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36 (문단 편집) === 업체선정 === 보잉, 더글러스, 노스롭 등 여러 회사가 제안에 응했으나 보잉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더글러스와 XB-35를 개발하고 있던 노스롭은 1941년 당시의 항공기술로서는 불가능한 제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따낸 회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콘솔리데이티드(Consolidated)였다. 1923년 창립된 콘솔리데이티드는 1925년에는 종업원이 900명이었으나 1939년에는 그 수가 9000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다 1940년 항공기 산업의 확대로 인하여 1949년대 중반까지 약 4만명까지 고용하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회사는 2차대전 동안 전국에 12개의 법인을 두었는데, 1943년에 다우니, 내슈빌 공장이 벌티 항공사와 합병(34% 지분확보)하고 이후 통폐합을 거친 법인은 다시 컨베어(Convair)로 회사 명칭을 바꾸었다(컨베어는 비공식 명칭으로써, 벌티 항공의 상표였으나 나중에 복잡한 합병을 거치면서 공식적으로 컨베어가 된다). 이 회사는 그 유명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제작한 회사로서, 1940년 9월, 이미 장거리 폭격기인 XB-32(2000파운드 폭장, 4450마일 항속거리)와 대륙간 왕복 폭격기 모델 35의 기본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콘솔리데이티드사는 모델 35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 항공대의 대륙간 왕복 폭격기 제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1941년 10월, 콘솔리데이티드는 2대의 고고도 장거리 폭격기에 대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특이하게도 총 6개의 레시프로 엔진이 동체의 후면에서 작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육군 항공대에서 분리창설된 공군 참모총장 핸리 "햅" 아놀드 장군은 라이트필드 테스트 책임자인 조지 케니 준장[*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남태평양해역군 항공사령관으로 맹활약한 사람이다. 능력이 출중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맥아더의 참모장이었던 리처드 서덜랜드와 함께 특급 [[후빨]]러로도 유명했다. 서덜랜드와 달리 실제로 능력도 있었던 것이 그나마 맥아더에게는 다행이었다.]에게 검토를 지시했다. 검토를 마친 라이트필드 항공소재 담당국은 호평을 하였고, 기술국은 콘솔리데이티드가 제안한 두 종류의 엔진 탑재안(4개 또는 6개 엔진 탑재)중에서 6개 엔진 탑재안을 최종 선택하였다. 검토결과를 보고받은 캐니 장군은 아놀드 장군에게 콘솔리데이티드의 안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후술하지만 훗날, 케니는 B-36 생산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리하여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11월 15일, 경쟁사인 보잉을 제친 콘솔리데이티드는 2대의 XB-36 발주 계약을 맺었다. 계약의 주 내용은 가격 80만 달러의 1번 시제기가 30개월 후(1944년 5월)에 납품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이 발주에 실패한 보잉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하여 전쟁에 돌입한 미국이 소위 "30억 달러의 도박"이라 불리우는, 설계도상으로만 존재하며 그 어떠한 테스트도 없이 발주에 성공한 폭격기인 [[B-29]]로 대박을 터뜨렸다. 반면에 XB-36 발주에 성공한 콘솔리데이티드사는 자사의 장거리 폭격기 XB-32는 1944년까지 B-32로써 15대가 생산되었지만 기술적 결함 때문에 그 능력이 이미 검증된 경쟁기종인 B-29에 눌려 생산이 중단되는 비극을 맞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