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Quad (문단 편집) == [[동남아시아 조약기구]]와의 유사성 == 주재우 경희대 교수에 따르자면 아태지역의 집단안보체제의 시작은 1955년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가 최초였다고 한다. 미국은 대서양의 [[나토]], 중동에서는 이란을 중심으로 한 테헤란 액시스(Teheran Axis)과 함께 공산권 국가와 맞서 싸우는 동맹들로 활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는 다섯가지 시대적 정치와 역사의 이유로 기대한 결과를 보지 못했다. 첫번째, 역외 국가로 참가한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가 있었다. 전후시기에 동아시아에까지 전력을 투입하기에 여력이 없었다. 둘째, 일본의 참여가 불가능했다. 이른바 ‘평화헌법’으로 미일동맹관계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은 역내 군사 활동이 불허되었다. 셋째, 1969년의 [[닉슨 독트린]] 때문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문제를 아시아인이 해결해야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역내 문제에 미국의 간여를 축소하는 일환으로 미군의 감축 조치도 또한 선언됐다. 넷째, 1973년의 [[베트남 전쟁]] 종결이다. 이로써 미국에는 닉슨 독트린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전략적 판단이 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72년 중국과 일본 수교협상에서 중국 측(덩샤오핑)은 일본과 수교협상 때 센카쿠열도의 국경문제를 놓고 “전쟁은 뒤로하고 공동개발”의 원칙을 제시, 일본 측의 양해를 구한 것이 유효했다. 이 원칙은 훗날 남중국해 일대의 영해분쟁을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효과를 발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