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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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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종교론
2.1. 종교의 정의
2.2. 타종교와의 관계
2.2.1. 타종교와의 관계 유형들
2.2.1.1. 전적인 대체 유형
2.2.1.2. 부분적 대체 유형
2.2.1.3. 성취 유형
2.2.1.4. 카를 라너의 견해
2.2.1.5. 에른스트 트뢸치의 견해
2.2.1.6. 조지 린드벡의 견해
2.2.1.7. 상호성 유형
2.2.1.8. 급진적 다원주의
2.2.2. 유대교와의 관계
2.2.3. 이슬람과의 관계
2.2.4. 인도-이란 종교와의 관계
2.2.5. 동아시아 종교와의 관계
2.3. 종교 비판
2.3.1. 칼 바르트의 견해
2.4. 삼위일체론적 종교 이해
3. 계시론
3.1. 포괄적 계시 이해와 배타적 계시 이해
3.1.1. 포괄적 계시 이해
3.1.2. 배타적 계시 이해
3.1.3. 칼 바르트의 계시 이해
3.2. 점진적 계시 이해와 종결된 계시 이해
3.2.1. 점진적 계시 이해
3.2.2. 종결된 계시 이해
3.3. 이원론적 계시 이해와 일원론적 계시 이해
3.3.1. 이원론적 계시 이해
3.3.2. 일원론적 계시 이해
3.4. 계시의 모델들
3.4.1. 교리 또는 명제로서의 계시 이해
3.4.2.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계시 이해
3.4.3. 변증법적 현존으로서의 계시 이해
3.4.4. 역사로서의 계시 이해
3.4.5. 이야기로서의 계시 이해
4. 신앙론
4.1. 고대와 중세의 믿음 이해
5. 성서론
6. 사랑관
7. 주요 예식(성사)
9. 민족관
10. 인간관
11. 징벌관과 구원관
12. 생활관


1. 개요[편집]


기독교의 교리는 신자의 구원을 위함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구원이란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써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죄로 향하는 본성을 갖고 태어나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벗어나지 못하여 현세의 삶에서는 죄많은 삶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후에는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다.[1][2][3] 인간의 부족한 능력만으로 그 죗값을 다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과 죄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기독교 교리에서 죄의 용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죄의 대가는 사후의 영원한 지옥벌이다.[4][5] 그러나 하느님은 인류를 사랑하시어, 인류가 지옥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보내 수난과 죽음을 당함으로써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였다.[6] 따라서 죄값은 이미 전부 치러졌으나, 모든 인류가 자동으로 구원받게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여, 여전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음으로써, 인간의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신자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계명을 실천함으로 따르는 삶의 자세, 죄의 포기, 선한 마음가짐 등의 선행이 뒤따르게 된다. 이렇게 1.예수를 믿고 2.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사람은 죄를 용서받으며 구원받아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7] 예수의 제자들은 이러한 기쁜 사실인 복음을 예수의 행적과 삶, 그리고 이를 계승한 교회,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하였다.

믿고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고백하고, 이 믿음을 통해서 죄악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실천해야만 한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보내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믿고, 하느님이 성경과 교리를 통해 명령한 계명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면 그 하느님의 은총(=예수님의 도움, 성령의 작용)에 힘입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새 삶을 살아갈 은총의 원동력을 얻게 되며, 이를 통해 현세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사후에는 지옥행을 면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8] 이것이 주류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또한, 단순히 믿음 이후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이 기독교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시작,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 역시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이다.[9] 또한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며, 모든 사람들이 은총을 통해 믿음을 갖고 구원받기를 바라지만 인간은 원죄(악한 경향)에 물든 자유의지 때문에 하느님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아 실질적으로 모든 인류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며, 동시에 이 세상은 여전히 원죄에 의해 초래된 죄와 악이 상당히 퍼져 있다는 것,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죄의 악한 성향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죄와 악,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피해 믿음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한편, 기독교는 2000년이나 되는 긴 역사 동안 무수한 분파들이 갈라져 나옴에 따라 현재는 2만 개나 되는 흠좀무한 수의 교파들[10]이 있으며 이에 따라 각 교파의 교리나 성경 해석도 조금씩 상이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교파에서 동일하게 믿고 있는 신학적 믿음은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의 천지창조
  • 구세주(메시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동정녀에게서의 출생
  •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천국의 거주민이 될 자격을 얻으며, 영생(영원한 삶)을 얻을 자격이 주어짐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셋째 날의 부활
  •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세상 마지막 때에 다시 올 것)의 약속
  • 예수 그리스도 승천 및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의 존재 및 교회론적 교리[11]
  • 성령의 존재와 성령을 통한 영적인 각종 은총의 존재
  •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로서는 한분이시며 위격으로는 세분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
  • 인간 영혼의 존재와 천국/지옥으로 대표되는 사후세계의 존재
  • 마지막 때의 모든 인간의 부활과 예수 재림 후 최후의 심판에 따른 영원한 판결, 그리고 하느님 나라(천국)의 완성

이 주요 교리는 이를 총 12개의 신조로 요약한 사도신경, 그리고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이 교리들을 믿을 교리(신덕 도리)라고 해서,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믿고 고백하여야 하는 요소로 본다. 대다수 개신교 교파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이나, 사도전승 문제[12]나 예배 관습 등 세부적인 교리에서는 교파간의 많은 차이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에서 종교전쟁을 벌였을 정도로 기독교의 교파 간의 교리 차이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대립된 적도 있다. 그리고 다른 교파간 관계는 교회일치운동에도 불구하고 원활하지 않은 편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교도권 중심의 성경 해석이 성경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며 마태복음 28장 19~20절, 베드로 1서 1장 20~21절 등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성직자만이 아닌 일반 평신도 역시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개신교가 수많은 교파들로 갈라져 있는 원인이며 수없이 많은 갖가지 이단들이 발생한 주요 원인이다.

2. 종교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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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종교의 정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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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종교와의 관계[편집]


원래 기독교는 대개 유일신을 믿어왔다. 즉, 자신들이 섬길 신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타 종교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배타성이 다른 문화권과의 갈등을 낳으므로 교회가 탄생한 서기 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고민하였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예수메시아로 믿고 구원의 주체로 믿는 데서부터 시작된 종교이며, 이후 시간이 흘러 서기 4세기 이후 여러번의 종교적인 논의 끝에 예수가 유대교의 야훼와 동일한 존재로 설파되었다. 즉,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채택한 주류 교단들은 예수와 성부, 그리고 성령의 세가지 페르소나가 야훼라는 하나의 본질 및 본성을 지닌 유일한 하느님으로 믿는다. 다만 예수의 경우 특이하게도 인간의 본질 및 본성도 지닌다. 자세한 것은 삼위일체론 참고.

일반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예수를 통한 구원을 인정한다면 기독교로 분류되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야훼만을 신으로 섬기면 유대교 계통으로 분류한다. 반면 이슬람의 경우에는 예수를 유대 민족의 메시아(그리스도)로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신격이나 예수를 통한 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무함마드 이전의 일반적인 예언자 중 하나로 본다는 특징이 있다.

중세에는 비배타주의적 관점들이 희미하게나마 의식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무슬림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암묵적 신앙"과 "원의의 세례"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등장, 종파의 분열, 신대륙의 발견, 식민주의의 확장, 그리고 비기독교 공동체 출신의 이민자들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의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다원주의의 필연성을 옹호했고, 에른스트 트뢸치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역사학을 통해 비판한 이래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큰 문제로서 아직까지 논의되어 오고있다.

또한 구원 개념과 타종교를 연관짓는 것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비판과 대안들은 타종교와의 관계를 논의하기에 있어서 구원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신학자 S. 마크 하임은 종교적 삶의 목적에는 구원뿐 아니라 해탈, 전적 복종, 자기 비움 등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 목적과는 다른 종교 전통들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2.1. 타종교와의 관계 유형들[편집]


전통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지어졌다:
  1. 배타주의 (또는 특수주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만이 구원으로 이끌게 할 수 있으며, 다른 종교가 조그만한 진리를 가진다 할지라도 기독교적 믿음과 결단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2. 포괄주의 (또는 포용주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결정적/최종적 계시이며, 일반적 계시가 주어진 타종교에도 있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하는 입장이다.
  3. 다원주의: 모든 종교 속에서 동등하게 구원의 빛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상당수 비판받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과 유형들이 제시되면서, 여러 대안적 범주들이 나오고 있다. 신학자 크리스토프 슈뵈벨은 배타주의와 다원주의로 나누는 것은 "어느 입장도 하느님의 은혜의 특수성과 보편성 양자 모두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관심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신학자 폴 F. 니터는 종교신학을 네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대체 유형' (보수 복음주의의 입장), '성취 유형'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입장), '상호성 유형' (진보적 개신교 및 가톨릭교회의 입장), '비교불가능성 유형'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입장).

