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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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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曹)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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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숙 진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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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태백 ||<width=20%>
제3대

중군 ||<width=20%>
제4대

궁백 ||<width=20%>
제5대

효백 ||<width=20%>
제6대

이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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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유백 ||
제8대

대백 ||
제9대

혜백 ||
제10대

조백 석보 ||
제11대

목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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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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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曹)나라 16대 국군
공공
共公
희(姬)
조(曹)
양(襄)
아버지조소공(曹昭公) 희반(姬班)
생몰 기간음력기원전 ???년 ~ 기원전 618년
재위 기간음력기원전 652년 ~ 기원전 618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중국 춘추시대 조(曹)나라의 제16대 군주. 조소공의 아들. 조문공의 아버지. 진(晉)나라공자 중이(重耳)[1]에게 무례하게 굴어 그 공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군주가 되자 그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했다.


2. 생애[편집]


조 소공 10년(기원전 653년), 조 소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조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겨울에 조 공공은 조 소공을 안장했다.

조 공공 원년(기원전 652년), 조 공공, 노희공, 주나라의 사신, 제환공, 위문공, 허 희공, 진(陳)나라 세자와 조나라의 도읍(桃邑)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왕실의 안정이었다.

조 공공 2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조 공공, 노 희공, 송양공, 진목공(陳穆公), 정문공, 허 희공과 규구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6년(기원전 647년), 조 공공이, 노 희공, 제 환공, 송 양공, 위 문공, 진 목공, 정 문공, 허 희공과 함읍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8년(기원전 645년), 초(楚)나라서(徐)나라를 치자 제 환공이 노나라, 진(陳)나라, 정나라, 허나라, 조나라 7개 국의 군주를 소환해 모구 땅에서 회맹을 가져 서나라를 구하려고 했다. 7월, 제나라와 조나라는 초나라의 여 땅을 공격했다.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송나라는 조나라가 원정을 가 나라가 비자 조나라를 쳤다. 이에 제후들은 송나라에게 한을 품게 되었다.

조 공공 9년(기원전 644년), 조 공공은 노 희공, 제 환공, 송 양공, 진 목공, 위 문공, 허 희공, 형나라 후작과 회 땅에서 회맹했다.

조 공공 12년(기원전 642년), 제 환공이 관중의 말을 듣지 않아 내란이 일어나자 송나라, 조나라, 위나라는 제나라를 쳐서 공자무휴를 쳐서 죽이고, 제 환공의 다른 아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다. 송 양공은 이 사건을 계기로 패자가 될 뜻을 품었다.

조 공공 13년(기원전 641년), 송 양공이 우읍에서 회맹했다. 이때 송 양공이 회맹에서 늦은 증나라 군주를 삶아 죽였다. 이에 조 공공은 송 양공에게 대들었다.[2] 이에 송 양공이 크게 분노해 조나라를 쳤는데, 양국 다 소득이 없어 결국 물러났다.

조 공공 16년(기원전 637년),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가 조나라에 와서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공공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 늑골을 훔쳐보려한 무례함을 저지르려 했다.[3] 이때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간했으나 목욕하는 것을 끝내 훔쳐보았다. 이에 희부기는 그 아내의 조언을 듣고 선물로 아름다운 옥돌과 음식을 바쳤다. 공자 중이는 음식은 받아들였지만, 옥돌은 거절했다. 희부기의 아내와 희부기는 공자 중이가 장차 패자가 될 것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자 중이가 진후가 되니 그가 바로 진(晉) 문공이다.

조 공공 21년(기원전 632년) 진 문공이 조 공공의 무례한 태도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조나라를 쳐서 조 공공은 포로가 되어 진(晉)나라로 끌려갔다. 진 문공은 희부기의 가족들을 보호하라고 했다. 진 문공은 조나라를 멸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동성 제후국을 없애는 것은 제후들을 호령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간해 조 공공은 귀국할 수 있었다.

조 공공 24년(기원전 629년), 진 문공이 다시 조 공공을 핍박하자 노나라에게 제서 땅, 자도 이남 등이 할양되어 조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다.

조 공공 30년(기원전 623년), 조 공공이 진(晉)나라와 공물 바칠 일을 상의했다.

조 공공 33년(기원전 620년), 조 공공은 제소공, 송소공, 위성공, 정목공, 허 소공, 진(晉)나라의 조돈과 우읍에서 회맹해 진영공을 세웠다.

조 공공 35년(기원전 618년), 조 공공이 죽고 그 아들인 수(壽)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 문공이다.

[1] 훗날의 진문공(晉文公)이다.[2] 다만, 이것은 인신공양해서 실망해서라기 보다는 송나라가 조나라를 뒷치기한데 한을 품어서 그렇다.[3] 이건 요즘에도 무례한게, 목욕한 것을 훔쳐보는 것이 과연 예의에 맞는 일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 요즘에는 그것을 증거로 남겨 신고하면 처벌 받는 행위다. 다만 남자가 남자끼리 본 거라 요즘 기준으로는 미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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