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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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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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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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6
Convair B-36 Peacemaker

파일:RB-36D.jpg

비행 중인 RB-36D
파일:attachment/B-36_and_B-29_arrivalcarswell_1948.jpg
B-29-55-BA와 XB-36

1. 개요
2. 제원
3. 개발
3.1. 개발배경
3.2. 업체선정
3.3. 기본설계 확립
3.4. 2선으로 밀리다
3.5. 개발의 재활성
4. 취역
4.1. XB-36
4.2. B-36A
4.3. B-36B
4.4. B-36D
5. 실험
5.1. RB-36
5.1.1. 실전 투입
5.2. GRB-36D
5.3. 극한지 적응 프로그램
5.4. NB-36H
5.5. YB-60
6. 말로
7. 문제점
8. 평가
9.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6 Turning, 4 Burning.

6개는 돌고, 4개는 탄다.


영화 Strategic Air Command[1]에 등장한 B-36. 제트엔진 4기를 추가한 B-36D의 슬로건인 6 turning, 4 burning이 의미하는 엔진 10기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Convair B-36 Peacemaker(피스메이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부터 개발해서 냉전초기에 완성된 미공군의 중(重)폭격기이다. 프로펠러와 피스톤 엔진을 사용하는 폭격기로서는 세계 최대[2] 최장거리 및 최고도 비행이 가능한 폭격기였다. 그리고 개량형은 기존 엔진을 장착한 폭격기에 제트 엔진을 추가해서 하이브리드 형태로 운용된 실적이 있는 특이점을 가진다.

파생형으로 수송기 및 민간 여객기 버전의 프로토타입인 XC-99도 있다. B-36의 동체를 2층으로 확장하고 부품 일부를 공유하는 형태의 초대형 수송기였지만 양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2. 제원[편집]


Convair B-36 Peacemaker
형식
B-36A/B/C/D/F/H/J
RB-36B/D/E/F/H
분류
전략 폭격기(B-36A/B/C/D/F/H/J)
장거리 정찰기(RB-36B/D/E/F/H)
전장
49.42m
전폭
70.12m
전고
14.25m
승무원
15명(B-36)
22명(RB-36)
익면적
443.5m²
자체중량
75,530kg
전비중량
119,318kg
최대이륙량중량
186,000kg
엔진
제네럴 일랙트릭 J47-GE-19 터보제트 엔진 4기(2개조 2편성, 기당 추력 5,200lbf)[3]
프랫 & 휘트니 R-4360-53[4] "와스프 메이저" 28기통 4열 성형 공랭식 엔진 6기(터보슈퍼차져 장비, 기당 3,800 마력)
총합 10기
최고속도
672km/h
순항속도
370km/h
작전반경
6,415km
항속거리
16,000km
최고 고도
13,300m
상승률
10.1m/s
무장
원격조종 후미 기관포탑 1기, 기수 고정포탑 1기, 동체수납 원격조종 2연장 기관포탑 6기. 20mm M24A1 기관포 총 16문
39,000kg (탑재한계량), 32,700kg (폭장량)[5]


3. 개발[편집]


개발에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개발후에도 개량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개발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3.1. 개발배경[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 폭격기가 영국 상공을 폭격하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개시되자, 이런 현상을 지켜보던 미 육군항공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영국이 패배하고 대부분의 서유럽이 독일의 손에 들어간다면 미국과 독일이 전쟁상태에 돌입할 경우, 중간 기착지없이 대서양을 그대로 횡단하여 독일과 전쟁을 수행해야 할 운명이 될 것을 걱정했다.[6]

그런데 실제로 추축국들은 유럽 대부분을 장악해버렸고 영국은 물론, 북해지역도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해상을 봉쇄한 U보트는 영국의 식량과 산업망을 서서히 고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이라 미국과 대립하면서 중국, 영국령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노리면서 전쟁의 위험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국제정세에 충격을 받은 미 육군항공대 수뇌부는 북미대륙에서 유럽까지 논스톱으로 날아가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과 육군항공대 지휘관들과의 회의끝에 대륙간 중폭격기 개발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1941년 4월 11일, 미 육군항공대는 항공기 제작사들에게 비밀유지를 요구하며 미국의 항공기지에서 발진하여 유럽을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 개발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육군항공대가 제안한 요구는 25000피트 상공에서 최고 속도 450마일(724km/h)을, 시간당 순항 속도 275마일(445km/h)에 45,000피트(14000m)의 실용상승한도를 요구했었는데, 25,000피트 상공에서 12,000마일의 항속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이었다. 당시 B-17E 폭격기가 25,000피트에서 317마일의 최고 속도를 냈으며 실용상승고도가 37,000피트이고 최고 항속거리가 2,000마일인 것을 비교하면 육군항공대의 요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요구는 1941년 8월, 5,000피트(1524m)의 활주로에서 이착륙이 가능할 것과 240에서 300마일의 순항속도와 40,000피트(12000m)의 실용상승한도와 10,000마일(16000km)의 최고 항속거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10,000파운드(4500kg)의 폭장능력과 10,000(16000km)마일의 최고항속거리는 매우 중요하게 요구되었다. 덕분에 이 계획에 입각해서 만들어지는 폭격기를 텐(ten)-텐 폭격기[7]라고 별명이 붙었다.

3.2. 업체선정[편집]


보잉, 더글러스, 노스롭 등 여러 회사가 제안에 응했으나 보잉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더글러스와 XB-35를 개발하고 있던 노스롭은 1941년 당시의 항공기술로서는 불가능한 제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따낸 회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콘솔리데이티드(Consolidated)였다. 1923년 창립된 콘솔리데이티드는 1925년에는 종업원이 900명이었으나 1939년에는 그 수가 9000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다 1940년 항공기 산업의 확대로 인하여 1949년대 중반까지 약 4만명까지 고용하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회사는 2차대전 동안 전국에 12개의 법인을 두었는데, 1943년에 다우니, 내슈빌 공장이 벌티 항공사와 합병(34% 지분확보)하고 이후 통폐합을 거친 법인은 다시 컨베어(Convair)로 회사 명칭을 바꾸었다(컨베어는 비공식 명칭으로써, 벌티 항공의 상표였으나 나중에 복잡한 합병을 거치면서 공식적으로 컨베어가 된다). 이 회사는 그 유명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제작한 회사로서, 1940년 9월, 이미 장거리 폭격기인 XB-32(2000파운드 폭장, 4450마일 항속거리)와 대륙간 왕복 폭격기 모델 35의 기본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콘솔리데이티드사는 모델 35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 항공대의 대륙간 왕복 폭격기 제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1941년 10월, 콘솔리데이티드는 2대의 고고도 장거리 폭격기에 대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특이하게도 총 6개의 레시프로 엔진이 동체의 후면에서 작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육군 항공대에서 분리창설된 공군 참모총장 핸리 "햅" 아놀드 장군은 라이트필드 테스트 책임자인 조지 케니 준장[8]에게 검토를 지시했다.

검토를 마친 라이트필드 항공소재 담당국은 호평을 하였고, 기술국은 콘솔리데이티드가 제안한 두 종류의 엔진 탑재안(4개 또는 6개 엔진 탑재)중에서 6개 엔진 탑재안을 최종 선택하였다. 검토결과를 보고받은 캐니 장군은 아놀드 장군에게 콘솔리데이티드의 안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후술하지만 훗날, 케니는 B-36 생산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리하여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11월 15일, 경쟁사인 보잉을 제친 콘솔리데이티드는 2대의 XB-36 발주 계약을 맺었다. 계약의 주 내용은 가격 80만 달러의 1번 시제기가 30개월 후(1944년 5월)에 납품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이 발주에 실패한 보잉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하여 전쟁에 돌입한 미국이 소위 "30억 달러의 도박"이라 불리우는, 설계도상으로만 존재하며 그 어떠한 테스트도 없이 발주에 성공한 폭격기인 B-29로 대박을 터뜨렸다. 반면에 XB-36 발주에 성공한 콘솔리데이티드사는 자사의 장거리 폭격기 XB-32는 1944년까지 B-32로써 15대가 생산되었지만 기술적 결함 때문에 그 능력이 이미 검증된 경쟁기종인 B-29에 눌려 생산이 중단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3.3. 기본설계 확립[편집]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미국은 영국이 독일의 항공기 공습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비록 자국에서 발진할 장거리 폭격기가 필요 없었고, 또한 당장 전쟁에 사용할 수 있는 폭격기 개발에 최우선권을 두었을지라도 XB-36의 개발은 진행되고 있었다.

XB-36 개발의 기초는 4개의 엔진이 탑재되는 모델 35를 사용했지만 혼동을 피하기위하여 모델 36으로 개칭하였다. 제작에 참여한 기술자들은 극심한 기술적 문제들과 싸워야만 했다. 엄청난 덩치의 기체가 필히 극복해야만하는 무게와 공기역학적 문제가 가장 큰 과제였다. 또한 대륙간 폭격기로서 이틀동안 10,000마일을 비행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뛰어난 내구성과 연료를 적게 소비하는 엔진도 필요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탑재장비들은 모두 새롭게 개발, 제작되어야 했다. 예를 들면 당시 1,500psi 유압 시스템이 표준이었지만 2배인 3,000psi가 요구되었다. 동시에 라이트필드의 공군기술 실험실에서는 새로운 400사이클, 208볼트 삼상교류 경량 모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 16마력 신형 발전 모터는 무게가 10kg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인 45kg 직류 모터와 맞먹는 성능을 가지게 되었다.

엔진은 설계도만 제작된 플랫 앤 휘트니사의 3,000마력 28기통 "X"엔진이 탑재될 예정이었지만 라이트필드의 콘솔리데이티드 엔진 담당그룹은 플랫 앤 휘트니사 기술자와 긴밀히 협조하여 각종 테스트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후 이들은 3,500마력 R-4360 와스프 메이저 엔진을 설계했고, 이 엔진은 전후 보잉 KC-97에 사용된다.

XB-36 장거리 폭격기 개발의 총책임자는 맥 레이든(I.M. Mac Laddon)이 맡고 있었다. 레이든은 유능한 항공 기술자로서 PBY 카타리나 등을 제작하는 몇 년동안 대표 기술자로 재직했으며 회사들을 효율적으로 합병정리하여 수석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리 셔튼(항공기술 부서대표), 테드 홀(설계 디자인 그룹대표), 랄프 베이레스(공기역학 그룹대표), 캔 워드(기체 표면 담당)와 로버트 위드머(풍동실험 담당) 등이 각각의 파트를 책임지고 있었다. 엔진 부문 지원은 버드 웨스첼과 밥 굳이어가 맡았는데 1942년 초에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와 PBY 카타리나 비행정 엔진프로그램의 설계기사였던 달튼 서거가 합류하였다. 당시 서거는 엔진 설계와 배열을 책임지고 있었다.