신학자 벨리마티 케르케이넨은 '교회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신 중심주의'로 나뉘어진 범주들을 제안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한 아래의 여덟 가지 유형들은 다니엘 밀리오리의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을 참고하여 붙여졌다. 이러한 유형들은 대체적으로 보수적 입장에서 진보적 입장으로 흐르게 서술되었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관적이다.

2.2.1.1. 전적인 대체 유형[편집]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이며 구원자이므로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에는 계시나 구원이 없으며, 다른 종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2.2.1.2. 부분적 대체 유형[편집]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이고 구원은 그에 대한 신앙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보지만, 타종교에도 어느 정도 진리가 들어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기독교의 전통주의적 입장이기도 하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바크티 종교나 대승 불교같은 유일신론적 종교도 기독교처럼 진리이지만, 기독교와 달리 자력 구원을 추구하므로 동시에 기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학자 칼 브라텐은 타종교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지만, 은혜와 용서의 복음의 지식이 아니기에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2.2.1.3. 성취 유형[편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기독교 종교들의 가치와 진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은혜는 타종교를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성취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모든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이 입장은 현재 가톨릭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공식적 견해가 되었다.

2.2.1.4. 카를 라너의 견해[편집]

신학자 카를 라너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타종교에도 현존한다며, 타종교에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신실하게 사는 자들은 하느님을 몰라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라너가 언급한 이 하느님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이다.

하인츠 로베르트 슐레테는 라너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모든 종교는 구원의 통상적인 길이고 교회는 구원의 특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2.2.1.5. 에른스트 트뢸치의 견해[편집]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치는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비판했다. 트뢸치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1. 순진하게 주장한 절대성: 기독교적 확신과 이 확신이 믿는 자를 구원하고 자유롭게 햐는 영향력에 근거한 절대성
  2. 인위적으로 주장한 절대성: 논증을 통해 기독교의 우월함이 증명될 수 있다는 신학에 근거한 절대성
  3. 진화론적 관점에서 주장한 절대성: 역사적으로 파악된 다양한 종교의 일반 개념에 근거해서 이 종교 개념이 오직 기독교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음에 근거한 절대성
트뢸치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편타당한 가치가 도출될 수 없음을 말했으나, 가치와 규범이 역사적 제약 안에서 완전하고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음 또한 말했다. 역사는 가치를 상대화하지 않으며 개인적 입장을 표명하도록 요구한다. 트뢸치는 다양한 종교에 대한 비교를 통해 기독교 안에서 인격주의 사상이 가장 강하게 드러남을 발견했다. 그에 의하면 이 역사 초월적인 인격주의는 기독교가 신과의 인격적 관계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기독교의 절대성 대신에 기독교의 최고 타당성을 주장했다.

카를 하인츠 라초브는 하느님이 종교 안에서 세계를 통치한다는 입장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이 상대화되는 것을 비판했다. 라초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해석되지만 성령 안에서 해명되기까지는 불안하고 희미함을 주장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절대적인 진리이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아니다. 그는 특정 종교의 절대성을 그 종교 밖에서도 고수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을 하느님의 단계로 높이는 우상숭배라고 지적했다. 라초브는 종교의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는 것과 종교의 상대성을 절대화시키는 것 둘 다 거부했다.

2.2.1.6. 조지 린드벡의 견해[편집]

신학자 조지 린드벡은 종교 간의 독특한 차이점과 특수성을 강조하며, 종교 각각이 자신의 특수성과 서로의 독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환원 불가능한 종교 간의 다양한 대화와 협력은 물론이고 서로 종교를 발전시켜주는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비기독교인이 죽음 이후에도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는 긍정적 입장을 전개했다.

2.2.1.7. 상호성 유형[편집]

신학자 폴 틸리히는 각 종교 전통들 간에 상이한 강조점과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가르침이 혼재하는데,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타종교와 비종교를 포함한 모든 존재에는 성령의 빛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신학자 한스 큉은 모든 종교에 진리와 오류가 혼재되어 있으나,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와 협력은 서로 놓치고 있던 부분을 발견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신학자 존 B. 캅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종교에 들어있는 근원의 지혜를 수용하게 되며, 종교 전통들의 습관과 한계를 비평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다른 신앙과의 대화는 기독교적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타종교의 고통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었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수용을 하는 동시에 상처를 받지만, 기독교인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대화 속에 참여해야 한다.

2.2.1.8. 급진적 다원주의[편집]

신학자 존 힉은 종교 간 공통점에 초점을 두어 각각 종교 전통들의 궁극적 실재 중심적 핵심을 파악하고자 했다. 힉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음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고 보았다. 힉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론적 진리 주장이 아닌 시적이고 넘쳐 흐르도록 풍부한 사랑의 언어로서 이해했다.

폴 F. 니터는 힉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적 확증을 중요시 여겼다. 니터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확신에 부끄러워하기 않으면서 타종교와 대화 하기를, 그리고 이 대화에서 타협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음을 주장했다.


2.2.2. 유대교와의 관계[편집]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의 관계보다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유대교의 타나크와 동일하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대교를 박해해왔으며, 심지어 루터는 유대교의 회당을 파괴하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견해는 후대의 수많은 루터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루터교 신학자 파울 알트하우스에마누엘 허시를 중심으로 한 루터교회가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홀로코스트 후,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추세이다. 가톨릭교회는 오늘날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만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하며, 마르틴 부버에마뉘엘 레비나스 같은 유대교 신학자들의 작업이 기독교 신학에 다양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피터 폰데어오스텐자켄은 반유대주의의 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삼은 것에 있다고 보아 그리스도 중심적 기독교를 거부했다. 베르톨트 클라퍼트는 구약성서를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유대교 문서의 6번째 문단 참조.

2.2.3. 이슬람과의 관계[편집]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슬람과의 다양한 갈등을 맺어왔으며, 십자군 전쟁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보편 종교 개념이 유럽에 활성화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잠재적인 의식이 학자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보여졌다. 현대의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과 이슬람 신학자들은 서로 간의 종교 대화의 필요성을 인지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스 큉은 이슬람이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그리고 기독교는 쿠란과 이슬람의 전례들을 받아들이거나 삼위일체론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종교 간 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2.2.4. 인도-이란 종교와의 관계[편집]


한스 큉힌두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조명했다. 가령 힌두교의 박티 요가는 종교개혁이 외쳤던 믿음, 즉 무조건적인 헌신과 유사하다.


2.2.5. 동아시아 종교와의 관계[편집]


유교는 종교이지만 예언자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사상이 아브라함계 종교나 인도-이란 종교와 비교하였을 때 훨씬 저조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교는 기독교와 독특한 방식으로 혼재될 수 있었다.

2.3. 종교 비판[편집]



2.3.1. 칼 바르트의 견해[편집]


오직 전적 타자인 하느님에 의해서만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가 극복된다고 주장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의 종교적 노력들을 의미없는 것으로, 아니, 종교를 무신론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자신의 계시-신학적 관점을 통해 종교 비판을 전개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가 아니라 오직 계시만이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적절히 밝혀낼 수 있다. 또한 바르트는 종교의 본질이 죄와 불신앙임을 전개했다. 다만 오직 죄인의 칭의에 한해서 참된 종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라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며 기독교가 종교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했다. 종교는 신앙에서의 개인의 내적 확신과 참여가 아닌 공동체의 전통에 기초하며, 종교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이 땅으로 내리게 한다. 본회퍼는 이와 같은 시선에서 종교와 신앙을 구분했으며, 본회퍼가 보기에 기독교는 종교에서 벗어나 신앙으로 돌아가야 했다.


2.4. 삼위일체론적 종교 이해[편집]


삼위일체론이 근대에 무시되었으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하는데 기여했다. 그중에는 삼위일체론을 통해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탄생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라너의 영향을 받은 자크 뒤피의 입장은 타종교는 물론이고 종교 자체에서도 현존하며 활동하는 삼위일체적 성령론과, 기독론에 기반했다. 뒤퓌는 성령의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별하면서도 서로 불가분리적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즉, 하나의 구원 사건을 그리스도와 성령 둘을 통해 구별되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는 타종교에서도 활동하는 성령의 활동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타종교의 전통을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S. 마크 하임은 삼위일체론적 종교 이해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편적/구성적으로 이해함은 물론이고, 타종교 안의 특수성과 하느님의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하임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통일성과 상이성을 초월한 연합이 타종교와 연합을 맺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임에 의하면, 각 종교가 모두 하느님의 합당한 뜻인 것이다.

