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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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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요약한 미국의 만평. 주요 당사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쟁에 엮여들어가는 모습을 풍자했다.
세르비아: (오스트리아에게) 날 건들었다가는 내가...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내가...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만약 그 꼬마 건들었다가는 내가...
독일: (러시아에게) 내 친구 건들기만 해봐. 내가...
프랑스: (독일에게) 걔를 쳤다가는 내가...
영국: 어이, 거기 만약 너희들이...

July Crisis

1. 개요
2. 과정
2.2. 6월 29일
2.3. 7월 5일
2.4. 7월 7일
2.5. 7월 23일
2.6. 7월 25일
2.7.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전포고와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
2.8. 독일의 총동원령 선포
2.9. 8월: 연쇄반응
3. 결과



1. 개요[편집]


사라예보 사건이 터진 1914년 6월 28일 촉발되어, 강대국들의 연쇄적인 총동원령 선포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동년 8월 초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안보 위기. 1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칸의 문제가 점차 확대되어,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사건이다.

대놓고 전쟁을 원하다시피 한 2차 세계대전과 달리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원했던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1] 주요 열강들 내부에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후일 전범으로 매도당한 빌헬름 2세조차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막바지에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열강 간 전면전쟁이 아닌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간 전쟁, 못해도 오스트리아-러시아 간 전쟁에서 그치기 위해 일선의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처절한 전쟁회피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은 발발했고,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1918년 종전 직후부터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했다. 전후 협상국은 개전의 책임을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동맹국의 것으로 돌렸으며, 50년대의 피셔 논쟁 또한 그랬다. 그러나 전후의 수정주의적 시각들은 꼭 동맹국만의 책임이 아닌, 당대 유럽 열강 공동의 책임임을 주장했다. 이들은 동맹국들뿐만 아니라 오헝 제국 내 과격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한 세르비아 왕국과 그 세르비아를 전면 비호하고 나선 러시아 제국 등의 책임도 강조한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과 책임 공방은 직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각국의 역학 관계는 현재까지도 국제정치학계와 역사학계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다.

2. 과정[편집]



2.1.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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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6월 29일[편집]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자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가 지원한 과격주의자 단체에게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에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중제국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우선 오헝 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외무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백작은 이를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며 영향력을 펼치려고 하는 세르비아가 제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대장 또한 무력을 써서라도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유화노선을 채택해 온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회첸도르프의 전쟁 불가피론은 의회를 휘어잡았다. 외무장관 베르히톨트,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재무장관 레온 데 빌린스키(Chevalier Leon de Biliński), 전쟁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대장이 대표적인 예방전쟁을 주장한 인물들이었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이 6인의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르히톨트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초기에는 각료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도 세르비아가 발뺌하자 헝가리의 총리 티서 이슈트반 백작을 제외한 의회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자 슈튀르크 총리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얘기를 종합해 “수사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주장했다.[2] 한편 가장 중요한 군 통수권자이자 제국의 수장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대에 가까운 편이었다. 티서와 같은 의견이라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슬라브인들을 전쟁에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슬라브인들에게 많이 양보해야 하니 전쟁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황실의 후계자가 적국이 배후로 보이는 암살단에게 대낮에 저격을 당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베르히톨트는 최후 통첩안을 작성하여 황제에게 전달하였지만 황제는 독일의 지지 없이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베르히톨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만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도와 가세한다면 전쟁이 국지전에서 그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을 베를린에 보냈다.


2.3. 7월 5일[편집]


호요스는 베르히톨트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7월 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빌헬름 황제는 그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독일 제국 총리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참모총장 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총리와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총리는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한 빌헬름 2세는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독일 내부적으로 열강들이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는데, 사라예보 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고 삼국 협상의 일원인 영국프랑스, 러시아마저 페르디난트 대공을 동정하고 세르비아가 명분을 제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오헝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걸어온다 하더라도 정당성이 명확하므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빌헬름 황제의 낙관적인 판단이 바탕이 되었다.[3]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호요스는 이런 독일의 의사를 가지고 다음날인 7월 6일에 곧바로 빈으로 돌아왔다.