개발팀은 1942년 봄까지 나무로 제작된 1:26 스케일의 모형을 완성하였다. 메사추세츠 공대와 켈리포니아 공대에서 풍동 테스트를 실시한 위드머는 가장 공기역학적인 날개 디자인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첫 번째 풍동실험은 1942년 6월에 실시되었는데 날개(NACA65)에서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실험은 몇 개월 뒤로 미뤄졌다. 몇 달후, 더 큰 규모의 풍동 터널이 랭글리필드에 설치되었고 모패트필드에 실험연구소가 설치되었지만 몇 달동안 우선순위가 높은 다른 항공기에게 밀려있다가 실험이 실시되었다. 1943년 동안의 실험결과 날개는 재설계할 필요없이 뒤로 3도정도 후퇴각을 주는 것으로 했다.

위드머 팀은 방대한 실험들을 실시하면서 온갖 데이터들을 뽑아냈으며, 동시에 기본 설계도가 작성되어 실물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냈다. 이 모형은 콘솔리데이티드 샌디에이고 공장의 긴 건물 안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모형은 실물과 거의 똑같은 동체, 날개의 절반, 쌍수평 미익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랜딩 기어와 기관포탑들은 나중에 많은 개량을 거치게 될 예정이었으며, 큰 덩치를 지탱해야할 랜딩 기어의 취약성은 큰 문제로 떠올랐다. 방어를 위해 폭탄 투하실에 고속으로 회전이 가능한 360도 선회 포탑을 설치했지만 어떠한 무기를 쓸 것인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산화탄소 엔진 소화 시스템은 이산화탄소보다 비등점이 낮고 낮은 온도에서 액체화할 수 있는 메틸 브로마이드(토양 훈증제,농약으로도 사용됨) 소화 시스템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소화 시스템은 초도 B-36 피스메이커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그 다음 폭격기와 또 다른 항공기들에 사용된다.

1942년 중반, 콘솔리데이티드 샌디에이고 공장은 PBY 카타리나와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생산하느라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래서 XB-36도 텍사스 포트워스에 건설된 공장(No4 국가공장)에서 만들기로 결정되었다. 미 육군성은 1941년 1월, 중폭격기 생산을 위하여 포트워스 육군 항공기지에 광대한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내륙 깊숙히 위치했기 때문에 안전하였지만 공장 건물에 창문을 만들지 않은 등 보안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1942년 8월, 모형 XB-36은 무개화차에, 약 200명의 XB-36 프로젝트 기술자들은 싼타페 여객열차를 타고 포트워스로 향했다. 모형과 기술자들은 포트워스 공장 페인트 가게 부근에 배치되었으나 이 지역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추가로 건물 증축 자금이 요청되었다.

3.4. 2선으로 밀리다[편집]


1942년 9월, 아놀드 장군은 XB-35, XB-36에게 가장 높은 우선권을 부여하였으나 1942년말에 들어서자 XB-36개발 프로그램은 1급 비밀 순위에서 점차 강등되고 있었다. 게다가 풍동 실험 우선권에서 밀려나 수개월을 허송했으며 후부 날개의 재설계 때문에 또 수개월을 보내는 등 프로그램은 몹시 지연되고 있었다. 이것은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토치 작전에 성공하였고, 태평양 전쟁에서는 과달카날 전투의 승기로 전쟁의 형세가 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중국의 절박한 상황 때문에 다시 우선권의 최상위에 올려졌다. 만약 중국이 일본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거나 아예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악지대만 간신히 유지한다면 1944년에 B-29 장거리 폭격기의 발진기지로 사용하려던 계획은 무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XB-36 개발 프로그램의 장애는 인적자원의 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경험이 풍부한 항공기술자의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1943년,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평균적으로 15개월의 경력을 보유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1943년 중반은 생산 가속도가 붙은 B-24 폭격기에 기술자들이 달라붙어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B-24 리버레이터는 미국 폭격기 중 가장 많은 생산댓수인 18,181대를 기록하는 폭격기이므로 기술자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여기에 모든 항공기 제작업자들은 기존의 주문량을 납품하는 것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렇게 XB-36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해 개발이 진전되지 못했다.

1943년, 콘솔리데이티드는 통합 합병을 통하여 새로운 회사명칭을 컨베어(Convair)로 정했는데, 이 컨베어라는 회사명은 전쟁동안에는 사용되었으나 1940년대 말까지는 공식적인 사명은 아니었다. 새로운 콘솔리데이티드 벌티(컨베어) 항공사의 새경영자 토마스 거들러는 미 공군이 오직 2대의 시제기의 제작을 새로운 합병법인에게 떠맡긴 것에 대하여 대단히 불만스러워했다. 거들러는 국방성에 대하여 "단 2대의 주문량으로는 하청업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 프로그램에 양산이 보증된다면 업자들이 B-36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전했다.

1943년 7월, 프로그램의 증진에 동기를 부여하기로 결정한 아놀드 장군은 중국의 함락 가능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참모들과 함께 토론회를 가진다음, B-36 장거리 폭격기 100대 발주건을 임시 결정했으나 시시각각 변하는 전쟁의 양상 때문에 완전한 계약은 1년 후에나 이루어졌다. 그래서 1944년 8월, 미 공군은 100대 발주를 최종 결정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대독일전은 낙관적이었으나 대일본전은 1947년까지도 계속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B-36은 긴급생산 우선순위에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당장 미국 상층부는 XB-36의 거대함에는 감탄하고 있었으나 프로그램의 증진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100대가 발주된 B-36의 대당 예상 가격은 125만 달러였으나 여기에 추가예상 장비가격 50만 달러를 포함하여 총 1백 75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1944년 10월,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의 승리로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와 괌이 미군의 손에 들어오고, 여기를 발진기지로 한 B-29가 일본을 공격하게 되자 콘솔리데이티드 벌티 항공사는 B-32 폭격기 생산 프로그램을 줄이고 XB-36 프로그램에 매진하도록 지시받았다.

3.5. 개발의 재활성[편집]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미군은 군용기 획득의 필요성이 줄었으므로 이후 수개월 동안 수많은 계약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B-17, B-24, XB-30 폭격기는 생산과 도입이 중단되었고 오직 B-29만 계속 생산되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일거에 종식시켜버린 원자폭탄의 경우에는 해당 시점에서는 미국의 독점상태지만 그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여기에 더해서 태평양 전쟁 동안 B-29 폭격기의 발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섬을 점령하면서 너무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손실한 공군은 이러한 중간 기지가 필요없는, 향후 대량살상무기의 보복 수단으로서의 장거리 대륙간 폭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동안 컨베어의 경영진들도 바뀌어 XB-36 프로그램은 탄력을 받았다. 22년동안 해군 항공전문가로 복무했던 로날드 메이어 미 해군 퇴역 중령이 설비 책임자로서 5월에 취임하였고, 항공전문가 레이 라이안이 실험 작업실의 책임자로 부임하여 XB-36 프로젝트의 분위기를 매우 능률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플랫 앤 휘트니 R-4360-5P 와스프 메이저 테스트 엔진이 1943년 5월에 포트워스로 전달되었었다. 그러나 이 엔진의 개량은 12월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포트워스의 20피트 풍동 터널에서 테스트를 실시했다. 풍동 테스트는 컨베어의 달튼 서거의 지휘하에 플랫 앤 휘트니 기술자들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테스트 결과 냉각 팬과 공기배출 시스템이 엔진의 성능을 저하시키는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 결과 엔진 냉각 팬의 재설계가 필요하였고, 공기역학을 고려하여 엔진 커버와 인테이크 부분도 수정되었다. 그리하여 플랫 앤 휘트니 R-4360-5P 와스프 메이저 엔진에는 11-11A 냉각팬이 설치되어 다시 테스트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7종류의 다른 팬들에 대한 실험도 진행되어 11-11A 냉각팬은 34개의 블레이드를 가진 것으로 변경되고 공기배출관도 종 모양으로 개수되어 냉각효과를 높였다.

1945년 8월, 캘리포니아 모펫필드 해군항공기지의 아메스 실험실에 설치된 12X24m 크기의 풍동실에서 엔진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이 테스트에 사용된 엔진이 실패하여 9월에 또 다른 엔진이 포트워스로부터 도착했다. 1945년 10월, 다시 시작된 엔진 테스트는 커티스사의 직경 5.79m 전기식 삼엽 프로펠러를 장착한 엔진을 주익 후방으로 향하게 하여 실시되었는데, 프로펠러 제어장치에서 기름이 누출되고 과도한 온도상승을 일으켰으나 커티스 기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45년 9월 2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자폭탄을 두들겨 맞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나자 항공 기술자의 부족은 자연히 해결되었고, XB-36 프로그램이 구상되었던 1941년 이후 처음으로 경험많은 항공 기술자와 생산기술자들이 XB-36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1월, XB-36 프로그램이 급피치를 올리자 스테픈 딜론 소령이 포트워스에 파견되었다. 딜론 소령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B-17 폭격기로 실전에 참가했으며 B-29 폭격기 테스트 비행경력 및 B-17, P-38 라이트닝의 병기 운용에도 관여했던 사람이었다. 폭격기 경험이 풍부한 딜론은 XB-36에 장착될 새로운 무기와 전투효율성 분야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포트워스로 파견되었다.

XB-36 설계 디자인 팀은 무게 문제때문에 고전했으며 그동안 많은 부분이 개수, 변경되었다. 필수 승무원 수는 14명으로 증가했고 1945년, 미 공군은 5톤의 무장 적재중량 증가를 요구했다. 미 공군은 50구경 기관총과 37mm 기관포를 무장하려 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 8개의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리모트 콘트롤 포탑에 20mm 기관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기관포탑은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기수와 꼬리 부분에 설치된 포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인입식으로서 기체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금 설치될 것이 요구되었다.

미익의 경우에도 B-24와 B-32처럼 쌍 수평미익을 적용하려고 했으나 수평미익과 수직미익은 이미 재설계되어 단익으로 변경되었다. 연료탱크도 하중을 줄이기 위하여 자동 방루식 고무연료 탱크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 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다우 캐미컬사의 마그네슘 합금을 사용하여 무게를 줄이려는 노력을 했으나 무게의 증가는 여전했다.

이런 개량으로 인해 1941년, 최초 제안된 최대 중량은 120,800kg 이었으나 1945년 가을까지 126,900kg으로 증가했으며, 속도는 9,145m 상공에서 594km/h에서 520km/h까지 감소되었고 실용 상승 한도는 12,000m에서 11,644m로 감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개선할 점은 많았다. 일례만 들어도 미 공군은 XB-36의 막대한 하중을 지탱하는 1륜 랜딩기어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했다. 컨베어도 1륜, 2륜, 3륜과 4륜 등 1944년에서 1945년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공군으로부터 65인치 4륜 브레이크 휠의 장착을 요구받았던 컨베어는 하청업체인 굳이어사에 랜딩기어용 타이어 개발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굳이어사는 직경 2.79m, 폭 1.17m, 무게 670kg이나 되는 초 대형 타이어를 개발했다. 이어 굳이어사는 마침내 개발해낸 직경 1.42m, 폭 40cm의 신형 고압 타이어에 4륜 신형 브레이크 시스템을 채용한 신형 랜딩기어를 개발했다.

