더드(Isaac Woodard, 1919~1992) 병장 피격 사건으로[46] 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유색 인종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1948년 7월 26일 행정명령 9981호를 통해 미군 내의 인종 간 분리 정책 폐지를 명령했다.[47] 당시 미 해군과 공군은 즉시 대통령의 명령을 수용했지만, 보수적인 미 육군과 해병대는 그렇지 않았다. 미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당시 대다수 미 지상군 고위 지휘관들은 미 합중국 대통령의 이 행정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시된 채 남아있던 흑인 연대인 제24보병연대가 6·25 전쟁에 급파되고[48], 이런저런 논란을 거쳐 맥아더 해임 후인 1951년 10월 1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24연대와 같은 유색 인종 부대를 해체하고, 유색 인종 장병들은 인종 통합을 위해 백인 부대로 전출시켰다. 이후부터는 백인 부대에서도 흑인 신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육군에서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더더욱 보수적이었던 미 해병대는 1952년부터 백인 부대에서 흑인 신병을 매우 제한적으로 받았고, 1960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졌다.[49] 보수의 끝판왕인 군에서 민간보다 먼저 인종 간의 화합을 시작하도록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의 혜안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 하와이한국계 미국인이나 일본계 미국인도 적지 않게 참전했으며 용산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PARK, WATANABE 등) 유명한 인물로는 한국계 김영옥 대령, 장진호 전투중국계 미국인 커트 리 해병 중위가 있다.(중국명 리추웬) 커트 리 중위는 중공군 포로가 "중국인이 제국주의자가 되었냐"며 발악하자, 영어로 "나는 커트 추웬 리 중위이고 미합중국 해병대 소속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커트 리는 현재 타계하였고 "중국계로서 중공군과 맞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용맹한 미합중국 해병대의 장교로서 명령에 따랐고, 부하들과 함께 고국(미국)으로 귀환했다. 그것이 다이다."라는 굵직한 소회를 남겼다. 그리고 중공군 측에는 통역병으로 다수의 조선족이 참전했고, 한국군 측에서는 역시 비슷한 용도로 화교들이 지대급 병력으로 참전하거나 일선부대에 배속되었다. 전후 근래 들어 지속적 청원으로 화교 참전병들은 훈장수여로 명예회복을 한 상태. 이는 한국 화교의 절대다수가 대만계이기에 가능했던 사항으로 보이며 대만에서 "전 병력을 파견, 참전해서 북진 후 본토(중국) 수복을 하고 싶다"며 UN측에 의사를 전달했으나 확전을 우려한 맥아더에 의해 묵살당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캐나다, 영국군에 배속되어 전투에 임한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인 ANZAC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야전에 있어 미군, 터키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정예였으며 의정부, 양주, 가평 등지에서 용맹하게 싸운 정예부대이다. 경기북부에 이들의 전승비가 있으며 소수로 중공군 인해전술을 대파한 전사는 호주 역사에 남을 정도. 당시 미군 장성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은 호주군에게 "강철과 같은 병사"들 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 북한의 남침과 동시에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50][51].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있을 때 브라질멕시코를 탈탈 털고 있었으며 경기 결과는 브라질 4:0 멕시코였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공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후퇴에 참전하였다.



  •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는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 소속되어 F9F 팬서 조종사로 참전하여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미국인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한 존 글렌이 그의 윙맨으로 함께 작전에 참가하였다.




  • 제48대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부친인 에드워드 펜스(Edward Joseph Pence Jrㆍ1929~1988)도 6·25 참전 용사이다. 미 육군 소위로 참전한 그는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 연합군의 요청으로 연합군 점령하 일본 병사 60명이 참전했다. 일본군이나 자위대 자격이 아니라 미군 군속(군무원) 자격으로 참전했는데, 원래 전투병이 아닌 취사요원으로 참전했었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조리병에서 소총수로 역할이 전환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 중 2명의 일본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1명은 실종되었고, 그 중 1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이름은 '히라츠카 시게하루(平塚重治)'이며 그의 동생 히라츠카 아키마사(平塚昭正)가 직접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인 경상북도 가산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일본은 구 해군을 중심으로 일본 특별 소해대를 편성해 원산, 군산, 인천, 해주, 진남포 등에서 기뢰제거 등 목적으로 1,450명이 동원되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미국의 스키 선수 린지 본의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도 6·25 참전 용사이다.[52] 특히 그는 동계 올림픽이 열린 정선군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킬도는 손녀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 지킨 땅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때문에 린지 본은 할아버지의 유골 일부를 정선 알파인 경기장에 뿌렸다고 한다.


  • 케이툰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었던 완결 웹툰 야오네집 21화에서는 6·25 전쟁을 거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작가의 어머니는 피난길에 친어머니에게 버려지려다가 그걸 본 유엔군의 흑인 군인이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준 담요와 크래커로 버텼고, 그럼에도 결국에는 나무에 묶인 채로 버려졌는데 이를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의 한 군인이 보고는 안쓰럽게 여겨 나무에서 풀어주고 돈을 쥐어주고는 마을에서 따뜻한 걸 사먹으라고 했다고 한다.[53] 그 돈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다가 한국군 장교의 눈에 띄었고, 그 장교의 지인에게 맡겨졌다가 우연히 그 집을 찾아왔던 영어교사 부인이 데려가 부부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덧붙여 작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평소보다 불편했던 체험쯤으로 회고했다고 하고, 작가의 시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모내기하다 미군부대 카투사에 들어가 스크램블 에그 만드는 법을 배워온 게 다라고 한다.