2.4. 7월 7일[편집]


7월 7일,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각을 소집했다. 정부 쪽에서는 독일에 갔다 온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외무성 장관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성 장관, 레온 데 빌린스키 재무장관, 카를 폰 슈튀르크 오스트리아 총리와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총리가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 민족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4]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러시아 제국을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군부에서 내각에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고 보고하면서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인민의 방어'와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 활동을 지체 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 조직 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 및 밀란 치가노비치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2.5. 7월 23일[편집]


그런데 정작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 니콜라 파시치(Никола Пашић)는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베오그라드로 복귀하긴 했지만 너무 늦어서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5],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아예 후임자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6]이었기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사 파견 일정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세르비아 공사는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1914년 8월 26일에나 도착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 공사마저도 병환으로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세르비아의 책임을 추궁하며 오스트리아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영국이 세르비아를 압박한 이유는 자국도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자국 군주와 태자가 암살당할 때도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정체는 공화정이었지만 이때는 제정이 폐지된지 44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7]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결국 영프의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2.6. 7월 25일[편집]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독일의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이참에 오스트리아를 조지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8]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9]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10]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


2.7.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전포고와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편집]


결국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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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왕립정부는 주 베오그라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통해 1914년[11]

7월 23일 귀국에 통보한 요구에 대해 귀국이 만족스러운 회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받은 상태에 놓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은 무기와 힘에 의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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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에 통보한 선전포고전보. 세르비아에서 제출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링크


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 온건파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지역의 군관구에 한정하여 동원령을 내리는 것으로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을 내리면 오스트리아가 총동원령을 내릴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 이 과정도 복잡했다. 니콜라이 2세는 날밤을 꼬박 새며 고민했고,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간의 수많은 전보들이 오고 갔다. 두 황제는 필사적으로 독일-러시아 전쟁을 막으려 애썼고, 특히 니콜라이 2세는 어떻게든 빌헬름 2세에게 이번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가 대상이라고 항변했으며 빌헬름 2세는 그에 따른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때문에 니콜라이 2세는 7월 31일 오전에 일시적으로 총동원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러시아 군 수뇌부가 궁전으로 달려와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경우 독일의 기습에 일패도지한다며 총동원령 취소를 철회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몇 시간에 걸친 압박에 황제는 결국 다시 총동원령을 내렸다.


2.8. 독일의 총동원령 선포[편집]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독일 제국은 수많은 격론을 벌인다.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이 바로 전쟁을 시작 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당시 전 유럽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은 지배 엘리트층의 투쟁에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란 시각을 견지하고 있어서 반전성향을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보수파가 러시아의 공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추는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결국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 만들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린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인 군사적 추태과 손실을[12] 보고 러시아는 함부로 전쟁을 하지 못하며 설령 전쟁해도 혁명이 일어나서 망한다는 식으로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3]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14],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입니다." 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그대의 걸출한 삼촌[15]이라면 나한테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16],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7]


2.9. 8월: 연쇄반응[편집]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몸을 집어넣어서라도 막아보려던 온건파들은 많았다. 당장 독일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러 러시아 외상을 방문한 주러 독일공사는 선전포고문을 건네지도 않고 외무장관과 자신의 유대관계, 인간적 친분을 언급하며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끓으면서까지 총동원령을 취소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럼에도 (총동원령을 취소할 권한이 없던) 외무장관이 그 요청을 거절하자 그제서야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난 러시아가 너무 좋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런 관계가 되었느냐, 짐을 싸 귀국해야 하는데 도저히 짐을 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빌헬름 2세와 외교부처 모두 삼국 동맹-삼국 협상 간 대립이나 슐리펜 계획 때문이라도 선전포고는 피할 수 없다고 인식은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협상은 해보자며 독일의 대 러시아 전쟁에 대해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줄 수 있냐는 의사를, 그리고 영국에게도 독일-프랑스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냐는 의사를 타진했다. 프랑스에서도 사라예보 사건에는 세르비아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러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동맹 관계라도 프랑스가 중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정당하고도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부 및 강경파들의 경우 1870년의 원한으로 이 제의를 묵살하자고 했고, 온건파들은 러불동맹을 파기했다가 프랑스가 외교적 신의를 깨트리고 다시 과거처럼 고립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협상 주장을 꺼내지 못했다.[18] 그렇다고 프랑스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기 전,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병력들을 10km 이상 후퇴시켰다. 그러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8월 4일에는 프랑스도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다.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해라!" 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 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독일은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19]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사실 영국 정부도 벨기에 침공 직후 바로 선전포고한 것은 아니고, 약 하루의 최후통첩을 날리며 통첩시간 내에 벨기에에서 철군할 것을 독일에 요구했으나, 독일은 답을 주지 않았다. 이때 영국의 통첩기준시각은 자정이었는데, 독일측 시각으로 자정이 되었음에도 아직 런던 표준시로는 자정이 아니라며 억지로 1시간을 더 기다리기도 하고, 독일이 대영 선전포고를 했다는 오보에 낚여 준비된 선전포고문을 독일 공사관에 보냈다가 오보임이 확인되자 허겁지겁 회수하는 등 전쟁을 피하려고 정말 처절하게 노력했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 제국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과 영국의 지원요구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3. 결과[편집]


