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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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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하이난성은 중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하이커우시다. 약칭은 충([ruby(琼, ruby=qióng)]). 이는 과거 이 지역을 경애(琼崖), 경주(琼州)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인구는 약 1,000만 명 정도로 면적에 비해 적은 편은 아니다.[4] 인구의 80%가 한족이지만, 타이족과 연관 있는 이 섬의 원주민인 리(黎)족이 15% 정도로 상당히 많으며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섬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는다. 한족은 전체 인구수는 많지만 거의 다 일부 해안 도시에 모여살고 도시 밖 외곽에는 별로 없다.
매우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동남아시아로도 간주된다.[5] 위 지도를 보면 당장 같은 위도에서 하이난섬의 좌우로 베트남, 필리핀이 있다. 하이난성은 중국 대륙에서 얼마 안 되는 열대기후[6] 지역으로 중국 본토인들에게 아주 인기있는 관광지이자 신혼여행지이다. 한국의 제주도에 비견되며, '중국의 하와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 지역의 전통 건축 양식을 보면 더운 날씨 덕에 창문이 여닫을 수 있는 문 없이 그냥 뻥 뚫려 있기도 하다.
최고봉은 중부에 있는 해발 1,867m의 우즈산(五指山)으로 현급행정단위로 우즈산시(五指山市)가 따로 있다.
2. 역사[편집]
기원전에는 백월의 일파였던 여족[7] 의 땅이었다. 리족이 유일한 원주민은 아니고 섬 남부 일대에 상당수의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도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다수가 한족이나 리족에게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오스트로네시아인들도 여전히 살고있기는 한데 이들은 베트남 중부에 주거하던 참족의 후예들이며[8] 후이족으로 분류된다.[9]
기원전 3세기 초에 남월에 의해 정복당하며 기원전 110년경까지는 남월의 영토[10] 였지만 남월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면서 한나라 소속 군현이 되어서 중국사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 정복 당시의 인력은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고, 삼국시대에는 손권이 이곳으로 위온과 제갈직 등을 보내기도 했다. 육손이 반대했지만 강행했는데 득보단 실이 컸다.[11] 오나라의 지배는 느슨했고 하이난이 실질적인 중국의 강역으로 흡수된 건 약간 더 뒤였다.
하이난은 오랜 시간 지금의 중국 북중부에 국한되었던 전통적 의미의 중원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변방 중의 변방, 오랑캐의 땅, 유배지 취급을 받았다. 삼국지에서는 '주애'로 불리는 섬이 여기이다. 현재는 베트남 영토가 되어버린 일남과 마찬가지로 유배지로 악명을 떨쳤었다. 이후로는 주애(珠崖)나 경애(瓊崖)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한나라 때부터 아주 악명 높은 유배지로서 소동파가 이 곳 단저우(儋州)로 유배오기도 하였다. 당시 하이난 유배는 곧 죽음을 뜻할 정도였다. 중원에서 터무니 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 비행기가 없던 옛날에는 끝내 귀향을 못 하고 하이난에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소동파 역시 여기로 유배 후 사면받아 귀향길에 사망했다. 그래서 이 곳과 현재 베트남 중부인 일남군으로 유배를 갈 땐 무려 장례식을 치르고 가기까지 했다. 가면 못 돌아오기 때문에 사실상 죽은 사람 취급을 한 것이다. 다만 명청 시기 중국에 편입이 된데다가 50년간 일본의 지배까지 받으면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던 대만과 달리 하이난 섬은 한나라 때 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동안 중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중국의 정체성이 강한 편이었다.
16세기 하이난 출신으로 대신에 오른 해서의 묘. 후일 해서파관 사태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이후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며 확실히 중국의 부속도서로 자리매김했다. 남명 및 정성공 세력이 대만에서 버티며 항쟁할 때도 이 섬은 정씨 일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조용했으며 청조 강희제 때 대만을 정복하며 여기까지 확실히 청의 영토로 굳혀버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 청의 팔기군은 극히 일부만 주둔했다.
