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36 (문단 편집) === B-36A === 2차대전 당시 극동공군을 지휘했으며, 초기 XB-36 대륙간 폭격기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었던 조지 C 캐니 미국 전략 공군 사령관(SAC)은 B-36 폭격기 도입에 회의적으로 돌변했다. 캐니 장군은 2차대전에서 이미 그 성능이 입증되었던 보잉 B-29 폭격기의 개량형인 B-50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폭탄 탑재량과 항속거리는 XB-36에 비하여 못 미치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성능은 오히려 B-50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짧은 항속거리는 공중급유기를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캐니는 스팻츠 공군 대장에게 B-50이야말로 미국의 표준 중폭격기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 제15중폭격 비행단을 지휘했던 공군 조달사령관 나한 트위닝 장군은 테스트만으로 XB-36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최고의 성공을 누렸던 B-17과 B-29도 개발과 테스트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추가로 B-36A 피스메이커 폭격기용으로 신형 3,500마력 R-3640-41 엔진이 개발되었으며, 냉전시대에 있어 B-36 대륙간 폭격기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미 공군의 인내가 없었더라면 2차대전중 [[B-17]], [[B-29]], [[P-47]], [[P-51]]과 같은 걸작기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니나 트위닝 장군 두 사람 모두 개발중인 B-52 폭격기가 확실히 더 훌륭한 폭격기가 될 것이라는데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B-52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결국 스팻츠 대장은 트위니 장군의 주장에 동의하고, B-36 프로그램은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캐니 장군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하였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래 1947년 9월 18일자로 육군에서 분리된 미 공군은 냉전시대의 핵무기 운반수단으로서 B-36 대륙간 폭격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B-36은 속도가 빠른 제트 추진 요격기에 취약할 것이라는 지적이 공군내에서 제기되었다. 1947년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대통령 특별 보좌관 호이트 반덴버거 장군은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러한 회의는 1년 뒤인 1948년에도 다시 열려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참석한 장교들은 신무기 획득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을 발표했다. 비록 몇 해동안 폭격기를 운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트 엔진을 장착한 폭격기를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가까운 미래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어찌되었든 B-36은 이미 제트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폭격기라는 주장이었다. 속력을 더 얻기 위하여 기존의 엔진을 제거하고 플랫 앤 휘트니 4,300마력 R-4360-51 VDT(variable discharge turbine) 엔진 6기를 장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 터빈 엔진도 피스톤 방식이었으나 조개 껍질 형상의 노즐에 의해 추진력이 향상되는 제네럴 일렉트릭사의 CHM-2 터보 과급기를 채용한 것이었다. B-36을 전략적인 장거리 핵 운반수단에만 국한하지 말고 엄청나게 비축된 범용 폭탄을 탑재하여 전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폭격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캐니 장군처럼 B-50에 VDT엔진을 장착하게 된다면 B-36보다 훨씬 우수한 폭격기가 될 것으로 주장한 장교가 많았다. 논쟁 끝에 1947년 9월 4일, 미 공군은 후기에 생산되는 기체(B-36C)에 VDT 엔진을 장착하기로 하고 비용절감을 위해 원래 계획된 100대에서 5대를 감한 95대의 B-36 조달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은 전략 폭격기로 개발 중인 B-52의 능력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거나, 또다른 핵 운반수단이 개발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B-36을 전략 폭격기로서 계속 유지시키기로 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군은 B-36 피스메이커로 2개의 공군 폭격 그룹을 창설하고 초장거리 핵무기운반 수단으로써 사용하기로 최종 합의하였다. 하지만 VDT는 설계에 어려움이 따랐고, 공군 소재 사령부는 전략공군 사령부에 대하여 VDT 계획과 B-36C계획을 취소하도록 권고했다. B-36A가 공군에 보급되는 동안 B-36 피스메이커의 운명이 또 다시 위기를 맞자 컨베어는 성능향상 프로그램을 긴급히 마련하여 스튜어트 시밍턴 공군장관에게 제출하였다. 스튜어트 장관은 1948년 6월 24일, B-36 프로그램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캐니를 비롯한 공군 장군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소집당시는 소련이 독일 베를린을 봉쇄하여 동독과 서독으로의 통행을 전면 금지시켜버린 때이기도 하다. 독일이 분단되는 등 팽팽한 냉전시대로 돌입한만큼 많은 토론을 거친 장군들은 B-36C를 취소하고 우선 36대의 B-36B 피스메이커를 도입하는데 최종합의하였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가 B-36의 운명을 결정짓도록 도와주었던 셈이다. 공군은 B-36에 전쟁을 방지, 억제, 제지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은 항공기라 하여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군은 그냥 B-36으로만 불렀다. 생산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엄청난 크기의 덩치 때문에 작업은 많은 문제에 직면하였다. 특히 거대한 연료 탱크는 제작 도중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 문제는 향후 3년간 생산 프로그램의 최대 골칫거리가 된다. 컨베어가 B-36 피스메이커의 동체 내에 설치하기로 하였던 6개의 거대한 연료 탱크는 고도의 접합 기술이 요구되었다. 누유방지에 실패를 거듭하던 기술자들은 고무 밀폐제 프로씰(Proseal)을 개발하여 연료 탱크 내부 전체를 감쌌다. 