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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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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종의 서2녀. 어머니 경빈 박씨의 차녀로, 오빠 복성군과 혜순옹주와 동복 남매 지간이 된다.
2. 생애[편집]
중종 20년(1525) 판결사 홍서주[1] 의 아들 홍여와 가례를 올렸는데, 남편 홍여는 당성위에 봉해졌다.
중종은 혜정옹주가 출합할 때를 고려하여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 이에 중종은 "지금 혜정 옹주의 집은 단지 70간으로 비록 제도보다 지나친 듯하나 반드시 용도를 헤아려 지었을 것이니 고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2]
중종 22년(1527) 작서의 변이 일어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를 갔다.[3] 중종 28년(1533)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옹주의 남편 홍여는 경빈 박씨의 사주로 중종과 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홍여는 소년이었으나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4] 이 날, 옹주 자신도 언니인 혜순옹주와 함께 폐서인이 되었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죽은 뒤에야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안로가 홍여에게 죄를 씌우고자 무리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 옥사를 추국할 적에 김안로가 추관(推官)이었는데, 홍여의 집안으로 죄를 돌리고자 하여 이는 작서(灼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그 집의 노비(奴婢)들이 무수하게 형장을 받고 그가 묻는 대로 자복(自服)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32년(1537) 11월 26일
중종 36년(1541) 세자가 복성군의 딸[5] 과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달라고 해 줄 것을 상소하면서, 옹주의 직첩을 돌려받고 살게 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 남편 :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 ? ~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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