그리고 미 공군은 XB-36 폭격기의 이착륙이 가능하게 3개 비행기지의 활주로를 강화하였는데 이 세 곳은 포트워스, 플로리다 엘진 기지, 캘리포니아의 페어필드-시슨(나중에 트래비스 공군기지로 개칭)비행기지였다.


4. 취역[편집]


개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으므로 실험기인 XB-36을 시험비행하면서 동시에 시험비행결과를 가지고 양산형을 뜯어고치고 이미 생산돼서 납품한 폭격기도 뜯어고치는 고난의 연속이 이어졌다.

4.1. XB-36[편집]


B-36 피스메이커를 처음으로 조종한 사람은 수석 시험 조종사인 베릴 에릭슨 (Beryl A. Erickson) 이었다. XB-36 무기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스태픈 딜론 소령의 친구인 에릭슨은 아메리칸 에어라인즈 DC-3 조종사였으며 콘솔리데이티드사의 B-24, B-32 폭격기 개발에 테스트 조종사로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XB-36이 탄생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더글러스 XB-19개발에 참여한 몇 안되는 조종사 중 한 사람이었다.

1946년 7월 21일, 에릭슨은 B-24, B-32 폭격기 테스트 파일럿인 부조종사 O.S 거스 그린과 함께 비행 시스템 점검과 확인을 위하여 택싱 테스트에 들어갔으며, 이 테스트는 8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조종사는 시속 156km/h미만의 다양한 속도로 택싱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946년 8월 8일 아침, 7,000명 이상의 컨베어 기술자들이 활주로 바깥에 길게 도열했다. 자신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미군 역사상 가장 비싸고 가장 거대한 B-36 피스메이커 폭격기의 처녀비행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다. 에릭슨이 기상 상태를 묻자 기상 담당관이 에릭슨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이상없음을 알렸다. B-25폭격기는 이 역사적인 비행을 카메라에 기록하기 위하여 함께 비행할 계획이었다.

조종사 베릴 에릭슨, 부조종사 거스 그린, 비행 기술자 윌리엄 위즐리와 제임스 맥이체른, 비행 테스트 엔지니어 로버트 히위즈, 비행 테스트 분석관 W.H 보브와 A.W 제드먼, 비행 참관자로서 다니엘 주니어와 J.M 헤플리 등 모두 8명이 XB-36에 탑승했다. XB-36 폭격기에는 8,000갤런의 연료와 600갤런의 오일이 실려 있었으며 기체의 총 종량은 90,724kg이었다.

1946년 8월 8일 오전 10시 10분,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XB-36은 서서히 활주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속으로 질주하던 이 거대한 괴물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성공하였다. 초조하게 지켜보고있던 지상의 수많은 기술자들은 폭격기가 이륙에 성공하자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처녀비행에서 XB-36은 고도 1,067m에서 시속 225km~25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37분간의 처녀비행를 실시하였고 주익의 2번 플랩이 잘 움직이지 않은 결함만 빼고는 대성공이었다.

두 번째 테스트 비행은 8월 14일에 실시되었으며, 이날은 에릭슨의 절친한 친구인 스태픈 딜론 소령도 참가하여 2시간 43분 동안 테스트 비행을 실시했다. 여섯 번째 테스트비행에는 칼 앤드류 투이시 스펫츠 공군사령관이 참관했다.

테스트 비행이 진행되면서 기체의 결함이 속속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풍동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문제는 엔진의 냉각과 프로펠러의 진동이었다. 엔진의 냉각문제는 9,144m 이상의 고도에서 장시간 비행해야하는 XB-36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었으며 프로펠러 허브의 결함과 주익 플랩의 이상도 발견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첫 번째 테스트 비행에서 발견된 2번 플랩의 결함 때문에 알루미늄 합금제로 교체하였는데, 이것은 원래의 마그네슘 합금보다 6배나 무거웠다. 또한 신형 엔진 냉각 팬이 설치되고 제너럴 일렉트릭 BH-2 터보 과급기가 BM-2로 교체되면서 기체의 중량이 증가하여 1946년 8월 14일에는 최대 상승고도는 11,277m로 감소했다.

그리고 테스트 비행 도중 3,050m 상공에서 프로펠러가 부러지면서 주익 플랩을 친 다음 지상으로 곤두박질하여 농장에 떨어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원인규명에 나선 기술자들은 샤프트의 피로가 원인임을 밝혀내고 보완작업을 마쳤다. 버지니아 랭글리 풍동 실험실에서는 날개 밑면의 흐름을 날개 윗면으로 이동시켜 항공기의 실속을 방지해주는 틈(슬롯)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기술자들은 XB-36에 대하여 개수작업을 실시, 틈을 메웠다.

XB-36의 전기 시스템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전기 시스템의 갑작스런 기능 정지는 내구성이 취약한 배선의 결함 때문이었다. 설계자들은 중량을 줄일 목적으로 구리보다 더 가벼운 알루미늄 배선을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실제 비행에서 배선이 끊어지자 전기 시스템이 작동을 중지하는 바람에 비행도중 한 쪽 주익의 3개 엔진 모두가 먹통이 되기도 했으며, 동체의 진동 때문에 주익 플랩이 떨어져 나가는 사고도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비행중이 아니라 지상에 있을 때도 폭탄 투하실에서 전기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엔진 플러그도 다시 재설계하는 등 XB-36의 말썽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6년 9월 30일 오후, 결국 위험천만한 사고가 발생했다. 대기 속도 점검 테스트 비행중이던 XB-36 폭탄 투하실 윈치에 연결된 75피트 케이블이 절단되어 무게 22.7kg짜리 계기판이 포트워스 초등학교 화장실 지붕에 떨어져 버렸다. 지붕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파편은 콘크리트에 큰 구멍을 내었고, 어떤 것은 옷장을 박살내기도 했다. 7명의 부상당한 학생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학교에 보험을 들어주는 등의 금전적 손실과 함께 100만 달러짜리 폭격기가 학교를 폭격했다느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싼 폭격기의 첫 폭격 대상이 고작 그 곳인가하는 등의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XB-36 피스메이커 원형기의 16번째 테스트 비행은 1947년 3월 26일 수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계획된 테스트는 고도 3,050m 에서 4번과 5번 프로펠러 허브의 압력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조종사 베릴 에릭슨과 부조종사 거스 그린은 평소와 같이 비행전 점검을 마친 후, 포트워스 활주로 북쪽 끝으로 XB-36을 택싱한 다음 관제탑과 이륙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날 폭격기의 총 하중은 115,220kg(254,000파운드)이었으며 11,050갤런의 연료를 적재하고 있었다. 폭격기에는 조종사와 부종사 외에 스태픈 딜론 소령, 2명의 커티스 라이트 기술자와 공군 소재 기술담당관 등 모두 14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낮 12시 20분, 이륙 허가를 받은 폭격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날아오른 다음 랜딩기어를 수납하기 위해 접는 도중 갑자기 굉음과 함께 기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측 주익의 랜딩기어 유압장치 실린더가 폭발하면서 랜딩 기어의 지주를 날려버렸다. 에릭슨과 거스 그린이 기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동안 계기판에는 내부 통로 화재, 4번 엔진 화재, 랜딩 기어 작동 정지경고등이 켜졌다. 에릭슨은 즉시 전원을 차단시켰다.

에릭슨은 승무원과 원형기의 안전과 함께 XB-36 프로그램의 존폐조차도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에릭슨은 기체를 계속 상승시켜 고도 3,050m에 도달하자 기수를 내려 기체를 안정시켰다. 단지 랜딩기어 지주가 고장난 것으로만 판단하여 피해를 조사하려고 동체 후미로 갔던 딜론 소령은 상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딜론으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에릭슨은 딜론에게 조종석을 맡기고 후미로 달려갔다. 그동안 비행 기술자 윌리엄 위즐리와 제임스 맥이체른은 손상된 유압 파이프들을 수리하는데 매달려 어느 정도 수리를 해놓고 있었다.

부조종사 거스 그린은 관제탑에 예비 비상사태를 보고하였고, 승무원들은 회의를 열어 12명은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하고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폭격기를 비상착륙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승무원들은 한번에 2명씩 탈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는 딜론 소령은 지상에서 무전기로 폭격기와 교신하면서 비상착륙을 돕기로 되어 있었다. 승무원들을 비상 탈출 시키기 위하여 조종사들이 침착하게 상공을 선회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이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구급차가 동원되었고, BT-13 훈련기는 탈출 승무원의 정확한 낙하지점을 지상의 구조요원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륙했다.

강풍이 불고 있어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승무원들이 매우 멀리 떨어진 곳까지 흘러갈 위험과 함께 착지하자마자 강풍에 끌려 큰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구조요원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컨베어 안전요원들은 승무원들이 땅에 착지하자마자 강풍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원기가 알려주는 장소에 신속히 달려가 대기해야 했다. 오후 3시 45분, 에릭슨은 2명의 탈출 승무원이 1,830m 상공에 있다고 지상으로 통보했다. 에릭슨은 여러번 선회하면서 승무원들을 탈출시키고, 또 무전기로 위치를 통고했다. 탈출한 승무원들이 강풍 때문에 멀리 날아가 버려 지상 구조요원들은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2명의 승무원 중 9명이 부상당했으며, 맨 먼저 탈출한 딜론 소령은 발목이 접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딜론은 구조되자마자 약속대로 조종사와 교신하기 위해 구급차를 비행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비행장에 무전기가 설치된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딜론은 C-47 수송기를 택싱, 활주로 북단 동쪽에 주기시켜놓고 XB-36과 교신할 준비를 서둘렀다.