  • 이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6월 26일, 즉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과 월과 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49년 6월 26일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니까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은 백범 사망 1주기를 맞이하였던 해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하나의 징크스처럼 굳어져 가고 있는데, 이른바 30년 주기 국장설로, 30년 간격으로 국상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대규모 유혈사태를 겪는다는 것. 첫 번째로는 1919년 고종 황제 승하 후 3.1 운동으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으며, 2번째가 1949년 김구 선생 서거 후 발생한 이 전쟁, 3번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집권 과정에서 일어난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4번째는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일어난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전이다.

  • 1950년 5월에 첫 발매하였던 칠성사이다는 사이다 출시 1달 만에 전쟁으로 사이다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밀리터리 FPS 게임인 콜 오브 듀티배틀필드 시리즈에는 2020년 6월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54] 북미권에서의 “Forgotten Wars”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정전 상태인 데다 중국군이 적으로 나와서 중국 시장에 출시가 불가능해지기에 게임으로 내놓기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전쟁이다.


  • 제주도가 전쟁 당시 전장이 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실제 제주도로 한국 정부를 피난시키는 방안이 나타나기도 했다.[55] 만약 현실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대만관계처럼 되어버렸을지도.

  • 제주도가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는 이미 제주 4.3 사건으로 말이 아닌 상태였다. 게다가 4.3 사건으로 구속되어 본토로 수감된 사람들은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학살로 인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 당시 제주 출신들은 4·3 사건으로 인해 빨갱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많은 수의 제주인들이 전쟁 때 해병대에 입대해 싸웠고 상당수의 해병이 제주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 중공군은 말도 안 되는 미군의 화력을 막기 위해 지하 만리장성을 수천 km 규모로 건설했다. 중공 기록만이 아니라 UN군 기록에도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공격하는 데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어 피해가 심했고 결국 UN군의 계속된 공세로도 밀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 매년 6월 25일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6.25 전쟁 중앙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쟁 발발일이 여름철이고 참전용사들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인 점을 고려해서 장충체육관이나 잠실실내체육관 등 서울시내 체육관에서[56] 행사를 치르고 있다. 부득이하게 야외에서 행사를 치러야 할 경우 서울공항에서 진행했던 2020년 제70주년 기념행사처럼 기온이 낮보다 낮은 야간에 치르고 있다.

  • 일부 언론사에서는 6·25 전쟁 정전 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종전일인 것처럼 쓰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6·25 전쟁은 종전된 것이 아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정전과 종전은 엄연히 다른 거다. 풀이하자면 정전은 전쟁을 잠시 정지한다는 뜻이고, 종전은 전쟁을 종결한다는 뜻으로 확연하게 다르다. 매년 6월 25일마다 기념식을 국가에서 주최하는 것도 단순히 전쟁이 있었던 걸 기념하는 게 아니라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니까 사기 진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행사를 갖는 것이다. 다만, 전쟁 양상이 전면전에서 국지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2연평해전 등 계속 전투가 발생했다.

  • 한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6·25 전쟁 기간의 공적으로만 수여하고 이후 폐지하였다.

  • 한국인에겐 가장 임팩트 있고 현재에도 영향이 있는 2개의 근현대사 이벤트[57] 중 하나지만 그동안 세계사로 볼 땐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의 이벤트 정도로 취급되었다. 물론 냉전 시기 제1세계제2세계가 맞붙은 첫 무력 분쟁이라는 상징성이 있지만, 전쟁 과정과 전후의 임팩트가 앞뒤 전쟁들만 하지 못해 묻힌 감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말부터 미중 관계에 긴장감이 돌며 재평가되었고 특히 중국에서 미국과 처음으로 싸운 6.25 전쟁, 정확히는 전쟁 내 중공군을 고평가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 관련 영화만 3개 이상이 나왔고 방탄소년단이 6.25 전쟁 때 대한민국 쪽의 참전 용사들에 감사를 표하자 전국적인 보이콧이 있었을 정도였다.

  • 대한민국의 참전 용사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전 이후 받은 돈은 32만원 정도밖에 안 되고, 정신적 부담이나 신체적 부담에 대해서도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는데, 이를 일부에서는 제2차 한국전쟁(Second Korean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3년에 걸친 분쟁에서는 한국(남한)-미국(주한미군) 측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한국군 1사단, 주한미군, 카투사 등이 참전했으며 중소규모 국지전, 게릴라전에서 박격포를 사용한 소규모 포격전까지 있었을 정도로 나름 격렬했고 파주, 문산, 동두천까지 총탄음이 들렸을 정도였다.


  •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잡힌 인민군 포로들 중 일부는 정전 후 북한으로의 송환도, 남한으로의 귀순도 아닌 제3국행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남북한 당국자들의 설득, 회유로 남한에 남거나 북송되었으나, 76명의 포로들은 끝까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채 결국 한반도를 떠나 이들을 수용할 의사를 밝힌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흩어져서 떠났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러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택한 포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며, MBC에서는 이들의 이후 행방을 추적하여 1992년에 6.25 특집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을 제작, 방영하였다.