하이커우 구도심의 개항기 건물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벌이는데,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하이난을 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기하고 배상금을 더 받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 이유는 하이난이 일본과 너무 멀어서였다. 대만의 경우 류큐 열도와 붙어있는 곳이고 규슈 남단과도 가깝지만 하이난은 전혀 딴 동네였으며 당시 초기 단계의 비행기로는 왕래가 어려운 곳이었다. 뱃길로 1주일이나 걸리는 곳을 갖긴 쉽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광동군벌 등본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26년에 국민혁명군 4군 군장 리지선이 원정하여 중국 국민당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는 이 지역을 하이난 특별행정구라는 행정구역으로 통치했다.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바이충시 휘하 18만명 대군이 넘어가, 중국본토에서 결판이 난 지 오래인 1950년까지도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타이완섬도 그렇지만 당시 인민해방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그해 5월 1일에 민간어선 수백척을 동원하여 하이난섬에 상륙하여 공세를 벌이고 결국 중화민국군은 철수했다.[12] 이때 중화민국의 하이난 특별행정구는 폐지되고 광둥성 산하의 하이난 행정구로 명칭이 변경된다.
1980년 당시 같은 성에 있던 선전시, 주하이시, 이웃 푸젠성 샤먼시와 함께 경제특구가 되었으며 1988년 4월 하이난 행정구가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으로 광둥성에서 분리되어 승격되었다. 문화든 뭐든 서로 완전히 다르고, 크기도 만만찮아서 웬만한 건 해당 지역에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하이난섬에서 밀려난 후에도 멀리 떨어진 타이핑다오 같은 난사 군도의 일부 섬들은 계속 영유했다. 이 잔존 남중국해 섬들은 중화민국 하이난 특별행정구 소속으로 계속 있다가[13] 1979년에 하이난 본섬이 없는지라 관내 모든 섬을 가오슝시 치진구에 편입시켜 중화민국에서도 하이난 특별행정구는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난사 군도, 둥사 군도 등이 모두 과거 하이난 특별행정구 소속이었고 하이난 본섬을 영유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지금도 난사/시사 군도를 하이난 성에 넣었다.[14]
중국에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분쟁중인 남중국해의 여러 군도(스프래틀리 군도 등)를 전부 하이난성 소속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만든 '하이난성 지도'를 보면 정작 하이난은 지도 위쪽 끝에 조그마하게 붙어있는 소축척지도다. 중국의 하이난 통계연감에 따르면 하이난성의 해역 포함 면적은 210만km²인데 남중국해 영해를 전부 면적 계산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난성은 중국에서 작은 성에 들어가지만 중국 지도의 해양 면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크기를 자랑하는데 남중국해 암초들이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 또한 남중국해 군도들이 하이난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종종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는 한다. 2012년 7월에는 상주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이곳에 하이난 성 관할의 싼사시(三沙市)를 설치해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산하 구까지 설치했다.#
2013년 이후 성도 하이커우시가 시진핑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으로 인해 해상 실크로드가 개발되어 중요도가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2018년 4월 13일에 시진핑은 하이난 성에 자유무역항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에서 하이난을 홍콩과 필적하는 세계적 수준의 자유무역 지대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특별행정구로 사실상 별개 특구인 홍콩과 달리 중국 본토 범주 내에 들어가는 하이난에는 사상적인 누수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 원칙을 천명했다. # 그러나 홍콩은 약 150년간 중국의 대외관문이라는 지위가 있고 영어 구사 능력이 홍콩에 비해 낮으며 형평성 및 규제 등의 문제로 중국 본토에서 홍콩 수준의 경제자유도를 보이기 어려워 난관이 많았다.[15] 결국 코로나 판데믹 이후 없던 일이 되었고 홍콩의 질서를 잡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3. 관광[편집]
싼야시의 야자수 해변과 리조트.
