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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한

덤프버전 :





묘호없음
시호없음
제호창려왕(昌黎王)[1]
연호청룡(靑龍, 398년)
성씨난(蘭)
한(汗)
생몰년도? ~ 398년
재위 기간398년

1. 개요
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5호 16국시대, 16국중 하나인 후연의 비정통 황제였다.

폐주이기에 묘호시호는 없다. 제호(帝號)는 창려왕(昌黎王)이었다. 자신의 딸 둘을 모용해(慕容楷)와 열종 혜민제 모용보에게 시집보냈으며, 형 난제(蘭堤), 동생 난가난(蘭加難)과 함께 모용씨 황실의 외척으로 세조 성무제 모용수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평범한 외척이었다. 용성에 주둔하던 모용회(慕容會)의 반란[2]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398년 혜민제 모용보는 중신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북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남은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을연(乙連)에 이르렀을 때 단속골(段速骨)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용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난한은 사실 단속골과 한패였다. 5월에 용성으로 돌아온 난한은 혜민제와 그의 태자인 모용책(慕容策)을 시해하고 마침내 자신을 '창려왕'이라 칭한 후 제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난목(蘭穆)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잠시동안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째서인지 난한은 자신의 사위이자, 혜민제 모용보의 서장자인 모용성(중종 소무제)만큼은 죽이지 않고 남겨놓았는데, 모용성은 황실 복고를 위해 난한과 그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갈라놓았다. 398년 7월 모용성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난한은 일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이후 모용성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2.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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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칭. 특이하게도 황위를 찬탈해놓고도 제(帝)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목민족 국가들의 칭호인 선우보다 더 격이 높은 대선우를 칭했고, 대장군으로도 칭했다.[2] 용성을 포위하고 자신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