  • 이 전쟁 직후 미군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게 햄, 소시지, 베이크드 빈즈 등을 주었는데 이것을 찌개로 끓인 것이 부대찌개이다. 한국에서 발명되었으며 부대찌개의 기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나 6.25 전쟁의 시작과 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먼저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선에서 다발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를 접하여 본격적인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최초로 인지한, 즉 공식적인 6.25 전쟁의 시작을 접한 육군본부 당직 장교는 후일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되고, 국무총리를 2번 맡은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또한 정전 협정 석상에서 정전 사실을 협정장 밖으로 전달하며 6.25 전쟁의 끝을 알린 한 무전병은 훗날 유명 코미디언이자 국민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방송인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이 각각 김종필송해다.

  • 일본 연예기획사 쟈니스의 창립자 쟈니 키타가와는 1952년 CIA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59] 10개월만에 한국어를 마스터 한 후[60] 판문점에서 전쟁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첩보활동을 하였으며 고아들에게 미군들의 세탁물을 세탁해오는 일을 시키면서 수익을 만들어줘 고아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앙일보 기사
우크라이나어 신문기사 전선이 고착화된 2023년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예시

  • 한국광복군 출신의 장교들도 전쟁 과정에서 다수 전사하였다. 개전 초기 서부전선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제일 먼저 교전하다가 동두천 전투에서 전사한 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장 이의명 소령을 시작으로 장철부, 김영남, 차약도, 박영진, 박재화, 이건국, 최철, 이무중, 이건국, 이진영 등이 전사하였다. 이 중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박영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광복군 인면전지공작대 소속으로 임팔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전사한 광복군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하거나 일본군 탈출 후 광복군에 편입한 20~30대의 젊은 장교들이며 이들이 전사하면서 광복군 계열 고위장교들의 명맥이 다소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 이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위한 국립묘지가 국립호국원이다. 애초에 국립호국원을 조성하게 된 계기가 수요에 비해 묘역 공급이 부족했던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한 보훈 강화 차원이었다. 6.25 참전에 대한 공적이 인정돼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사람과 유공자의 배우자는 사망 후 국립호국원에 안장될 수 있다.

  •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한국인들을 제주도, 일본, 사모아(서사모아)로 이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일단 제주도는 토지가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가 불리하고, 일본으로 가기엔 안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겪고 해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인이 극구 반대할 가능성이 상당히 늪을 것이고, 남은 건 사모아(서사모아)로 이주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지금 대한민국는 폴리네시아 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5.1. 관련 예언들[편집]




  • 1949년 탄허스님이 북한의 사찰에 있었는데, 어느 날 개미떼가 법당 뜰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은 것인데 이 모습이 너무 불길해 보여서, 역학 원리를 통해 분석해 보니, 다음 해에 민족 다툼이 벌어질 것이 예견되었고 이에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경상남도 양산시통도사로 피신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61]

  • 증평 사곡리 우물은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에 있는 우물이다. 여기에서 1950년 6월 24일 우물이 1m 내외로 불어나자 이튿날 6·25 전쟁이 발발했다.[62]

  • 북한에 속하게 된 명산인 구월산에 사는 도사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서 사주팔자를 물어보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도사로부터 간명지를 받았는데, 여기에 "이도남하(移道南下)" 글자가 적힌 보고 뜻을 파악하고 급히 자산을 처분하고 남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이후에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63]

  • 일부 호사가 사이에서는 파티마의 성모님의 3번째 예언이 교황이 아닌 외국으로 파견 나간 최고위 사제 또는 수도원장이라는 말이 있는데, 전쟁은 13년 후에 벌어진 6.25전쟁이며 당시 예언에서 불타는 건물이라는 것이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이라는 것과 흰 옷 입은 사람은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도피차 하얀 도포를 입었다가 북한 공산당에게 잡힌 보니파티우스 사우어(보니파시오, Bonifatius Sauer) 주교 아빠스(1877 ~ 1950)이라는 것이다.[64]

6. 관련 자료[편집]



6.1. 학계[편집]


  • 브루스 커밍스: 대표 저서: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한국전쟁의 기원)은 6.25 전쟁 발발 전까지 대한민국의 내부 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 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감탄했다.[65] 특히 군사학적 분석을 무시한 지나친 실증주의 집착이 주 원인이었다. 반대로 1권은 주로 한국 내부를 미군 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실증주의 집착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최근에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 캐서린 웨더스비: 대표 저서 "Korea, 1949-1950: To Attack, or Not to Attack? Stalin,Kim Il Sung, and the Prelude to War”,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깨트린 장본인이다.[66] 다만 국내에서 인지도는 낮다.커밍스만 알고 웨더스비는 모르는 한국 국제적으로 냉전사 연구의 선봉이자 중심인 우르도윌슨센터에서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의 6.25 전쟁 연구 책임자로 일했다. 특히 그녀는 6.25 전쟁에 관련된 구소련 문서 번역을 주도했다.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브루스 커밍스와의 설전이다.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 회보(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에서 커밍스의 수정주의에 비판을 가했고, 커밍스는 공개된 소련 문서의 신빙성에 태클을 걸면서 수정주의를 방어했다.

