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문단 편집) === 중앙 행정 === 고려는 초기에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광평성]]을 최고 중앙관부로 두었고, 이후 성종 때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한 [[2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은 3성 6부제가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기도 하다.] 이에 태봉의 내의성, 내봉성, 광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제도를 결합하였다. * 내의성 → 내사문하성 → [[중서문하성]]이되었으며, * --내봉성--[* 정확히는 [[상서성]]의 상서이부(尙書吏部)에 해당한다.]/광평성 → 어사도성 → [[상서성]]으로 이어졌다.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중서문하성 소속,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상서성 소속,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 (5재, 8인) * 문하시중 - 이상 종1품, 수상(총재), 실질적인 최고 관직 * 문하평장사 * 중서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아상(2재) / 정2품 * 참지정사 - 3재 * 정당문학 - 4재 * 지문하성사 - 5재 / 종2품 * [[중추원]] 소속 추신 (6추, 8인)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 충렬왕 때 추가[* 같은 시기 [[삼사(관청)|삼사]]의 판사, 좌사, 우사도 추가되었다.] 이상 5재 6추 16명을 양부 재상이라 부르며 이들이 고려 재추회의 (재상회의)에서 국정을, 도병마사 (후기에는 중추원)에서 군정을 주도하였다. * [[상서성]] 소속 * 상서령(尙書令: 종1품) *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명 * 지성사(知省事: 종2품) 1명 *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명 *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종5품) 각 1명 *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각 1명 * 도사(都事: 종7품) 2명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 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간관, 성랑)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 이하 지문하성사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정3품 6부 상서를 추신(추밀)들이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재추에 문벌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한 관료재신들이 있었으며 또한 6부 판서를 모두 재신이 겸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실제로는 왕권이 강했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조선시대의 승지)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 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반원 자주 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 [[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하우시중이 된 [[조민수(고려)|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 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 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고려)|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 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