개빈 드코스타는 기독교에 유일한 구원이 있음을 견지하면서도 삼위일체론을 통해 다른 종교들의 고유한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계시론[편집]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기 선포다. 본래 계시는 어원론적으로 '드러남', '밝혀짐', '벗겨짐' 등을 뜻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신앙을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응답으로, 그리고 성경을 기록의 형태로서 하느님의 계시를 결정적으로 반영하는 문서로 인정한다. 계시의 주체는 하느님이고, 계시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진노다.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 의지, 행위 안에서 주어진다. 창조 세계를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자기 선포를 자연() 계시 또는 보편 계시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자기 선포를 초자연() 계시 또는 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자연 계시를 통해 얻은 신학을 초자연() 신학 또는 계시() 신학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특별 계시를 통해 주어진 신학을 자연 신학이라고 부른다. 직접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직접 주어진 계시라면, 간접 계시는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어 내려온 계시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행위를 다양한 형태로 그려낸다. 창세 17에 따르면, 하느님은 모든 백성 중에서 이스라엘만 선택하고 그와 계약을 맺는다. 출애굽 3:14에 따르면, 야훼는 자신이 하느님임을 역사를 통해서 증명한다. 신명 6:4-5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을 주로서 인정하고 사랑하기를 원한다. 이사야 40:5에 따르면, 하느님은 미래에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것이며, 49:6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있던 구원의 관심을 전세계로 넓힐 것이다. 이사야 7:14와 마태오 1:23; 즈가리야 9:9와 마태오 21:5에 따르면, 구약성경의 기대들과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요한 14:6과 행전 4:12에 따르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히브리 1:1-2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하느님의 자기 선포를 증언하는 이러한 다양한 성경의 내용들은 신학이 해명해야 할 두 가지 문제로 이어진다:
  1. 구약과 신약의 관계: 구약의 텍스트 그 자체에서는 그리스도론을 도출할 수 없다. 이것은 급진적인 일부 성서학자들의 일탈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안팎을 불문하고 성서학에서 널리 공감을 받는 견해이다. 곧, 그리스도론적인 구약 독서는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다시 읽었을 때 얻어지는 관점인 것이다.[13] 여기서 그리스도교 안팎의 차이는 '그 관점이 객관적인 실재인가, 혹은 주관적인 감상문에 불과한가'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교 성서학에서는 이것을 객관적인 실재로,[14] 비그리스도교에서는 주관적인 감상으로 여긴다.
  2. 비기독교적 하느님 진술도 진리인가의 여부: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전 유대교에도 참된 하느님 지식이 전해졌음을 확인했고 (히브리 1), 아브라함이 첫 믿음의 증인이자 신앙의 아버지로 여긴다 (로마 4; 갈라디아 3; 히브리 11). 그러나 유대-기독교 전통 바깥에 있는 종교 전통들에도 참된 하느님 지식이 남아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참된 하느님의 계시가 주어지는가? 신약에서는 또한 유대-기독교 전통 밖에도 하느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듯한 구절이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로마 1:19-32을 비롯하여; 행전 14:8-18; 17:16-34; 로마 2:12-16이 있다. 이 구절의 해석을 둘러싼 쟁점에서 가장 중요한 두 쟁점은 이렇다:
    1. 로마 1:19-20: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이 내용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시 없이도 올바르고 참된 하느님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1. 이 부분을 보다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창조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또한 여기서 그리스도의 계시가 성경 밖의 하느님 진술도 포함한다는 포괄적 계시 이해가 나타났다.
    2. 그러나, 로마 1:21은: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주어진 하느님 계시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 #2 이 부분을 보다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창조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의 상이성을 강조한다. 또한 여기서 그리스도의 계시가 성경 밖의 하느님 진술을 제외시킨다는 배타적 계시 이해가 나타났다.

개신교 스콜라 신학자 다비트 홀라츠는 계시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일반 계시, 특별 계시, 직접적 계시, 및 간접적 계시.

요하네스 안드레아스 크벤슈테트는 계시를 "하느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인류가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치기 위해 자신을 인류에게 개방하는 수단으로서 바깥에서 오는 하느님의 행위"로 평가했다.

관념주의 신학자들은 간접 계시를 직접 계시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계시 종교의 가치나 무가치는 이웃 사랑의 자연종교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계시에 의거한 순수한 도덕적 신앙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겼다.


3.1. 포괄적 계시 이해와 배타적 계시 이해[편집]



3.1.1. 포괄적 계시 이해[편집]


유대교, 초기 기독교, 그리고 고대 후기 철학은 로마 제국의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비판했고, 당대 신학자들은 철학의 다신론 비판과 부자연스럽게 공존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철학자들도 순수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레나이우스 또한 구원을 창조의 회복으로 이해하면서, 철학이 신학을 통해 발전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부터 철학이 신학의 완벽한 진리 탐구 과정에 필수적이라는 사유가 중세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철학의 자연적 통찰을 신학의 초자연적 계시를 통해 완성시키려는 사유가 스콜라철학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했다.

그 후 종교개혁 신학자들은 철학적 신 지식의 무용성을 강조했으나, 구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이르러 다시 철학적 신 지식의 역할이 인정되었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중세보다 인간의 죄성을 강조했기에 가톨릭 스콜라주의에 비해 자연적 신 지식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다.

계몽주의 시기가 되자, 초자연 계시의 불확실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면서 대체적으로 자연 계시가 초자연 계시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폴 틸리히는 계시 안에서 존재의 깊이가 열린다고 보았다. 틸리히에 따르면 계시 안에서 존재는 신적인 근거와 심연을 향해 투명해지며, 존재의 근거는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의 힘으로 계시된다. 그리고 계시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의 파괴적인 힘과 고양적인 힘이 만난다. 틸리히는 계시를 무조건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의 현시이며; 자연, 역사, 집단과 개인, 말씀을 계시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 계시를 준비 시기와 수용 시기로 나누었다. 보편적 계시는 그리스도 이전, 그리스도와 나란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이것들을 통해 타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최종적 계시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제1-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주었듯이, 자연적 이성을 통해 하느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 공식 교리로 세워졌다. 또한 하느님의 유일성과 그가 창조주라는 교리가 이성 뿐만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도 전승되어졌다는 논거가 세워졌다. 불완전한 자연적 통찰이 초자연적 계시로 하여금 완성되어야 한다는 중세의 교리가, 완전한 자연적 이성이 완전한 초자연적 계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변화된 것이었다.


3.1.2. 배타적 계시 이해[편집]


테르툴리아누스는 철학과 기독교를 연결짓는 것에 거부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신앙을 실존적으로 이해했던 마르틴 루터는 자연 계시를 하느님의 완전한 지식으로 향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루터는 철학적 신학을 우상숭배의 극복이 아닌 변종으로 이해했다. 기독교 밖에도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선포가 있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그것이 왜곡되고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부어준 믿음 없이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불가능하다. 이성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지만 그것은 늘 거짓되고 실패한다. 또한 이성은 하느님께 보답하기 위해 선한 행실을 하며, 행실의 공로에 따라 벌을 받는다고 여기게 한다. 이어서 루터는 행위와 공로, 즉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은혜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율법의 기능을 역해석해 율법의 존재 이유는 '죄의 방지'와 '원죄의 계시'라고 이해했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루터를 이어 하느님의, 율법 안의 낯선 '비본래적 활동'과 복음 안의 진정한 '본래적 활동'을 구분했다. 그는 최종적인 말씀인 복음 전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해했다.

장 칼뱅은 인간의 보편적 "신성에 대한 감각" 또는 "종교의 씨앗"을 긍정하면서도, 이것들은 특별 계시와 비교하면—죄에 의해—심각하게 약화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로마 1:18-23에 근거하여 종교를 우상화시키는 인간의 하느님 인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자연적 하느님 지식이 왜곡되었더라도 그것도 분명 계시라는 것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사람이 기존의 하느님 지식 없이 어떻게 자연 계시가 하느님을 떠난 삶의 결과임을 알 수 있겠는가? 알트하우스는 그리스도 밖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자기 증언을 원계시라고 지칭했다.

에밀 브루너칼 바르트의 자연 계시 비판으로부터 자연 계시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브루너에 따르면 기존의 하느님 지식 없이는 죄와 회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과 역사로부터 하느님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브루너는 이 개념을 "접촉점"이라고 불렀다.

라인홀드 니버는 계시를 종교의 연속이나 완성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적으로 반전시키는 확증이자 변화라고 주장했다.


3.1.3. 칼 바르트의 계시 이해[편집]


포괄적 계시 이해와 배타적 계시 이해는 입장이 서로 상반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전과 밖에 주어진 하느님의 자기 선포, 즉 '자연 계시'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떠한 종교적 행위도 불신앙으로 규정했던, 칼 바르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계시가 주어짐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의 존재가 신앙의 초점을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에 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물론이고 그릇된 지식조차 세울 수 없다고 보았다. 자연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 해석과 정당화만을 낳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기독교 밖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세계 전체의 주인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기 때문이다 ('빛의 교리').