중국인들의 대표적인 국내 최고의 남쪽 바다 휴양지로 중국의 하와이로 인식된다. 한국인에게 제주도가, 일본인에게 오키나와가 갖는 의미와 거의 같다. 물론 중국 자체가 큰 것처럼 하이난도 저들보다는 큰 편에 속한다.[16] 완전한 열대기후의 우리가 흔히 더운 나라 하면 생각하는 그런 해안이 있다.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아예 이주 목표지로도 인기가 있다.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환경 오염. 하이난 성은 아직 미세먼지와 같은 환경오염 문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골프여행으로 많이 가는 듯 하다. 1년 내내 따뜻하고 그린피 싸고 꽤 멀리 떨어진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보다 가깝기까지 하다. 오키나와와 같은 조건인 셈이다. 다만 한국인에게 해변 휴양지로서 하이난은 아무래도 태평양 섬들이나 동남아시아 유명 휴양지인 코타키나발루, 푸켓, 보라카이, 세부 등은 물론 하다못해 저가항공이 잔뜩 취항하는 일본 오키나와현에 비해서도 인기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냥 잘 몰라서다. 중국여행 하면 베이징이나 상하이, 내몽골, 티베트, 실크로드 등이 떠오르는데 비해 아직까지 하이난은 딱히 떠오르는 곳이 아니다.
중국으로 막 여행가기 시작한 1990년대 및 2000년대까지 하이난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였다. 그러다가 X맨이라든가 여러 예능들에서 하이난이 배경으로 나오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이 하이난 관광비자를 면제하게 되어 가기 편해지자 그제서야 조금씩 인지도를 올렸다. 중국은 하이난성에 처음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의 접속 가능한 지역을 조성하려고 하자 시나 웨이보에서는 네티즌들이 타 지역과 형평성을 이유로 반발한 적 있다.#
최고봉인 우즈산의 남쪽 줄기에 있는 치셴링(七仙岭)
비자 정책도 타 지역에 비해 너그럽다. 여행사를 통하면 비자없이 입국 가능하고, 그렇지 않다면 도착비자를 받아서 입국 가능하다. 한국인이 중국에 입국하려면 홍콩, 마카오를 제외하고는 비자가 필요하지만 하이난 성만큼은 여행사를 통해 사전신청하면 30일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17]
1.무비자: 도착 후 무비자 신청. (무료, 입국에 오래 걸릴 수 있음. 한국 등 50여개 국가만 가능)
2.면비자: 사전 여행사 신청 후 바우처 지참. (유료, 빠른 입국)
3.도착비자: 무비자 신청이 안되는 경우 가능. (200위안, 주숙등기 서비스 없는 에어비앤비 등 숙박 시 해당)
4.사전비자: 하이난 외 다른 장소 방문 시, 중국 국내선 경유 시
하이난은 중국에 편입된 역사가 긴 편이기에 역사적인 건축물도 많은 편인데 그런 역사적 관광지로는 당/송나라 시대 때 하이난으로 유배를 간 5명의 관리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오공사(五公祠)와 하이난에서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 중 하나이자 중국 최남단에 위치한 공묘인 원창 공묘(文昌孔庙), 하이난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건축물이자 석탑으로 알려진 메이랑 쌍탑 등이 존재한다.
4. 음식[편집]
기본적으로 섬인 만큼 해산물을 많이 사용하며 본토에 비해 담백하고 간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닭뼈 육수에 갖은 향신료를 넣고 삶아낸 닭고기를 역시 닭육수에 지은 밥과 함께 먹는 '하이난 치킨 라이스(海南鷄飯, Hainanese chicken rice)가 유명한데,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주변 지역으로도 전파되어 인기메뉴로 자리잡았다. 홍콩의 대중 음식점인 차찬텡에서도 중화요리 계열에서는 필수로 들어가 있는 메뉴일 정도로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