  • 김학준: 대표 저서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1980년말 6.25 전쟁에 대한 미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국내에 소개하였다. 김학준은 추후에 6.25 전쟁을 연구하지 않았지만,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한 미국의 연구 결과를 한국 학계에 소개한 것만으로 엄청난 것이었다.[67] 1980년 계간 현대사가 폐간된 일로 한국 학계에서는 6.25 전쟁을 금기시해 왔는데, 그 터부를 깨부쉈기 때문이다. 물론 김학준의 저서와 논문은 기존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고, 정교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학계의 터부를 깨부순 것만으로 언급될 만하다. 참고로 해당 도서는 1980년대 말 논문집을 집대성한 것이다.

  • 박명림: 대표 저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정치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주장된 남침 유도설을 논파하였다. 1999년 한국전쟁의 기원을 출간하여 당시 국내 기준에서는 최고의 실증 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봐야 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놓은 한국전 요약의 비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이 요약은 당시 스탈린과 소련의 개입을 축소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2010년대 중반에도 6.25 전쟁기를 전후한 시기의 외교 문서 관련해 가끔 새로 발굴한 자료 소식이 들려온다.

  • 김영호: 대표 연구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스탈린의 세계 전략이 6.25 전쟁에 미친 파급력을 분석하였다.

  • 김명섭: 대표 연구 저서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 정전 협정과 한미 동맹으로 구성된 6.25 전쟁과 정전 체제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하였다.

  • 와다 하루키: 좌파 성향의 일본인 학자이다. 소련사와 북한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 북한사와 김일성 항일 투쟁사를 연구한 학자이다 보니 뉴라이트를 비롯한 세력들에게 빨갱이로 까이기도 한다. 6.25 전쟁 관련한 책도 썼다.

  • 김동춘: 대표 연구 저서 '전쟁과 사회'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라는 책을 집필했다. 미군 참전자들의 회고록과 기록을 모아서 만든 책이므로 추천한다.

  • 테사 모리스-스즈키: 일본계 호주인으로 호주국립대학 교수. 한국전쟁 중 비밀리에 참전한 일본인들에 관한 기밀자료를 미 국립공문서관(NARA)에서 열람하는 데 성공, 이를 바탕으로 논문 을 작성하였다.

  • 일본방송협회(NHK) 보도국: 테사 모리스-스즈키의 해당 논문을 통해 동 교수와 접촉하여 관련 다큐를 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朝鮮戦争を戦った日本人)>(NHK出版, 2020)를 간행했다.(<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 후지와라 가즈키, 박용준 옮김, 소명출판 , 2023.으로 국내 정식 발간.)

  •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교수가 쓴 책이며, 책 서문에 몇 년 동안 집필한 혼신을 기한 책이라고 한다. 6.25 한국 전쟁을 다루지는 않았고, 한국 8.15 광복 후,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북한과 남한의 상황을 보여준다.


6.2. 군사적 자료[편집]


지난 60년간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존재한다.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 용사들의 수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보니, 한글로 된 책자도 그 양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러나 수준이 제각각 천차만별이라 기본 텍스트는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공식 간행물부터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초등학생용부터 중고등학생용, 일반인용, 전문가용 각종 버전의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 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 있다.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 원대 돈으로 살 수야 있겠지만, 상업용 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 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군에서 발간한 전문 학술 자료인 만큼 흥미 위주의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 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 내용과 특정 전장의 지리 환경, 투입 부대, 전투 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 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 기록 명시가 있다.

그 다음은 미 육군 당국의 공간사(Official History)를 읽어 보는 게 좋다. 영문판은 미 육군 전사감실 홈피에서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한글판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서 무료로 원문 보기를 할 수 있다.
<정책과 지도> 제임스 F. 슈나벨, 온창일 옮김, 육군본부, 1974. (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OCMH, 1972.)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로이 E. 애플먼, 육군본부, 198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CMH, 1961.)
<밀물과 썰물> 빌리 C. 모스맨, 대륙연구소출판부, 1995.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OCMH, 1990.)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월터 G, 허메스, 육군본부, 1968.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OCMH, 1966.)

*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의 경우에는 한글판을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원문보기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미 육군 당국의 공간사 한글판들의 경우, 원본에 비해 생략, 오역된 내용들이 존재하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68]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 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기밀문서의 보호기간이 만료되어 공개된 사례로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 후지와라 가즈키, 박용준 옮김, 소명출판 , 2023. (朝鮮戦争を戦った日本人, NHK出版, 2020))가 있다. NHK의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출판된 도서로, 한국전쟁 시기 비밀리에 참전한 일본인 70명 및 그 유가족에 관한 기록이다. 이들은 미군과 동행하면서 실탄을 지급받아 직접 북한군 및 중국군과 교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군 당국은 오히려 일본인 요원들을 엄중히 심문했으며, 이들의 존재 및 활동을 극비에 부치는 등 사실을 은폐했다. 그 과정에서 1,03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일급비밀(TOP SECRET)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기밀에서 해제된 후 일본계 호주인 교수가 최근에 그 존재를 파악하였다. 해당 교수와 접촉한 NHK 보도국의 후지와라 가즈키(藤原和樹)는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생존한 일본인 요원 또는 유가족들을 취재한 내용이다.개요


6.3. 다큐멘터리[편집]


  • KBS 제작 10부작 <한국전쟁>: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한국방송대상 대상까지 받았던 작품이며, 1994년에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선정한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에 선정됐다.#

