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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케임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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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군인이자 귀족. 캐나다의 제16대 총독과 남아프리카 연방 제4대 총독을 지냈다.
영국의 국왕 조지 5세의 왕비인 테크의 메리의 막내동생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외삼촌이다.
2. 생애[편집]
1874년 켄싱턴 궁전에서 테크 공작 프란츠 폰 테크와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의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들 사이에선 애칭인 알지(Alge)로 불렸다.
1883년 가족이 빚 때문에 유럽 대륙을 전전했다. 이때 형 두 명은 영국의 기숙학교에 남았으며, 어린 알렉산더는 누나 테크의 메리와 주로 시간을 보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튼 칼리지에서 재학했다. 1892년에 육군 학교에 들어간 알렉산더는 군인이 되어 제2차 마타벨레 전쟁과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1903년 11월 16일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딸인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와 약혼했다. 에드워드 7세는 조카 앨리스를 통치 가문에 시집보내고 싶어했지만, 혈우병 보인자인 앨리스와 혼담을 나누고 싶어하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는 앨리스와 사랑에 빠져 1904년 2월 10일에 윈저 성 성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2남 1녀가 태어났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벨기에와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하면서 1915년 12월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으로 영국에서 반독일 감정이 극심해지자 1917년 7월에 원래 성인 폰 테크(von Teck)를 포기하고 형과 함께 케임브리지(Cambridge)로 성을 바꾸었다. 1917년 11월 7일에 매형인 조지 5세로부터 애슬론 백작과 트레마톤 자작 작위를 받았다.
종전 후 퇴역한 알렉산더는 연구 기관을 지원하는 등, 여러 민간 사회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23년에 조지 5세는 알렉산더를 중장으로 승급시키고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924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총독직을 수행했다. 당시 남아프리카 연방의 정치가들은 독립을 원했는데 알렉산더는 독자적인 국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이들의 요구를 적절하게 수용하고 조율하면서 정치가들의 신뢰를 얻었다. 총독직에 있는 동안 가터 기사로 임명되어 직무를 완료하고, 영국에 돌아온 1923년에 가터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런던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혼란스러운 1940년에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캐나다에서 모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인들을 위한 의료 사업에 지원하면서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여러 왕족들이 캐나다로 피신했기에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 당시 왕세자였던 노르웨이의 올라프 5세와 메르타 왕세자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타 황후 등, 많은 왕족들이 알렉산더를 방문했다.
1946년에 총독 직이 끝나고 영국에 돌아와 켄싱턴 궁전에서 노후를 보냈다. 말년에도 공무를 수행했으며, 런던 대학교 총장[1] 으로 1955년까지 재직했다. 1957년 1월 16일에 사망해 프로그모어 왕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1939년에 축구 협회의 협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축구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축구 협회의 협회장이 된 최초의 케이스이다. 이후 축구 협회장은 계속해서 왕족들이 임명되었다.
- 막내인 모리스는 유아기에 사망하고 혈우병 환자였던 첫째 아들 루퍼트는 20살에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애슬론 백작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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