XB-36은 비상 연료 방출장치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량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비상착륙하게되면 폭발의 위험이 매우 컸다. 때문에 조종사들은 연료를 소모하기 위해 벌써 2시간 동안이나 피말리는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는 7,015갤런의 연료를 모두 소모하자면 5시간은 더 비행해야할 운명이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착륙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XB-36 원형기가 텍사스 상공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시각, 뉴욕에서는 콘솔리데이티드-벌티 항공의 중역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회의 도중에 긴급히 걸려온 전화를 통하여 텍사스 상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사태를 알게 되었다. 컨베어는 위기를 느꼈다. 만약 XB-36이 비상착륙에 실패하여 기체가 파괴되고 조종사가 사망한다면... 원형기가 사라져 버리면 B-36 피스메이커 프로그램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고, XB-36 프로그램 반대자들의 중지요구는 한층 거세질 것이 뻔했다. 게다가 비록 XB-36에 비하여 폭탄 탑재량에는 못 미치지만 보잉과 노스롭같은 경쟁회사들의 B-50, XB-35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원형기가 사라져 버린다면 생산계획이 전면 취소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텍사스 지역 방송들에 의해 사고소식이 전파되자 인접한 고속도로에는 시민들이 몰고온 차량들로 넘쳐났다. 포트워스 공군 수백명이 긴급 배치되어 구경꾼들의 접근을 통제했다.이륙한지 5시간이 지난 오후 5시 30분까지도 에릭슨과 거스 그린은 연료를 소모시키기 위하여 계속 공중을 선회비행하고 있었다. 강풍이 부는데다 일몰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구급차, 소방차, 화재 진압 장비를 배치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6시 15분, 에릭슨과 그린은 결단을 내렸다. 연료를 모두 소진하지는 못했지만 캄캄한 밤에 착륙하는 것이 더 위험할 것이기 때문에 더 어두워기기 전에 착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두 조종사는 플랩을 최대로 내리고 천천히 북쪽 활주로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수 천명의 구경꾼들도 탄성과 함께 손에 땀을 쥐며 이 위험한 착륙을 지켜보고 있었다. 활주로 왼쪽에서는 C-47에 탑승한 딜론 소령이 에릭슨의 착륙을 도와주었다. 활주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하강을 시작한 에릭슨은 기체가 활주로에 닿자마자 프로펠러를 역회전시키며 제동을 걸었다. 동시에 군인들과 시민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착륙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XB-36이 고장난 랜딩기어로 활주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 뒤에서는 C-47이 뒤를 따라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딜론 소령은 앞서가는 XB-36의 랜딩기어의 각도를 감시하며 달렸지만 C-47 수송기는 XB-36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딜론은 앞서가던 XB-36을 시야에서 놓쳐 버리고 말았다. 딜론은 에릭슨에게 위치를 알려달라고 송신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파손된 랜딩기어가 엔진커버에 끼어 버렸기 때문에 XB-36은 활주로 측면 바깥에서 위험한 질주를 멈출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엔진 커버의 손상은 아주 경미했고, 잠시 후 포트워스 전역에 "XB-36은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XB-36은 비상 착륙 당시 약 4,000갤런의 연료가 남아 있었으며 이 때의 기체 총 중량은 86,369kg이었다. 전날의 폭풍우 때문에 들판이 약간 축축하긴 했으나 이 덩치가 큰 폭격기는 땅 속 23cm 깊이로 파고 들면서 질주를 멈추었다. 이날 밤, 에릭슨과 거스 그린은 일체의 기자회견이 허용되지 않은 가운데 사고 보고를 위해 공장에 남았다. 날이 밝아오자 폭격기 주변에는 경비병이 배치되고 컨베어 기술자들은 랜딩기어에 임시 지주대를 설치하였다. 랜딩기어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 떨어져나간 몇 개의 부품이 사고 조사반에 의해 지상에서 발견, 회수되었다. 사고 조사반은 알루미늄을 강철로 대체해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었다.

사고 후 2개월이 지난 1947년 5월 25일 저녁, 포트워스의 블랙스톤 호텔에서 축하 만찬이 있었다. 여기에는 컨베어 최고 경영자 해리 우드헤드와 맥 레이든, 로날드 메이어도 참석했다. 추가로 조종사들의 용기와 감투정신을 치하하는 칼 투이시 스팻츠 공군대장의 축하문도 낭독되었다. 위기를 맞았던 컨베어는 이 용감한 조종사 덕분에 오히려 공군으로부터 강한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딜론 소령도 공군 장관에게서 공로 표창을 수여받는 등 귀중한 원형기인 XB-36을 살려낸 이들은 만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후, 에릭슨은 컨베어 수석 테스트 조종사가 되었으며 그린은 서비스 대표로서의 주요 보직을 받았다. 그러나 그린은 사고 당시 위험에 처한 남편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던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여 테스트 비행직을 그만 두었다. 거스 그린은 3년 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48년, 컨베어는 XB-36과 그 자매기인 YB-36의 테스트를 계속 실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XB-36은 3500마력 R-3640-41 엔진을 장착했으며 신형 계기판으로 교체, 동체외피는 금속피로와 마모로 인하여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XB-36은 1948년 6월 19일, 전략 공군 사령부에서 폭격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며칠 사용되었다가 다시 포트 워스로 돌아왔다.

1949년 8월, 미 공군협회는 항공기술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표창하였는데, 여기에는 3명의 B-36 피스메이커 개발자도 포함되었다. 컨베어 기술자 레이 라이언, 수석 엔지니어 스파키 세볼드, 풍동 전문가 로버트 위드머가 수상했는데, 공로패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일본 본토 폭격의 영웅 제임스 지미 둘리틀 장군이 전달하였다.

1948년에서 49년까지 미 공군은 궤도형 랜딩기어를 실험적으로 달아서 쓸만한 기술인지 평가하기도 했다. 기체번호 42-13570 XB-36에 장착되어 착륙 테스트를 진행했다.

XB-36은 1950년 8월 8일 비행을 마지막으로 원형기로서의 일생을 마감했다. XB-36은 총 30회(88시간 50분)의 테스트 비행을 했으며, 포트워스 활주로 북쪽지역에 보관되었다가 1952년 1월 30일자로 공식 퇴역하게 된다. 엔진과 모든 장비가 제거된채 5년 동안 보관되어오던 XB-36은 1957년 5월, 대형 항공기 화재 진화 프로그램에 사용되기 위하여 카즈웰 공군기지로 옮겨졌다.

4.2. B-36A[편집]


2차대전 당시 극동공군을 지휘했으며, 초기 XB-36 대륙간 폭격기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었던 조지 C 캐니 미국 전략 공군 사령관(SAC)은 B-36 폭격기 도입에 회의적으로 돌변했다. 캐니 장군은 2차대전에서 이미 그 성능이 입증되었던 보잉 B-29 폭격기의 개량형인 B-50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폭탄 탑재량과 항속거리는 XB-36에 비하여 못 미치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성능은 오히려 B-50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짧은 항속거리는 공중급유기를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캐니는 스팻츠 공군 대장에게 B-50이야말로 미국의 표준 중폭격기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 제15중폭격 비행단을 지휘했던 공군 조달사령관 나한 트위닝 장군은 테스트만으로 XB-36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최고의 성공을 누렸던 B-17과 B-29도 개발과 테스트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추가로 B-36A 피스메이커 폭격기용으로 신형 3,500마력 R-3640-41 엔진이 개발되었으며, 냉전시대에 있어 B-36 대륙간 폭격기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미 공군의 인내가 없었더라면 2차대전중 B-17, B-29, P-47, P-51과 같은 걸작기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니나 트위닝 장군 두 사람 모두 개발중인 B-52 폭격기가 확실히 더 훌륭한 폭격기가 될 것이라는데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B-52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결국 스팻츠 대장은 트위니 장군의 주장에 동의하고, B-36 프로그램은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캐니 장군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하였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래 1947년 9월 18일자로 육군에서 분리된 미 공군은 냉전시대의 핵무기 운반수단으로서 B-36 대륙간 폭격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B-36은 속도가 빠른 제트 추진 요격기에 취약할 것이라는 지적이 공군내에서 제기되었다. 1947년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대통령 특별 보좌관 호이트 반덴버거 장군은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러한 회의는 1년 뒤인 1948년에도 다시 열려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참석한 장교들은 신무기 획득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을 발표했다.

비록 몇 해동안 폭격기를 운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트 엔진을 장착한 폭격기를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가까운 미래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어찌되었든 B-36은 이미 제트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폭격기라는 주장이었다.

속력을 더 얻기 위하여 기존의 엔진을 제거하고 플랫 앤 휘트니 4,300마력 R-4360-51 VDT(variable discharge turbine) 엔진 6기를 장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 터빈 엔진도 피스톤 방식이었으나 조개 껍질 형상의 노즐에 의해 추진력이 향상되는 제네럴 일렉트릭사의 CHM-2 터보 과급기를 채용한 것이었다.

B-36을 전략적인 장거리 핵 운반수단에만 국한하지 말고 엄청나게 비축된 범용 폭탄을 탑재하여 전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폭격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캐니 장군처럼 B-50에 VDT엔진을 장착하게 된다면 B-36보다 훨씬 우수한 폭격기가 될 것으로 주장한 장교가 많았다.

논쟁 끝에 1947년 9월 4일, 미 공군은 후기에 생산되는 기체(B-36C)에 VDT 엔진을 장착하기로 하고 비용절감을 위해 원래 계획된 100대에서 5대를 감한 95대의 B-36 조달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은 전략 폭격기로 개발 중인 B-52의 능력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거나, 또다른 핵 운반수단이 개발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B-36을 전략 폭격기로서 계속 유지시키기로 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군은 B-36 피스메이커로 2개의 공군 폭격 그룹을 창설하고 초장거리 핵무기운반 수단으로써 사용하기로 최종 합의하였다.

하지만 VDT는 설계에 어려움이 따랐고, 공군 소재 사령부는 전략공군 사령부에 대하여 VDT 계획과 B-36C계획을 취소하도록 권고했다. B-36A가 공군에 보급되는 동안 B-36 피스메이커의 운명이 또 다시 위기를 맞자 컨베어는 성능향상 프로그램을 긴급히 마련하여 스튜어트 시밍턴 공군장관에게 제출하였다. 스튜어트 장관은 1948년 6월 24일, B-36 프로그램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캐니를 비롯한 공군 장군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소집당시는 소련이 독일 베를린을 봉쇄하여 동독과 서독으로의 통행을 전면 금지시켜버린 때이기도 하다.

독일이 분단되는 등 팽팽한 냉전시대로 돌입한만큼 많은 토론을 거친 장군들은 B-36C를 취소하고 우선 36대의 B-36B 피스메이커를 도입하는데 최종합의하였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가 B-36의 운명을 결정짓도록 도와주었던 셈이다. 공군은 B-36에 전쟁을 방지, 억제, 제지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은 항공기라 하여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군은 그냥 B-36으로만 불렀다.

생산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엄청난 크기의 덩치 때문에 작업은 많은 문제에 직면하였다. 특히 거대한 연료 탱크는 제작 도중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 문제는 향후 3년간 생산 프로그램의 최대 골칫거리가 된다. 컨베어가 B-36 피스메이커의 동체 내에 설치하기로 하였던 6개의 거대한 연료 탱크는 고도의 접합 기술이 요구되었다. 누유방지에 실패를 거듭하던 기술자들은 고무 밀폐제 프로씰(Proseal)을 개발하여 연료 탱크 내부 전체를 감쌌다. 또한 날개 제작에 사용되었던 마그네슘 합금제 패널 접합 문제도 특수한 제조 공법과 검사 기술을 개발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재래식 리벳으로 조립된 구조물들은 진동에 의해 변형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컨베어는 직접 개발한 금속 접착제를 동체의 취약한 부분에 폭넓게 사용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 전기로 작동되는 보조익이 전기 계통의 결함시 오작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기술은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였다. B-36 피스메이커에 쓰여지는 모든 부품은 너무나 다양하고 또 너무나도 커서 공급을 책임진 하청업체들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XB-36, YB-36의 뒤를 이어 B-36(B-36A. 기체번호-44-92004)가 1947년 7월에 제작이 완료되었다. 공군은 최초의 4륜 랜딩기어를 가지고 탄생한 이 양산형 기체에 BM-00(BUZZ NUMBER)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B-36A 피스메이커 제1번기는 테스트 비행을 마친 이후 라이트 필드 기지의 격납고에 들어가 기체 구조 검사 및 증명 테스트용으로만 사용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8월 28일, 조종사 베릴 에릭슨이 "BM-004" B-36A 제1번기의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T.P 제리티 중령은 B-36A를 4시간 40분간 비행하여 오하이오 주 라이트 페터슨 기지에 착륙하였다. 베릴 에릭슨은 참관자로 함께 비행하였다. BM-004는 엔진과 주요 부품들이 제거된채 라이트 페터슨 기지에 특별히 마련된 거대한 실험 격납고로 옮겨졌다. BM-004는 거대한 기중기와 강철 사슬에 매달려 충격, 하중 테스트, 기압 테스트 등 45가지의 테스트에 사용되면서 서서히 고철로 변했다.

