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36 (문단 편집) === XB-36 === B-36 피스메이커를 처음으로 조종한 사람은 수석 시험 조종사인 베릴 에릭슨 (Beryl A. Erickson) 이었다. XB-36 무기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스태픈 딜론 소령의 친구인 에릭슨은 아메리칸 에어라인즈 DC-3 조종사였으며 콘솔리데이티드사의 B-24, B-32 폭격기 개발에 테스트 조종사로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XB-36이 탄생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더글러스 XB-19개발에 참여한 몇 안되는 조종사 중 한 사람이었다. 1946년 7월 21일, 에릭슨은 B-24, B-32 폭격기 테스트 파일럿인 부조종사 O.S 거스 그린과 함께 비행 시스템 점검과 확인을 위하여 택싱 테스트에 들어갔으며, 이 테스트는 8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조종사는 시속 156km/h미만의 다양한 속도로 택싱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946년 8월 8일 아침, 7,000명 이상의 컨베어 기술자들이 활주로 바깥에 길게 도열했다. 자신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미군 역사상 가장 비싸고 가장 거대한 B-36 피스메이커 폭격기의 처녀비행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다. 에릭슨이 기상 상태를 묻자 기상 담당관이 에릭슨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이상없음을 알렸다. B-25폭격기는 이 역사적인 비행을 카메라에 기록하기 위하여 함께 비행할 계획이었다. 조종사 베릴 에릭슨, 부조종사 거스 그린, 비행 기술자 윌리엄 위즐리와 제임스 맥이체른, 비행 테스트 엔지니어 로버트 히위즈, 비행 테스트 분석관 W.H 보브와 A.W 제드먼, 비행 참관자로서 다니엘 주니어와 J.M 헤플리 등 모두 8명이 XB-36에 탑승했다. XB-36 폭격기에는 8,000갤런의 연료와 600갤런의 오일이 실려 있었으며 기체의 총 종량은 90,724kg이었다. 1946년 8월 8일 오전 10시 10분,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XB-36은 서서히 활주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속으로 질주하던 이 거대한 괴물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성공하였다. 초조하게 지켜보고있던 지상의 수많은 기술자들은 폭격기가 이륙에 성공하자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처녀비행에서 XB-36은 고도 1,067m에서 시속 225km~25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37분간의 처녀비행를 실시하였고 주익의 2번 플랩이 잘 움직이지 않은 결함만 빼고는 대성공이었다. 두 번째 테스트 비행은 8월 14일에 실시되었으며, 이날은 에릭슨의 절친한 친구인 스태픈 딜론 소령도 참가하여 2시간 43분 동안 테스트 비행을 실시했다. 여섯 번째 테스트비행에는 칼 앤드류 투이시 스펫츠 공군사령관이 참관했다. 테스트 비행이 진행되면서 기체의 결함이 속속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풍동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문제는 엔진의 냉각과 프로펠러의 진동이었다. 엔진의 냉각문제는 9,144m 이상의 고도에서 장시간 비행해야하는 XB-36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었으며 프로펠러 허브의 결함과 주익 플랩의 이상도 발견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첫 번째 테스트 비행에서 발견된 2번 플랩의 결함 때문에 알루미늄 합금제로 교체하였는데, 이것은 원래의 마그네슘 합금보다 6배나 무거웠다. 또한 신형 엔진 냉각 팬이 설치되고 제너럴 일렉트릭 BH-2 터보 과급기가 BM-2로 교체되면서 기체의 중량이 증가하여 1946년 8월 14일에는 최대 상승고도는 11,277m로 감소했다. 그리고 테스트 비행 도중 3,050m 상공에서 프로펠러가 부러지면서 주익 플랩을 친 다음 지상으로 곤두박질하여 농장에 떨어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원인규명에 나선 기술자들은 샤프트의 피로가 원인임을 밝혀내고 보완작업을 마쳤다. 버지니아 랭글리 풍동 실험실에서는 날개 밑면의 흐름을 날개 윗면으로 이동시켜 항공기의 실속을 방지해주는 틈(슬롯)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기술자들은 XB-36에 대하여 개수작업을 실시, 틈을 메웠다. XB-36의 전기 시스템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전기 시스템의 갑작스런 기능 정지는 내구성이 취약한 배선의 결함 때문이었다. 