3.2. 점진적 계시 이해와 종결된 계시 이해[편집]



3.2.1. 점진적 계시 이해[편집]


에른스트 트뢸치는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종결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포괄하면서도 기독교에서 정점에 도달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트뢸치의 점진적 계시 이해는 세 단계를 거친다:
  1.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계시 (경전이나 제의)
  2. 발전하는 계시 (전승)
  3. 현재적 계시 (종교 경험)

폴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최종적이고 원초적인 계시지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계속되는 계시로 여겼다. 틸리히는 역사의 종말까지 원초적 계시가 계속될 수 있다고 보았다.


3.2.2. 종결된 계시 이해[편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점진적 계시를 거부했다.

한스게오르크 프리체는 AD 30년까지 일어난 성육신 사건을 계시 사건으로 간주했다.

오스카 쿨만은 AD 1년에서 AD 70-80년까지의 사이의 기간을 직접 계시 또는 성육신의 시기로 보았다.


3.3. 이원론적 계시 이해와 일원론적 계시 이해[편집]



3.3.1. 이원론적 계시 이해[편집]


프리드리히 브룬슈테트, 베르너 엘러트, 파울 알트하우스, 피터 브루너, 에드문트 슐링크, 에른스트 킨더, 울리히 만은 율법과 복음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특히 엘러트는 하느님의 계시를 율법과 복음의 갈등 속에서만 일어나고, 이 갈등은 죄와 신앙의 갈등 속에서만 일어난다고 보았다. 엘러트에 따르면 하느님의 계시는 진노와 은총이고, 인간의 계시는 죄와 신앙이다. 그는 여기서 진노-죄와 은총-신앙으로 계시를 상응시켰다.


3.3.2. 일원론적 계시 이해[편집]


칼 바르트는 이에 반대해 계시의 일원론적 성격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율법을 복음의 한 부분으로 보고, 율법이든 복음이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둘 다 은총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통해 계시의 삼중적 형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 성부성자성령
  • 계시자 → 계시 → 계시됨
  • 은폐 → 드러냄 → 전달
  • 자유 → 형태 → 역사성

파울 알트하우스는 계명-율법-복음으로 이어지는 삼중 명제를 제안했다. 그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계명이 율법이 되었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복음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를 통해 복음에 의해 율법은 폐기되었으나 계명이 효력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3.4. 계시의 모델들[편집]



3.4.1. 교리 또는 명제로서의 계시 이해[편집]


보수 복음주의와 신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하느님의 계시가 교회나 전통의 교리나 명제로서 매개되고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칼 F. H. 헨리는 계시를 인지적 진리의 명확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스탠리 J. 그렌츠는 하느님의 계시를 명제로 이해하면서도 이야기나 전통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했다.


3.4.2.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계시 이해[편집]


계몽주의 신학은 대체로 자연적 이성이 초자연적 계시보다 우월한 것으로 또는 정초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 하만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여 초자연적 계시를 모든 인식과 행위에 선행하는 근원적 이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이해를 계승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우주가 매순간 계시한다는 통찰에 근거해 계시를 다양한 종교적 관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이해에 따르면, 하느님의 근원적 계시는 다양한 종교 공동체의 관점의 토대에서 형성되어 간다. 이렇게 계시는 종교적 관점의 다양성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종교적 공동체도 자신의 계시를 우월한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의 하느님 지식은 인간이 처한 한계의 본질로 인해 반드시 특정한 관점으로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온전한 진리는 오직 하느님만이 소유할 수 있다.

에른스트 트뢸치도 슐라이어마허와 비슷하게 계시를 하느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관계와 신비로부터 흘러나오는 내면적 격양으로 이해했다. 계시는 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자연적으로 계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일러트 헤름스는 계시를 인간의 확신과 행위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동적으로 경험된 이해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해 사건에서 주어지는 확신과 행위가 계시의 내용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해 사건은 특정 종교의 성격을 띤다.


3.4.3. 변증법적 현존으로서의 계시 이해[편집]


에밀 브루너부버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계시를 개인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거기에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교통이자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말씀의 형태로 오는 구원 사건인 케리그마(Kerygma)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3.4.4. 역사로서의 계시 이해[편집]


오스카 쿨만은 계시를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사건 연관에 관한 계시'로,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실존에 관한 계시'로 규정했다. 이 구원사적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다 그리스도 안에서 확장된다.

오토 베버는 하느님이 역사의 주체-객체로서 우리를 위해 계시를 역사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유한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계시했다고 주장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계시가 하느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라는 것을 부정하고, 간접적인 역사적 행위를 통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판넨베르크는 계시가 역사가 끝날 때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계시의 보편적 특징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적 계시의 구분을 부정하기도 했다.


3.4.5. 이야기로서의 계시 이해[편집]


가브리엘 패크리는 계시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나타나는 하느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로완 윌리엄스는 성서의 이야기가 종결되지 않았으며, 하느님만이 이것을 종결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신앙론[편집]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신앙" 또는 "믿음"으로 정의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는 믿음의 의미는 인격적 신뢰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창세 15:6(과 로마 4:3; 4:9; 그리고 갈라디아 3:6)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개역한글

아브람은 창세 12:1-3에서 등장한 하느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신뢰했다. 창세 12:1-3과 18:10-13에서 볼 수 있는 비이성적으로도 보이는 하느님의 약속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성이나 현실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사야 7:9와 28:16은 믿음을 끈기있게 하느님의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이사야 7:9, 개역한글

그러나, 믿음은 현실성 안에서 하느님의 신실함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하기도 한다. 출애굽 14:31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애굽기 14:31, 개역한글

그 외에 마태오 8:8-10; 마르코 2:1-12; 5:34; 6:5 등은 하느님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을 잘 표현해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와 연결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다는 것에 근거해, 믿음을 하느님의 죄 용서와 구원에 대한 확신와 연결시켰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14, 개역한글


믿음은 신뢰 외에도 하느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의 지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g. 요한의 복음서). 이 경우에 믿음과 지식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즉 구약성경이 하느님과 그의 행위나 예언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믿음으로 제시한다면, 신약성경은 믿음의 의미를 동의와 지식 범주까지 확장시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작위적인 사건이 아니라, 스토아주의와 원영지주의의 영향 하에서 전달받은,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적 숙고였다).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요한의 복음서, 바울로 서신들, 및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비유대적—정확히는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고 헬레니즘적—기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부버에 따르면, 유대교에게 믿음은 계명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며 행위를 통해 몸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로 서신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지식"이나 요한의 복음서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동의"가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 또한 부버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부버에 따르면, "지식이나 동의로서의 믿음"은 유대교와 예수의 "신뢰와 확신으로서의 믿음" 이해와 관련 없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부버의 논지를 비판함으로서 기독교적 믿음 이해를 옹호했다. 에벨링에 따르면 "믿다"라는 단어 자체가 기독교에 의해 발전했다. "믿는다"라는 말은 믿음의 용기의 근거가 어디인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에벨링은 이사야 7:9를 인용하며, 믿음은 존재와 관련이 있으며 존재의 근거를 경험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4.1. 고대와 중세의 믿음 이해[편집]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보편적인) 믿음의 내용"—대상으로서의 믿음—과 "(개별적인) 믿음의 행위"—신뢰로서의 믿음—로 구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대상을 아는 것은 공시적인 반면에, 대상을 인격적으로 믿는 신앙은 오직 이러한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및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구분했다.

중세에는 대상으로서의 믿음과 신뢰로서의 믿음 말고도, 교회 전통에 대한 신뢰인 "내포된 믿음", 신앙 내용에 대한 신뢰인 "명백한 믿음", 성령이 부어준 사랑에 근거한 "부어진 믿음", 역사 지식과 관련된 "역사적 믿음", 믿음의 내용에 동의하지만 아직 사랑으로 형성되지는 않은 "형성되지 않은 믿음", 믿음의 교리를 수용하는 "획득된 믿음", 등으로 믿음이 세세하게 구분되었다. 이 시기에는 믿음을 위해서 적어도 사도신조, 십계명, 주기도문을, 때로는 보편교회의 교리와 규범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과 사랑의 영향을 받았냐의 여부에 따라 "형태가 없는 신앙"(지식적 신앙)과 "형태가 있는 신앙"(의지적 신앙)을,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아느냐의 여부에 따라 "명시적 신앙"(밖으로 드러나는 신앙)과 "함축적 신앙"(숨겨진 신앙)으로 신앙을 구분했다. 또한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으며, 은총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도리어 완성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의 기준의 규범의 과제가 교황의 권한에 달려있다고도 보았다.