전 세계 아카이브를 동원해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 정전 이후 1990년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프로그램이다.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후 2010년에는 1990년 다큐를 기초로 하여 새롭게 밝혀진 사실과 자료들을 증보하여 새롭게 제작됐다.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 자료와 중국 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또한 그간 추가로 축적된 자료에다가 각국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더했다. 이 다큐는 현재까지도 KBS가 제작한 대표적인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69]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DVD로도 출시됐으며, 현재는 유튜브에 전 편이 올라왔다. KBS 홈페이지에서도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 BBC 제작 4부작 <한국전쟁>: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 오르칸키노 제작 2부작 <한국전쟁의 실상>: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는 6.25 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6.25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 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1부 영상, 2부 영상

  • MBC 제작 <76인의 포로들>: MBC에서 제작된 2부작 다큐멘터리로 1993년 방영되었으며, 그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당시 남북한 대신 중립국행을 택한 76인의 포로들의 이후 행적과 현재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현지 취재를 통해 제작되었다.

  • <끝나지 않은 전쟁>: KBS가 미국의 공영방송사 WETA, 영국의 공영방송사 BBC,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전문 배급사인 ZED와 공동제작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2019년 방영되었으며, 총 2부작이다.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 <숨겨진 "전쟁협력" - 한국전쟁과 일본인> (2019)'''[70]: NHK에서 방송된 보기 드문 한국 전쟁 관련 다큐, 일본의 민간인 남성 60명[71][72]을 미군이 대동하고 그 중 18명이 한반도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 미 국립 공문서의 미군 작성 일급 비밀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에 관한 내용은 2020년에 국내 언론에서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사를 베이스로 국내언론들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 영상에서는 한국전쟁 개전초기 미국은 주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국에 급파하지만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자 일본인들도 살아남기 위해 소총을 들게된 사연이 나온다.[75]

위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출간된 단행본은 <朝鮮戦争を戦った日本人>(NHK出版, 2020)이 있으며, 최근에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후지와라 가즈키, 박용준 번역, 소명출판, 2023)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7. 창작물[편집]





8. 관련 사건[편집]




9. 어록[편집]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이승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더글러스 맥아더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 김달육 육군 소령(퇴역),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8사단 16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본부중대 정보장교로 6.25 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에서 전사.)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백선엽[76]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 월튼 워커


"Stand or die."

고수 혹은 죽음뿐.

- 월튼 워커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77]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 하일레 셀라시에[78]


"한국은 걱정마세요. 한국은 걱정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모인 군대가 가고 있습니다."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የጀግኖች ሰራዊት እዚህ አለ።"

- 에티오피아 제국 황실근위대 메할 세파리[79]

, 배멀미로 인한 구토와 곧 닥칠 피바다의 두려움을 이기는 자기암시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프랑스 육군 중장[80]

[81]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 신성모


"조국통일이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소련에 가서 스탈린 동지를 만나 조선인민군의 공격허가를 받아오라."

- 김일성, 스탈린의 남침 허가를 설득하면서 #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

- 박헌영


"특히 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 역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역량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이승만 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 도당은 이승만 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습니다."

- 김일성의 북한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개전 당일의 연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 신동우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 박헌영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 저우언라이[82]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해 오던 1950년 10월 11일 밤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 시간 뒤 김일성은 평양에서 도망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김일성[83]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 이오시프 스탈린


"조선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대한민국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마오쩌둥


"대한민국은 미국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 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 해리 S. 트루먼


"딘,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하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 해리 S. 트루먼


"이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해리 S. 트루먼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오."

- 해리 S. 트루먼[84]


"인천 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도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확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Inchon is a 5000 to 1 gamble, but I am used to taking such odds... We shall land at Inchon and I shall crush them."

- 더글러스 맥아더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손원일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 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 손원일


"알라후 아크바르!!!"

"Allahû ekber!!!"

- 금양장리 전투에서 600명의 튀르키예군이 몇 배는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착검돌격을 하며


"친애하는 동포 형제자매들,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과 남녀 빨치산들, 용감한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 친애하는 동지들, 지난 7월 27일 10시에 판문점에서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들을 일방으로 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수로 한 무력침공군 대표들을 타방으로 하여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정전의 달성은 외래 제국주의 련합 세력을 타승하고 미 제국주의 리승만 매국도당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여 우리 조국 인민이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이며 우리나라와 우리 인민이 쟁취한 위대한 력사적 승리입니다."

- 김일성[85]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 후세 다쓰지[86]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87]

(1996년 6월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김영삼 대통령 발언)[88][89][90][91][92][93]



10. 외부 링크[편집]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Most countries to support an ally in war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국으로 참전한 전쟁 )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scale?)

등재 시일
(When?)

KOREA (REPUBLIC OF) (SEOUL)#
KOREAN WAR
67개국
2010년 9월 2일
Longest ceasefire without a peace treaty
(종전 없이 지속된 가장 긴 정전)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scale?)

등재 시일
(When?)