이로써 당시 주요 열강 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 삼국 동맹을 깨고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오헝 제국과 함께 열강 중 말석을 차지하며 내부적 문제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받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참전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열강 국가들이 얽힌채 치고 박고 싸우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의 경우 영국이 전함이 필요하다고 오스만 제국이 뱃삭을 이미 모두 내고 주문한 전함을 강제로 압수한 사건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 함선을 강제로 전쟁통으로 밀어넣은 범인이 바로 당시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다. 우리가 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총리 처칠 맞다.(...) 그리고 그 처칠은 오스만 제국을 적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메꾸겠답시고[20] 갈리폴리로 들어가서 냅다 깨지는 대참사를 일으킨다.

사실 인척관계로 얽혀있던 각 참전국의 군주들은 내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21]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22]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국가 간의 소통창구가 딱히 없었던 것도 다소 어처구니 없는 에스컬레이션에 부채질을 했고, 전후에는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연맹, 국제연합 등의 기구가 설립되었다. 국제연합은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국지적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어느정도 막아주었다.


[1] 시발점인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자국의 황위 후계자가 암살당했다는, 정당한 명분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전쟁을 하려 했다. 그나마도 독일의 지원이 있어야 세르비아와 전쟁을 한다고 한 것도 자국의 군사력이 열강 중에서는 약한 편에 속하는 걸 아는데다 러일전쟁에서 그랬듯이 배후에 러시아가 지원을 하면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2] 물론 슈튀르크 또한 외교적 행동으로는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베르히톨트와 의견을 같이하였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남부 슬라브 지방(보스니아)이 제국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 영국과 러시아는 군주제 국가였던 만큼 죽은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더 동정적이었을 것이다.[4] 상술한 헝가리의 개전 반대 문제, 이를 달래기 위한 세르비아 주권 유지 및 영토 획득 포기 문제 등이 있었다.[5] 어이없게도 러시아 공사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 공사와 함께 저녁을 같이 하며 위기수습 방안을 논의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주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공사는 모두 전쟁을 막으려는 쪽이었는데 한쪽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버린 것도 위기 수습이 안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아울러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공사가 러시아 공사를 암살한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러와 오스트리아 공사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느라 전쟁을 막기 위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6] 당시에는 비행기 개발 초기였기에 정상 간 정상회담을 하려면 기차선박을 타고 프랑스에서 러시아까지 가야 했다. 비행선이나 열기구가 있긴 했지만 역시나 비행기보다는 훨씬 느렸다.[7]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면서 프랑스 황실, 귀족들은 모두 폐지됐지만 귀족들의 경우 1970년대까지도 귀족 가문의 후예들이 자신을 공작이니 백작이니 부르는 일이 흔했고 정부 차원에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공식 석상에서 구 귀족가문의 명사들을 XX백작, XX공작으로 불러줬다. 그러다 1975년에 와서야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방불에 맞춰서 이러한 관례를 폐지했다.[8] 영국은 군주제 국가였고 프랑스도 군주제가 폐지되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검은 손을 지원하는 세르비아를 비판했고 공화국 입장에서도 한 나라의 차기 수장을 대놓고 암살한 단체를 지원하는 세르비아 왕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 때처럼 적들을 과소평가하고 러시아 제국 내부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급기야는 전쟁에 참가하여 세르비아를 도왔지만 1차 세계대전 참전은 러시아 제국을 망쳤다는 그 라스푸틴도 반대할 정도로 최악의 실책이었고 니콜라이 2세는 왕정과 제국을 파멸시키고 자신과 가족들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라스푸틴도 반대하는 것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만큼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유럽 분위기는 물론 전쟁에서 중요한 명분 자체에 매우 무관심했다는 증거다.[9] 이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가 모호한 말돌리기로 답변을 회피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요구한, 공교육의 문제나 세르비아 고위직들의 공개적인 모욕행위, 그 외 자국 내에서 있었던 일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세르비아 정부가 사건에 가담한 증거를 내놓으라는 답변서를 보내놓고는 자기들이 국제법에 따라 오헝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고 호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세르비아의 외교술로 오헝 제국을 "저들은 우리가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는데도 침략했다." 