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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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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Itō Hirobumi
[1]


출생
1841년 10월 16일
스오국 쿠마게군 쓰카리촌
(現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2][3]
러시아 제국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
묘소
도쿄도 시나가와구 니시오이
재임기간
초대 내각총리대신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제5대 내각총리대신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제7대 내각총리대신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제10대 내각총리대신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초대 한국통감
1905년 12월 21일 ~ 1909년 6월 13일
서명
파일:이토 히로부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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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리스케(利助) →
도시스케(利助)[1]
슌스케(春輔)

슌포(春畝)
부모
부친 이토 주조, 모친 이토 고토네
배우자
선처 이토 스미코, 후처 이토 우메코
자녀
장녀 이토 사다코(요절)
차녀 스에마쓰 세이코 - 사위 스에마쓰 겐초
삼녀 니시 아사코 - 사위 니시 겐시로
사녀 오타케 사와코 - 사위 오타케 다케
양자 이토 히로쿠니
서장자 이토 분키치
서차남 이토 신이치
외외증외현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
학력
쇼카손주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2][3]
종교
무종교 (무신론)[4]
신체
154cm[5]
작위
공작[6]
정당

약력
참의[7]
제4·6대 내무경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제6대 외무대신
초대 입헌정우회 총재
귀족원 의원
초대 귀족원 의장
제1·3·8대 추밀원 의장
황실제도조사국 총재
초대 한국통감

1. 개요
3.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인물?
3.1. 반론
4. 평가
5. 어록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7.1. 영상물
7.2. 만화
7.4.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제1, 5, 7, 10대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으로서, 대일본제국 헌법의 초안 작성, 현(現) 일본내각제 시행, 양원제를 포함한 의회 제도의 확립, 일본 민법의 제정에 기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내각총리대신직과 대신직들을 비롯한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일본 국회)는 이토가 그 시작을 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리로서는 도합 7년 6개월(2,720일)을 지냈는데,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일본에서는 여자 밝힌 것 정도만 빼면 정치, 법, 황실 등의 방면에서 업적만 많이 남긴 개국 공신 중 한 명이자 정치 거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야마구치현 쿠마게군[4]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은 이등박문이며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로 부르는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는)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암살)[5] 이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6]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각은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박사박학다식에 나오는 것처럼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이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남녀노소 막론하고 아는 사람이 많다.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팽창주의를 부르짖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7][8]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통감 정치를 했다는 점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물어보면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답보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사람"이라는 답이 더 많이 돌아온다.[9][10]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이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다.

이러한 대중적인 악명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이토 성씨를 지닌 일본인들을 "이토 히로부미와 혈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며 자제해야 할 태도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구로 따지면 5위~6위에 해당하는 성씨이며 같은 한자를 쓴다고 해서 한국처럼 한 집안에서 대대적으로 갈라져 나온 자손들이 아니라 완전히 남남인 경우도 비일비재한 일본의 성씨의 특성을 미루어 볼 때 정말 널리고 널린 흔한 성씨라는 것이다. 사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한국에 비해 성씨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성본변경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지만[11] 일본의 경우는 결혼만 해도 무조건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한다.[12] 또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경우나 도무지 발음하기 힘든 괴상한 성씨를 가지고 있어 일부러 읽기 편한 성씨로 바꾸는 경우 또한 의외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이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에 아주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나가사키시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같이 거물급 성씨나 되어야 그나마 애착을 갖는 편이고, 그렇지 않은 성씨들은 자기 성이 어떻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국회 건물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13]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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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의 [[이토 히로부미/생애#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인물?[편집]


일각의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근대화에는 동의했으나 합병에는 반대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합병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합병에 기술적이라고 표현되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 조선을 (훗날 만주국처럼) 일본의 보호 하에 두며 조선인 스스로 자국의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도록하여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자국의 근대화에 노력을 쏟고 있던 일본이 조선 합병에 따른 병참기지를 비롯한 병원, 철도 등의 기초 시설의 건설 부담을 일본 정부가 스스로 지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며[14], 또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병합을 추진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발도 생길 수 있고, 합병 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구 열강들로부터 간섭과 마찰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측면도 있다.[15]

다음은 월간조선 198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으로 조갑제 기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 이토 도시오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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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90921_145521.jpg}}}