5. 성서론[편집]


구약 본문의 경우, 전통적으로 교회는 구약 본문 그 자체에서 드러나는 문필적 의미와,[15] 신약의 시선으로 구약을 읽을때 드러나는 예형론적 의미를 모두 인정한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유다인들로부터 배운 해석법이자 구약 시대의 유산이다.[16] 대체로 교부 시대보다는 스콜라 시대에, 스콜라 시대보다는 근대에 예형론적 의미보다는 문필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나, 예형론적 의미는 현대 신학에서도 강조점만 옅어졌을 뿐 여전히 사용된다.[17]

해석학적인 면에선, 자주 '성직자가 독점하는 가톨릭/정교회', '자유로운 해석의 개신교'라도 도식화되지만, 이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이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가 그런 슬로건을 내세운 건 사실이지만, 이미 루터 본인조차도 후기에는 그러지 않았으며, 관주도적 프로테스탄트 개혁[18]에서는 개인의 해석을 거부하였다.

성찬에 대한 개혁자들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는 관주도적 종교개혁을 항구적으로 두 개의 운동으로 분리시키는 일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루터가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그런 성경구절들의 해석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널리 증명해보였다. 1510년대 말과 1520년대 초에는 낙관적인 성경주석관이 일반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그러나 1530년대 말에는 일반 그리스도인이 오직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숙하며, 복잡한 언어학적 이론들에 익숙한 경우에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성경독자들은 성경해석의 수단으로서 어떤 '필터'를 제공받았다. 이러한 '필터'의 한 예로, 루터의 "소요리문답"(Lesser Catechism, 1529)은 독자들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한 틀을 제공했다. 그런데 가장 유명한 성경 안내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 특히 1529년의 최종판 ㅡ 였다. 이 책은 처음에 칼빈이 루터의 요리문답을 모델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1년도 불어판 서문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하는 열쇠나 입구와 같게 될 것"이라고 진술했다. 달리 말해서 독자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성경해석의 수단으로 사용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쯔빙글리에게 쮜리히 시와 쮜리히 교회는 사실상 하나였고 동체였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것은 그의 교회론 및 성례론[19]

과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시의회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개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쮜리히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올바른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로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시의회는 사실상으로 그들이 ㅡ 교황이나 공의회가 아닌 시의회가 ㅡ 쮜리히 시민들을 위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의도가 있음을 알렸다. 성경에는 실로 해석하기 애매한 경우들이 있는데, 시의회가 성경 해석자로 활동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함에 따라 쮜리히 종교개혁의 정치적 성공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었다. 바젤과 베른에서도 쮜리히의 모델에 근거한 비슷한 결정이 내려져 스위스 종교개혁을 강화시켰으며, 1530년대 중엽에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킴으로써 간접적으러 칼빈의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끌었다.

초기 개신교 내부의 세력 갈등은 성경해석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권위를 갖고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누구나 종교개혁의 다양한 갈래들의 이데올로기 ㅡ 곧 사회적, 정치적인 견해 ㅡ 에 사실상으로(de facto) 통제를 받고 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교황의 세속적 권위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권위 있는 성경해석자로서의 역할과 결부되어 있었다.

.... 관주도적 종교개혁이 초기에는 각 사람이 성경해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는 사회적, 정치적 결과를 염려하게 되었다. 1525년의 농민반란은 루터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에게 솔직히 개별 신자들(특별히 독일 농민들)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중요성을 그처럼 강조했다가 나중에 덜 교육받은 멤버들이 동일한 성경을 해석하게 될 것을(달리 말해서 관주도적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해석에 도달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성경으로 직행하는 일를 거부했던 것은 루터파 종교개혁의 아이러니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뷔르템베르트 공국의 학교규칙은 가장 유능한 학생들에게만 최종 학년에 신약성경을 배우는 일 ㅡ 라틴어나 헬라어로 배워야 했다 ㅡ 을 허락하도록 규정했다. 어쩌면 훨씬 다수였을 나머지 보통 학생들은 그 대신에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읽도록 규정되었다. 직접적인 성경해석은 사실상 이렇게 소수의 특권을 지닌 집단의 몫이 되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그것은 성경 해석자로 교황을 지목하는가, 루터나 혹은 칼빈을 지목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성경의 명료성'의 원칙은 종교개혁 내부의 보다 급진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했던 용례에 비추어 조용히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모든 사람이 신실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념은 결국 오직 급진파들만의 소유가 되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s: An Introduction), 최재건 번역, 제3증보판 255-259쪽


지금도 왕왕 거론되는 또다른 오해는, 개혁가들이 사람들에게 성서를 읽혀서 그들 스스로 성서의 의미를 해석하도록 이끌려고 했다는 것이다. ...... 당대의 다른 성서들과 마찬가지로,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서문과 난외 주석으로 독자를 인도하고자 했다. 16세기에 성서를 읽으면서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유아 세례 등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기독교도를 유죄 판결했다는 점에서 신교 당국과 가톨릭 당국은 차이가 없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The Reformatio), 이재만 옮김


6. 사랑관[편집]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레위기 19장 18절(공동번역 성서)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한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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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8~10절(공동번역 성서)


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0]

요한의 복음서 13장 34~35절(공동번역 성서)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3장 1~13절(공동번역 성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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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첫째 편지 4장 18절(공동번역 성서)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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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의 복음서 22장 35~40절(공동번역 성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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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의 복음서 12장 28~31절(공동번역 성서)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0장 25~37절(공동번역 성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호세아 6장 6절(공동번역 성서)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21]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2]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오의 복음서 19:16-2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오의 복음서 25장 31절 - 46절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복음 3:16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8절(공동번역성서)


이어서, 하느님이 성경과 교리를 통해 명령하신 계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이는 물론 절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 온정적인 박애정신인 아가페적 사랑이다. 예수는 성경에서 여러 번에 걸쳐 사랑을 실천할 것을 직접 강조하였다. 단순히 가족과 친구를 아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하였다. 누가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자기와 한 몸인 것처럼, 예수 본인을 직접 만난 것처럼 대하라고 가르쳤다. 즉, 온 인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만을 훗날 천국에서 자신의 제자로 대할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였다.[23] 이 때문에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있다. 만약 이러한 사랑의 계명을 실제로는 믿고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 또는 교파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이비이다. 사랑의 실천이 따라오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단, 여기서 정말 조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기독교적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 있던지, 어떤 행동을 하던지간에 무작정, 무제한적인 관용을 베푸는 식의 사랑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나 죄를 짓고 다니면서도 양심이 무뎌져버려 그것이 죄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고 하자. 이 경우에 '사랑'이나 기독교 외적인 세속적 가치관을 내세워 이들의 죄의 상태를 침묵하거나 죄인들의 죄짓는 행위를 묵인/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라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보편적 교리에 입각하여 권고하고, 또한 죄인들을 죄에서 벗어나게끔 기도하고, 실제적으로도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 선행과 사랑의 강조는 인간의 노력을 통한 사랑의 실천만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류는 여전히 원죄를 갖고 태어나며, 스스로 온전히 의롭고 선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과 도움 없이 인간의 노력(선행이라거나, 이웃사랑이라거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죄있는 인간은 하느님앞에 한없이 겸손해야 하며, 스스로 약하고 모자람을 인정하고, 믿음과 교리를 반드시 받아들여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상술했듯이 믿음과 교리를 따르는 삶, 그리고 사랑의 가르침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 은총이자 도움이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라면서, 믿음과 구원을 등한시하는 그리스도인은 역시 예수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서로 사랑하라는 아가페적) 계명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 교리상으로는 십계명을 두고 이를 공통적으로 지킨다.[24]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같은 비신자들에게도 유명한 원칙 역시 이웃사랑의 계명이 확장된 것이다. 또한 이를 따라 온 인류에 대한 공동체 의식, 즉, 공동선,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과 인류애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

7. 주요 예식(성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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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오랜 역사 전통과 성경 기록에 의거해 여러 예식들을 확립시켰으며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주요한 예식들은 다음과 같다.

성사[25]

  • : 예수를 하느님이자 자신의 죄악에서 구원할 인격적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자로 재탄생하는 예식이다. [26][27]

  • 만찬: 예수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포도주와 빵(떡)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구원을 확신하고 공동체적 동일감을 고양하는 예식이다. 예수가 자신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때, 예수를 따르던 많은 유태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떠났듯이[28], 성찬예식은 일반적인 비기독교도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식이다.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에서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성찬 제병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성변화설을 주장한다. 자세한 것은 성체성사성만찬 문서를 참고할 것. 또한 타교파에서 받은 세례 등을 인정한다. 세례성사 참고.