BM-004에 이어 생산된 1대의 B-36A 피스메이커가 1948년 4월 1일, 틴커 공군기지에 보내졌고, 또 1대는 전술 테스트를 위하여 6월 18일 에그린 공군기지에 전달되었다. 미 전략공군사령부 휘하 제7폭격비행그룹(제7BG)에 1948년 6월 26일 처음으로 B-36A 피스메이커 폭격기(44 - 92015)가 전달 되었다. 이 전달식은 포트 워스에서 거행되었으며 식 도중에 하늘에서는 (44-92023)피스메이커가 축하비행을 실시하였다. 제7BG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부대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해산되었다가 1947년 10월 1일, 공식적으로 부활되었다. 제7BG는 도입, 수리, 운용이 용이하도록 포트 워스의 컨베어 공장과 활주로를 사이에 두고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트 워스는 195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상이 용사 호라스 카즈웰 소령을 기리기위하여 카즈웰 공군기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제7BG도 제7중(重)폭격비행단(제7BW)으로 승격된다.

피스메이커의 도입은 매주 1대 꼴로 도입되었으며 제9폭격비행대대는 1948년 7월 1일 첫번째 기체를 받은 다음, 11일 후인 7월 12일에 두번째 기체를 받았다. 제7중폭격비행단은 활주로 건너 공장으로부터 전해지는 B-36 피스메이커의 수가 증가하여 활주로가 비좁아지자 B-29 폭격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자리를 마련해야했다. 원래 B-25용으로 건설되었던 카즈웰 기지의 지상요원들은 B-36을 주기시킬 만큼의 큰 격납고가 없었기 때문에 1948년 여름 내내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아래, 겨울에는 추운 바람에 시달렸다. 또한 기체가 너무나 커서 출격 가능상태로 유지하는 것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컨베어는 당시 B-36의 미래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체의 성능을 더욱 더 발전시키기위하여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전략공군사령관 캐니가 여전히 B-50 슈퍼포트리스의 도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 가을부터 조지 캐니 장군의 영향력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대통령 특별 보좌관 호이트 반덴버거 장군이 전략공군사령관의 교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8년 10월 16일자로 태평양 전쟁 당시 제20공군 지휘관으로서 B-29 폭격을 총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가 신임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임 사령관으로 취임한 커티스 르메이는 업무의 시작을 B-36 피스메이커 훈련 프로그램 조사를 선택하였을 정도로 B-36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르메이는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 개장식에 전시하기 위하여 B-36을 보냈으며,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한 공군의 날에는 3대의 B-36이 포함된 700대의 항공기를 저공비행시키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8일에는 미국 유명 언론사의 기자들을 포트 워스로 초대하여 B-36에 탑승하도록 해주었다.

제7중폭격 비행단은 그 규모가 확대되어 휘하에 제7BG와 제11BG를 두었다. 제7BG휘하에는 9, 436, 492폭격비행대대가 있으며 11BG는 26, 42, 98폭격비행대대를 휘하에 두었으며 이들 비행대대는 각각 6대의 B-36을 장비하도록 계획되었지만 나중에는 10대로 증가된다.

훈련 및 교육용으로 사용될 22대의 B-36A 피스메이커는 1948년 11월까지 배치가 완료되는데, 만약 총10,000파운드(4,536kg)의 폭탄과 24,121갤런의 연료를 적재하였을 때의 총 중량은 140,795kg 이며 전술행동반경은 6,243km였다. 또한 총 26,745 갤런의 연료와 72,000 파운드(32,660kg)로 폭탄을 만재하였을 때의 전술행동반경은 3,380km이며, 폭탄을 적재하지 않았을 때의 항속거리는 14,702km에 달했다. 그리고 해수면상 고도 9,631m에서 시속 552km/h의 최고속도와 11,917m의 실용상승한계고도를 가지고 있었다. 보잉의 B-50 수퍼포트레스 폭격기는 총 10,000파운드(4,536kg)의 폭탄을 적재하였을 때 해수면상 고도 9,144m에서 626km/h의 최고속도를 나타내었으나 전술행동반경거리는 B-36A 피스메이커보다 훨씬 짧았다.

B-36A는 AN/APQ-23 폭격/항법 레이더를 설치하였지만 기관포는 설치하지 않았고, 제7BG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기관포로 완전히 무장하는 형은 1948년 7월 8일 처녀비행을 실시한 B-36B 피스메이커이다. 제7BG의 조종사들이 훈련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공군 분석관들도 B-36A의 평가 작업에 착수하였다. 승무원들은 B-36A의 느린 속도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뛰어난 성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4.3. B-36B[편집]


B-36B 피스메이커는 워터 인젝터형 3,500마력 R-4360-41 와스프 메이저 엔진을 장착하여 12,954m의 실용상승한계고도와 610km/h의 최고속도로 증대 되었다. 기체 전체에는 방어수단으로서 총 16문의 20mm 기관포로 무장하였는데, 기수와 꼬리의 기관포를 제외한 8개의 리모트 콘트롤식 기내 수납형 포탑을 장비하였다. 동체 후부에 APG-3 사격 조준 레이더를 설치하였으며 성능이 개선된 AN/APQ-24 폭격/항법 레이더를 장비하였다.

폭탄 투하실 문은 현존하는 거의 대부분의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도록 넓게 제작되었고, 총 43,000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18기의 B-36B(44-92045 ~ 44-92062)는,3000파운드 VB(vertical bomb)-13 유도 폭탄을 투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중 11대는 RB-36D형으로 변경되지만 컨베어는 이를 계속 B-36B로 지칭하였다. B-36B 피스메이커는 1948년 7월 8일 처녀비행을 실시한 다음, 11월 30일에 공군에 전달되었다. 컨베어는 11월에 6대의 B-36B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미 전략공군사령부는 1948년말까지 총 35대의 B-36B를 카즈웰 공군기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장군은 전략공군의 파워를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르메이는 진주만 공습 제7주년이 되는 1948년 12월 7일을 D-데이로 잡았다. 르메이는 카즈웰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B-36B 피스메이커를 일본군이 공격했던 하와이 호놀룰루로 보낼 생각이었다. 12월 7일 오전 8시(미중부 표준시각), 1대의 B-36B가 카즈웰 기지에서 이륙하였다.

제7BW 7BG 지휘관 죤 바틀렛(John D. Bartlett)중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승무원용 6인승 구명보트 3개와, 모의 폭탄을 탑재하고 호놀룰루를 향하여 비행하였다. 바틀렛 중령이 하와이 가까이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밤이 되었으며 오하우섬 북서쪽에 10,000파운드의 모의 폭탄을 투하한 다음 호놀룰루의 진주만 상공을 날았다. B-36B 피스메이커는 발각되지 않고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일본군과 똑같이 미 방공 부대에 전혀 발각되지 않은채 모의 폭탄을 투하했던 것이다.

폭격을 마친 바틀렛 중령은 12월 8일 아침에 샌프란시스코 상공을 거친 다음 그날 저녁 카즈웰 기지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바틀렛과 승무원들은 공중급유없이 8,100마일(13,035km)이상의 거리를 평균 378km/h의 속도로 총 35시간 동안 비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귀환하였을 때 100마일(160km)정도를 더 비행할 수 있는 2,800갤런의 연료가 남아 있었다. 이 비행은 B-36 피스메이커가 미 대륙으로부터 가장 멀리, 오랫동안 비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B-36은 1941년의 태평양 전쟁 개전을 알리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처럼 레이더에 걸리지 않고(일본군은 레이더에 걸렸으나 미군의 판단실수로 기습에 성공) 하와이 상공을 침범, 모의 폭탄을 폭격했다. 당황한 하와이 방공부대는 B-36의 비행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하여 크게 항의하였다. 하와이 휠러 공군기지의 태평양 공군은 전시도 아닌 평시에 단 1대의 폭격기를 하와이 방공망으로 잡아내지 못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불평을 하였다. 그러나 워싱턴 정부는 죤 바틀렛 중령이 하와이 오하우의 군사 무선국에 미리 통보하였다고 해명하였으나 무선국 요원들은 그러한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르메이는 B-36 폭격기 승무원들의 비행 및 폭격 능력을 최대한 숙달, 유사시 임무를 완수하도록 훈련하기 위해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때 비행금지구역인 미국회의사당 상공을 B-36이 비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여 5대의 피스메이커가 취임축하비행을 하였다. 트루먼은 2월 15일에는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자신이 직접 B-36 피스메이커 폭격기를 참관하기도 하였다.

4.4. B-36D[편집]


적국 영토 깊숙히 비행해야 하는 전략폭격기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하여 속도와 상승고도가 증대된 형이 B-36D이다.

B-36A와 B는 너무 느린 폭격기였다. 전략폭격기는 강력한 적 대공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폭격한 후 다시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자기 방어 능력이 요구되었다. 1948년 중반까지 전투기들은 약 12,190m정도의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폭격기들이 B-36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지만, 높은 고도에서 피스메이커를 발견, 요격 또는 격추시키기란 아직까지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스메이커가 더 높은 고도에서 더 빠른 속력으로 재빨리 빠져나가 버린다면 생존확률은 더 높아질 것이었다. 이 때문에 B-36은 제트엔진을 추가 장착한다.

1948년 6월 24일, 시밍턴 공군장관은 엔진, 항속거리, 비행궤도, 폭탄적재량을 증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컨베어는 1948년 10월 5일, 양쪽 주익에 각각 2기씩(총4기)의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는 피스메이커 성능향상 프로그램에 공군과 합의하였고, 1949년 1월 4일, 원형기 생산이 최종 결정되었다. 컨베어는 보잉 XB-47 스트라토제트와 동일하게 원형기에만 J-35-A-19 엔진을 사용하고 나머지 기체들은 4기의 제너럴일렉트릭 J-47-GE-19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서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컨베어는 몇 가지의 제안을 하였다. 빠른 터보제트 엔진 설치와 평가를 위해 생산중인 B-36B중에서 원형기로 사용하는 것과 연료적재량 증가, 폭탄투하실 문을 반으로 갈라 양쪽으로 신속하게 개방한다는 안이었다. B-36D로의 개조비용은 20시간의 테스트 비행을 포함하여 총 24만 달러(기체 가격은 410만 달러로 추정)가 추가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컨베어는 4개월 내에 원형기를 만든다는 계획으로 54번째로 생산되던 B-36B(44-92057)에 J-35-A-19 제트엔진을 장착하였다. 이렇게 개조된 B-36D 원형기는 1949년 3월 26일 처녀비행을 실시하였고, 이때 발견된 진동 문제는 나중에 엔진 포드의 버팀대를 추가하여 해결된다.