KOREA (NORTH)#
SOUTH KOREA, NORTH KOREA
25813일(현재 진행형)
2011년





































































[1] 1953년 7월 27일 22시부터 정전 상태이다. 정전 협정 이후에도 몇 차례 군사 충돌이 있긴 했지만 현재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대법원도 딱히 통일된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이런 관계로 만일 남북한 간에 직접적인 교전이 다시 벌어질 경우 이를 6.25 전쟁의 연장선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전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2] 제주도, 울릉도, 독도에서는 섬은 물론이고 인근 해역에서도 교전이 없었다. 다만 대한해협 해전 등 반도 연안과 서해 5도, 거제도 등 도서 지역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3] 당시에도 국호는 튀르키예이지만 국호 영문 표기가 터키(Turkey)였다. 그래서 '터키', 또는 '토이기'로 많이 불리었다.[4]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 자원자에 한하여 참전했다.[5]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과거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를 물리친 계기로, 마침내 황실의 친위대 소속 군인들도 포함된 칵뉴 대대가 창설되어 파병되었다.[6] 중국인민지원군의 형식으로 참전하였다. 당대에는 중화민국(대만)이 국제사회에서 정통 중국으로 인정받으며 그에 따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7] 군사 고문단 및 무기 지원, 극비리에 소련 공군 참전[8] 서독 정부는 1953년 5월 80여 명 규모의 의료 지원단을 대한민국에 파견해 정전 이후인 1954년 5월부터 약 5년간 의료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료 지원 활동 시점이 정전 이후였다는 이유로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2018년에야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독일을 6번째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전쟁기념관이나 UN 평화 기념관 등지에서 내용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9] 이탈리아는 6·25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 병력도 파병했지만 전원 군의관간호장교뿐이며 전투병력은 없다.[A] 제3세계 중립국으로서 전투병력이 아닌 의무부대를 파견하였고 포로교환 감시단 역할도 하였다.[국장병기] 동독은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서독과 같은 국기를 사용했으므로, 서독과 동독의 혼동을 피하고자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사용된 동독의 옛 국장을 국기와 함께 병기한다.[10] 참전국 및 의료지원국 제외[11] 북베트남 내에 의용군을 차출하여 중공군 소속으로 북한에 파병되었다.[12] 참전국의 파병 책임자 및 통수권자는 볼드체로 표기. 북한 측 지휘관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사연표에 근거함.[13] 대한민국은 중동부 전선에서 대폭 북상한 반면 북한은 서부 전선에서 남하하며 기존의 삼팔선과 다른 분계선이 형성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실효 지배 면적이 증가했다. 대한민국은 태봉국 철원성, 금성천, 금강산, 오성산 이남 지역을 수복하여 중동부 전선이 약 38km 북상했다. 북한은 개성시, 개풍군, 연백군, 강령&옹진반도를 점령하였다(이후 해당 지역들을 신해방지구로 북한에 편입). 결과적으로 남한이 수복한 영토가 북한에 뺏긴 영토보다 더 많아 전쟁 전의 38선 대치 시기보다 남한 면적이 4,000km² 더 증가했다. 안보적으로도 38선보다 방어가 더 유리한 편이라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관광이나 도시적 가치는 38선이 더 낫다는 의견이 많다. 옹진은 금광과 온천이 있었는데, 속초보다도 큰 도시였다. 연백은 옹진보다 인구가 많으며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었다. 무려 개성은 고려의 수도라 가옥이나 관광거리가 많다. 북한도 이를 알기에 관광지로 만들어놨다.[14] 간혹 북침으로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으나, '남쪽으로 쳐들어온 것'임으로 남침이 맞다.[15]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년[16] 일반적으로 전쟁의 명칭은 전쟁이 벌어진 돈바스 전쟁처럼 지역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보불전쟁처럼 세력이나 국가의 명칭이 붙는 경우가 많다. 그도 아니라 기간이 긴 경우를 의미하고자 할 때는 백년전쟁이나 30년 전쟁처럼 전쟁이 일어난 기간을 넣기도 한다.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17] 후술하겠지만 북한이 정신승리를 시도한 거다. 승리는 커녕 중국의 병력 지원만 없었다면 국군은 북한을 역으로 통일시킬 수 있었다.[18] 직역하면 "잊혀진 전쟁"으로, 2차대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안된 상황에서 발발한 전쟁이고, 2차대전과 베트남전과 달리 승패가 결정나지 않은 전쟁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19] 물론 항왜원조의 조선은 옛 조선왕조라 오늘날의 남북한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반면, 항미원조의 조선은 북한 한정이고 남한은 적의 입장에 있다.[20] 일본TV에서 종종 한국계 일본인들이 아리랑 등 한국문화 공연을 하는 영상이 나올때, 반드시 "조선민요 아리랑"이라고 안내 자막을 넣는다. 현대 한류문화가 아닌 전통 한반도문화를 말할때 일본 방송과 신문은, 항상 한국문화란 표현 대신 "조선문화"라는 표현을 쓴다. (고려청자 같은 고려시대 문화라도 일단 표현은 조선문화라고 한다.)[21] 영국은 영일동맹이나 LON 시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임을 공식 인정한 경력이 있어서, 일본과 원수가 된 뒤에도 조선의 독립이 껄끄러웠다.[22] 결정재상당시기사조선자유여독립. 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 독립하도록 결정한다.[23] 영어 버전은 Korea이다.[2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간행물 목록에서 확인 가능.[2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 검색에서 확인 가능.[26] 굳이 번역하자면 한국에서의 충돌, 한국 사태[27] Police Action(치안활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8] 이 탓에 6.25 전쟁과 관련된 영문 유튜브 영상들에선 '한국 전쟁이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인 줄은 몰랐다'며 충격을 받는 미국인들의 댓글 반응을 종종 접할 수 있다.[29] 한국어 명칭으로 정작 미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미국은 심플하게 남북전쟁을 그냥 미국 내전, American Civil War라고 자칭한다.[30] 대표적으로 베트남. 다만 이쪽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다.[31] 소련 문서는 매우 파편적이고 제한된 기록이기에 6·25 전쟁의 기원을 해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32]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1950-2015." 『한국사학사학회』, 32권, 2015, pp. 325-364[33] 다만 북한은 전통적인 '양반'이 드문 지역이었다. 대신 현대 한국과 비슷하게 경제적인 격차만 있었는데 이들이 숙청의 표적에 포함된다. 