설계자들은 중량을 줄일 목적으로 [[구리(원소)|구리]]보다 더 가벼운 [[알루미늄]] 배선을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실제 비행에서 배선이 끊어지자 전기 시스템이 작동을 중지하는 바람에 비행도중 한 쪽 주익의 3개 엔진 모두가 먹통이 되기도 했으며, 동체의 진동 때문에 주익 플랩이 떨어져 나가는 사고도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비행중이 아니라 지상에 있을 때도 폭탄 투하실에서 전기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엔진 플러그도 다시 재설계하는 등 XB-36의 말썽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6년 9월 30일 오후, 결국 위험천만한 사고가 발생했다. 대기 속도 점검 테스트 비행중이던 XB-36 폭탄 투하실 윈치에 연결된 75피트 케이블이 절단되어 무게 22.7kg짜리 계기판이 포트워스 초등학교 화장실 지붕에 떨어져 버렸다. 지붕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파편은 콘크리트에 큰 구멍을 내었고, 어떤 것은 옷장을 박살내기도 했다. 7명의 부상당한 학생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학교에 보험을 들어주는 등의 금전적 손실과 함께 100만 달러짜리 폭격기가 학교를 폭격했다느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싼 폭격기의 첫 폭격 대상이 고작 그 곳인가하는 등의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XB-36 피스메이커 원형기의 16번째 테스트 비행은 1947년 3월 26일 수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계획된 테스트는 고도 3,050m 에서 4번과 5번 프로펠러 허브의 압력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조종사 베릴 에릭슨과 부조종사 거스 그린은 평소와 같이 비행전 점검을 마친 후, 포트워스 활주로 북쪽 끝으로 XB-36을 택싱한 다음 관제탑과 이륙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날 폭격기의 총 하중은 115,220kg(254,000파운드)이었으며 11,050갤런의 연료를 적재하고 있었다. 폭격기에는 조종사와 부종사 외에 스태픈 딜론 소령, 2명의 커티스 라이트 기술자와 공군 소재 기술담당관 등 모두 14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낮 12시 20분, 이륙 허가를 받은 폭격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날아오른 다음 랜딩기어를 수납하기 위해 접는 도중 갑자기 굉음과 함께 기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측 주익의 랜딩기어 유압장치 실린더가 폭발하면서 랜딩 기어의 지주를 날려버렸다. 에릭슨과 거스 그린이 기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동안 계기판에는 내부 통로 화재, 4번 엔진 화재, 랜딩 기어 작동 정지경고등이 켜졌다. 에릭슨은 즉시 전원을 차단시켰다. 에릭슨은 승무원과 원형기의 안전과 함께 XB-36 프로그램의 존폐조차도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에릭슨은 기체를 계속 상승시켜 고도 3,050m에 도달하자 기수를 내려 기체를 안정시켰다. 단지 랜딩기어 지주가 고장난 것으로만 판단하여 피해를 조사하려고 동체 후미로 갔던 딜론 소령은 상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딜론으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에릭슨은 딜론에게 조종석을 맡기고 후미로 달려갔다. 그동안 비행 기술자 윌리엄 위즐리와 제임스 맥이체른은 손상된 유압 파이프들을 수리하는데 매달려 어느 정도 수리를 해놓고 있었다. 부조종사 거스 그린은 관제탑에 예비 비상사태를 보고하였고, 승무원들은 회의를 열어 12명은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하고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폭격기를 비상착륙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승무원들은 한번에 2명씩 탈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는 딜론 소령은 지상에서 무전기로 폭격기와 교신하면서 비상착륙을 돕기로 되어 있었다. 