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오 3세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88_niccolo_III.png|height=125]] || || 제187대 [[요한 21세]] || → ||<#806600> '''{{{#FFF 제188대 니콜라오 3세}}}''' || → || 제189대 [[마르티노 4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88대 교황[br]{{{+1 니콜라오 3세}}}[br]Nicolaus II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니콜라오3세.jpg|width=100%]]}}}|| || '''교황명''' ||니콜라오 3세 (Nicolaus III) || || '''본명'''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br](Giovanni Gaetano Orsini) || ||<|2> '''출생''' ||[[1225년|1225년경]] ||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width=25]] [[교황령]] [[로마]] || ||<|2> '''사망''' ||[[1280년]] [[8월 22일]] (54~55세) ||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width=25]] [[교황령]] [[비테르보]] || || '''재위기간''' ||[[1277년]] [[11월 25일]] ~ [[1280년]] [[8월 22일]] || || '''문장''' || [[파일:니콜라오3세문장.svg.png|width=100]]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Nicolaus PP. III[br][[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III[br][[영어]]: Pope Nicholas III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88대 [[교황]]. == 생애 == 13세기 중반부터 [[교황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해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 과정에 프리드리히 2세는 이전 교황들과 직접적인 마찰을 빚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교황들에게 두 차례나 파문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代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오랜 협상 끝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황제 칭호 부여와 대관식 일정은 보류했고, 니콜라오 3세도 전임 교황의 뜻을 이행할 의향이 있었지만, 루돌프 1세가 먼저 교황청 측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하기 전까지는 그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구실로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 이에 루돌프 1세는 니콜라오 3세와 논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롬바르디아]], 투시아 지역[* 현재의 [[토스카나]] 전체, [[움브리아]]의 일부, [[라치오]] 북부.]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볼로냐]], [[에밀리아로마냐]], [[라벤나]] 지역은 교황령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합의했고, 니콜라오 3세는 그에 상응하여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정식 승인했다.[* 정작 루돌프 1세는 [[로마]]로 가지 못해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고 독일왕으로 남았다.] 이로써 니콜라오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위협을 잠재우고 화친을 도모한 것과 동시에 교황권의 확립까지 이루었다. 이처럼 니콜라오 3세는 대외적으로는 외교적인 능력을 지녔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한 인물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족벌주의]]에 사로잡혀 여러모로 물의를 빚었다. 교황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척 세 명을 [[추기경]]으로 서임했고, 그 밖의 친족들에게도 한 명씩 중요한 보직을 부여했다. 이에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 [[신곡/지옥편|지옥편]]에서 족벌주의를 남용한 죄로 니콜라오 3세가 여덟 번째 지옥 말레볼제의 제3원으로 추락한 것으로 묘사했다. 니콜라오 3세는 휴식을 취하고자 [[비테르보]]에 머물다가 돌연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뇌졸중]]에 걸려 중태에 빠지다가 1280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분류:1225년 출생]][[분류:1280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뇌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