이런 숙청을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세운 기업이나 학교 등이 현재도 남아 있다. 함석헌이나 황순원 같이 북한의 이러한 숙청을 목격한 경우 북한에서는 머슴 같은 사람들의 권력욕을 부추겨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처리하였음을 주장하였고, 심지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라고 하여 탱크와 항공기가 시위 진압에 동원되기도 했다. 함석헌은 "김일성의 무리가 계급 갈등이 적은 이북에 '어거지 혁명'을 일으켰다"며 분개했다. 《카인의 후예》라는 작품에서도 개판이 된 북한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람들이 제주 4.3 사건에 가담하는 등 북한의 정국은 대단히 혼란스러웠으며, 이는 북한에서도 정당한(?) 계급투쟁으로써 인정하고 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고위층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34] 서로 말이 다르긴 하다.[35] 문제는 이 형식적인 재판이라는 것도 말이 재판이지, 사실상 사람 하나 죽이려고 몰아가는 마녀사냥의 느낌이었다.[36] 이미일,〈6·25전쟁 중 한국 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37] 1949년 8월 5일 〈연천주재지사업보고서〉"…반동분자들을 분열.와해시키고 납치함으로써 국토완정의 결정적 역할을 높일 임무…"[38] 1950년 8월 17일〈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 명을 후송하도록 한다."[3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p.256~262를 참조[40] 인민재판 문서에 나오듯, 특히 초창기 북한군의 점령지 관리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41]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아군을 처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6.25 회고록을 보면 중국군을 꽤 고평가한 장군들이 있다. 그런데 학살이나 약탈을 명령하지 않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 처벌하는 게 일반적 군대라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다. [42] 어떤 중년의 미군은 젊은 중공군 병사가 몰래 풀어줘서 본대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중공군 병사가 풀어준 이유가 압권이다. (그 병사가 한 말) “난 어릴 적부터 항일 동지들이었던 미국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어서 여기서 떠나라.”[43]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스탈린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가 그 "미덕"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집권 체계와 전시 동원 체제가 완비된 다음이라 점령지 주민을 짓밟아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 없었기 때문이다.[44] 물론 중공군은 비뢰포 같은 빈자의 무기를 사용해서 직접 비교는 곤란하다.[45] 물론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아무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46] 1946년 2월 12일 미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고 민간 버스 편으로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 휴게소 정차를 요구한 아이작 우더드 병장과 이를 거부한 버스기사 사이에 시비가 붙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아이작 우더드 병장을 집단 구타 후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고 부상당한 눈을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여 실명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서 이 사건을 공론화하여 미합중국 정부의 흑백 분리 정책 철회를 이끌어냈다.[47] 당시에는 주요 전투 병력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흑인황인종, 히스패닉등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입대 자체가 힘들었다. 입대했더라도 대부분 비전투직에다 인종별로 나누었다. 지금이야 다민족국가의 대표 주자지만 이 시절만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였다.[48]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대장 성씨가 화이트였다고 한다. 전쟁 전 한국 근무 경험이 있어서 백선엽하고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49] 지금처럼 피부색 따윈 상관없이 여러 인종의 병사들이 같은 참호와 막사에서 먹고 자며 부대끼는 풍경은 6·25 전쟁 당시에는 아주 생소한 모습이었으나 베트남전에 이르러서는 매우 당연시되었다. 물론 아직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라 장교진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패싸움을 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다.[50] 그 유명한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 그 대회이다.[51] 리우데자네이루 현지시각 기준 1950년 6월 24일 15시에 개막전이 열렸는데 리우데자네이루는 서울과의 시차가 12시간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었으므로 동시발생이 맞다.[52] 또한 본의 전 남자친구였던 타이거 우즈의 부친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이다.[53] 그 때문에 작가의 어머니는 그 유엔군에게 고마워서 아프리카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말했고, 겨울만 되면 길가에 보이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자를 보면 그 인민군이 생각나서 항상 고구마를 사 온다고 한다.[54] 콜 오브 듀티의 경우 몇몇 등장인물들의 배경으로 간간히 언급되었고 미래전을 다룬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선 2차 한국전쟁 미션이 있기도 하다.[5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밀려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난해야 한다"는 제안을 들었으나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로 대표되는 위기가 닥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유엔군사령부가 북한군과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도달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해서 차후 공세 전환의 거점으로 삼자는 구체적인 안건이 나왔지만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백지화되었다.[56]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나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들도 21세기 기준으로 모두 70세 이상의 노인이 됐다. 젊고 건강한 청년들도 6월 하순의 더위와 땡볕 아래에서 야외 행사를 치를 경우 온열질환 관련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가 크다. 청년들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온열질환 관련 안전사고의 위험성이 몇 배나 더 높다.[57]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58] 비공식 참전국 포함[59] 일본계 미국인이었기에 당시 병역의무가 있어 징집되었다.