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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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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엔은 1905년 이후의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쓰이던 한반도의 통화이다. 제일은행권, 구(舊)한국은행권, 조선은행권의 세종류가 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앞의 두 종류는 짧은 시간 동안만 유통되었고 대부분의 시기는 조선은행권이 사용되었다.
2. 역사[편집]
2.1. 대한제국 시기[편집]
러일전쟁이 1904년에 터지고,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지면서 대한 제국 정부에 일본이 2명의 고문을 파견한다. 이중에서 서양인 외교 고문이 뒤에 암살당하는 더럼 스티븐스이고, 일본인 경제 고문이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이렇게 파견된 메가타가 역점을 두고 진행한 것이 화폐정리사업이다. 메가타는 대한 제국의 전환국에서 발행했던 기존의 백동화와 상평통보를 폐지하기 위해서 1905년 일본 제일은행[1] 에 위탁해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선 엔의 시작이다.[2] 1909년 이후에는 한국통감부의 사실상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한제국의 구(舊)한국은행에 업무를 이관한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1911년 3월 구(舊)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3] 그러나 경술국치후 조선은행으로 바뀐 뒤에도 준비부족 등의 이유로 1914년까지 전의 제일은행권과 구(舊)한국은행권을 혼용하였다.
보조 단위로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보조단위 동전인 전(센, 銭)이 쓰였다.[4]
2.2. 조선 총독부 시기[편집]
조선 엔은 일본 은행권 금엔 지폐를 정화보증으로 삼아 찍어냈다. 한국에서만 쓰이지 않고 만주, 요동, 일본의 지배하의 중국에서도 통용되었다. 식민지 내에서만 쓰는 화폐를 따로 만든 셈이다. 식민지도 외국이라면 일종의 국제 화폐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에 조선 은행은 지폐만 발권하였으며, 동전은 일본 엔화가 그대로 통용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한국의 오래된 집에서 大日本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동전을 간혹 볼 수 있으며, 한국의 고화폐 수집상에서 소장중인 해방 전 일본 동전도 상당히 많다. 특히 다이쇼 시대부터 국가총동원법이 선포된 1938년 전까지 대량으로 발행 및 유통되었던 봉황 50전 은화가 많이 보이는데, 도합 6억개 이상 발행되었다. 그리고 배재학당 건물에서도 10엔짜리 금화가 발견된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일본어 상용 정책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원'이라고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초창기에는 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엔을 사용하면서, 원으로 부른 경험이 있는 세대들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일본 엔을 '원'으로 부르기도 했다.(1968년 중앙일보 기사)
2.3. 해방 이후[편집]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부터 미군이 주둔한 1945년 9월까지 일본 정부는 도쿄에서 급히 돈을 발행하여 공수하고, 닳아서 폐기해야 할 구권을 계속 보관하는 등의 작업으로 기존 발행량의 두배가 넘는 돈을 쌓아둔 뒤 패망이 확실시 될때부터 미군정이 들어올때까지 돈을 살포하여 일본인 귀향 자금,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재산 분배, 퇴직금, 재한 일본인 단체의 귀국 자금으로 썼고 그 돈이 풀리자 한국 내의 물가가 넉 달 사이에 수십배로 폭등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에 의해 조선은행법 효력이 존속되어 미군 군표와 함께 조선은행권이 계속 통용되었다. 이후 도안이 동일한 상태로 조선은행 원을 발행하게 된다.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재정 적자를 조선은행권을 찍는 것으로 해결하라고 미군정 재무국장 찰스 고든 중령에게 권유했다. 이때부터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통화팽창이 주된 원인이 되어 물가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출처:임성욱
조선총독부의 불법 화폐 남발과 미군정의 통화정책으로 1945년 9월 총 통화액은 130억 정도였다. 통화발행고 90억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음성 자금 40~45억을 합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남발한 화폐는 위폐로 의심받을 정도로 품질이 나빠 경제에 혼란이 생겼다.
그러자 미군정은 고작 천만원 정도의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것이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누명을 쓴 독립운동가는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한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또한 김철수(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박낙종과 송언필,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도 누명을 썼다.
