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한양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교육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한양대학교 법학과 교수, 법과대학 학장,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사무처 처장, 한양대학교 총무처장,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 한양사이버대학교 학장 등을 지냈으며, 그 밖에 사법시험 출제위원 및 대한변호사협회 변호사등록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09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제5대~제6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인권과는 관련성이 적은 분야인 민법 전공 교수인데도 임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재임기간 동안 세계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직 포기와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7]
용산 참사를 두고 한 말이었다.
, 깜둥이, 야만족 등 비인권적인 막말 발언을 하였기에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인권위 직원들이 한겨레에 퇴진을 요구하는 광고를 낸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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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관공파 29세 희(熙)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맏형 현희선(玄熙善)이 항렬자를 사용했다.[2] 현병철의 증조부 현용호(玄龍鎬)는 현정은의 조부 현준호의 4촌 형이다.[3]성주 현씨 집성촌이다.[4] 어머니 진주 강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순천 박씨 박노필(朴魯弼)의 딸은 슬하에 장남 현희선(玄熙善)을 낳고 1936년 11월 12일 별세하였다.[5] 석사 학위 논문 : 團體協約에 關한 考察(단체협약에 관한 고찰).[6] 박사 학위 논문 : 不當利得法의 硏究(부당이득법의 연구).[7]용산 참사를 두고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