승무원들을 비상 탈출 시키기 위하여 조종사들이 침착하게 상공을 선회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이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구급차가 동원되었고, BT-13 훈련기는 탈출 승무원의 정확한 낙하지점을 지상의 구조요원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륙했다. 강풍이 불고 있어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승무원들이 매우 멀리 떨어진 곳까지 흘러갈 위험과 함께 착지하자마자 강풍에 끌려 큰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구조요원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컨베어 안전요원들은 승무원들이 땅에 착지하자마자 강풍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원기가 알려주는 장소에 신속히 달려가 대기해야 했다. 오후 3시 45분, 에릭슨은 2명의 탈출 승무원이 1,830m 상공에 있다고 지상으로 통보했다. 에릭슨은 여러번 선회하면서 승무원들을 탈출시키고, 또 무전기로 위치를 통고했다. 탈출한 승무원들이 강풍 때문에 멀리 날아가 버려 지상 구조요원들은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2명의 승무원 중 9명이 부상당했으며, 맨 먼저 탈출한 딜론 소령은 발목이 접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딜론은 구조되자마자 약속대로 조종사와 교신하기 위해 구급차를 비행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비행장에 무전기가 설치된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딜론은 C-47 수송기를 택싱, 활주로 북단 동쪽에 주기시켜놓고 XB-36과 교신할 준비를 서둘렀다. XB-36은 비상 연료 방출장치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량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비상착륙하게되면 폭발의 위험이 매우 컸다. 때문에 조종사들은 연료를 소모하기 위해 벌써 2시간 동안이나 피말리는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는 7,015갤런의 연료를 모두 소모하자면 5시간은 더 비행해야할 운명이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착륙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XB-36 원형기가 텍사스 상공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시각, 뉴욕에서는 콘솔리데이티드-벌티 항공의 중역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회의 도중에 긴급히 걸려온 전화를 통하여 텍사스 상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사태를 알게 되었다. 컨베어는 위기를 느꼈다. 만약 XB-36이 비상착륙에 실패하여 기체가 파괴되고 조종사가 사망한다면... 원형기가 사라져 버리면 B-36 피스메이커 프로그램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고, XB-36 프로그램 반대자들의 중지요구는 한층 거세질 것이 뻔했다. 게다가 비록 XB-36에 비하여 폭탄 탑재량에는 못 미치지만 보잉과 노스롭같은 경쟁회사들의 B-50, XB-35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원형기가 사라져 버린다면 생산계획이 전면 취소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텍사스 지역 방송들에 의해 사고소식이 전파되자 인접한 고속도로에는 시민들이 몰고온 차량들로 넘쳐났다. 포트워스 공군 수백명이 긴급 배치되어 구경꾼들의 접근을 통제했다.이륙한지 5시간이 지난 오후 5시 30분까지도 에릭슨과 거스 그린은 연료를 소모시키기 위하여 계속 공중을 선회비행하고 있었다. 강풍이 부는데다 일몰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구급차, 소방차, 화재 진압 장비를 배치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6시 15분, 에릭슨과 그린은 결단을 내렸다. 연료를 모두 소진하지는 못했지만 캄캄한 밤에 착륙하는 것이 더 위험할 것이기 때문에 더 어두워기기 전에 착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두 조종사는 플랩을 최대로 내리고 천천히 북쪽 활주로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수 천명의 구경꾼들도 탄성과 함께 손에 땀을 쥐며 이 위험한 착륙을 지켜보고 있었다. 활주로 왼쪽에서는 C-47에 탑승한 딜론 소령이 에릭슨의 착륙을 도와주었다. 활주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하강을 시작한 에릭슨은 기체가 활주로에 닿자마자 프로펠러를 역회전시키며 제동을 걸었다. 