독립운동가를 검거한 경찰들이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총괄자 임영태는 친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조작 사건의 시초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분석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부활한 친일파는 4.3사건 및 6.25전쟁에서의 학살의 주범이 된다.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조병옥-장택상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경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되고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됨으로써 향후 반공 체제 형성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법적 한도를 넘어선 피의자에 대한 장기 구금 및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강압 수사 방식이라는 일제 경찰의 유산도 정판사 ‘위폐’ 사건을 거쳐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위폐 공판 소요 사건에서의 비무장 대중에게 총을 쏘는 과잉 진압 방식 역시도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116) 1946년 가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과잉 진압 및 이후 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은 위폐 제조 범죄로 인해 민심이 불안해지고, 매점매석, 낭비 풍토가 조장되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77) 이는 일제의 화폐 남발, 미군정의 일제 화폐 정책 승계, 각종 경제 실책 등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폐위조범, 즉 정판사 ‘위폐’ 사건 관계자 및 공산당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정 측이 이러한 공산당의 경제 교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5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백원짜리 신지폐, 즉 조선은행권 100원권 정(丁)권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으며,78) 7월 1일 신권을 발행하였다.(중략) 결국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를 통해 경제 혼란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 책임과 감수해야 할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3. 종류[편집]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조선 은행권의 종류는 발행 순서대로 금권 → 개권 → 갑권이며 지급 어음으로는 1차, 2차, 3차가 발행되었다.
3.1. 금(金)권 시리즈[편집]
조선은행권 첫 발행 권종이다. 금과 교환해줄 수 있는 권종이라고 해서 금권이라고 불린다. 1914년에 백원권이 먼저 나왔으며, 1년 뒤인 1915년에 일원, 오원, 십원이 발행되었다. 고액권인 백원권이 먼저 발행된 이유는 당시 소액권의 경우 구 한국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이 유통 가능했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고액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발행순서는 금 백원권 -> 금 일원권 -> 금 오원권 , 금 십원권 순서이다.
3.2. 개(改)권 시리즈[편집]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에서 사용할 통화 및 군자금을 조선은행을 통해 조달하기 위해,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고 금과 교환해주던 금권 발행을 중지하고 개권을 발행했다. 이때부터 조선은행권의 전체적인 도안이 정해졌으며, 이 수노인 도안은 해방 후 발행된 마지막 조선은행권까지 이어진다.
발행 순서는 개 일원권 유번호 → 개 십원권 → 개 오원권 → 개 백원권 순서이다.
3.3. 갑(甲)권 시리즈[편집]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을 지속함에 따라 물자 부족이 심각해지자, 종이의 질을 낮추고 색조도 줄인 갑권을 발행하게 된다. 일련번호가 있는 유번호가 먼저 나오고 이후에 일련번호가 없는 무번호가 나오게 된다. 일원권은 기존의 개 일원에서 번호가 없는 무번호권으로 발행되었다. 시기가 같으므로 갑 시리즈로 분류한다.
발행 순서는 갑 오원권, 십원권 → 개 일원권 무번호 → 갑 백원권 → 갑 십원권 무번호 → 갑 오원권 무번호 순서이다.
3.4. 미발행권[편집]
4. 환율과 가치[편집]
- 명목 환율 : 일본은행권 1엔 = 대만은행권 1엔 = 조선은행권 1엔 = 만주 중앙은행권 1위안 = 중국 연합준비은행권 1위안
- 실질 가치(1940년대 전반기) : 일본 100금엔 = 영국 1금파운드 = USA 10금달러 = 나치 독일 100마르크 = 이탈리아 1000리라
5. 지폐의 인물은 누구인가?[편집]
새겨져있는 노인이 누구인지 확실한 정설은 없다. 일단 외모 기준으로 해서 보통 수노인이라고 부른다.
수노인 문서 참조.
6. 화폐수집시 가치[편집]
애초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유통시킬 목적으로 발행한 것이기 때문에, 도안이 거의 모두 동일하고 퀄리티가 심하게 낮다. 몇몇 특정 지폐(미발행 갑 1000엔 등)는 한번 경매나 상점에 올라오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의 거액에 거래되고 있는것도 있으나 위의 사진은 개10원짜리로, 접혀 좀 쓴듯한 느낌을 받는 지폐는 5000원에서 2만원이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