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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하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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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하얼 시내
치치하얼 구역사
치치하얼 신역사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의 지급시. 인구는 540만명으로 성에서 하얼빈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다. 퉁구스어 또는 다우르어로 '천연 목장'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발음인 치치하르라고도 불린다. 한국식 한자발음으로는 제제합이지만, 음차라서 별 뜻이 없는데다가 어감상의 문제로 인하여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는 같은 음차발음인 하얼빈과도 공유하는 특징. 또한 몽골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가장 동쪽의 도시이기도 하다.
만주, 그 중에서도 북만주에 있기 때문에 매우 춥다. 최난월인 7월기준 평균기온이 23°C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최한월인 1월에는 기온이 −18.6°C까지 떨어진다. 이로 인하여 연평균 기온이 3~4°C를 왔다갔다하는 지역으로, 강수량도 연평균 415mm밖에 오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체르노젬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악조건에도 농산물은 많이 생산된다.
옛 치치하얼 성벽
고대에는 말갈이나 실위의 거주지였으며, 부여의 영토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후 5~8세기 경에 이곳 근처에 두막루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치치하얼의 위치에 도시를 세운건 12세기 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이며, 당시에는 상경임황부와 동경요양부가 분할관할을 하였다. 이후 금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쭉 중화권 국가들이 통치하였으나 너무 기후가 척박하여 역사적으로 별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 하였고, 이 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다우르족과 시버족이 목축 혹은 수렵을 하는 정도로만 존재하였다.
이후 1674년에 러시아 제국의 원정대가 기지로 썼는데,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 영토가 된 후로는 러시아와의 무역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중화민국시기에는 넌장성(嫩江省)의 성회로 작용하였으며,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관동군이 이 곳에 공단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도시는 크게 성장한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헤이룽장성에 편입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기준으로는 작은 도시였으나 50년대의 공업화가 가속화되어 동북지역 개발에 힘입어 발전하였다. 시가지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넌강(嫩江, 눈강)에 접해 있으며 강에는 섬이 여럿 있다.
주 산업은 2차 산업이다. 애초부터 이 지역이 도시로 발전한 이유도 관동군의 공업화 때문이었으며, 2019년 기준 치치하얼에 기반을 둔 공업회사는 302개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중공업이 주 산업이며, 석유도 나기 때문에 석유정제업도 발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러스트 벨트인 만주지역답게 경제적 수준은 매우 낮은데, 2019년 기준 1인당 GDP가 4,660달러밖에 되지 않아 중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이는 치치하얼뿐 아니라 만주지역 도시 전반에 나타나는 문제로, 부성급시인 하얼빈조차 1인당 GDP가 중국 평균인 1만달러에 못 미칠 정도로 심각하다.
농업은 척박한 기후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지역의 토양은 다름아닌 체르노젬이기 때문에 엄청난 추위에도 불구하고 2019년 기준 농산물이 무려 1,189만 톤이나 생산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옥수수로, 약 770만 톤이 생산된다. 또한 의외로 쌀 생산량이 265만 톤으로 꽤 많은데, 이는 체르노젬+조선족의 영향이다.
철도로는 치치하얼역과 치치하얼난역이, 공항은 민군복합인 치치하얼 싼자쯔 공항이[1] 있고, 그외에 고속도로와 배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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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하얼 시내
치치하얼 구역사
치치하얼 신역사
1. 개요[편집]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의 지급시. 인구는 540만명으로 성에서 하얼빈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다. 퉁구스어 또는 다우르어로 '천연 목장'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발음인 치치하르라고도 불린다. 한국식 한자발음으로는 제제합이지만, 음차라서 별 뜻이 없는데다가 어감상의 문제로 인하여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는 같은 음차발음인 하얼빈과도 공유하는 특징. 또한 몽골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가장 동쪽의 도시이기도 하다.
2. 기후[편집]
만주, 그 중에서도 북만주에 있기 때문에 매우 춥다. 최난월인 7월기준 평균기온이 23°C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최한월인 1월에는 기온이 −18.6°C까지 떨어진다. 이로 인하여 연평균 기온이 3~4°C를 왔다갔다하는 지역으로, 강수량도 연평균 415mm밖에 오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체르노젬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악조건에도 농산물은 많이 생산된다.
3. 역사[편집]
옛 치치하얼 성벽
고대에는 말갈이나 실위의 거주지였으며, 부여의 영토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후 5~8세기 경에 이곳 근처에 두막루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치치하얼의 위치에 도시를 세운건 12세기 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이며, 당시에는 상경임황부와 동경요양부가 분할관할을 하였다. 이후 금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쭉 중화권 국가들이 통치하였으나 너무 기후가 척박하여 역사적으로 별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 하였고, 이 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다우르족과 시버족이 목축 혹은 수렵을 하는 정도로만 존재하였다.
이후 1674년에 러시아 제국의 원정대가 기지로 썼는데,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 영토가 된 후로는 러시아와의 무역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중화민국시기에는 넌장성(嫩江省)의 성회로 작용하였으며,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관동군이 이 곳에 공단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도시는 크게 성장한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헤이룽장성에 편입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기준으로는 작은 도시였으나 50년대의 공업화가 가속화되어 동북지역 개발에 힘입어 발전하였다. 시가지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넌강(嫩江, 눈강)에 접해 있으며 강에는 섬이 여럿 있다.
4. 경제[편집]
주 산업은 2차 산업이다. 애초부터 이 지역이 도시로 발전한 이유도 관동군의 공업화 때문이었으며, 2019년 기준 치치하얼에 기반을 둔 공업회사는 302개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중공업이 주 산업이며, 석유도 나기 때문에 석유정제업도 발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러스트 벨트인 만주지역답게 경제적 수준은 매우 낮은데, 2019년 기준 1인당 GDP가 4,660달러밖에 되지 않아 중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이는 치치하얼뿐 아니라 만주지역 도시 전반에 나타나는 문제로, 부성급시인 하얼빈조차 1인당 GDP가 중국 평균인 1만달러에 못 미칠 정도로 심각하다.
농업은 척박한 기후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지역의 토양은 다름아닌 체르노젬이기 때문에 엄청난 추위에도 불구하고 2019년 기준 농산물이 무려 1,189만 톤이나 생산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옥수수로, 약 770만 톤이 생산된다. 또한 의외로 쌀 생산량이 265만 톤으로 꽤 많은데, 이는 체르노젬+조선족의 영향이다.
5. 교통[편집]
철도로는 치치하얼역과 치치하얼난역이, 공항은 민군복합인 치치하얼 싼자쯔 공항이[1] 있고, 그외에 고속도로와 배편이 있다.
5.1. 국내선[편집]
6. 하위 행정구역[편집]
7. 출신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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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부전구 다롄기지 3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