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파극 (문단 편집) == 의미 확장과 이에 대한 지적 == 이후 일본이고 한국이고 신파라는 장르는 소멸했지만 [[의미 변화|의미가 넓어져]] 신파라는 용어는 살아남았다. 대개 '감정 과잉,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핑계로 삼아 논리와 개연성을 무시하는 억지 전개 방식,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연출 방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즉, 오늘날 "영화가 너무 신파극이었다" 등등의 표현은 이런 의미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신파 장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의 비판 및 재평가 문단 역시 역사적 신파 장르가 몰락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당연히 넓은 의미, '[[감성팔이]] 위주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내용의 통속성과 관객 대중의 정서에 대한 자극'이 신파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 가지고 신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초기 한국영화 작품 중에는 표현과 내용 모든 면에서 일본의 신파극이나 신파 영화에 근접한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유사한 특성이 있다 하여 기타의 많은 영화를 신파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켜 다루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여러 정황을 살필 때 한국영화 역사에서 사용되는 신파라는 말은 일반인들의 언급과 학술적 용어 사이의 엄정한 구별이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 '''김대중(2013), 《[[https://books.google.co.kr/books?id=67QrAwAAQBAJ&pg=PA94&lpg=PA94&dq=%EC%8B%A0%ED%8C%8C%EB%9D%BC%EB%8A%94+%EB%A7%90%EC%9D%B4&source=bl&ots=3w9_DQTX5M&sig=ACfU3U1rA91X8yafi1BcdmzdEN8VmSLojQ&hl=ko&sa=X&ved=2ahUKEwi9u8jkz8rmAhUMG6YKHc_SDGUQ6AEwA3oECAcQAQ#v%3Donepage%26q%3D%25EC%2588%2599%25EC%2598%2581%25EB%2582%25AD%25EC%259E%2590%25EC%25A0%2584%26f%3Dfalse|초기 한국영화와 전통의 문제]]》, 커뮤니케이션북스, 94쪽.''' 한편 신파를 이렇게 넓은 의미로 쓰는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첫번째는 유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파'라는 것은 '구파', 즉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되어 서양 극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극 = 서양 극이 되고 초기 근대 일본의 일본 극 vs 서양 극이 대립되던 시대가 지나간 지금은[* 이는 비단 공연 문화뿐 아니라 대다수 서양 문물이 그렇다. 하물며 [[과자]]조차도 '[[양과자]]'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지만([[염상섭]]의 '양과자갑' 등) 지금은 전통 과자를 [[한과]]라고 부르는 형편이다.] '신'이라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더구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가부키]]를 애초에 향유하던 지역이 아니므로[* 여담으로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될 만한 실내 전통극은 없다. 그나마 [[판소리]]가 가까울 수 있는데 이 역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근세 조선에는 일본과 달리 실내 [[극장]]이 활발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조선 문화사와 일본 문화사의 큰 차이점으로 거론되는 점 중 하나이다.] 역시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던 시기에조차도 무엇이 '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신파'라는 말을 받아들인 셈이다. 모든 단어를 어원대로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단어 구조로부터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후술하듯이 의미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역사적 신파가 감정 과잉이 자주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감정 과잉인 작품이 신파극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감정과잉의 연출 방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며 이어온 정서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생겨난 것은 물론, 슬픈 장면을 통한 정화는 극 예술의 시작점에서부터 '카타르시스', '페이소스' 등의 단어로 이미 오래 전부터 서양에서도 극의 중요한 요소로서 중시하였던 만큼 인류 보편적인 연출 방식이다. 역사적 장르 표현과 혼동을 빚기보다는 대중들 사이에서 신파라는 말이 알려지기 전부터 널리 써왔던 한국식 표현인 [[감성팔이]]나 [[억지 감동]]이란 표현을 쓰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과잉'이라는 것은 그 기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장르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위에서 말했듯이 창작물에서 감정을 일절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고 '많이 표현됐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이다. 같은 작품이어도 사회적으로 감정을 활발히 표현하고 있다면 과잉이라고 느껴지지 않겠지만 감정을 절제하는 분위기라면 평범한 감정의 작품이어도 과잉으로 느껴질 것이다. 즉, 아래의 비판은 '작품 향유자들이 생각하는 작품 내 감정의 역할에 비하여 창작물의 감정이 너무 과하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신파극을 별 거부감 없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인으로서는 그것이 과잉이 되어버렸지만 외국인들의 문화로서는 그것이 과잉이 아닐 뿐이다. 이를 뭉뚱그려 '한국인은 신파를 싫어하는데 외국인은 좋아하더라' 식으로 말하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개중에는 '신파'라는 용어를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으로, 주로 비판적 의미로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 가령 "미국 영화는 (한국 사람이 보기에) 가족애 정서가 너무 과도하긴 하지만 신파는 아니다"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상업성이나 작품성에 영향을 주는 요소인지 명료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 용어는 타당성을 얻기 어렵다. 즉, "한국식 감정 과잉 A는 작품성이나 상업성을 저해하는 요소이지만 미국식 감정 과잉 B는 A와 이런저런 차이가 있어 그렇지 않다" 식으로 분석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용법이 타당성을 갖출 수 있다. 이 역시 '신파'라는 용어가 [[의미 투명성|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