가톨릭,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에서 인정하는 예식 [29]

  • 견진성사
  • 고해성사
  • 혼인성사
  • 성품성사(신품성사) - 주교제 교회의 성직자를 양성하는 성사. 신자가 사제수도자, 기혼자[30]가 되기 위한 거룩한 소명을 받아 가지는 것을 '성소'(聖召 = 거룩한 소명)라고 부른다. 다만, 수도자는 성품성사를 받는 것이 아닌 자체적인 과정을 통해 입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성직자가 아닌) 수도자도 있다. 수도자 생활을 하면서 추가로 신학과정을 공부한 뒤 성품성사도 받아서 성직자가 된 수도자는 수도 사제(수사 신부)[31]라고 불린다.
  • 병자성사 - 죽어가는 사람,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베푸는 성사. 축성된 성유를 바르고[32][33]환자의 쾌유와 은총을 빈다. 원칙적으로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나서 진행하는데, 죽어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지막 고해를 한다면 이를 통해 죽기 전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굳이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이 일생에 한번 하는 성사가 아니라, 큰 수술 등을 앞두거나 병이 재발하거나 할 경우에 여러번 받는 경우도 있다.

주교제 전통이 남아있는 개신교 교파인 성공회는 위의 주교제 교회 전용 예식을, 성사는 아니지만 성사에 준하는 예식이라 하여 '준성사', 또는 '성사적 예식'이라 부른다. 이 다섯 준성사를 고대 초기 교회로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존중하고 시행하기는 하나,[34][35] 공식 예식에서는 세례감사성찬례만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성공회 신자가 큰 죄를 지었을 때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아도 괜찮고, 그냥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개신교식 개인 회개만을 통해서도 고해성사 필요없이[36] 똑같이 용서받는다고 본다. 어차피 주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에, 긍휼을 구하는 진심만 있다면 형식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


8. 기도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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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독교 교파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도문으로 주님의 기도(주의 기도/주기도문)가 있다. 각 교파별로 사용하는 다양한 기도문에 대해서는 상세 내용 참조.


9. 민족관[편집]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 시절에는 히브리 민족(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선민사상과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약시대의 예언들을 거치며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허물어질 것이 예고되었고, 이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성을 초월한 세계종교가 된 기독교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없는 존재라고 가르치며, 힌두교나 유대교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더 나아가 인종 차별을 거부하는 면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백인이거나, 아시아인이거나 흑인이거나 여타 소수민족들이거나 인종과 국가의 구분 없이 모두 기독교 신앙에 따라 신앙생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3:26–29(공동번역)

위 구절을 보면, 유대인 중심 구원관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 비유대인 이방인들에게로까지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그리고 대부분의 교파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며,[37]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구약 시대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며 구원받을 자격을 얻는다.


10. 인간관[편집]


imago Dei 문서를 함께 참고하는게 좋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한번 죽으나, 예수의 재림 이후 다시 육체의 부활을 겪고 이후에는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모든 인간은 비록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숙명에 처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으로 부활 이후 다시는 죽지 않고 하느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고 여겨진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믿어온 기독교의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현재는 성경의 말씀을 글자그대로 사실이라고 보는 교파인가 융통성있게 해석하는 교파인가에 따라 창조와 기독교적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견차이가 다소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관의 핵심 이념과 정신은 교파들이 모두 공유한다.

  •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미지)을 따라 만들어 졌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하며, 모든 생물 중 가장 존귀하다.(창세기 1장 26절, 28절, 9장 1~2절, 17장 20절))[38]

  • 최초의 인간(아담)은 어른 남자이며 하느님에 의해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두번째 인간(하와)은 어른 여자로 남자의 갈비뼈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창세기 1장, 2장)[39]

  • 인간은 하느님에게 순명해야 하며, 인간이 하느님을 넘어서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창세기 11장).[40]

  •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순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고 그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41] 이를 천국이라고 한다. 참조

  • 인간이 늙고 죽는 것은 최초의 인간들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 원죄를 가졌기 때문이다.(창세기 3장) 참고로 이 원죄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나 오해가 많은데,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원죄는 그 자체로 단죄받을 죄라기보다는 본래 선한 인간의 본성을 덮고, 죄로 자꾸 기울게 하는 대물림되는 악한 영혼의 성향에 가깝다. 따라서 개신교 이전의 신학에서는 인간은 원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고 본다.[42]

  • 인간은 똑같이 연약하고 비일관적인 다른 사람들의 인정으로서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43] 영원히 동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에 비로소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다.

또 기독교 인간관의 특징은 부활신앙의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례를 따라 마지막 때(말세, 즉 예수 재림의 때)에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합쳐져 부활하게 될 존재라고 가르친다. 뒤이어 현세에서의 행적과 믿음에 따라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보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최후의 심판을 참고.


11. 징벌관과 구원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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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정통 교파 기독교는 원죄의 대물림을 인정한다. 기독교에서는 성서 속 최초의 인간들이 창조주의 명령을 어겨서 발생한 보편적인 죄를 원죄라 부르는데, 이 원죄는 모든 존재에게 현존한다.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자신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모든 기독교 종파의 공통교리)[44] 원죄 및 자기 탓으로 지은 죄를 '참으로 용서받거나'(가톨릭 신학), 죄인인 건 변함없으나 이에 대한 벌을 면제받은 '의인이라고 인정 받는다'(개신교 신학)고 믿는다.(이신칭의 참고)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선 가톨릭과 견해가 일치하는 개신교 교파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원죄 이외의 죄(즉 자기 탓으로 지은 죄악들)의 대물림은 정통 교파들에서는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대다수 기독교 교파에서는 모든 인간야훼가 처음 창조한 인간인 아담하와의 자손이므로 그들의 원죄[45]를 물려받게 되며, 이 원죄로 인한 본죄[46]까지 사람들이 저지르게 되면서 세상이 타락하였으며, 악인은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인간은 삼위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를 믿고 선하게 된 사람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또는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가톨릭정교회에는 천국과 지옥 외에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있다. 연옥 문서 참고. 사람의 인격의 기본이 되는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이는 육체의 죽음과는 상관 없이 불멸한다고 믿는다. 또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영혼 불멸과 천국, 지옥을 믿지 않는 교파도 종종 존재한다.다만, 정교회에서는 원죄라 부르지는 않고, '조상의 죄'라고 부른다.

기독교에서, 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드러난 죄의 용서를 믿으며 원죄와 본죄를 용서하는 세례(침례)를 받고(주교제 교회는 특히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함) 참된 신앙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데 노력하고(자선과 이웃사랑 등) 미사/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 성체성사/성만찬[47] 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인생에서 저지르는 여러 죄악들을 지속적으로 참회[48]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49][50] 죽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일단 영혼의 상태로 천국에 가서 편안하고 즐거운 복락을 누리고, 장차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영혼과 육신이 온전하게 합쳐져서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통해 지상에도 하느님 나라(천국)가 도래할 때 부활의 새로운 몸[51]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행복하고 이상적인 삶을 끝없이 누릴 것을 믿는다.

기독교의 천국관에 대해 설명하자면, 기독교의 천국은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 동일시된다. 또한 마지막 때가 와서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한다는 교리를 성경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로운 땅에 내려온다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천국/기독교를 참고.


12. 생활관[편집]


교리적으로 유대교 시절의 구약성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십계명 등), 교파들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우상숭배나 미신 등에 배타적이며 유일신론에 입각해 다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또 성윤리 또한 교파들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보수적인 편이라서, 가족주의를 중시하고 동성애에 대한 터부나 혼전순결, 성적 타락에 대한 반대 등이 교리에 들어가 있다. 또 이슬람과는 달리 많은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은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는다. 특히 가톨릭정교회의 경우는 혼인과 자녀의 양육을 초월자가 신자에게 부여한 일종의 '임무'로 해석하여, 원칙적으로 이혼도 금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유지할 경우 7성사 참여를 금지할 정도로 강경한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축첩제나 일부다처제를 고수하는 신자는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성사도 볼 수 없다. 공식적으로는 간음중인 상태나 다름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장로회 등 개신교 주요종파에서도 일부다처제를 반대하는 기조는 매우 강하며, 구한말 한국에 선교 온 선교사들도 축첩 상태를 유지하는 신자가 새로 입교할 경우 축첩을 포기하고 정실부인과의 결혼관계만을 유지하지 않는 이상 입교 및 세례주기를 거부하는 사례도 매우 많았다.