3.1. 반론[편집]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일합병을 반대한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함으로써 한일 강제 병합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17] 실제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가 살아있을 때에는 한국 정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으나, 이토가 사살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한국 정책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한국을 병합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하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당시 한국통감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를 사임시키고 자신의 뜻과 일치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으로 올렸으며[18], 결국 이토가 사망한지 1년도 안 돼서 대한제국은 합병되었다.[19]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한일병합을 반대했던 것이지, 한일병합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한국을 괴뢰국으로 삼고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호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에 급진적인 합병을 꺼린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토는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1909년 순종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기도 했다.[20] 그리고 이토는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군 해산 등 식민지화의 사전작업에 활발히 참가해 왔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었고(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는 등 가쓰라 다로 총리를 필두로 병합을 이미 추진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이토는 한국통감부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인들의 반발이 심하자 결국에는 병합에 찬성하기에 이른다. 1909년 4월,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한국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뒤 1909년 6월 통감 자리에서 사임했으며, 4개월 뒤인 10월에 하얼빈 의거가 발생했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가 한국 편에 섰던 온건한 일본 정치인을 죽였기에 결과적으로는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급진적인 합병을 반대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급진적인 합병은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결코 대한제국을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나중에 가서는 강경파들의 합병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기에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로코, 베트남, 인도의 사례와 같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직접 합병뿐만 아니라 여러 식민지배 방식이 있었다. 보호국, 제후국, 자치령, 번왕국, 부왕령, 심지어는 회사령 등 수많은 배경과 구조를 가진 정치체들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체계로 도입되었다. 가령 영국의 인도 번왕국 중 하나였던 마이소르 왕국 또한 결론적으로는 식민지로 간주되며,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응우옌 왕조 또한 마찬가지다.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 역시 식민지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이미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에 속한 사실상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결국 이토는 한국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 맞다.


4. 평가[편집]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일본 내에서의 역사적인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가 일본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으로 온건파 성향이 강했기에, 그가 사망한 상황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할 인물이 없어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토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큰 역할을 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 대해 모두 개전에 반대하는 등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한편 일각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여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진보 중에서는 김기협 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토는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한 사람이고,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보다는 정치가 출신들이 주도하여 한국이 독립보다는 자치령 정도에서 만족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며,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1909년 주한 프랑스 영사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기록했다.[21]


5. 어록[편집]


"영국, 미국, 프랑스의 자유과격론자의 저술만을 금과옥조로 과신하고, 국가를 기울게 만드는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얻어 마음 편히 죽을 곳을 찾은 기분입니다."

1882년 8월 11일, 이와쿠라 우대신에게 보내는 편지


"사람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성실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친절한 것이다."


"학문은 읽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인간은 살아있는 책이기 때문에 서양에 가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나는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고 축재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의 인구는 4천만을 넘지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 40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접 국세 5엔을 기준으로 하여 170만 명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길입니다."

1899년 3월 9일 국회 연설


"귀국은 독립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로 허명뿐인 독립에 불과하다. 제군은 최근 10년간 나라의 생존 유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 한국특파대사의 고압적 태도에 다소 불만을 드러내자 남긴 말


"제군은 동맹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릇 동맹이라는 것은 그들과 우리의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에 비로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귀국(대한제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는 절름발이를 동반하고 걷는 것과 같아서 자유로운 보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외교는 유치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하는 바이다. 따라서 제군이 다른 세력을 믿고 이 조약의 결정을 지연시키려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완전히 헛된 의뢰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국에 하등 이익될 바 없음이 명백하다."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한 말



6. 여담[편집]



파일:¥1000 front-2.jpg
  •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 1000엔권 인물 도안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그 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를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2020년 초까지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하다[22] 2020년 중반부터는 기타자토 시바사부로로 바뀔 예정이다.

  • 당대 한국에서는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에서 더 나간 이야기로,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뒤 주장한 이토의 죄목 중에 "대일본 명치 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이란 내용이 있으며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통해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개인적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한국인 도 있었다. 고려 청자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조선 통감에 부임을 한 후에 일본 천황과 귀족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있는 고려 청자들을 사들였다. 1906년에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 평정관이었던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록『그때의 기억-고려 고분 발굴시대』에 의하면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일본인을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 청자를 가져오라'했고, '몽땅 사자'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수집하여 반출한 고려 청자의 수는 최소 1,000점 이상으로 추정된다.EBS <역사채널e> - 고려 청자를 찾아라 이를 반영해서 tvN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도공 황은산의 백자를 선물받고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 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암살 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문화재청 보도자료 [23]