[60] 훗날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쟈니스 소속 아이돌의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61] 근거: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52&v=LPLzmEog-P0&embeds_euri=https%3A%2F%2Fjsdmessage.tistory.com%2F2463&source_ve_path=MjM4NTE&feature=emb_title[62] 여담으로 이 우물에는 물이 3번째 넘칠 때 말세가 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2번 넘쳤다고 한다.[63] 야사에서는 구월산에 살던 도사와 같이 일하던 무속인, 제자 등 같이 남쪽으로 피신했다고 한다.[64] 근거: https://home.catholic.or.kr/pdsm/bbs_view.asp?num=39&id=138587&SORT=R&menu=4831[65] 원서는 레이건 집권 초기인 81년에 나왔으나 한국어판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나왔다.[66] 그렇다고 해서 웨더스비의 시각이 전통주의 시각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6.25 전쟁/전쟁 발발참고.[67] 김학준은 주로 러시아학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68]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과 엘리트들의 실수를 조명한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를 집필한 인물이기도 하다.[69] 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70] 이 영상의 심문 기록은 1급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미군은 일본인 당사자들에게 외부 발설을 금지하고이 사실을 봉인해 왔다.[71] 호주국립대학교의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와 NHK에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70명으로 나온다.[72] 군무원 신분으로 통역/취사/수리/의무/운전 등을 담당했다.[73] 미 제63 야포병연대 소속으로 취사지원을 하던 일본인이 대전전투에 참전[74] 미 육군 제 8기병 연대 소속으로 미군에 취사지원을 하러 같이 왔던 군무원 소속 일본인이 다부동 전투에 참전[75] 이들중에 전사자도 나오게 되는데 하필이면 대전 전투[73], 다부동 전투[74] 등의 네임드급의 한국전쟁 주요 전투였다.[76] 다부동 전투 당시 방어 담당 구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후퇴한 11연대 1대대 장병들에게 한 발언. 이 발언 직후 백선엽은 주머니 속 권총을 뽑아 사단장 일선 돌격을 감행한다. 참고로 김석원은 맨날 이런 짓 하다가 미군에게 일본군 출신답다고 찍혔다. 결국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인식이 다른 것이다.[77] 이는 정말로 가서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원정군의 결의와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발언이다.[78]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편입되고 국제적인 평판을 올리려는 계산도 있지만 1,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침공하자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끝내 무시당하고 이를 아득바득 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집단 안보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79] 보병, 기병, 포병, 저격병 중에서 최상위의 성적을 낸 초일류를 혹독하게 훈련시켜 구성된 부대로 창과 방패를 든 기병대가 기관총을 들고 온 이탈리아군을 여러번 깨부순 전적이 있으며 이탈리아군 내부에선 이 자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성기를 자르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6.25 전쟁에서는 스위스군의 훈련을 받은 황실 근위대말곤 별 다른 전력이 없었던 에티오피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사실상 정예병 올인에 가까운 6,037명이 투입되어 253전 253승의 괴물같은 전적을 쌓았으며 중공군과 북한군 내부에서는 난생 처음보는 검은 귀신들사람을 잡아먹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돌았다.[80]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독립문제로 병력 대부분이 동남아에 주둔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본국에서 대대급인 외인부대를 파견하는데, 당시 대대장에 위임하려면 중령이어야 했음으로 중장이던 그를 중령으로 강등시킨 후 위임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81] 게다가 본국 프랑스에선 이미 2차대전 전쟁영웅인 그가 제발로 가려는걸 만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국방차관인 막스 르젠이 "미군은 대대장이 중령인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하는건 이치에 안맞는다." 라는 식으로 만류했다. 하지만 위의 말을 남기며 스스로 강등을 자처하여 파병되었고 몇개월 후에 본 계급인 중장계급을 돌려받는다.[82]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제3보병사단이 강원도 양양에서 삼팔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을 시작한 직후 한 발표.[83]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이었다.[84] 1950년 6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 행위를 유엔의 경찰 행위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 기자에게 트루먼이 한 대답.[85]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이른바 '전승열병식'에서 한 연설 내용 #[86] 6.25 전쟁과 관련이 깊지 않지만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아닌 일개 변호사가 무서울 만큼 한반도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발언을 한 후세 다쓰지는 6.25 전쟁 발발과 정전까지 모두 지켜보고 사망하였다. 이후 발칸반도에서도 구 유고 내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연방의 대립, 키프로스 분쟁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을 구 1세계 및 유럽권 전체가 떠안게 됨으로써 이 발언이 역으로 실행되기도 하였다. 뭐 이 발칸반도는 1차 대전의 원인으로써 지목된 것이고 구 유고 내전은 그렇게 전 세계에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87] 여야, 김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88] 김영삼대통령의 6.25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 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89] 김영삼 대통령 만주 폭격 발언 일파만파[90] 여야 만주 폭격 공방[91] 김영삼대통령의 6.25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 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92] 김영삼 대통령 만주 폭격 발언 일파만파[93] 여야 만주 폭격 공방[94] 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오로지 50년대에 6.25 전쟁의 포상으로만 수여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