물론 이것도 지역에 따라 좀 달라서,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기독교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해 주는 경우도 있다.[52] 그러나 오해하면 안될 것이, 일부다처제를 예외적으로 용인해주는 일부 교파 및 국가도 있긴 있으나, 대다수 기독교 교파에서는 일부일처제를 올바른 기독교적 관습으로 보고 일부다처제를 옳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사실 성공회의 경우가 오히려 예외적인 케이스일 뿐이다. 위에 언급된 케냐에서도 가톨릭,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기독교계가 모두 나서 정부 주도의 일부다처제 법안에 공식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또한 기독교인이 혼인성사 등 교회에서 결혼을 원할 경우 무조건 법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지키는게 원칙), 일부일처제를 강력히 중시해서 새로 개종해 들어오는 일부다처 및 축첩에 익숙한 현지인들과 의견차이를 보이는 남아프리카 국가들의 가톨릭 선교 사례 등 아프리카의 기독교계도 일단 일부일처제를 우선적으로 원칙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을 공유하며 율법을 아직 지키는 유대교와 비교하면, 기독교는 구약 율법의 강제성이 신약성경 시대에 와서 의미가 사라졌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십계명을 제외한 구약시대의 율법은 신학적 가치는 있지만 더이상 준수할 의미가 사라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완성되어 끝난 문제라는 것. 신자들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구원의 문제가 구약 시대에는 율법의 준수로 이뤄졌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더 이상 율법이 아닌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뤄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공유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다.[53] 이 부분의 교리를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구약 율법 중에서도 신약의 정신과 부합되는 '도덕법'은 여전히 대단히 중요히 여기며(대표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이나 주일-안식일 엄수, 십계명 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의해 성취되었고 완성되었다고 보는 동물 제사나 복식 규정, 식생활 등의 의식 율법은 강제성과 의미가 더이상 사라졌다고 본다. 때문에 일반적인 주류 교파 기독교인이 구약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돼지고기, 갑각류 등을 먹거나 동물 제사를 더이상 드리지 않아도, 할례를 하지 않았어도, 이슬람이나 바하이처럼 예배 전에 복잡한 세정의식을 하지 않아도,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기도하는 생활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모든 죄악을 피하려는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산다면 구원받는데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이면서 복잡한 율법 수행을 매우 강조하는 이슬람이나 유대교와 비교해 대단히 중요한 점.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매우 강조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할 것과 각종 성사, 미사, 전례, 예배 등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주교제 교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해준 '보편적인 구원의 길'이다. 즉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도 어렵고 교회의 공적인 지도 없이는 자기주관이나 자기합리화를 통한 죄 등에 빠져 구원받기가 쉽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러한 교리와 성사들을 통해 가장 천국에 가기쉬운 보편적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 따라서 주교제 교회(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에서는 어떤 신자가 고의적으로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도 개인적 신앙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무교회주의'를 배척하며,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주일미사 참례나 7성사 등의 교회 예식에도 함께해야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교회법에 규정하고 있다. 반면 비주교제 교회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개인의 믿음을 더 중시하고 교회적 형식과 예식의 일원이 되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구약의 복잡한 율법 의식을 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생활에 있어서는(ex: 생활에 있어 자잘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유대교나 이슬람보다 어느정도 자유로운 성향이 있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기독교에는 구약 관습을 여전히 중요시하는 재림교회여호와의 증인, 일부 독립 교회들이나 오리엔트 정교회 등 일부 종파 외에는 코셔 푸드할랄 푸드 같이 '신자들은 이것만 먹어야 한다' 식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특징[54]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술, 담배, 뜨거운 음료와 카페인을 금지하는 지혜의 말씀이라는 율법이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 아닌 데다 주류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

전반적으로 성차별이 존재한다. 그나마 점차 시대가 바뀌어 여성을 남성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던 구약의 시대착오적인 율법은 대부분 무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디모데전서 2장을 위시한 여러 성경 구절을 이유로 기독교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고 있다. 하와아담의 배필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고, 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에 여성은 (아이들을 제외한) 남성을 감히 가르치면 안 되며 주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가톨릭과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여성을 성직자로 서품하지 않는다(수도자는 가능하나 수도사제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 여성 성직자를 제한하는 건 단순히 상술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는 건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신학적 이유가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여성 교회 지도자가 등장하는 데다가 디모데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로부터가 특정 여성을 사도라면서 띄워주기까지 한다. 교리적으로도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여성도 교리교사가 될 수 있고 신학대학에서 교수로서 남성 사제들을 가르칠 수도 있으며 교황청에서는 고위 공직에 여성을 임명하기도 한다. 이들 종파가 여성 성직자를 허용하지 않는 게 성차별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성경을 근거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가르치거나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개신교는 일부 보수적인 교단[55]을 제외하고, 여성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편이다.