또한 날개 제작에 사용되었던 마그네슘 합금제 패널 접합 문제도 특수한 제조 공법과 검사 기술을 개발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재래식 리벳으로 조립된 구조물들은 진동에 의해 변형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컨베어는 직접 개발한 금속 접착제를 동체의 취약한 부분에 폭넓게 사용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 전기로 작동되는 보조익이 전기 계통의 결함시 오작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기술은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였다. B-36 피스메이커에 쓰여지는 모든 부품은 너무나 다양하고 또 너무나도 커서 공급을 책임진 하청업체들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XB-36, YB-36의 뒤를 이어 B-36(B-36A. 기체번호-44-92004)가 1947년 7월에 제작이 완료되었다. 공군은 최초의 4륜 랜딩기어를 가지고 탄생한 이 양산형 기체에 BM-00(BUZZ NUMBER)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B-36A 피스메이커 제1번기는 테스트 비행을 마친 이후 라이트 필드 기지의 격납고에 들어가 기체 구조 검사 및 증명 테스트용으로만 사용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8월 28일, 조종사 베릴 에릭슨이 "BM-004" B-36A 제1번기의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T.P 제리티 중령은 B-36A를 4시간 40분간 비행하여 오하이오 주 라이트 페터슨 기지에 착륙하였다. 베릴 에릭슨은 참관자로 함께 비행하였다. BM-004는 엔진과 주요 부품들이 제거된채 라이트 페터슨 기지에 특별히 마련된 거대한 실험 격납고로 옮겨졌다. BM-004는 거대한 기중기와 강철 사슬에 매달려 충격, 하중 테스트, 기압 테스트 등 45가지의 테스트에 사용되면서 서서히 고철로 변했다. BM-004에 이어 생산된 1대의 B-36A 피스메이커가 1948년 4월 1일, 틴커 공군기지에 보내졌고, 또 1대는 전술 테스트를 위하여 6월 18일 에그린 공군기지에 전달되었다. 미 전략공군사령부 휘하 제7폭격비행그룹(제7BG)에 1948년 6월 26일 처음으로 B-36A 피스메이커 폭격기(44 - 92015)가 전달 되었다. 이 전달식은 포트 워스에서 거행되었으며 식 도중에 하늘에서는 (44-92023)피스메이커가 축하비행을 실시하였다. 제7BG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부대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해산되었다가 1947년 10월 1일, 공식적으로 부활되었다. 제7BG는 도입, 수리, 운용이 용이하도록 포트 워스의 컨베어 공장과 활주로를 사이에 두고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트 워스는 195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상이 용사 호라스 카즈웰 소령을 기리기위하여 카즈웰 공군기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제7BG도 제7중(重)폭격비행단(제7BW)으로 승격된다. 피스메이커의 도입은 매주 1대 꼴로 도입되었으며 제9폭격비행대대는 1948년 7월 1일 첫번째 기체를 받은 다음, 11일 후인 7월 12일에 두번째 기체를 받았다. 제7중폭격비행단은 활주로 건너 공장으로부터 전해지는 B-36 피스메이커의 수가 증가하여 활주로가 비좁아지자 B-29 폭격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자리를 마련해야했다. 원래 B-25용으로 건설되었던 카즈웰 기지의 지상요원들은 B-36을 주기시킬 만큼의 큰 격납고가 없었기 때문에 1948년 여름 내내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아래, 겨울에는 추운 바람에 시달렸다. 또한 기체가 너무나 커서 출격 가능상태로 유지하는 것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컨베어는 당시 B-36의 미래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체의 성능을 더욱 더 발전시키기위하여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전략공군사령관 캐니가 여전히 B-50 슈퍼포트리스의 도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 가을부터 조지 캐니 장군의 영향력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대통령 특별 보좌관 호이트 반덴버거 장군이 전략공군사령관의 교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8년 10월 16일자로 태평양 전쟁 당시 제20공군 지휘관으로서 B-29 폭격을 총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가 신임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임 사령관으로 취임한 [[커티스 르메이]]는 업무의 시작을 B-36 피스메이커 훈련 프로그램 조사를 선택하였을 정도로 B-36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르메이는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 개장식에 전시하기 위하여 B-36을 보냈으며,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한 공군의 날에는 3대의 B-36이 포함된 700대의 항공기를 저공비행시키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8일에는 미국 유명 언론사의 기자들을 포트 워스로 초대하여 B-36에 탑승하도록 해주었다. 제7중폭격 비행단은 그 규모가 확대되어 휘하에 제7BG와 제11BG를 두었다. 제7BG휘하에는 9, 436, 492폭격비행대대가 있으며 11BG는 26, 42, 98폭격비행대대를 휘하에 두었으며 이들 비행대대는 각각 6대의 B-36을 장비하도록 계획되었지만 나중에는 10대로 증가된다. 훈련 및 교육용으로 사용될 22대의 B-36A 피스메이커는 1948년 11월까지 배치가 완료되는데, 만약 총10,000파운드(4,536kg)의 폭탄과 24,121갤런의 연료를 적재하였을 때의 총 중량은 140,795kg 이며 전술행동반경은 6,243km였다. 또한 총 26,745 갤런의 연료와 72,000 파운드(32,660kg)로 폭탄을 만재하였을 때의 전술행동반경은 3,380km이며, 폭탄을 적재하지 않았을 때의 항속거리는 14,702km에 달했다. 그리고 해수면상 고도 9,631m에서 시속 552km/h의 최고속도와 11,917m의 실용상승한계고도를 가지고 있었다. 보잉의 B-50 수퍼포트레스 폭격기는 총 10,000파운드(4,536kg)의 폭탄을 적재하였을 때 해수면상 고도 9,144m에서 626km/h의 최고속도를 나타내었으나 전술행동반경거리는 B-36A 피스메이커보다 훨씬 짧았다. B-36A는 AN/APQ-23 폭격/항법 레이더를 설치하였지만 기관포는 설치하지 않았고, 제7BG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기관포로 완전히 무장하는 형은 1948년 7월 8일 처녀비행을 실시한 B-36B 피스메이커이다. 제7BG의 조종사들이 훈련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공군 분석관들도 B-36A의 평가 작업에 착수하였다. 승무원들은 B-36A의 느린 속도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뛰어난 성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