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쓸쓸한 당신의 삶에, 아직 희망이 있다... 나는 마약을 사고 팔고 밀입국자들을 짝퉁가방 공장에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다. 고질병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암이란다. 남은 시간 3개월… 엄마의 우울증 때문에 못난 아빠와 함께 사는 나의 착한 두 아이는, 아직 어리다.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나의 특별한 능력은… 불행히도 나의 죽음을 보게 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마지막 순간, 실패한 인생이라 불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것처럼, 험한 세상에 남겨질 나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기억을,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하고 싶다. 3개월... 한 달... 하루... 한 시간... 일분... 나의 아이들아,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Javier Bardem's searing performance helps to elevate Biutiful, as does 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s craftsmanship, but the film often lapses into contrivance and grimness.
하비에르 바르뎀의 타오르는 듯한 연기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장인정신이 담긴 <비우티풀>을 더욱 빛내주긴 하나, 영화는 종종 억지로 부자연스럽게 짜 맞춘듯한 암울한 전개로 빠지곤 한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바로 그 아버지들의 아버지에 낙담하고 연민하는 영화. 아버지들의 분열증이 화면 안의 인물과 거울 안에서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순간 나는 감독이 의도한 바로 그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모두 슬프고, 모두 결핍되어 있으며, 모두 발버둥을 치고, 모두 새끼를 거두려다가, 모두 죽음에 이른다. 다층적인 운명의 충돌을 장중하게 그려내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이냐리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이고 동시에 탐미적인 영화. 아름답다.
암에 걸렸다. 죽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 최대한 많은 돈을 모으는 것뿐,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옥스발(하비에르 바르뎀)도 자신의 죽음을 유예시킬 순 없다. 주인공이 끝까지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대개의 경우와 달리 옥스발이 차라리 빨리 죽길 소망할 정도로 그가 발붙인 곳은 지옥에 가깝다. 완벽한 악인이 되지 않으면 더 괴롭기만한 세상에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악착같이 환전한 그가 바란 것은 단 하나. 아이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뿐 아니라 영화를 보게 될 이들 역시 이 가련한 남자를 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