  • 파일:external/www.imaeil.com/20090828_161108000.jpg

한복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한국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본처인 우메코(梅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찬성했던 행위에서 봤듯 이러한 팬서비스도 눈가림을 위한 위선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처음 런던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서 인종차별적인 조롱을 많이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독하게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 때려치워도 영어 선생은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토는 실제로 UCL 화학부에서 수학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청일전쟁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할 때 이홍장[24]과 통역없이 영어로 교류를 했고 이완용과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25] 심지어 메이지 덴노와 대화할때도 뜬금없이 영어를 섞어 말해 영어를 잘 모르는 메이지 덴노가 짜증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26]

  • 생전에 복어 를 좋아했다고 한다. 먹어보고 매우 좋아서 식용 금지를 해제할 정도로 복어 매니아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복어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 커피를 즐겨마신 애호가이기도 하다. 영국 유학 시절에 커피를 접한 영향으로 즐겨마시는 것으로 추정된다.

  • 고향인 히카리에 이토 히로부미 기념공원이 있다.[27]

  • 놀랍게도 「동아찬영회」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총재는 장석주라는 친일파였는데, 이토가 죽은 뒤 이토의 동상을 세웠다.

  • 2020년 10월 21일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의원이 확보한 사료를 통해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머릿돌)에 새겨진 '定礎'(정초) 두 글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로 밝혀졌다. #

  •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워서 창경원이라는 유원지로 만드는 것을 주도했는데, 본래는 1909년 11월 1일에 열리는 창경원 개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바로 며칠 전인 10월 26일에 저격당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 안중근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일관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라고 밝혔으나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시종일관, 자신이 대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여 재판을 거쳐 사형시키기 위하여 절대로 대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토의 사살 이후 안중근의 재판에서 사형에 이르는 절차에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일제는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하기로 결정한 뒤 이에 끼워 맞추는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있고 삼권 분립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도 상당수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문제점은 아주 심각하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중에 러시아군이 위에서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러시아와 일본이 둘 다 조선[28]을 탐냈다는 것.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며 러일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의 피해는 비등비등하였고 러시아에게서 배상을 얻어내려는데 "협상하기 싫느냐?"라는 압박과 조선의 독점권을 지켜야 하는 것 중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선택해 적은 보상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과 대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 안중근에게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줄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역 건물 위의 러시아 저격수가 총을 쏴 죽였다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은 위에서 아래로 박혀있었다고 주장한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로 한 강경파인 일본 군부에서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군부의 훼방으로 비참한 말로를 보낼 운명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이 사살한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며 여러번 총리를 맡은 거물급 인사인데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 군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건적이었던 인물이며 조급히 한일병합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와 반대로 일본 군부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온건파와는 다르게 즉시 한반도를 병합하는 것을 원하였고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보이며 일본 내각을 장악하여 추진력을 얻고자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천천히 하자며 가로막고 있으니 일본 군부가 직접 암살 사건을 꾸미거나 타살을 방치하도록 고의로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하얼빈역에는 일본군보다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당시 러일 관계를 생각하면 객관적으로도 경비가 허술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급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일본군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안전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ito.jpg}}} ||
女ずき者の最後
호색한의 최후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로 사망할 당시의 풍자화로, 그림자가 의 형상을 하고 있다.[29]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7adef86830356c97542f951b15663c8800dea1c.jpg}}} ||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메이지 호색 일대 남자, 식도락, 대훈위 이토 후작 ||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30] 中에서.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로, 이토의 여색 밝힘은 유명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는데, 그 중의 1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한다.[31]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32]라는 한시를 남긴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는 총리보다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7.1. 영상물[편집]

























7.2. 만화[편집]




7.3. 대체역사물[편집]











7.4. 기타[편집]