[1]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첫 죄(또는 '첫 불순종'이라고도 부른다) =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원죄, 둘째로 그로 인해 인류에게 생겨난 죄로 향하는 본성(=타고난 본성으로서의 원죄), 셋째로 죄로 향하는 본성으로 인해 개인이 삶에서 저지르는 죄(=본죄).[2] 여기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엔 죄(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라는것은 죄의 개념에 속하고, 죄의 개념이 없으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도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니 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과 충돌되니 모순 아닌가"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독교적인 죄와 선악의 개념을 잘 몰라서 생기는 오해이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다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죄(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와 선악의 개념은 있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의 계획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이에 순종하지 않고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악이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가 들어왔다'는 표현은, 이전에는 죄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는데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죄라는 관념은 있었으나 다만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3] 또한 원죄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지는가?에 관한 해석은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가 각각 다르다.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원죄 그 자체만으로 지옥에 가는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삶에서 짓는 죄 때문에, 비 신자가 하느님의 은총 없이 큰 죄를 짓지 않고 평생 사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본다. 또 정교회에서도 사람이 원죄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사람이 원죄만으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는다. 자세한 내용은 원죄 문서 참고.[4] 왜 영원한 지옥벌을 받냐면, 본질상 하느님은 그 선도, 권위도 무한하다는 무한성과 절대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중대한 명령을 직접적으로,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어기는 죄를 짓게 된다면(=대죄를 짓게 된다면) 그 무한한 선과 절대적인 권위를 침해한 댓가도 무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하기는 하지만 하느님과 달리 그 본질상 능력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형벌의 양적 무한함을 감당할 수 없다. 또한 현세에서의 죄에 치우치는 약한 상태에서 감당할 수도 없다. 따라서 지옥 형벌의 '사후 기간'이라도 무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회개를 통해 하느님에게 용서받았거나, 자기 탓 없이 계명의 중대함을 모르고 어긴 경우는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영원한 지옥형벌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5] 소수 신학자들이 영혼절멸설 혹은 만유화해설을 주장하기는 한다.[6]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인간으로 내려온 이유는, 앞서도 설명했듯 일반적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서 하느님의 완전하고 무한한 선과 권위를 침해한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이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영혼의 행위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것으로 완전한 것을 메꿀 수는 없기 때문. 구약 시대의 각종 희생예물이나 제사 등의 방법으로도 희생제물이나 희생을 봉헌하는 주체가 불완전하고 죄에 물든 인간이므로 일단 하느님이 한동안 속죄제사로 인정해 주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불완전한 속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를 위해 대신 속죄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이를 인류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표현한다.) 그 하느님 자신의 속죄 제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희생이며, 이로서 인류의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7] 여기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서도 교파 간의 해석이 갈린다. 개신교에서는 믿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며(예수님 십자가 옆에 메달렸던 죄인의 예를 들어), 가톨릭/정교회 등에서는 믿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교리를 잘 이해하기 위한 교육을 충분히 받음으로써 바른 믿음을 갖추고, 그 교리를 삶을 통해 잘 실천함으로써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8]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쓰이던 가톨릭의 교리문답서(천주교요리문답)의 제1번 항목은 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나왔는가? 사람은 천주(하느님)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천국에 가기 위하여) 세상에 나왔습니다."[9] 교부 시대에 대표적 이단 사상 중 하나인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던 펠라기우스의 제자들이 신앙의 첫 과정은 은총 없이 인간의 마음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를 내세웠던 적이 있는데, 이는 행위구원론과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가톨릭도, 개신교도, 정교회도 모두 믿으려는 동기, 신앙의 시작 역시 하느님의 은총(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10] 주로 중앙집권체제가 없는 개신교파 내에서 많은 종파분열이 일어난 탓이 크다.[11]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에서는 이 '교회'를 제도적 성직체계와 가시적 위계질서를 갖춘 사도전승을 받은 교회이자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보지만(무교회주의 배척), 대다수 개신교 및 독립교회에서는 이를 부정하는 편이다.[12] 교회가 사도로부터 전해진 교회인가 아닌가[13] 일단 이 방법론 자체는 그리스도교만의 방법론이 아니며, 구약시대에 행해지던 유다인들의 해석법에서 그리스도교가 배운 것이다. 가령 이집트 탈출은 이미 구약 내부에서도 바빌론 탈출의 예형으로 해석된다. 현대인들이 바울로 서간을 읽으면서 느끼는 다소 논리적으로 거칠다는 인상 역시도, 바울로가 희랍(더 나아가 희랍 문명의 확장인 서구 문명)의 논리가 아니라 유다이즘의 전통적인 논리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14] 물론 Adolf von Harnack처럼 구약성경을 그냥 정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지닌 그리스도교 신학자도 있지만, Harnack의 관점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명백히 소수론이다.[15]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Lorsque le lecteur chrétien perçoit que le dynamisme interne de l'Ancien Testament trouve son aboutissement en Jésus, il s'agit d'une perception rétrospective, dont le point de départ ne se situe pas dans les textes comme tels, mais dans les événements du Nouveau Testament proclamés par la prédication apostolique. On ne doit donc pas dire que le Juif ne voit pas ce qui était annoncé dans les textes, mais que le chrétien, à la lumière du Christ et dans l'Esprit, découvre dans les textes un surplus de sens qui y était caché.
]
,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16] 가령 구약 예레미야서가 출애굽기 본문의 문필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바빌론 탈출의 예형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창세기의 문필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아담을 그리스도의 예형으로 보는 것과 동일한 해석법이다.[17] 따라서 구약과 신약이 예형과 본형의 관계이기에 여전히 구약성경은 현대에도 필수적으로 읽힌다.[18] 공권력과의 협조하여 국교회, 제후교회, 국민교회 현태로 개신교를 조직하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루터, 츠빙글리, 칼뱅, 그리고 성공회가 여기에 속한다.[19] 발췌자 주: '성례'는 세례와 성찬 등을 일컫는 개신교 용어이다. 가톨릭에선 '성사'라 부른다.[20] 예수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며, 동시에 예수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최고의 사명이자 선물이기도 하다.[21] 10계명과 가장 큰 계명인 마태오의 복음서 22:35–40 참고.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 다만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에서도 나와 있지만 이 구절을 친족을 돌보지 마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링크의 성경 해석 참고. 해석 참고.[2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한복음 13장 34-35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 7:21~23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5:37~46
[24] 신학자들은 십계명의 초반부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 중후반부는 이웃사랑에 대한 법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25] 천주교정교회, 개신교 모두가 성사로 인정하는 예식[26] 몇몇 개신교파에선 세례가 아닌 침례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 교파에서는 이마에 물을 붓는 일반적인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한다.[27] 이전 문서의 서술에서는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서와 디다케 등 초대교회의 문헌은 분명히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시했기에 오류이다.[28] 요한 복음서 6장 52절 - 59절[29] 성공회의 경우 성사에 준하는 준성사, 또는 성사적 예식, (미국의 경우) 사목적 예식으로 규정한다.[30] 위의 혼인성사 참조.[31] 수도자인 사제는 수도회에 소속되었을 뿐 교구 사제와 마찬가지로 사제이므로, 주교도 될 수 있고 교황도 될 수 있다. 역사를 보면 가톨릭의 역대 교황 중에도 수도사제 출신들이 상당히 있는 편.[32]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성유)를 바르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성경 야고보서 5장 14~15절).[33] 참고로, 가톨릭은 해당 성경구절의 '원로'의 해석에 대하여, 이를 성직자(주교와 신부)로 계속 이해해왔으며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상으로 공식화했다. 따라서 가톨릭(그리고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도)에서는 일반 평신도의 병자성사 집전은 (비상시 누구나 집전가능한 세례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성사와 마찬가지로) 금지되고 성직자에게 유보되어 있다.[34] 반면에 개혁주의 개신교에서는 나머지 5성사를 비성경적인 예식이라 하여 배척한다.[35] 성공회에서 가톨릭식 전통이 남아있는 것은 성공회가 가톨릭에 우호적이어서라기보다는 종교개혁 전 (고대 및 중세에) 가톨릭을 통해 내려온 기독교 전통을 소중히 해서라고 보는 게 맞다. 성공회는 가톨릭 뿐 아리나 정교회를 통해 내려온 기독교 전통들도 소중히 여겨 성공회 자신의 전례와 신앙에 도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공회에서 묵주를 사용해서 드리는 기도(묵주기도)를 기존의 서방교회(가톨릭)식과 함께 동방교회(정교회)식 묵주기도를 봉헌하기도 한다.[36] 가톨릭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훼손한 점을 가슴 아파하는 개인의 절실한 회개(상등통회)만으로 죄 자체는 고해성사 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보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가톨릭 신자가 이렇게 절실히 회개를 했더라도 정말 죽기 직전 상황이거나 도저히 성당에 갈 수 없거나 하는 일이 있지 않는 이상 그 회개의 마지막 단계로서 교회와도 화해하고, 용서받았다는 확인을 받는 고해성사반드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37] 개신교 용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표현한다.[38] 근대에는 천부인권과도 연관지어진 교리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므로, 현대 신학에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은 간접적으로는 신성모독과도 연결된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해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정복자적 입장을 취하여 부작용을 낳았다는 환경주의자들의 비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창세기의 문맥을 고려하자면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에 따른 인류가 모든 생물을 정복하라는 말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상생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39] 해석에 따라서, 아담은 하와가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남자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40] 바벨탑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인간의 언어가 갈라진 이유를 바벨탑 이야기로 설명했다. 물론 과학적, 역사학적 의미로써 바벨탑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다.[41] 당연하지만 이 교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영혼이 물리적인 '합체'가 됨을 말하는 건 아니다. '하느님과 결합을 이룬다'라고 표현함은, 하느님의 구원으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에 올라섬을 말한다. 개신교식으로는 '하나님과 연합'한다고 표현한다.[42] 인간이 지옥에 가는 신학적 이유는, 원죄 자체 때문이 아니라 원죄를 극복하지 않고 '자기 의지'로 하느님을 거슬러 불신 및 죄를 짓기 때문이다.[43] 일반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44] 여기서도,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은총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만 온다고 보는 견해는 공통적이지만, 대개 가톨릭에선 여기에 더해 인간이 '주어진 자유의지로 은총에 협력하는 자세'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보는 반면, 대개 개신교에서는 모든 믿음과 행위 및 구원 전부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보는 차이점이 존재한다.[45]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원죄'란 말을 쓰기는 하지만 원죄 그 자체로는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죄'인건 아니다. 자세한 것은 원죄 문서 참고.[46]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지은 여러 죄[47] 요한 복음서 6장 50절~58절 참고.[48] 주교제 교회인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이 과정에 고해성사가 들어간다.[49] 다만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에서는 세례와 성찬(일단 7성사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교리상으로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세례는 믿음을 확인받는 예식이고 믿음자체가 구원의 조건이다. 이는 구원의 과정에서 세례성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톨릭과의 큰 차이로 볼 수 있다.[50]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신약에선 믿음을 강조한 것뿐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진짜 믿음을 가졌다면 행동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 물론 천국은 인간이 어떤 업적을 이루어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바로 진정한 사랑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신(사랑의 속성을 지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아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51] 마르코 복음서 12장 18-27절, 루카 복음서 20장 27-40절, 코린토 1서 15장 35-54절[52] 케냐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으로, 대부분 일부다처제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토착문화로서 인정 내지 관습적으로 용인되고있다. 성공회 주교회의에서 일부다처제는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라서 어쩔 수 없다 라면서 사실상 용인해주기도 할 정도.[53] 심지어 구약 율법을 대단히 강조하는 재림교회나 에티오피아 정교회도, 그리고 심지어 신약성경을 받아들인 기독교의 유대교적 분파라고 할 수 있는 메시아주의 유대교파에서도 율법보다 믿음이 구원받는데 필수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54] 단 금식에 대한 교리는 일부 남아 있는데, 초대 교회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던 유대교 관습을 조금 변형시켜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초대 교회 그 자체인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거의 바뀐게 많지 않은 성공회에는 특정 일자(정교회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과 대사순절과 기타 축일이나 축일 준비 기간 동안 고기류 생선류 유제품류 기름류 가금란류 주류를 금하고, 가톨릭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고기류를 그리고 사순시기의 특정 일자에 하루 한끼를 안 먹는 금식을 한다. 성공회는 성공회기도서에 언급된 '재일'에 육식을 금하거나 금식을 한다.)의 금식 규정이 있다.(이 정도 규정이 지금은 많이 완화된 편이고, 옛날엔 의무금식일이 연중에도 매우 자주 있었다.)콥트 교회나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무슬림들의 영향도 있고 역사가 오랜 교회 전통의 영향도 있고 해서 금식일이 매우 많다.[55] 대표적으로 장로회 합동, 고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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