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박노식(1930)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본관 밀양(密陽).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이냐시오이다. 배우시절 별명은 마도로스 박.
2. 생애[편집]
1930년 2월 4일,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읍 봉강리(현 여수시 봉강동)에서 태어났으며[1] , 여수 수산중학교를 거쳐 순천사범학교[2] 체육과를 졸업했다. 1950년에 여수소라국민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수도사단 선무공작대에 입대·종군했다.
이후 충남 대전의 유랑극단 노래자랑에 합격하여 악극단원으로서 '나그네 설움' 등을 시작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고[3] , 1956년에 이강천 감독의 영화 <격퇴>에서 검사 역으로 은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김묵 감독의 <현상금 붙은 사나이>를 비롯해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 이만희 감독)>, <도망자(1965, 이강원 감독)>, <0번 상해돌파(1967, 신경균 감독)> 등 온갖 액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맘껏 발산해 출연 영화마다 수많은 흥행기록 및 집객동원을 기록했으며, 1970년 설태호 감독 영화 <남대문 출신 용팔이>를 시초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의리파 주먹 '용팔이' 캐릭터를 창조해내 또 주목을 받았다.
그 외에 영화 <상해임시정부와 김구선생> 에서는 윤봉길 역으로 출연하여 막판에는 일본군에게 잡혀가는 씬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이후 영화 '한양건달' 에서는 10살 연하인 배우 최불암과 앙숙관계 역할로 열연했다. 1971년 <인간 사표를 써라>를 시초로 몸소 메가폰을 잡기 시작해 1976년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1983년 <돌아온 용팔이> 등 총 14편을 연출했다. 특히 용팔이 시리즈에는 더 애정을 보였다. 1971~1979년 및 1981~1982년까지 두 차례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에 온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1987년 영구귀국 후 <가요무대>에 가끔 출연하거나 1993년에 아들 박준규와 KBS2 미스터리 드라마 <금요일의 여인: 홍리나의 위험한 선택>에 출연해보기도 했다. 1995년 4월 3일 오후, 서울 방학동 삼익아파트 자택에서 65세에 당뇨병 및 천식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서울 공항동 성당에서 영화협회장으로 거행한 뒤 방학동 천주교혜화동교회 추모공원에 유해가 안장됐다.
3. 특징[편집]
후배 윤정희의 말에 따르면, 남자 후배들에게는 엄격한 군기반장이었지만 여자 후배들에게는 매우 자상했다고 한다.
주사가 심한 편이라 선배인 장동휘에게도 대들다가 두들겨 맞은 적도 있고, 후배인 신성일도 폭행한 적이 있다.[4] KBS2 상상플러스에 박준규와 함께 출연한 주현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셔서 경찰서 유치장에 자주 들어가셨는데, 촬영있을때마다 후배들이 가서 모셔오고, 끝나면 다시 유치장으로 모시고 갔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5]
야인시대에서 쌍칼을 맡았던 배우 박준규가 아들이다. 박준규는 2011년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 마도로스 박[6] 역으로 특별 출연한 바 있다.
다찌마와리 연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가 타계했을 때 아들 박준규는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박노식이 “연기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연기해야 한다”라고 아들에게 말을 해서 박준규는 부친의 와병 중에도 공연을 하였다. 박노식이 1995년 4월 3일에 타계했을 때 박준규는 부산에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하고 있었는데, 타계 소식을 뮤지컬에 함께 출연했던 독고영재가 부친 독고성으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7] 그런데 박준규가 무대에서 공연 중이라서 전할 수 없었고, 1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박준규에게 부친의 타계 소식을 전하고 서울로 보냈으며 박준규가 맡았던 역할은 윤다훈이 대신 하였다. 이 후 독고영재가 관객들에게 사정을 전하고 양해를 구하자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4. 저서[편집]
- 뻥까오리 백작: 박노식 은막 43년의 고백 - 씨와날. 1995.
5. 수상[편집]
- 1963년 제2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1965년
- 제4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제3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용사는 살아 있다)
- 1966년 제13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1967년 제6회 대종상 남우주연상(고발)
- 1968년
- 1970년 제7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돌아온 팔도사나이)
- 1971년 제17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조연상(전쟁과 인간)
-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소장수)
[1] 그런데 정작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순천시 출신인 해태가 여수 아줌마와 고향 대결을 할 때 박노식을 순천 사람이라고 내세운다.[2] 1946년 11월에 설립되었다가 1962년 2월에 폐교되었는데, 뒤이어 순천실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1967년에 지금의 순천공업고등학교로 재개편되었다.[3] 참조.[4] 심지어 신성일은 박노식의 동생과는 친구사이였다.[5] 실제로 1968년에 폭력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6] 1964년 작품으로, 감독에 신경균, 출연 배우들로는 이예춘(배우 이덕화의 아버지.), 도금봉, 박노식 등이 있다. 여기서 박노식 본인이 맡은 배역이 바로 마도로스 박.[7] 독고성은 당시 박노식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19:12:48에 나무위키 박노식(1930)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