원형기는 고도 10,753m에서 640km/h의 최고속도(B-36B는 610km/h)로 비행하였으며 실용상승 한계고도는 13,350m로 증대되었다. 원형기는 1949년 7월 11일에 다시 J47-GE-19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고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B-36D 피스메이커는 나중에 감량 프로그램에 의해 669km/h의 최고속도로 비행했다. 동체 후부의 AN/APQ-24 폭격/항법 레이더는 AN/APQ-32로 대체되었으며 K-1 폭격 시스템(나중에 K-3로 개량)이 설치되었다.

사실상의 B-36 양산형의 최종단계로, 이후의 개량형은 B-36J까지 있으나,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개량이 주요 개조 포인트로, 성능향상은 확실했으나 B-36D처럼 확실한 수준은 아니므로 언급을 생략한다.

5. 실험[편집]


B-36을 폭격기 외에 다른 방면에도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해서 각종 실험이 전개되었다. 사실 후술하겠지만 실험결과와 관계없이 시간벌이용의 목적이 숨어있었다.

5.1. RB-36[편집]


1948년, 해군이 B-36 프로그램은 거액의 예산만 잡아먹는 실패작이라고 거듭 비난하는 등 예산과 항공부대통합 논쟁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미 공군은 즉시 첩보를 수집할 수 있는 항공수색정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지휘 경험이 풍부했던 커티스 르메이 중장은 미 전략공군사령관으로 부임하자 전략 수색정찰 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0월말, 정보책임자 캐이벨 장군은 전략정찰기에 대한 요구사항 재검토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후 컨베어가 제안한 B-36 정찰기 안을 의논하기 위하여 공군은 1948년 11월 12일, 다시 회의를 소집하였다.

정찰임무를 수행할 기종에는 노스롭 YB-49 플라잉 윙과 보잉 B-47, B-54[9]도 고려되었다. 미 공군은 전 세계 어느 지역이라도 핵공격이 가능한 B-36 피스메이커 폭격기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에 앞서 표적 첩보, 날씨, 사진 정보, 그리고 전자 대항무기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장거리 정찰기가 먼저 수집임무를 선행해야했다. 또한 폭격 전과 확인을 위해서도 장거리 정찰기는 필수적이었다.

회의의 중점은 제트 엔진을 장착한 노스롭 YB-49와 컨베어 B-36으로 압축되었다. 회의가 열리기 6개월 전까지만 해도 YB-49가 가장 유력한 전략정찰기로 기대되고 있었다. 이 당시 B-36 피스메이커는 그 신뢰성을 매우 의심받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노스롭의 YB-49는 1940년 7월에 처음 비행하였던 쌍발 엔진을 장착한 N1M을 기반으로 한 기종이다. 그후 노스롭은 공군으로부터 4발 장거리 폭격기 개발 요구에 따라 1941년 9월, 디자인을 승인받고 2대의 XB-35 원형기와 13대의 테스트 기체를 발주받았다. 그리하여 가장 강력한 경쟁기종인 XB-36보다 한달 반 가량 빠른 1964년 6월 25일에 처녀비행이 실시되었다. R-4360-17 과 R-4360-21와스프 메이저 엔진을 사용하며 개발된 XB-35는 좋은 성능을 보여주었으나 프로펠러 엔진의 한계 때문에 제트 엔진을 장착해야 했다. YB-49도 1947년 10월 21일자로 제트 엔진을 장착했다.

1948년 6월, 공군 소재사령관 조지프 맥내니 장군은 한달에 15대씩의 YB-49 양산을 계획하여 정부에 예산승인을 요청하였다. 당시 YB-49는 높은 상승고도와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항속거리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독일은 양분되고 국제 관계는 동서양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체체로 돌입하고 있었고, 미래의 신기술이 적용되기까지 기다리기보다는 현재 사용 중인 항공기를 운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보였다. 한편으로는 노스롭 캘리포니아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B-49 대량 생산에 부적합했다. 공군이 한달에 15대의 B-49 생산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대형기 생산공장의 필요성은 명백한 것이었다.

대형기 생산능력이 확보된 국가 소유의 포트 워스 공장은 주문된 95대의 B-36 피스메이커의 양산이 완료되면 더 이상의 생산예정 항공기는 없었다. 맥내니 장군은 노스롭과 컨베어 양쪽 회사에 B-49를 포트 워스 공장에서 생산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그후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공군 고위 관계자와 양쪽 회사 최고경영진이 만나 진통을 거듭한 끝에 겨우 합의점을 찾았다. 공군은 두 회사가 합병하여 항공기를 생산하도록 설득하였는데, 노스롭 입장으로서는 무척 억울한 제의였다. 협상을 거듭했던 양쪽 경영진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회동을 마친 한달 후 포트 워스 생산 계획서를 작성했다. 포트 워스 공장이 하청형식으로 B-49를 제작하며 나머지 작은 규모의 생산은 노스롭 캘리포니아 공장에서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즉, 노스롭은 원청 계약자로서 전체적인 책임을 지고 컨베어는 생산 계획과 일정에 책임을 지도록 되었다.

노스롭 직원들은 포트 워스 공장에 사무실을 만들었으며 컨베어 직원들도 노스롭 공장에 파견되어 B-49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얻었다. 미 공군은 1948년 10월 13일, 양쪽 회사에 각각 동일한 발주서를 보냈다. 미 공군은 6대의 YB-49 정찰형(RB-49) 도입을 추진하여 추력 5,000파운드 J35-A-19 제트 엔진을 장착한 YRB-49A 정찰 원형기가 1950년 5월 4일 첫비행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불행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B-49와 RB-49에 대한 많은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수색형은 B-36과 B-54가 가장 적합한 것으로 결론이 나있었다. 정찰기 심의 회의 끝에 심의위원회는 RB-49 수색정찰기를 도입에서 제외시키도록 권고하였다. 얼마후 위원회는 B-54도 수색정찰형을 줄이거나 취소 또는 재검토할 것을 권고하였다. 결과적으로 RB-49 생산 계획은 1949년 1월 12일, 전면취소되었다.

그리고 RB-49가 취소되면서 B-36을 개수한 RB-36이 살아남게 되었으나, 이들은 곧 GRB-36D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그 쪽으로 진행된다.

5.1.1. 실전 투입[편집]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RB-36은 한국전쟁에 소수 투입되어 북중 국경 지대를 정찰하는 임무에 쓰였다.

5.2. GRB-36D[편집]


XF-85 고블린과 B-29 폭격기의 실패에 관계없이 폭탄투하실을 이용하여 호위 전투기를 운반, 발진, 회수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파이콘(FICON-Fighter-Conveyor)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1월 19일, 컨베어는 공군으로부터 개조계약을 받아 RB-36F 피스메이커(49-2707)의 폭탄투하실 개조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피스메이커 모기(母機)는 단좌 리퍼블릭 F-84E 썬더스트리크와 후퇴익 YF-84F을 수납하는 테스트 프로그램을 3월말에 완료했다. 이렇게 동체 하부가 개조된 RB-36F 피스메이커는 GRB-36F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52년 1월 9일 비행을 시작하였다.

1952년 4월 23일에는 기생기인 F-84E를 발사할 수 있으며 귀환 후 폭탄투하실에 수납할 수 있는, 완전히 접혀지는 회수기구가 설치되었다. RB-36F 피스메이커와 F-84E 썬더스트라이크는 테스트를 위해 플로리다 에그린 기지로 옮겨졌다. 이 두 대의 항공기는 1953년 2월 20일까지 총 170회의 발진과 복귀 테스트를 수행하였다. 그 다음엔 기생 호위 전투기로 사용될 YF-84F로 9,144m 상공에서 야간 운용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5월 중에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공군은 컨베어사와 10대의 RB-36 피스메이커 개조 계약을 맺게 된다. 이렇게 개조된 기체는 GRB-36D 피스메이커로 명명된다.

공군은 리퍼블릭사와도 25대의 RF-84K 정찰전투기 제작계약을 맺어 RB-36의 사진 수색정찰작전 범위를 더 연장시키고자 하였다. 1953년 12월 10일부터 포트 워스 컨베어 공장에서 개조가 시작되어 맨 마지막 기체가 공군에 전달된 것은 1955년 3월 9일이었다.

이 10대의 GRB-36D 피스메이커는 새로운 개조를 위하여 1955년 8월부터 1956년 5월까지 컨베어 공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모기에는 각각의 기생형 호위 전투기들을 발진 또는 회수하기 위하여 폭탄 투하실에 H형의 요람이 설치되었다. GRB-36D의 ECM 장비는 동체 후부로 이동 설치되었으며 모든 선회포탑이 제거되고 오직 후미기관포탑만 남겨졌다. 5개의 정찰 카메라만을 장비하였고, 폭탄은 일체 적재하지 않았다.

GRB-36D는 7,620m상공에서 RF-84K 수색정찰 전투기를 발진시켜 반경 4,522km까지 투입할 수 있었다. 모기를 떠난 RF-84K 수색 정찰 전투기는 해수면상 고도 10,668m에서 931~1,006km/h의 속도로 목표물을 향해 비행해 들어갈 수 있었다. RF-84K는 방어용으로 50구경 기관총을 무장하였다.

GRB-36D 피스메이커는 워싱턴 페어챠일드 기지의 제99전략정찰비행단(99SRW)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라슨 기지의 91전략정찰비행대대(SRS)에 배치된 RF-84K 수색 정찰 전투기들과 한조로 운용되었다. 파이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각각 이륙한 GRB-36D와 RF-84K는 공중에서 만나 도킹한 다음, RF-84K는 정찰 목적지까지 모기 내부에 수납된 채로 비행한다. 일단 안전하게 수납되면 RF-84K 조종사는 좁은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와있다가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다시 조종석으로 들어간다. 이 두 항공기의 결합으로 항속거리는 거의 19,311km를 넘었다. 파이콘 프로젝트에는 정찰뿐만 아니라 공중급유 등 여러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1955년 12월 12일 밤, 사건이 발생했다. 어두운 야간에 RF-84K가 도킹하기 위하여 GRB-36D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동안 모기 내의 승무원들은 여전히 파이콘 운용을 배우고 있었다. RF-84K 조종사 로빈슨 대위는 콕피트 계기판에 유압 경고등이 번쩍 켜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정찰기 유압 시스템이 몇 분 이내에 작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는 비상탈출 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었다. 로빈슨 대위는 GRB-36D 조종사 잭 팩우드 소령에게 이 사실을 무선으로 알렸다. 어두운 밤하늘, 긴급한 상황 속에서 기생정찰기는 1초라도 빨리 모기에 후크를 걸어야만 했다. 비록 회수기구 담당자 허버트 커트 상사가 조작에 아직 미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컨베어사의 GRB-36 테스트 파일럿의 도움을 얻어 로빈슨 대위의 목숨과 RF-84K를 구해내었다.

한편, 피스메이커 정찰기 중 맨 먼저 개조되었던 RB-36F 피스메이커(49-2707) - GRB-36F는 특이하고도 위험한 방법으로 한꺼번에 2대의 기생전투기를 운반해야하는 탐-탐(TOM-TOM) 프로그램에 투입되어야 했다.