8. 둘러보기[편집]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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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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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いとう ひろぶみ. 이름인 博文은 히로미(ひろふみ)라고 읽기도 한다. 인명에 들어가는 문(文)은 '후미(ふみ)'라고 읽는 경우가 더 흔하며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히로부미'와 '히로후미' 두 발음 모두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히로부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 교육 과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라고 가르치는데 일본 사람들(특히 학생들)도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 #(세 링크 모두 "伊藤博文"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읽나요? '이토 히로후미'라고 읽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다)도 적지 않은 듯하다. 허나 아래의 손자와의 인터뷰를 보면 훈독 '히로부미'로 읽지 않고 '하쿠분'이라고 독음으로 부르는 사례도 나온다.[2] 68년 10일[3]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4] 현(現) 히카리시[5] 공식적으로는 암살이라고 많이 쓰나 문헌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암살보다 '사살', '척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6] 박문사가 헐리고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빈관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다.[7] 그래도 이 중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냈던지라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교과서로 많이 언급된 사람이다. 도조 히데키는 안경대머리아돌프 히틀러 콧수염이라는 전형적인 일본군 외모로 유명한데다 일본군 생김새를 묘사할 때, 자신의 외모로 고착시켜 버린 장본인이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8권인 일본의 역사에도 나오므로 읽었다면 잘 기억할 수도 있다. 이시이 시로와 기무라 헤이타로는 나무위키 등의 수단을 통해 각종 전쟁범죄에 대해 열독해보지 않았거나 나무위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모를 수 있다.[8] 또 이 시절은 아니지만 임진왜란의 대표적 인물이자 역시 이토 뺨칠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증오를 받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에는 옛날 중에서도 너무 옛날 사람이라서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토가 얼마나 한국에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일본인인지 잘 알 수 있다.[9] 무단 통치를 펼친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유사한 이유로 일본 제국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보다 초대 조선 총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10] 이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례로는 조명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높은 거물인 일본 황족을 척살하려 했다. 그것도 다른 황족이 아니라 일본의 국구(= 천황의 장인)를 말이다. 끝판왕은 바로 쇼와 천황을 노린 이봉창이지만 그는 알려졌다시피 실패했다.[11] 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12] 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이다.[13] 다른 귀퉁이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동상이 있으며 나머지 한 자리는 의원 해당 자리에 올라가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14] 실제로 직할 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15] 이토 히로부미의 염려는 일본이 1930년대에 만주사변, 열하사변 등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현실화되었다. 일본이 중화민국의 이권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영국,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열강들과 국제연맹은 반발했고 이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로 응수하면서 군국주의로의 경도가 심화된다.[16] 인터뷰에서 손자는 이토를 "히로부미"라는 훈독이 아닌 하쿠분이라는 음독으로 읽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이름 자를 마치 한자 음독으로 읽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근대 일본어에서는 상당히 흔한 방식이었다. 이를 '유쇼쿠요미'라고 부른다.[17]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또한 이토가 한일합병에 반대했는지, 온건했는지를 떠나서 한국 침략의 원흉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의 의로움을 담은 내용도 있다.[18] 나중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직을 그대로 유임 승계한다.[19] 그리고 강경파가 득세하였으므로 일제시대 초기에는 정책이 강압적이어서 한국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3.1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20] 조선일보에서도 이토의 이러한 음모를 기사로 싣기도 하였다.관련 기사[21]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22]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노구치는 과학사기꾼이 아니냐는 논란이 생겼다. 자세한 것은 노구치 히데요 참조.[23] 반환도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책 외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책들도 포함되었다.[24] 이홍장도 놀라운 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고 한다.[25] 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26] 참고로 메이지 덴노는 독일어를 배웠다.[27] 야마구치 출신의 시타오 미우가 여기에 간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프로듀스 48 출전 도중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시타오 미우는 최종 데뷔조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28] 러시아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을 탐냈고 일본에서는 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써의 조선을 탐냈다.[29] 곳케이 신문(滑稽新聞), 1903. 09. 05.[30] 저자: 한상일, 한정선 / 출판사: 일조각 / 출판년도: 2006년.[31] 반대로 야마가타는 여자 문제는 없었으나 돈 문제가 깨끗하지 못 했다.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로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32]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33] 이런 케이스는 또 있는것이 게키단 히토리보다도 더 친한 연예인으로 유명한 초난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정서하고도 너무 다른 히데요시라 이질감이 심하다.[34] 당연하지만 켄신 일행은 굉장히 어이없어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엇보다 경례받는 일행 중에 진짜 사무라이 출신은 한명도 없다.[35] 이 단체 경례 장면은 군국주의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띄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폭주할 일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작 교토편의 마지막에 메이지 정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시시오의 말처럼 군국주의 행보를 걸었다는 내레이션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36] 원래 역사에서도 서양 눈치를 많이본 것을 고증한 듯.[37] 우익 정치인이라서 좌익에게는 원래부터 평가가 나빴고 러일전쟁을 막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우익에게 러시아 스파이로 찍혔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지지로 영미권에 일본을 팔아먹으려는 친미파로 낙인 찍힌다. 특히 이토 본인의 막후 정치 때문에 실제로는 별 실권없는 원로임에도 급진파들은 일본정부를 이토가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8] 실존인물로 원 역사에선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한 뒤 체포당하기 전 자살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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