동시에 군인들과 시민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착륙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XB-36이 고장난 랜딩기어로 활주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 뒤에서는 C-47이 뒤를 따라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딜론 소령은 앞서가는 XB-36의 랜딩기어의 각도를 감시하며 달렸지만 C-47 수송기는 XB-36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딜론은 앞서가던 XB-36을 시야에서 놓쳐 버리고 말았다. 딜론은 에릭슨에게 위치를 알려달라고 송신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파손된 랜딩기어가 엔진커버에 끼어 버렸기 때문에 XB-36은 활주로 측면 바깥에서 위험한 질주를 멈출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엔진 커버의 손상은 아주 경미했고, 잠시 후 포트워스 전역에 "XB-36은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XB-36은 비상 착륙 당시 약 4,000갤런의 연료가 남아 있었으며 이 때의 기체 총 중량은 86,369kg이었다. 전날의 폭풍우 때문에 들판이 약간 축축하긴 했으나 이 덩치가 큰 폭격기는 땅 속 23cm 깊이로 파고 들면서 질주를 멈추었다. 이날 밤, 에릭슨과 거스 그린은 일체의 기자회견이 허용되지 않은 가운데 사고 보고를 위해 공장에 남았다. 날이 밝아오자 폭격기 주변에는 경비병이 배치되고 컨베어 기술자들은 랜딩기어에 임시 지주대를 설치하였다. 랜딩기어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 떨어져나간 몇 개의 부품이 사고 조사반에 의해 지상에서 발견, 회수되었다. 사고 조사반은 알루미늄을 강철로 대체해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었다. 사고 후 2개월이 지난 1947년 5월 25일 저녁, 포트워스의 블랙스톤 호텔에서 축하 만찬이 있었다. 여기에는 컨베어 최고 경영자 해리 우드헤드와 맥 레이든, 로날드 메이어도 참석했다. 추가로 조종사들의 용기와 감투정신을 치하하는 칼 투이시 스팻츠 공군대장의 축하문도 낭독되었다. 위기를 맞았던 컨베어는 이 용감한 조종사 덕분에 오히려 공군으로부터 강한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딜론 소령도 공군 장관에게서 공로 표창을 수여받는 등 귀중한 원형기인 XB-36을 살려낸 이들은 만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후, 에릭슨은 컨베어 수석 테스트 조종사가 되었으며 그린은 서비스 대표로서의 주요 보직을 받았다. 그러나 그린은 사고 당시 위험에 처한 남편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던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여 테스트 비행직을 그만 두었다. 거스 그린은 3년 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48년, 컨베어는 XB-36과 그 자매기인 YB-36의 테스트를 계속 실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XB-36은 3500마력 R-3640-41 엔진을 장착했으며 신형 계기판으로 교체, 동체외피는 금속피로와 마모로 인하여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XB-36은 1948년 6월 19일, 전략 공군 사령부에서 폭격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며칠 사용되었다가 다시 포트 워스로 돌아왔다. 1949년 8월, 미 공군협회는 항공기술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표창하였는데, 여기에는 3명의 B-36 피스메이커 개발자도 포함되었다. 컨베어 기술자 레이 라이언, 수석 엔지니어 스파키 세볼드, 풍동 전문가 로버트 위드머가 수상했는데, 공로패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일본 본토 폭격의 영웅 제임스 지미 둘리틀 장군이 전달하였다. 1948년에서 49년까지 미 공군은 궤도형 랜딩기어를 실험적으로 달아서 쓸만한 기술인지 평가하기도 했다. 기체번호 42-13570 XB-36에 장착되어 착륙 테스트를 진행했다. XB-36은 1950년 8월 8일 비행을 마지막으로 원형기로서의 일생을 마감했다. XB-36은 총 30회(88시간 50분)의 테스트 비행을 했으며, 포트워스 활주로 북쪽지역에 보관되었다가 1952년 1월 30일자로 공식 퇴역하게 된다. 엔진과 모든 장비가 제거된채 5년 동안 보관되어오던 XB-36은 1957년 5월, 대형 항공기 화재 진화 프로그램에 사용되기 위하여 카즈웰 공군기지로 옮겨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