일련의 실험 결과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으나, 원판인 B-36이 퇴역함에 따라서 이들 정찰기와 관련된 실험은 모두 중지되는 비운을 맞는다.

5.3. 극한지 적응 프로그램[편집]


1940년대 말에 이르러 동서 양진영의 냉전상태는 점점 더 심해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1945년말, 합동참모본부는 소련과의 우발적인 전쟁에 대비한 계획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코드명 핀처(Pincher) 계획을 1946년 6월 8일에 완성하였다. 핀처 계획에는 1946년 8월에 작성된 브로드 뷰(소련의 북미대륙 침공에 대비)와 그리들(소련의 공격을 터키에서 역습), 칼드론(소련의 중동공격 역습), 코크스푸어(이탈리아에서 소련의 공격 역습)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947년 5월 15일에는 합동 전쟁 계획인 JWPC-474.1이 마련되었다.

미국의 여러 전쟁계획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1947년 9월에 마련된 "디어랜드 계획"으로서, 캐나다를 경유한 소련의 북미대륙 침공시의 긴급대책이었다. 1947년 11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전략계획 "브로일러 0SPC-496.1"을 작성하였는데, 발발할지도 모르는 3차대전을 대비한 첫 번째 계획이었다. 계획은 B-29, B-50, B-36 등의 폭격기로 핵무기를 운반한다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계획들이 마련되어 1948년 3월 8일에는 1950년대에 계획될 제3차 세계 대전 대비 계획의 초석인 "부시웩커"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1953년까지 400개의 핵무기 비축목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 공군과 전략공군 사령부는 3차대전 발발시 전략폭격기의 잠재적 이점을 신중히 고려하였기 때문에 B-36 피스메이커를 가장 중요한 무기로 생각하였다. B-36은 2차대전 당시 유럽 상공에서 사용하려고 개발되었던 폭격기였는데, 전쟁은 끝났으나 냉전이 다시 B-36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전략공군 사령부는 B-29, B-50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B-36만이 공중급유없이 북미대륙으로부터 소련의 심장부까지 날아갈 수 있는 유일한 폭격기였다. 때문에 소련과 가까운 유럽에 배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전 영역을 타격하자면 소련과 가까운 알래스카 지역에 배치되어야 했는데 B-36 피스메이커 부대는 1948년에는 무더운 텍사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략공군 사령부는 북극지대의 혹한 속에서도 전략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해보여야 했다. 그리하여 마련된 것이 보석(Gem)프로그램이었다. 제7전략폭격비행단의 B-36 피스메이커 18대와 승무원들은 극한지 운용 평가를 위하여 알래스카의 구스 만, 레버레이더, 라임스톤, 메인 그리고 페어뱅크스 지역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B-36 피스메이커 전략폭격기의 꼬리 날개 끝단에는 추락하였을 때 찾기 쉽도록 빨간색 줄을 도색했다.

잼 프로그램에 처음 사용된 피스메이커는 기체번호 44-92007(B-36A)기로서 1948년 6월 18일, 격납고에서 극한 기후 테스트를 받기위하여 플로리다 에그린 기지로 날아갔다. 밀봉 격납고에 들어간 B-36은 극한의 영하 온도하에서 폭탄창, 포탑, 랜딩기어 등 모든 가동 부분에 대한 테스트를 받았다. 1949년 초 겨울, 수 개월동안에 걸쳐 B-36B 피스메이커들은 알래스카의 극지에서 잼 프로그램 테스트를 받았다.

더 강력한 알래스카 극지 테스트는 1950년 2월로 예정되었다. 436 폭격비행대장 빅 존 바틀렛 중령은 B-36을 이끌고 알래스카로 비행했다. 비행 중 한 대의 B-36B(44-92075)에서 엔진 화재가 발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종사는 지난 여름, 텍사스 상공에서 엔진에 불이 나 비상착륙을 경험했던 해롤드 바리 대위였다. 바리 대위는 엔진 하나가 멈췄고 2개의 엔진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고기는 2월 14일 새벽, 캐나다 남서부 해안지역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10분 후 1대의 폭격기에 바리 대위의 무선이 들어왔다.

기체에 얼음이 얼고 계기판과 엔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비상사태다. 엔진 화재와 결빙 때문에 점점 고도를 잃고 있다. 승무원들에게 비상탈출을 경고해 두었다.

44-92075기의 레이더 조작사는 기체의 위치가 시애틀 북서쪽 약 736km 지점에 있음을 알았다. 바리 대위는 캐나다 해안의 프린세스 로얄 섬으로 향했다. 어두운 새벽, 비틀거리는 폭격기의 승무원들은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어네스트 중위는 낙하산이 나무에 걸린 채 바다로 추락하는 폭격기를 바라보았다.

공군과 해군의 대규모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다. 12대의 수색 항공기들이 수색을 시작하였고 이어 합류한 항공기들이 해안선을 따라 저공비행하며 조명탄과 탐조등으로 승무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처음 나무에 걸린 4개의 낙하산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총 12명의 생존자가 구조되었다. 이들은 구조되기까지 30시간 이상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냈다. 나머지 5명의 행방을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수색은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

수색대를 도운 다음 다시 캐나다로 비행하도록 허가를 얻은 비행대장 바틀렛 중령은 알래스카에서 시애틀로 날아가 수색작업에 합류했다. 캐나다 공군 수색기가 섬 인근에서 구명 보트를 발견하였으나 승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5명의 승무원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사고 조사 후 원인은 캬브레터가 얼고, 뜨거운 배기가스 열이 엔진에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결론내렸다.

극한지에서의 폭격기 운용이 목표인 잼 프로그램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실시되었다. 영하의 기온 속에서 금속의 수축과 연료와 윤활유의 예기치 못한 문제, 의복과 승무원 건강 문제도 해결되어야할 과제였다. 공군 군의관들은 24 ~ 40시간 동안의 장시간 비행 임무를 수행한 승무원들의 피로도를 조사하였다. 극한지에서 12,192m 상공을 비행하는 동안 승무원의 식사와 의복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해결되어야할 당면 과제였다.

물론 B-36 자체는 빨리 퇴역해서 해당 프로그램의 이득을 얻지 못했지만 잼 프로그램의 교훈은 이후의 미국 폭격기에게 적용되었다.

5.4. NB-36H[편집]


원자력 폭격기를 위한 실험기였다.[10]

1950년대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를 진수하는 등 핵무기 만이 아닌 원자력 자체를 군사 분야에 이용하는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를 항공기에도 적용해보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제트엔진에서 공기를 가열하는 역할을 석유가 아니라 원자로에게 맡기는 열핵제트 원리가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특히 핵무기를 탑재한 전략 폭격기에 적용하기로 했는데, 충분한 항속거리가 필요한 전략 폭격기에게 원자력을 적용하면 항속거리 제한을 완전히 해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험 대상이 이 B-36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B-36의 동력에 원자력 엔진을 바로 적용시킨 것은 아니다. 일단은 단순히 원자로를 항공기에 탑재하고, 비행 시간 동안 원자로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부터 진행했다. 이를 위해 약 1000킬로와트의 출력을 내는 실험용 원자로 ASTR을 B-36에 탑재하고 시험 비행에 나섰다. 물론 방사선 차단을 위해 원자로에 약 4톤 가량의 차폐막을 설치하고, 승무원 탑승 구역에도 고무 등을 이용한 차폐막을 설치했다. NB-36H의 첫 비행은 1955년 9월 17일에 이루어 졌고 1957년 3월 까지 총 47회의 실험비행을 실시하였다. 이 실험 비행에는 해병대원 1개 소대 병력이 별도의 수송기에 탑승해서 만약 추락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고 지점에 낙하산으로 강하해 현장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행히 실험 비행 기간동안 별다른 사고는 없었고, 실험 결과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방사능의 누출 우려는 없다'라고 나왔다.

하지만 이 원자력 엔진을 항공기에 본격적으로 탑재하는 연구는 상당히 지지부진했다. 당시 원자력 엔진의 개념은 터보 제트 엔진의 공기 압축 방식에 원자로의 열을 이용하는 형태였는데, 이 방법이 상당히 위험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용적인 문제도 있었다. 위의 시험 비행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자로를 탑재한 항공기가 추락할 경우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원자로 엔진의 특성상 항공기에 탑재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인력과 장비, 비용이 필요한데 기존의 항공기들과 비교했을 때 가성비 면에서 어떤 메리트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발생했다. 게다가 다른 핵투발 수단인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수준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항공기 성능으로도 충분한 전략 폭격기에 원자력 추진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적용하겠다는 건 더더욱 비효율적인 생각이 되었다.

결국 1961년 3월 28일, 케네디 대통령은 이 핵추진 연구 프로그램을 공식 중단시켰고, 남은 것은 사진 등의 연구 자료와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실험용 원자로 정도 뿐이다.

핵추진 제트엔진이라는 개념은 그 후 무인폭격기인 플루토 계획으로 이어졌으나, 이 역시 가성비 부족 및 소련과의 관계 안정화를 위해 취소되었다. 애초에 플루토 계획은 도대체 무슨 마약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해낸 건지조차 의문이다


5.5. YB-60[편집]


B-36 피스메이커에 후퇴익을 적용하고, 프랫 & 휘트니 J57-P-3 터보팬 엔진 8기를 장착한 프로토타입. B-52와 경쟁하기 위해서 컨베어가 될대로 되라 식으로 마개조한 B-36이다. 아무래도 B-36이 워낙에 크고 무거워서 B-52에 쓰이는 동일한 엔진인 J57을 8기나 때려박았다. 폭장량이 72,000 파운드로 43,000 파운드의 B-52보다 높았고, 두꺼운 동체 때문에 Mk.6 핵폭탄 같은 뚱뚱한 폭탄[11]도 탑재가 가능했지만, 일단은 B-52가 더 빠르고 상대적으로 작고, 무엇보다 YB-60은 그 큰 크기에 전투행동반경이 고작 4,400km밖에 안되었고, 선회력 또한 심각하게 느렸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쟁작인 B-52는 같은 엔진 수와 비슷한 폭장량[12]으로 무려 14,000km의 전투행동반경을 찍어버렸다., 결국 그렇게 YB-60이 패할 위기에 처하자 컨베어사는 터렛 수를 후미에 20mm 2정 포탑 1기를 10기로 늘리고 5명의 승무원을 9명으로 늘리는 개량[13]과 동시에, 무게를 감량하고 속도가 더 빠른 개량형을 내놓아 시험 비행엔 성공하지만, 오히려 B-52보단 느리고 항속거리도 별로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줄 뿐이였다.[14] 사실 그뿐만 B-52보다 완성도도 떨어져서 주날개 흔들림 문제, 진동 문제, 엔진 부조화 문제, 전기계통 문제등 여러 문제점들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YB-60은 결국 묻혔다. 이후 컨베어는 자사의 초음속에 가까운 여객기인 컨베어 880 시리즈 여객기로 관심을 돌린다. 그렇게 컨베어는 YB-60 이후 B-58 허슬러를 마지막으로 개발 및 생산한 후, 군용기에서 손을 떼버렸다.