며 비난할 명분을 마련했다는 것.관련 글[10] 이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11] 사진에도 나오지만, '914년'으로 잘못 적혀있다.[12] 예를 들어 러시아 해군은 러일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2차 대전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폴 케네디는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때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했다고 적었다.[13] 러시아는 러일전쟁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털렸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오판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러시아를 털어먹는 사이 전쟁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오판이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사실 전장의 승리에 집착해서 전쟁의 패배를 불러오는 건 2차 대전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14] 주영 독일대사 리히노브스키는 본국에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 역시 중립을 지킬 것이며 프랑스의 중립도 보장하겠다." 라고 영국이 제안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사실 이것은 잘못된 전보였다.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외교적인 기법으로 '러시아'를 생략한 것으로 실제론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벨기에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영국의 직접적인 참전은 이뤄지지 않았을 공산이 높았지만 프랑스의 중립은 영국이 보장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나라도 아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알자스-로렌 문제로 안 그래도 프랑스 국민 전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프랑스 국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파리 시청에 알자스-로렌의 깃발을 올리는 등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영국이 중립을 지키더라도, 분명히 프랑스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독일의 뒤통수를 쳤을 것이다. 이후 리히노브스키는 영국의 긍정적인 제안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다시 전보를 보냈다.[15]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던 대 몰트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에 이미 사망했다.[16] 이후 몰트케는 회고록에서 이 발언이 자신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주었다면서 자신도 결코 자신이 삼촌처럼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17] 사실 이런 병력 이동은 이미 독일이 부속계획으로 준비해놓았기에 가능했다. 당시엔 철도 국장이었던 폰 스타브 장군은 몰트케의 회고록을 보고 격분하여 서부전선의 7개 군 중 3개 군은 방어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4개 군은 8월 15일까지 동부전선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책에서 장황한 설명으로 입증했다.[18] 프랑스 입장에선 지금은 동맹이지만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는 영국과 언제 또 마찰이 생길지 모르는 마당에 당시 자국과 이해관계가 잘 부딪치지 않으면서 든든하고 신뢰 가능한 우군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를 포기하지 못했다.[19] 18명의 내각구성원 중 12명이 프랑스에게 영국의 지원을 확약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영국의 양대 정당이던 자유당은 벨기에를 포함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안을 지지했다. 영국 은행 총재는 은행가와 사업가를 대표하여 전쟁 개입을 반대한다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프랑스는 영국과의 협약에 의해 모든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해안은 독일 해군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영 프랑스대사 캉봉은 타임즈 편집자에게 "영어사전에서 '명예'라는 단어가 지워지는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20] 처칠이 갈리폴리 전투를 일으키기 전만 해도 오스만 제국은 전쟁은 무리였기에 영국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처칠이 갈리폴리에 쳐들어가면서 오스만 제국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다.[21] 유럽 왕족 대부분이 친인척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유럽 전쟁을 볼 때 이 점을 유념해야한다. 친인척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대륙처럼 전쟁으로 인한 적국 멸망으로 통합보다는 어느 정도의 결과가 보이면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시대 때부터 이어진 전통인데 군주들이 전쟁을 게임처럼 하기 때문이다.[22]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일부 군주들의 책임도 크다. 예를 들어 범게르만주의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의 가장 큰 선봉장인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모두 군주정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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