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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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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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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é Manuel Balmaceda

1840년 7월 19일 ~ 1891년 9월 19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칠레의 제14대 대통령.


2. 생애[편집]


1840년 칠레 부칼레무(Bucalemu)의 부유한 가정에서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산티아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864년 당시 칠레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몬트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고, 1870년 의원으로 선출되어 칠레의 자유주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뒤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를 거쳐 도밍고 산타 마리아]대통령 밑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886년 자유당의 유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98.1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음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발마세다는 칠레의 근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각급 학교대학을 만들고, 낙후된 지역에 철도항만을 건설하는 등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보수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의회 역시 발마세다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충돌하였다.

게다가 1891년에는 발마세다와 의회의 권력 분배를 놓고 내전이 일어났고, 육군은 발마세다를, 해군은 의회를 지지하며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발마세다와 육군은 8월 28일 프라실라 전투에서 참패하였고, 이후 지지층의 신뢰마저 잃은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은신하다가 9월 19일[1] 결국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3. 여담[편집]


그의 집권기에 이스터 섬이 칠레령이 되었다. 이에 당시 칠레 내에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섬을 굳이 돈들여서 차지해야 하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발마세다는 해군 장군인 폴리카르포 토로에게 반드시 이스터 섬을 차지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파일:10-Escudos.jpg
과거 칠레 10에스쿠도 지폐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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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날은 그가 5년 전 대통령에 취임하였던 날과 같은 날짜이다. 즉 자신의 대통령 취임 5주년이었던 날에 자살을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