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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한제국)/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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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1]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중략)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조선 말기의 시인이며 관리였던 황현은 1901년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해 남기고 있다. "지리산이 사흘을 우는데 그 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그 당시 안영중이라는 사람이 운봉 경계에서 지리산 산맥을 끊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산맥은 바다를 건너 왜국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산맥을 끊어 눌러주면 일본은 자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를 '양남도시찰'로 임명하여 그 공사를 맡겼다. 그 지역 관찰사가 이를 중단시켜달라고 정부에 청했으니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는데....

한국과학사상사 박성래 292p 中











  • 고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뜬금없이 군밤 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자기한테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아서였는데 물론 군밤 장수는 신하들이 크게 반대해서 사형은 면했다.[2]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이므로 승정원일기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3] 이 일화가 유명한 편이라 고종 하면 군밤이 자주 언급된다.

  • 고종과 군밤 이야기는 1900년 즈음에 궁에 출입하던 역술가인 정환덕이라는 사람이 쓴 남가몽에서 수록되어 있다. 궁에 직접 출입하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고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이기에 궁에서 떠돌던 소문을 기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때보다 유독 고종 재위 당시 밤[4] 진상 기록이 많았다. 그래서 고종이 실제로 을 좋아하긴 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상 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대부분 경상도 관찰사)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줬다고 한다.

  • 경술국치 이후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5]을 손수 구워다가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

  • 고종의 첫 아들이었던 완친왕이 죽자 조대비가 군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쩌면 아들인 완친왕도 아버지의 식성을 닮아 군밤을 좋아했던 듯 하다.

  •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또 암살의 위협으로 안색이 어둡고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고 한다.[6]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외국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고종이 벌인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후 한국 병합의 걸림돌로 판단한 고종을 폐위시켰다.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공표하는 게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었으며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부인인 명성황후도 밤을 샌후 새벽 5시쯤 잠들었다고 한다. 자연히 야식도 즐기게 되었다.

  •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와플, 카스텔라 등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식혜, 사이다, 커피[7]를 주로 즐겼던 이유도 술을 못 마셨기 때문이었다. 또 수라상에는 백반(白飯)과 홍반(紅飯, 팥물밥)이 함께 오르는데, 고종은 늘 백반만 먹었고 홍반은 밥 공기 뚜껑조차 안 열었다고. 여름에는 주로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등이 올랐고 겨울에는 냉면, 아이스크림 등이 주로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유독 냉면을 먹을 때는 면치기를 했다는데, 원래 전통 예법상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옳으나, 냉면만큼은 예외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야 더 맛있다고 상궁들에게 이야기했다 한다. # 이런 걸 보면 식사 시간에 그렇게 엄격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식사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상궁들을 불러 칭찬도 했다 한다. 반대로 순종은 식사 중에 전혀 말이 없었다고. #

  •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전통적인 반청 감정도 있었던 만큼, 청에 파병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 의화단 운동 진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고종에게 파병을 제안하였고, 고종 역시 적극 검토했던 것. 이어 고종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청으로의 파병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전력 부족을 이유로 만류한 후, 본국에는 사뭇 조롱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만약 파병이 성사되었다면 대한제국이라는 닉값(?)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이 일화는 고종 역시 제국주의 시대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숟가락이나마 얹어 보려 시도했음을 의미한다. #

[1] 양쯔강의 지류[2] 그런데 당시 인심이 박한 것은 사형까지는 아닐지라도 죄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원 지역에서는 인심이 각박한 자들을 잡아들여 매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고 농부들끼리 돈이나 쌀을 빌려줄 때 이자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관에서 나서서 반강제로 깎는 경우도 있었다.[3]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그러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기록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도 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4] 정확히는 황율(黃栗).[5]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6]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어리하게 생겼다고 좀 디스하고 있다.[7]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셨다. 이를 안 김홍륙이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집어넣어 독살을 시도했으나 고종은 하도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커피에 익숙해서 맛이 이상한 것을 간파하고 바로 뱉어버렸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은 이 커피를 마시고 피가 섞인 설사를 하는 등 고생했다. 이후 고종은 김홍륙을 교수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