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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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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
김보현
金輔鉉


출생
1871년 10월 3일[1]
조선 평안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55년 9월 2일 (향년 83세)
북한 평양시
본관
전주 김씨
가족
아버지 김응우
아내 이보익
아들 김형직, 김형록[2], 김형권
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며느리 강반석
손자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 김창주[3], 김원주[4]
증손자녀 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 김현, 김백연
현손자녀 김정남, 김설송, 김춘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내손자녀 김한솔, 김주애
경력
황해도 배천군 부군수
?~1903년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
1945년 8월 3일 ~ 1946년 8월 3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농민이자 대한제국의 전 하급 관료. 김일성의 할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1871년 8월 19일, 평안도 평양부[5]에서 만경대 산당지기이자 묘지기김응우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김응우가 일찍 사망하여 소작살이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 매관매직으로[6] 관직을 샀는데 공명첩으로 실직이 아닌 자 들어가는 저가양산형 관직을 산거 같다. 당연히 이런 관직들은 누구도 양반으로 인정치 않고, 족보에만 올라가는 자기 만족일 뿐, 실제로는 계속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7]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일성의 아버지인 장남 김형직 등 3남 3녀를 낳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김일성을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파일:118105_52920_3938.jpg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일성과 고향집 가족들의 모습. 왼쪽부터 할머니 리보익, 김일성, 할아버지 김보현, 고모 김형실이다.

1945년 손자소련군을 앞세우고 돌아온 뒤로는 대동군 태수를 지냈지만 1년 만인 1946년에 사임했고 이후로 손자가 내각수상에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부수반[8] 자리에 오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이라는 명예직을 맡았다가 1년만인 1949년에 은퇴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1955년 9월 2일에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3. 여담[편집]


당시 노인으로서는 장수하여 83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를 산 이승만(90세)과 함태영(92세) 정도는 아니더라도 평균 수명이 50대 정도였던 당시로서는 오래 살다간 셈이었다. 현재도 남자가 83세까지 살면 오래 산 편이다. 심지어 자기 아들인 김형직보다 29년이나 더 살았으며, 자신의 증손자인 김정일이 삼석인민학교에 다니는 것까지 보고 타계했다. 다만 김일성의 할아버지이다 보니 손자 덕분에 건강 관리를 철저하게 받아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한반도는 매우 가난해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김보현은 김일성을 손자로 둔 덕분에 왕처럼 대우받았다. 만약, 김보현의 아들이자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 역시 피살당하지 않았더라면 꽤 오래 살았을 것이다. 김보현은 자신의 손자가 40세 전후에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로당에게 돌려 숙청하는 꼬라지까지 다 지켜보고 간 것이다. 사실 관료로써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농사지어 겨우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다가 말년이 되어서야 손자의 덕을 봐서 드디어 자리를 얻었지만 이미 북한 정부가 수립될 때 쯤이면 나이가 들었던 탓에 은퇴한 인물이라 김일성과 그 형제를 기른 것을 빼면 그리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우상화를 위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우상화 되고 있다.

완전히 별 거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할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보직을 받아 죽을 때까지 김일성에게 예우를 받으며 살다 갔다.

농업 간부 재교육을 위한 김보현대학은 1994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명칭이며, 만경대의 묘지에는 아내와 함께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고, 집 안에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 우상화되고 있다. 심지어 1993년에 이곳을 방문한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김보현이 쓰던 지팡이도 전시되어 있었다고 한다.[9] # 그리고 북한에서는 김보현을 "일제 침략자들과 지주들을 반대하여 굴함없이 싸우면서 자손들을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투쟁에 내세우고 적극 도운 열렬한 애국자" "봉건관료배와 외래침략을 반대하는 정신이 투철한 열렬한 애국자"로 추앙하고 있다.[10] #

김일성에게는 할아버지이지만 1912년 생인 김일성보다 5살 연하로 1917년 생인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1871년 생 동갑내기이다. 김보현은 41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고, 박성빈 쪽이 박정희를 무려 46살에 낳았기 때문이다. 물론, 김보현과 김일성 사이에 들어가는 김형직은 1894년 생으로 박성빈의 차남 박동희(1895~1967)와는 불과 1살 차이밖에 안 난다.

처 이보익과 함께 김일성을 "일성아" 혹은 "성주야"라고 부를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외에 사적으로는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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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8월 19일.[2] 김형직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해방때까지 생존해서 만경대로 돌아온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후로 딱히 고위직을 맡지는 않았고 사망년도도 미상이다. 다만 김형록의 장남인 김창주는 정무원 부총리, 농업위원장을 역임했다.[3] 김형록의 아들.[4] 김형권의 아들.[5]북한 평양시.[6] 이미 구한말 흥선대원군 시절 공명첩의 영의정 직위가 쌀 몇섬으로 폭락 했으니 그 이하는 묘지기도 살 정도의 가격[7] 조선 후기에는 실직이 아닌 이름만 진짜 관직을 파는 경우가 많아서 누구도 벼슬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배천군에 가서 유세 떨면 포졸들한테 얻어맞아 쫓겨나고, 그저 관직을 샀는데 어떤곳인지 보러 왔다고 하면 밥한끼 얻어먹고 돌아갈수 있는 정도의 대우.[8] 당시 북한의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었으므로 "국가원수"는 아니다[9] 물론 북한의 우상화 실태를 보면 이 지팡이가 치워졌을 가능성은 없다.[10] 정작 김보현은 '봉건관료배'에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젊었을 적에 공명첩으로 이름뿐으로나마 관직을 샀을 정도로 '봉건관료배'들을 부러워했던 인물이었다.