6. 말로[편집]


B-36 피스메이커의 첫 최장시간 비행기록은 컨베어 비행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RB-36(44-92090)은 1951년 1월 14일 오전 9시 05분에 이륙하여 1월 16일 밤 12시 25분까지 총 51시간 동안 비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전략 폭격비행단의 승무원들은 긴급사태에 즉각 대응하기 위하여 고도의 훈련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사고도 많았다. 1949년 2월,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비행하던 조지 베네디트 대위의 B-36이 번개에 맞아 동체에 10인치 가량의 구멍이 났으나 운좋게 큰 피해는 없었다. 한달 후, 9폭격비행대 제임스 쿠퍼 대위는 메사추세츠 웨스토버 기지에 불시착했다.

엔진과 전기 계통에 관련된 고장 문제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1949년 7월, 제436폭격비행대의 B-36이 12,190m 상공에서 엔진에 화재가 발생했다. 해롤드 바리 대위는 인접한 2개의 엔진 동력을 차단 시킨 다음 나머지 3개의 엔진으로 32km를 비행하여 카즈웰 기지에 무사히 비상착륙하였다.

가장 큰 첫 번째 사고는 1949년 9월 15일 밤, 카즈웰 기지에서 훈련 중에 일어났다. 저녁 7시 45분, 훈련을 위하여 활주로를 질주하던 B-36(44-92079) 조종사 토이 허스밴드 소령이 정상적 이륙 속도까지 도달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이륙에 실패한 폭격기는 활주로 끝을 벗어나 워쓰 호수로 돌진하여 13명 중 1명이 충격으로 사망하고 4명은 정신을 잃은채 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5,000시간 이상의 비행을 기록한 B-36 폭격기들의 첫 번째 대형 사고였다. 사고 조사반은 2개의 프로펠러가 역회전한 것을 발견하여 생산되고 있는 폭격기들을 수정하는 등 긴급히 문제를 해결하고 이륙 시 안전 조치도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개수하고 실전에 맞추어서 대응방침이나 개량도 진행되었지만, 이미 B-36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미 공군이 1953년, 파이콘 프로젝트를 마련하였을 때까지 비밀로 했던 것은 미 전략공군사령부(SAC)가 가장 우수한 폭격기인 B-52로 전력을 대체할 때까지만 B-36 피스메이커 폭격기를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엔진이 제트엔진을 장착한 B-52 스트라토포트레스 폭격기와 B-47 스트라토제트 폭격기의 실전배치가 이루어지면 B-36은 1954년부터 단계적으로 퇴역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략공군사령부가 충분한 숫자의 신형 제트 폭격기들을 도입하기까지는 약 5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B-36 피스메이커 운용 연장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미 공군내에서 B-36 피스메이커에 대한 미래의 운용 계획 토론이 있었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함상전투기를 지원하는 공중조기경보기로 활용하자는 제안과 장거리 폭격에 나서는 B-52와 B-47의 공중급유지원기로 활용하자는 등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제안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떤 것도 더 이상 B-36의 수명을 늘리지는 못했다.

결국 1959년 12월에 마지막 B-36이 퇴역하였다. B-36의 최종 기체의 마지막 납품이 1954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납품하자마자 퇴역한 셈이다. 게다가 생산량도 거대한 크기를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총 384대고, 후속기인 B-47이 1977년까지 현역이었으며[15], B-52는 100년을 채울 기세로 21세기에도 계속 현역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수명이 짧았다. 마지막으로 폭격기의 본분인 실전상황을 한번도 겪지 않고, 실전에서 폭탄 1발 떨어뜨리지 못한채 생을 마감한 셈이니...

7. 문제점[편집]


B-36이 이렇게 용두사미식의 결과를 맞이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너무 느린 속도 : 2차대전에 출현했다면 공중요새 소리를 들었을지는 몰라도, 이미 냉전시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MiG-15같은 것에 걸리기만 하면 밥으로 전락해버린다. 이건 이미 B-29가 입증한지 오래다. 물론 높은 고도에서 비행이 가능하므로 종종 소련 전투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미 그런 것에 대비하기 위해 SA-2같은 대공 미사일이 한참 개발되고 있었다. 결국 당하는 것은 예견된 셈이라는 이야기다.
  • 운용의 난이도가 높음 : 거대한 크기, 무거운 중량, 레시프로 엔진과 제트 엔진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들고 정비하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6기의 프로펠러를 돌리는 레시프로 엔진의 경우 그 당시 항공기용 피스톤 엔진의 한계에 가까운 물건인지라 수명도 짧고 유지보수가 자주 필요했다. 일례로 윤활유만 따져봐도 엔진 1기당 380리터의 윤활유 탱크가 필요했지만, 이 윤활유를 1회의 비행에서 다 소모해버리거나 교환해야할 수준으로 만들어버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행할 때마다 윤활유를 드럼통 단위로 갈아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비행중에 윤활유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비행계획을 축소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 수소폭탄 사용시 자신도 휘말린다 : 앞서 언급한 느린 속도와 관련이 높은데, 수소폭탄을 투하한 다음에 폭발할 때까지 폭발반경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자신도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8. 평가[편집]


종합하면, 레시프로 엔진과 프로펠러를 이용한 폭격기의 최종단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한계점을 보여준 거대한 물건이다. 그리고 어떤 물건이든지 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물건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만 등장했어도 공중요새 소리를 들으면서 활약할 수 있었겠지만, 전후 기술발전이 너무 빨라서 이미 한국전쟁 시절로 가면 공중요새를 씹어버릴 각종 제트 전투기가 등장하는 바람에 개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G10N 후가쿠도 실체화되었으면 B-36꼴이 났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무작정 때만 탓할 수는 없는 것이, 다른 폭격기와는 달리 혼자서 가장 강력한 폭격기 분야를 담당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개발중인 폭격기가 취소되는 상태에서도 개발계획이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느리긴 하지만 다른 폭격기들이 할 수 없는 무착륙 왕복폭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과 긴 개발기간을 거치고도 양산된 것이다. [16] 그러므로 개발 초기에 개발역량을 집중했더라면 제2차 세계 대전 최강의 폭격기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9.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맨위의 영상과 같은 영화 "Strategic Air Command"에 출연했다. 엔진 가동하는 부분과 기체 외부에서 본 비행장면은 실기체로 한것으로 보인다.


9.1. 도미네이션즈[편집]


원자력 시대 폭격기로 중장갑 폭격기가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폭격기(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2. 스트라이커즈 1945[편집]


미국공항 스테이지에서 중간보스로 등장한다. 이후 스트라이커즈 1945 플러스에선 숨겨진 비행기인 XP-55로 폭탄을 쓰면 지원기로 날아와서 사방에 융단폭격을 갈기며 지나간다. XP-55도 마찬가지로 미국공항 스테이지에서 잡졸 적기로 나왔다는 점이 있다.


9.3.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편집]


기간한정 판매 형식으로 출시되었지만 기체가 너무 커서 공중전에 매우 불리하기에 굳이 이녀석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유저들은 너무나도 적었다.


9.4. 별이 펄럭일 때[편집]


웹소설의 후반부 몰락 작전 시점에서 B-29의 후속 기종으로 등장한다. 컨커러(정복자)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으며 작중의 묘사는 말 그대로 초고고도 요새의 압도적인 크기와 거대하고 아름다운 사이즈를 가진 전략폭격기의 위엄이자 작중의 빌런 세력인 시홀앙르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불태우며 천벌을 내리는 전설 속의 화룡이자 코즈믹 호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 묘사만 보면 흡사 베트남 전쟁 당시 라인배커 작전, 롤링썬더 작전에서 북폭임무를 수행하던 B-52에 맞먹는 무시무시한 연출을 보여준다.


9.5. IL-2 Sturmovik[편집]


1946 에서 유저모드로 탑승 가능한 기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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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략 항공 사령부. 1992년 전술 항공 사령부(TAC)와 통합되어 항공전사령부(ACC)가 출범하면서 사라진다. 전략폭격기, 붐 방식 대형 급유기, 지상발사형 ICBM, 전략정찰기 등을 운용했으며 초기엔 폭격기 호위를 위한 장거리 전투기도 잠시 운용하기도 했다.(50년대 후반 TAC로 이관)[2] 심지어 현재까지 개발된 모든 폭격기 중 최대이기도 하다.[3] B-36D부터만. B-36D 이전 형식은 와스프 메이저 엔진 6기만 장착되었다.[4] F2G 슈퍼 콜세어에도 탑재된 그 엔진 맞다.[5] 대략적으로 33톤가량의 폭탄을 탑재한다는 이야기다. B-29의 4배 가까이 되며, B-52H 31.5톤보다 약 4% 많은 폭장량이다.[6] 당장 세계지도를 보면 미국은 위로는 최우선 동맹국인 캐나다, 아래로는 거의 미국에 종속되다시피 한 멕시코 사이에 끼어 있고, 좌우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끼고 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장벽으로 보호받으면서 본토 방위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전 군사력을 해외에 투사하는 것이 미국의 국방 정책의 기본이다. 그런데 영국이 사라지면 유럽 방면에서 전력을 투사할 교두보가 사라지는 셈이니.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미국의 상륙함대는 서유럽 상륙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7] 10,000파운드의 폭장량, 10,000마일의 최고항속거리[8]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남태평양해역군 항공사령관으로 맹활약한 사람이다. 능력이 출중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맥아더의 참모장이었던 리처드 서덜랜드와 함께 특급 후빨러로도 유명했다. 서덜랜드와 달리 실제로 능력도 있었던 것이 그나마 맥아더에게는 다행이었다.[9] B-50의 개량버젼. 허나 취소되었다.[10] 6년후 소련에서 Tu-95를 바탕으로 원자로를 설치한 실험기 Tu-95LAL를 만들었다.[11] 팻맨의 개량형 버전이다.[12] YB-60의 폭장량을 줄여 같이 맞춘거라 YB-60이 더 유리한 조건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3] 의외로 포탑이 비행성능에 주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14] 물론 폭격기가 폭장량이 적으면 안되긴 했지만 B-52의 43,000 파운드도 결코 적은양은 아니였고 이미 가볍고 훨신 강력한 폭탄들이 나온 상황이라 그런 무식한 폭장량과 넉넉한 적재 공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속거리는 공중급유기를 보내야하고 그 공중급유기를 보낼 기지까지 세워야 하는 복잡한 문제지만 폭장량은 그냥 폭격기를 더 보내면 해결될 일이였다.[15] 전자전기 EB-47E 기준. 기존 B-47E는 1969년까지 현역이었다.[16]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핵무기들 중 두번째로 강력하며 가장 거대한 수소폭탄인 Mark 17을 탑재할수 있었던 유일한 폭격기였고, 이 폭탄을 탑재하는 B-36은 기존 2개의 폭탄창을 1개로 합치는 개수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당시 선빵은 같은 미 공군의 B-45, B-47, B-52와 그외 소형 핵폭탄을 장착할수 있는 전투기와 공격기들과 A-2, A-3, A-5 등 미해군/미해병대의 함재기들과 영국 공군의 V폭격기 시리즈 등이 맡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